중독 (제45회 / 이명자)
도날드는
내 흥분이 의외라는 듯 나와 눈 맞추기를 꺼려하고 말 섞기를 꺼려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혼자서 날뛰다가
혼자서 벼락 맞은 것처럼 초라해진 나는 어질러진 책상과 방안을 정리했다. 자식 혼자서 깨끗한 척 하더니
이 책상 어질러놓은 꼴 좀 보라지. 아무리 혼쭐이 났기로서니 내빼버리다니 구시렁구시렁 거리면서 하루
이틀만 더 지나면 너의 정체도 탄로 나고야 말거야 너도 아마 별 볼일 없는 녀석 일거야 라고 단정 짓듯 도날드를 향한 나의 이성은 그렇게 구시렁거렸다. 구월은
어둠이 빨리 찾아왔다. 어둠을 위하여 태양은 대낮의 열기를 어디다 가두어 놓는 것인지..... 나는 기숙사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그런데 뭔 일이야? 그곳에 나의 중독을 가두어 버리고 싶다는 희망이 빠르게 목 줄기를 타고 기어 올라오다니. 동시에 간절하게 너무나 간절하게 한 모금만 입속으로 코 속으로 빨아들이고 싶은 충동이 겉잡을 수없이 부풀어
올라 목구멍이 미어터지려고 버둥댔다. 그러면 그렇지 목구멍으로 미어터질 듯 올라오던 한 순간의 갈망은
절망으로 고꾸라지고(수중에 남아있는 게 없어서.) 나는 기숙사를
나와 전차를 탔다. 완전 범죄를 노리듯 어둠을 틈타 어둠속으로 재빠르게 어찌나 재빠른지 내 몸은 내가
아닌 듯 했다. 피터는 집에 있었다. “여-어 어릴 때의 친구. 이제나 저제나 했는데 생각보단 늦었군.”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진짜 비극이 저 멀리서 양손 벌려 환영하고 있을 징후였다.
그걸 내가 알기나 했나 뭐. 내 눈에 내 이성에 ‘똑
똑 똑 정신 차려,’ 라는 경고의 문 두들김이 있을 리 만무했으니까 말이지. 다만 그 날의(피터의 집에 처음 초대되었던 날.) 거릴 것 없이 풍족했고 내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안전지대였다는 생각만이 떠올라서 나는 허겁지겁했다. “코케인이
필요해. 아니야 마리화나면 족해. 아무 것이나 좀 줘. 미칠 지경이야.” 나는
대학생활 두 달도 되지 않아서 나의 신조를 망가뜨렸다.
헤랄드에서의 나의 신조는 그나마 현실에(쥐꼬리만 한 용돈.)
부응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대학의 첫째 날 세상이 처음 동이 트는 것처럼 나는 밝고 찬란하고 유치하게 새로운 신조를 만들었다. 대학생이 되었으니 지식인답게 지식인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 하자. 나는
나를 얼마든지 컨트롤할 수 있고 나의 욕망을 자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코케인 따위 다음 날이면 끊을 수 있고 마리화나 따위는 마약의 축에도
끼지 못하니 모든 걸 단칼에 잘라내 버리고 내일이면 나는 지식인으로 살아 갈 거야. 단 칼에..... 새로 만든 나의 신조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내 낯짝은 두꺼웠다. 소년시절에 이미 상실한 삶에 대한 순결한 마음이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신조는 알맹이 없는 거짓이었고(알긴 안다만.....) 대학생신분으로 화려의 극치에서(?) 살고 있는 피터가 부러워 내심 죽을 지경이었다. 대학이
시작되고 새로운 것들을 익히느라 모두들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피터 집에 초대되어 간 신입생 몇몇은 놀라 벌어진 입들을 다물지 못했다. 상상이 안 되는 넓고 넓은 팬티 하우스와 안목이 없는 우리들의 눈에도 값비싸 보이는 가구들 더더군다나 이제
겨우 대학생인 주제에 금발의 미녀와 함께 살고 있는 피터를 우리는 충격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날, 우리는 피터가 베푼 향락에 주저 없이 빠졌다. 피우고 먹고 떠들어
대고 코에 흡입하고 또 먹어 대고 시켜왔다는 음식들은 기름졌다. 나는 그날 뱀처럼 굴었다. 피터에게서 뭔가를 알아내고 싶어 안달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최상의
상태인 마리화나나 코케인을 피터는 무슨 연유로 우리들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것인지 피터의 입가에서 떠나지 않는 미소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어 나도
피터처럼 되고 싶어서 말이지. 그러나 그것은 허접스런 나의 한 가닥 희망에 불과했다. 끊임없이 피워대고 흡입한 주제에 본인이 어디에서 정신을 놓고 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누굴 살피겠다고. 육신이 흐물흐물해진 우리들은 행복에 사로잡혀 그 밤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깨어나 보니 다음날 오후였고 무자비할 정도로 우리의 등을 떠밀어내는 피터 때문에 양치질도 못하고 쫓겨난 우리는, 하루를 망가뜨렸다. 그러나 그날은 행복한 날이었다는 것 말고는 내
머릿속에 찌꺼기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행복의
정의’를 바꾸어야 할 판이군..... “돈은
가지고 왔니?” 청천벽력이었다, 피터의 요구가 말이지.
