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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寅年 新年山行을 咸昌(古寧伽倻 都邑地) 신흥리 오봉산(240m) 해맞이공원에서... 10 : 27 : 31
松崗의 수고로 신흥리 도로변에 주차 후 출발... 09 : 17 : 17
신흥리 골목 안에 암자 건물이 보인다... 09 : 18 : 47
신흥리 버스정류장에 " 千年古都 咸昌 " 전경이 아름답고 선명하다... 09 : 23 : 12
(41년 二現者 古露王 白珍이 古寧伽倻國 太祖王으로 卽位)
용곡보건진료소 아래 도로 오른편으로 오봉산을 오른다... 09 : 34 : 04
등산로 옆 밭을 편편하게 만들어 봄을 기다리고, 한옥의 모습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부른다... 09 : 35 : 42
가파른 포장길을 오르니 금방 호흡이 가파진다... 09 : 40 : 09
새로 조성한 함창 신흥 "오봉산 성모당" 후원 마오로기숙사 증 성모상 강택규신부
올라 온 길에서 내려 보는 도로와 들판의 모습에 정감을 느낀다... 09 : 50 : 07
아랫쪽에서 터 닦기 공사로 중장비의 소음이 크게 들린다... 09 : 52 : 34
아래 공사 현장에 온 차량들이 오봉산 입구에 주차.... 09 : 54 : 23
이정표 : 신흥리(셋집마) 0.2kkm, 10분 오봉산정상 0.8km, 30분
햇살이 비취는 양지바른 "해맞이 자리" 길을 오른다... 09 : 57 : 30
용기를 북돋우는 "해맞이 자리" 입석에서(2016년1월1일 조성).... 10 : 06 : 11
먼저 세운 "해맞이 공원"(2010년1월1일 조성)의 입석 자리는 좁고 전망이 나무에 가려, 넓고 전망이 좋은 이곳로 옮김.
새로 단장한 해맞이 자리의 돌출 부분에서 함창 들판을 배경으로... 10 : 07 : 47
바람이 찬 날씨인데 햇살이 비취는 곳은 아늑하고, 고압철탑의 전기줄은 8개가 선명합니다... 10 : 11 : 28
능선 아래 햇살에 빛나는 力谷(심실)마을의 풍경이 선명하여 아름답습니다... 10 : 15 : 14
나무 그림자가 선명한 행복한 능선길... 10 : 17 : 42
"오봉산 해맞이 공원"에서 聞師會 山客三人... 10 : 25 : 55
2010년 1월1일 세우고, 2016년1월1일 "해맞이 자리"로 옮겨서 해맞이 행사를 해옴.
정상의 찬바람을 피해 운동시설을 조성한 아랫쪽에 정상석(오봉산235m)이 있다... 10 : 32 : 31
운동시설을 아끼고 잘 정돈한 함창인의 참 모습에 감사하며, 간식(롤케익,사과 등)을 맛있게 먹었다... 10 : 32 : 56
신흥리로 내려가는 급경사 내리막에서 산객을 만나 반갑게 인사했다.... 11 : 00 : 20
"소나무 재선충 피해목"을 처리한 녹색비닐의 밀폐된 것이 여러군데 보였다... 11 : 04 : 44
"수리봉"에 먼저 온 산객이 쉬고 있어 반가웠다... 11 : 10 : 39
글씨가 힘차고 강인한 "수리봉"(185.1m)에서.... 11 : 11 : 41
큰 참나무 아래로 산객들이 많이 다녀서 길이 여러개 있다... 11 : 13 : 58
진주 강씨 묘원 11 : 17 : 33
晉州柳氏 晉川君 臺巖公波 新興宗員之墓
중간 축대위의 산소 : 좌 晋州柳公承出 配星州李氏享順 之墓 우 學生晋州柳公承卓之墓
주차장에 도착하여 먼지털이기를 이용하려했는데 바람이 약하여 수리가 요망 됨... 11 : 30 : 01
