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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과 누림, 그리고 행복
마가복음 8:11~13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서울로 출장을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서울은 꿈의 도시였습니다. 그곳으로 아버지가 가신다는 말은 제게 설렘을 안겨 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실 때 선물을 사 오시기를 부탁했습니다.
아버지는 흔쾌하게 약속하셨고, 2박 3일의 여정을 마치시고 돌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제게 하신 약속을 잊지 않고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빛이 바랜 수영복 하나와 하모니카, 그리고 컬러판 원효대사란 제목의 만화책이었습니다. 수영복은 초록색이었는데 빛에 바래져서 허옇게 색이 변질한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진열된 상품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고, 싼값에 대충 산 것이라는 생각도 들게 했습니다. 하모니카는 다룰 수 없었고, 원효대사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오랫동안 소중하게 간직하고 지금까지 좋은 추억으로 남겨 놓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 선물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약속하신 것을 바쁜 일정 중에도 잊지 않고 챙기셨던 아버지의 마음이 제게 와닿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선물에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흡족한 선물은 아니었지만 바쁜 일정에서도 저를 잊지 않고 약속을 지키신 아버지의 모습이 많은 시간이 흘러도 제게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표적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표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선물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다루는 4 복음서에서 표적(Sign)이나 이적(Wonder), 또는 기적(Miracle)은 주로 같은 상황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용어들은 거의 비슷한 용어처럼 등장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적과 기적은 비슷한 말로서 놀라운 행적을 묘사하는 용어지만 표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적이나 기적은 놀라운 일(Wonder), 보통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또는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일(Miracle)을 가리키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면 표적은 그것을 행하는 분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수단의 하나입니다.
‘표적’은 헬라어로 ‘세메이온, σημεῖον’이라고 하고 영어로 ‘sign’이라고 하는데, 이는 다른 말로 ‘표시’, 또는 ‘징조’로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말씀하시거나 주장하실 때에 표적을 통해서 그 말씀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증명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이 등장하고 이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힐난하다’ 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쉬제테오, συζητέω’인데 단순히 ‘질문하다’ 라는 의미보다는 ‘논쟁하다, 이치를 따지다’ 라는 의미가 담긴 단어입니다. 진리에 대해 호기심이 있어서 선한 의도를 가지고 질문한 것이 아니고, 뒤에 따라 나오는 단어 ‘시험’ 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많은 기적을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그리고 소경이 눈을 뜨고 귀신들린 자들이 회복되는 신기한 초자연적인 기적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의 태도에 대하여 막 8: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탄식에는 저들이 보기는 보아도 듣기는 들어도 표적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주신 표적은 마가복음의 주제를 이루고 있는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존귀와 영광을 다 가지고 있는 분이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고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표적을 보이신 가장 뚜렷한 증거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크고 신기한 표적을 보여주시더라도 믿음이 성장할 수 없고, 하나님의 아들을 바르게 믿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이 표적을 주시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으로 섬김과 누림 그리고 행복에 대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첫 번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표적에는 사랑의 섬김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을뿐더러 낮고 천한 종의 모습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 절정의 사건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전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시고 세숫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샌들을 신고 다녔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면 발을 씻어야 했고, 그래서 주인이 집에 오면 종들이 그 주인의 발을 씻기는 것이 관례로 자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손님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멀리 있는 길을 걸어 찾아온 손님에게 발을 씻겨주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은 주인이 베푸는 친근감을 안겨주는 호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자기가 섬기는 비천한 하인임을 보이는 행동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된 줄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겠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요 13:1에서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높은 마음을 지닌 교만한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낮은 자 되어 겸손해야 상대를 섬길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범을 보이시므로 제자들에게 낮은 종의 자세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의 사랑의 표적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몸을 속죄물로 드림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이뤄진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배반하고 말씀에 불순종할 때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당신의 온몸을 드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같으신 분으로 그분의 사랑은 변함없는 표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의 섬김이 위대한 표적이 되어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의 표적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누림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분명하게 보이신 사랑의 섬김은 지금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를 인정하고 믿음으로 내 삶에 적용할 때 누림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잠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흐름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화되는 것을 인정하고 기뻐하는 것이 누림입니다.