반사적으로 나는 피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피터는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자신의 한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 좋은 미소도 보이지 않고
말이지. 나는 당황했고 반사적으로 내 두 손은 바지 주머니를 더듬었다.
초조하게시리 몇 초가 지나갔다. 있지도 않는 돈을 찾는 시늉을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만
둬. 돈도 없으면서 감히 나를 찾아오다니. 제 정신이 아니구나, 너. 다른 애들은 너처럼 뻔뻔하지 않아. 그 다음날 곧바로 양심껏 돈들을 들고 와 자신들이 즐긴 만큼 갚았으니까 말이야. 넌 외상 기질이 너무 질겨.” 전율이
온몸에 소름으로 돋아났다. 충격이었다. 나의 달콤한 생각이
빚어낸 보상이었을까.
피터의 미소를 착각했고 옛날의 피터를 착각했고 피터가 베푼 그 날의 행복을 착각했을까? 한
순간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현실에 나는 망연자실했다..... 그랬으면 오죽 좋았겠는가. 망연자실하여 뒤를 돌아보고 과거를 돌아보고 그리하여 뼈저리게 느끼는 뭔가를 일궈냈으면 말이지. 허나 허지만 말이야, 내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주제에 어디 보이는
게 있었을까?
아니 보이는 게 있었다. 피터의 입가에 다시 그 미소가 떠올랐다. 그 성스러워 보이는 미소가 피터의 입가에 떠오르려고 하는 조짐이 내 눈에 포착되었을 때, 나는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한입만, 제발이지 한입만 피우게 해달라고. 무릎을
꿇어? 마약장이에게? 너 제정신이야, 하고 묻는다면 당연히 내 정신은 말짱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정신이
말짱한 게 무슨 대순가 말이지. 지금 이 순간 이 한순간만 지나가면 나는 본래의 내가 되는 게 자연의
이치인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데 말이지.
본래의 너라면 대체 너의 무엇을 말하는 것이지? 그래 그렇게 물을 만도 하겠다.
밤이 가면 아침이 오듯이 내게도 여지없이 찾아오는 아침이 있어 나는 강의에 참석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강의실에서는 누구 못지않게
반짝이는 눈으로 열심이었다. 그렇다면 그토록 열심이었다면 나의 심신에 이성과 지성과 지혜가 착착 쌓이고
쌓여 홍익인간이 만들어 져야만 마땅하지 않겠는가. 진실은 그래야겠지.