古寧伽倻國史蹟碑 11 : 39 : 14
古寧伽倻國은 高句麗 百濟 新羅 三國과 함께 古寧紀元 元年 西紀 十八年에 立國하여 同 沾解王九年까지의 約 二百十三年間 現 咸昌을 中心으로 國權을 維持한 古代 部族國家이다. 伽伽國의 開國神話를 살펴보면 餘他의 建國神話와 같이 王權天授思想을 反映하여 天孫降臨과 卵生 異常 誕生으로 神格化되어 있다. 駕洛國記에 이르기를 開闢以來 이 땅에는 나라의 이름이며 君長의 稱이 없이 我刀干 汝刀干 彼刀干 五刀干 留水干 留天干 神鬼干(신귀간)등의 아홉 酋長(추장)이 있어서 百姓 一百戶 七十萬五千人을 거느리고 산과 들에 퍼져서 우물을 파고 밭을 갈며 살았다. 後漢 世祖光武帝 建武十八年 壬寅三月 禊浴(계욕)하는 날 그들이 있는 북쪽 龜旨峯에 異常한 소리가나며 百姓들을 부르므로 二三百名이 그기에 모였는데 形象은 보이지 않고 사람의 소리만 들였다. 여기 사람들이 있는가 九干이 對答하였다. 우리들이 있소이다. 여기는 어디인가 龜旨로소이다. 皇天이 내게 命하여 여기 나라를 세우고 人君이 되라고 해서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山마루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잡아서 구워 먹으리라 하면서 춤추며 돌아가면 이것이 곧 大王을 맞아서 기뻐하는 것이로다. 九干은 이 말대로 즐겁게 춤을 추다가 얼마 뒤에 우러러 보매 紫色 끈이 하늘에서 다랗게 드리워 있었다. 그 끈의 아래에는 붉은 천으로 싼 金盒이 있었다. 그 盒을 열고 보니 거기에는 해와 같이 둥근 金卵 여섯 個가 들어있는지라 그들은 모두 敬喜하며 百番 절하고 操心히 안고 我刀의 집으로 돌아와서 榻(탑) 위에 安置하고 각각 헤어졌다. 이튿날 다시 我刀의 집에 모여서 그 盒을 열어보니 여섯 金 알이 化하여 容貌가 俊秀한 童子로 되어 床에 앉아 있었다. 모든 사람은 절하고 恭敬하기 그지없었다. 그 童子는 나날이 자라서 十餘日 뒤에 키가 九尺이나 되었으니 마치 殷나라 天乙이요 얼굴은 龍같으니 마치 漢나라 高祖요 八彩 눈썹은 唐堯요 눈의 重瞳(중동)은 虞舜(우순)이었다. 그달 보름날 卽位하였다. 諱를 首露 或은 首陵이라하고 나라 이름을 大駕洛 或은 伽倻國이라고 했는데 여섯 伽倻中 하나이다. 남은 다섯 童子도 각각 헤어져서 다른 다섯 伽倻의 王이 되었다라는 神話的 傳說이 紀錄되어 있으므로써 伽倻開國의 起源과 淵源을 짚어볼 수 있다. 漢書朝鮮傳 紫纓(자영)金氏 降生 事蹟 等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이렇게 天孫의 自負心과 非凡한 誕生으로 象徵化된 神話 속에서 建國된 六伽倻의 太祖王은 六伽倻國 事實錄에 依하면 六卵中에서 始現者를 首露라하고 二現者는 古露이며 三現者는 大露이고 四現者는 碧露이며 五現者는 阿露(아로)이고 末現者는 末露라 이름 하였다하였으며 鴻史桓殷(홍사환은)에는 六王들의 諱가 首露는 首露또는 靑裔(청예)이고 古露는 白珍이며 大露는 伊珍이며 碧露는 黃珍이며 阿露는 紅日이고 末露는 阿珍이라하였다. 國號는 三國遺事와 關係 史料를 詳考(상고)해 보건대 김해는 駕洛이고 咸昌은 古寧伽倻이며 高靈은 大伽倻이고 星州는 碧珍 또는 星山伽倻이며 咸安은 阿羅伽倻이고 固城은 小伽倻라하였다. 古寧伽倻의 王系와 有國年代는 古寧紀元 元年이 新羅儒理王 十八年 (41년)壬寅이며 그 해 三月에 古露王 白珍이 太祖王으로 卽位하여 一百十五年間 在位하였고 二代 摩宗王은 古寧紀元 一百十五年 丙申 卽 新羅阿達羅王 三年(156년)에 卽位하여 六十五年間 在位하였으며 三代 利賢王은 古寧紀元 一百七十九年 庚子 卽 新羅 奈解王 二十五年(219년)에 卽位하여 三十五年 間 在位하다가 古寧紀元 이백십삼년 甲戌 七月에 新羅 沾解王의 侵略을 받아 衆寡不敵이었으나 伽倻聯合軍으로 擊退한 後 곧 金海로 移都하였다라고하니 大抵 이때는 이미 主權을 喪失하고 金官伽倻로 倂合되었는듯하다. 