아침을 눈을 떠보니 변함없이 햇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창 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는 말씀이 분명하게 성취되고 있으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하나님 스스로 취소하기 전에는 전혀 빈틈없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말씀대로 빛이 있으라 하신 말씀이 지금 내게 성취함을 보고 인정하고 있다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 역시 성취될 것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녁이 되어 잠자리에 들 때 우리는 이런 고백을 통하여 누림의 축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 밤에 나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주께 맡기고 주님의 안식에 들어갑니다. 이 밤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정합니다. 그 십자가의 피로 내 죄를 씻어주시고 주님과 함께 죄된 내가 함께 죽었음을 고백합니다.”이렇게 하고 잠을 자고 새벽에 눈을 뜨게 되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신 것처럼 저도 어둠을 이기고 이렇게 살아 있음을 감사합니다.”이렇게 고백해 보십시오!
그리고 아침의 밥상을 대할 때도 말씀을 기억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변함없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침을 말씀을 기억하고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의 동행을 기뻐하는 누림이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힘차고 아름답게 하겠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보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눅 12: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내게 주어진 환경이 낮은 곳이든 높은 것이든 기뻐하며 매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게 되면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은 솔로몬에 베풀어 주신 모든 것보다 뛰어나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왕도 지혜와 총명에 있어서 솔로몬은 능가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부와 명예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주님의 섬김을 받아들이고 누림을 얻을 때 솔로몬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존재로 빛나게 해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내 노력이 아닙니다. 너무나 쉽고 간단한 누림의 원리를 이뤄갈 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세 번째는 섬김과 누림의 양 날개를 가질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꺼릴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창세기에서 에덴의 동산에 있는 아담과 하와에 대하여 창 2: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서로에게 당당할 수 있고, 숨길 것도 없으며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그 모습이 자유이며 이것이 행복의 기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므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벗어나 하나님의 관계가 새로워질 때 사람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진리입니다.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것이 누림입니다. 이렇게 섬김과 누림이라는 양 날개를 가질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이 섬김과 누림입니다. 그때 ‘새 힘을 얻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새 힘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이요.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가 보이고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이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독수리에게 있어서 거센 바람은 저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아무리 세게 몰아치는 바람이라도 독수리는 그것을 응용할 수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바람을 타고 하늘을 오르는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섬김과 누림이 있는 성도에게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두렵고 떨리는 환난이 닥치더라도 이것을 능이 이길 수 있고 그것을 변하여 축복으로 만들 수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경우 1.0의 시력을 가지고 있는 데 비하여 독수리의 경우 4.0~5.0이라는 어마어마한 시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시야가 넓습니다. 독수리는 340도를 볼 수 있어 모든 시야를 다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독수리는 시속 100km가 넘는 속도로 날다가 먹이를 발견하고 급강하할 때는 300km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여호와를 앙망하여 섬김과 누림의 날개를 달게 되면 세상 사람이 육체의 눈과 감각으로는 느낄 수 없는 천국이 보이고 그때 누리게 될 영광을 소망 중에 바라볼 수 있습니다. 독수리가 먹잇감을 놓칠 수 없는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결코, 잊을 수 없고 지나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신비한 능력이 있기에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고, 소망이 차고 넘치므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행복한 자로 살 수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 중에 의기소침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회개하십시오! 마음을 돌이키고 하나님께 아들을 보내셔서 베푸신 사랑의 섬김을 기억하고 믿으십시오! 날마다 삶 속에 이를 인정하고 누리십시오.
제 아버지의 선물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버지의 사랑이 와 닿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난 사랑의 표적으로 보이신 선물은 어떠하겠습니까? 영원토록 감동과 감격을 남게 될 것입니다.
섬김과 누리의 날개를 가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지니고 높이 나르십시오. 독수리는 어는 정도 성공에 이르게 되면 날갯짓을 하지 않고도 날개를 펴고 날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렇습니다. 초기에 누림의 은혜를 연습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를 되풀이하고 습관화하다 보면 어는 순간에 이르러 힘 안 들이고 자유롭게 누림을 이루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섬김과 누림의 축복을 이루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천국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천국을 이 땅에서 실제화하는 삶이 복된 것이요 하늘에서 큰 상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