허지만 너무 서두르다가는 앞으로 넘어져 코 깨지는 수가 있다. 나는 며칠 전에 대학생이
되었고 대학생이 되니까 더 많은 자유가 사방에 널려있었다. 기숙사는 자유를 만끽하는 공간이었고 누구의
간섭도 감시도 없었고 누구의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내 몸처럼 도우며 슬쩍슬쩍 빼돌려
간직해왔던 돈이 쏜살같이 바닥나 버리자 드디어 예상을 뒤엎고 올 것이 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치심이고 뭐고 무릎을 꿇는 사태까지 와 버렸고 필연적으로 다른 조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학생
정도 되면 하루가 36시간이 되어 땀을 뻘뻘 흘리며 한 뙤기 두 뙤기 차곡차곡 옹골지게 밭을 가꾸어
가는 그 길을 나는 황폐하게 내버려둔 채 저 깊고 깊은 어둠의 골짜기를 향해가고 있었다. 거 있지 않는가. 다른 길은 죽었다 깨어나도 가지 못하고 더러운 이득을 챙기느라 자신을 더럽히는 마약 판매상. 드디어 나는 마리화나를 팔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마약의 환각에 젖어 세상이 온통 내 것 같은데 세상이 온통 살맛나는 곳인데 생각이고 나발이고 뭐 그리 대단한가
말이지. 나는 마리화나를 팔아 생긴 마진으로 드디어 헤로인까지 샀고 코케인을 샀고 그리고 행복에 젖어
낄낄댔다. 이 행복에 젖어 낄낄댔다는 것은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착시일 뿐,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라는 것을 현자들은 금방 눈치 챈다. 그리고
단단히 주의를 시키려든다. 약물에서 오는 부작용은 한 인간의 심신을 초토화 시킬 뿐, 중독자들이 나불대는 지상낙원은 중독자들의 허무맹랑한 환각이라는 것을 왜 모르느냐고 안타까워한다. 그 들은 우리들을 정품으로 만들어 놓겠다고 갖가지 정답을 내어놓지만 모르시는 말씀, 우리들 중 한명도 우리들을 옭아 메는 정답에 가까워지는 사람은 없었다. 세상이
이토록 쉬울 줄이야 세상이 이토록 허술할 줄이야 사방팔방 일곱 걸음(럭키 세븐이니까.) 안은 나의 세상이었다. 그런데 말이지 내 키가 닿는 일곱 걸음만
벗어나면 나의 이성과 지성과 지혜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혹독한 시련이 나의 모든 것을 재빠르게 좀 먹었다. 시련이란
내 자신이 누구이며 무얼 향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지를 좀처럼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생의 불량품이
되어버린다. 허긴 뭐 어떤 인생이 인생의 정품이라고 일컬어지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지. 마리화나를 팔아 생긴 마진이라는 것은 어쩌다 호기심으로(이 낱말이
왜 존재하는지.) 한번 살짝 발을 담가보고 곧 바로 빠져나가버리는 영리한 대학생의 고픈 주머니 사정으로
인해 생겨나는 삐뚤삐뚤한 나의 계산 방법이었지만(앞에서는 남고 뒤에서는 손해 보는.) 나는 나의 계산을 철썩 같이 믿었다. 책상위에 있는 달력에 깨알같이
써놓은 나의 영리한 손님들의 이름. 풍족하지 못한 돈 때문에 입가에 살살 미소를 머금고 내 눈치를 살피는
마리화나의 옹호자들. 나는 피터처럼 그들에게 무지막지하게 돈을 거둬들이지는 않았다. 로버트는 겨우 2달라 잭은 3달라
줄리는 4달라가 모자라..... 등등 이십 명도 넘는 같은
층에 기거하는 대학생들이 내게 빚을 지고 있었다. 돈을 갚으라고 나는 그들을 조르지도 내놓고 무시하지도
않았다. 내가 하루하루 원하는 소량의 약물만 취할 수 있다면 그만이었으니까. 피터는 확연히 달랐다. 내게서 다만 1달라 라도 부족하면 물건을 주지도 않았을 뿐더러 불같은 역정을 냈다.
나는 그런 피터에게서 외상으로 마리화나를 가져다 팔고 있었던 것이다. “네
머릿속엔 세상의 모든 것이 온통 공짜로 보이니? 눈에 보이는 것은 없니? 이걸 보란 말이야. 내 집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알아챘어야지. 여기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란
말이야 자식아. 이 상류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지난한 노력이 필요 하단 말이지. 너도 나처럼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고말고. 네가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어쩌면..... 방법은 말이야 어떻게든 확실한 계산을 철칙으로 삼으란 말이야.
그거 아주 쉬운 거야.”
피터의
철칙은 또 있었다. 받을 돈은 집요하게 외상은 사절 마약을 향한 우리들의 숨이 헉헉 차오르도록 유도하는
것 나열하자면 밤을 새우고도 남을 만큼 죄 없는 자들을 죄짓게 빨아 드려 그들에게서 단물을 짜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상한 건,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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