헤아려보면 古寧伽倻國의 歷年은 三代 二百十三年間으로 그간 나라를 세우고 國權을 維持하였다. 古寧伽倻國의 位置와 疆域(강역)에 對하여는 三國史記雜誌 第三地理條에 古寧郡은 本來 古寧伽倻國이었다. 新羅가 取하여 古冬攬郡 또는 古陵郡이라 하였으며 景德王이 至今의 咸寧郡으로 改名하였다. 領縣이 셋이며 喜善縣 冠山縣 및 虎溪縣이라하였고 世宗實錄地理志에는 咸昌縣은 本來 古寧伽倻國이었다. 新羅가 取하여 古冬攬郡(고동람군)으로 하였고 景德王이 古寧郡으로 고쳤으며 高麗太祖 亦是(역시) 古寧郡으로 封하였으나 高麗光宗 十五年에 咸寧郡으로 고치고 顯宗九年 戊午에 尙州牧에 屬하였으며 뒤에 咸昌郡으로 改稱하였다라고 明記되어 있으며 같은 內容이 東國輿地勝覽과 郡縣誌에 收錄되어 있으므로 이를 綜合하여보면 有國中 多少變更은 있었을 것이나 옛 咸昌郡과 聞慶邑 虎溪面 店村市 永順面 江北 一部 그리고 洛東面의 甲長山東部와 中東面의 飛鳳山 南部中 洛東江 沿岸 一帶가 國土이었을 것으로 推測된다. 遺跡으로는 太祖王과 王后의 陵으로 傳하는 東西 陵이 境內 曾村과 梧沙里에 現存하고 있고 廟字(묘자)인 崇寧殿과 祭閣인 萬歲閣이 階下에 位置하고 있다. 陵은 輿地勝覽과 縣誌에 모두 伽倻王陵이 縣 南二里 許에 있다. 陵誌에는 朝鮮宣祖二十五年(1591년) 陵下의 本孫과 當時 縣監이 本道 觀察使와 함께 王陵을 補修하던 中 階前에서 碑銘을 發見하여 太祖王陵임을 確認하고 이어 奉審致祭하고 있다는 記錄이 있으니 這間(저간)의 事情을 헤아려볼 수 있다. 都城의 城址(성지:성터)로 洛東의 伽倻城 中東의 鳳凰城 邑內의 五峯山城 德峯土城 城內 山周圍의 邑城과 崇德山下의 宮城 等이 있고 當時의 地名이 常存하는 곳으로는 王이 行幸한 大駕山 王이 遊賞하던 上監池 王宮의 鎭山인 崇德山과 承統山 國祀峯 王都洞 曾村 舊鄕 等이 있다. 王孫은 失國以後 大多數는 伽倻聯盟의 各國으로 離散하고 或은 百濟로 亡命하였으며 일부는 故國과 周邊에 隱遁(은둔)하면서 抗爭을 繼續하다가 新羅儒禮王 十年에 新羅가 古寧伽倻와 沙伐國 두 나라 流民 中 抗拒하는 王族과 豪族 八十餘家를 盈德의 沙道城으로 移住시켰는데 그 때 追放된 一派에서 高麗 仁宗 때 出生하여 顯達한 德原君 諱宗悌와 德陽君 諱宗繼 兄弟를 中祖로하여 새로이 門戶를 열었으며 그後 宜山君 諱世珣(세순)의 宗派와 御使公 諱鈞의 支派의 子孫이 祖先의 蔭德과 王孫의 矜持를 굳건히지키며 오늘에 이러렀다. 그 동안 子孫이 繁盛하지 못한 것은 失國 後 積極的인 抗爭期에 或은 湮沒(인몰)되기도하고 혹은 山野에서 隱遁하면서 그 뿌리를 숨겨왔던 緣由인지도 모른다. 中始祖 德原君 開門 以後 子孫도 점차 繁昌해지면서 歷史的 人物도 數많이 輩出되었다. 때로는 仕官과 忠節로 이름을 남긴 분도 많았으며 學問과 德行으로 빛을 낸 분도 많았다. 特히 孝友와 節義는 古寧伽倻王孫 咸昌 一門의 門性으로 많은 歷史的 記錄과 文獻들이 考證하고 있다. 世俗과 時流에 便乘하지 않는 精神은 끊임없이 이어오는 天孫 古寧伽倻族의 氣稟(기품)이라 하겠다. 오늘날 우리의 門運이 날로 隆盛하여 各 分野에서 門中을 빛내고 國家社會 發展에 이바지하는 濟濟多士들이 續出함과 더불어 始祖王陵 墓域이 淨化 丹粧됨은 實로 아름답고 壯한 일로 이 또한 始祖大王의 加護로 子孫의 發展的 氣運의 徵表라 아니할 수 없다.
古寧紀元 一九四八年 三月 西紀 一九九十年 三月
檀國大學校 副總長 三十世孫 錫夏 謹撰(근찬: 삼가 짓다)
高靈 申斗榮 謹書
咸寧學園理事長 三十七世孫 河潤 謹竪(근수 : 삼가세우다)
고령가야태조왕릉(古寧伽倻太祖王陵) 11 : 46 : 08
지정 : 경상북도 기념물 제26호 소재지 :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 7번지
이 릉(陵)은 서기 42년 낙동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6가야(六伽倻) 중 하나로 함창(咸昌), 문경(聞慶), 가은(加恩) 지방을 영역으로 하는 고령가야(古寧伽倻)의 태조왕릉(太祖王陵)이다. 조선(朝鮮) 선조25년(宣祖. 1592년) 당시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 김수(金晬. 1537~1615)와 함창현감(咸昌縣監) 이국필(李國弼) 등이 무덤 앞에 묻혀있던 묘비(墓碑)를 발견하여 고령가야왕릉(古寧伽倻王陵)임을 확인했다고 되어있다. 그 후 조선(朝鮮) 숙종38년(肅宗. 1712년) 왕명으로 묘비(墓碑)와 석양(石羊)등의 석물(石物)을 마련 후 후손들에 의해 여러 차례 墓域이 정비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고령가야태조왕릉에서 역사을 체험하며 .... 11 : 51 : 57
松崗의 도움으로 "고령가야 태조왕릉"의 자애로움을 느끼는 海山... 11 : 53 : 25
첫댓글 신년 산행을 뜻 깊은 오봉산 해맞이 공원에서 기운을 받으며 너른 함창 들판의 품에 안겨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새해에 건강한 산행을 기원하며, 고령가야태조왕릉을 방문하여 사적비를 읽으며 고령가야국의 역사적 사실을 새롭게 이해하면서 그 동안 함녕김씨들의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조상들의 자취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어 기쁘고, 오늘을 보람있게 살아가는 의미를 생각케하는 좋은 시간이 되어 감사합니다.
壬寅年 新年山行은 咸昌 五峰山으로 간다.가까운 탓도 있지만 끝간데 없이 넓게 전개된 咸昌平野를 비롯한 四方의 丘陵이 한눈에 展開되는 곳이라서 새해 所望을 祈願하는 곳으로는 더할나위없이 좋은 곳이다.새해 첫산행인 만큼 診療所~봉우재~頂上~力谷里~봉우재~元點回歸의 단조로움을 벗어나서 頂上에서 守理峯~돋질~ 元點回歸하는 새로운 코스를 택한다.봉우재 오르는 길이 가팔라서 힘들기는 해도 쉼 때마다 뒤돌아보면 新興里 門前沃畓을 바라보는 眺望이 좋다.과거 伽倻國 時節에 曾村里에 都邑하여 半徑을 그려보면 이곳 新興里 일대는 그들 指導者들의 幽宅 造成地였으므로 崇拜의 對象地였는데 南山古城을 비롯한 數百個의 古墳群들은 성한게 하나도 없고 모두 盜掘 당했다.그런체로 지금도 放置되고 있으니 奉天寺 지정스님이 애석해 하는것도 理解가 간다.많은 市民들이 찾는 유람길이라서 멍석을 깔고 落葉은 쓸고 하는 精誠이 갸룩하다.歸路에 古寧伽倻太祖王陵을 방문하여 사적비를 탐독한다.近代史의 歪曲된 解釋으로 6伽倻에서 잘못 誤讀된 사유로 황당한 傳說로만 由來되고 있으니 언젠가는 바로잡아 歷史 精氣를 새롭게 새울 일이다.金集 博士 以後의 愛鄕 愛族人의 活躍이 좀 더 活潑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