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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과 두만강으로의 진격
제 1 절 작전 개요
압록강과 두만강 진격작전은 크게 낭림산맥을 기준으로 서부지역가 동부지역 2개 지역으로 구분한다. 유엔군 사령부는 낭림산맥을 기준으로 서부지역은 주공으로 미 제8군이, 동부지역은 조공으로 미 제10군단이 북쪽으로 진격하여 정주-군우리-영원-함흥-흥남을 연하는 선까지진격하며, 이 선 이북지역은 국군이 전담하는 북진계획을 10월 2일 예하부대에 하달하였다.
이 명령의 특징은 제10군단을 미 제8군이 통제하지않고 유엔군사령부가 직접 통제한 것이며, 미 제10군단으로 하여금 원산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북진작전을 조기에 종결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국군 제1군단의 조기 원산상륙을 고려하지 않고 미 제10군단의 원산상륙은 지연되어, 미 제8군의 진격작전에 많은 차질을 가져왔다. 유엔군 사령부는 10월 17일 미 제8군이 평양 부근까지 진격했을 때 유엔군의 진출한계선을 한.만국경선에서 남쪽으로 48~64km 떨어진 지점을 연결하는 선천-고인동-평원-성진선(※신맥아더선)으로 이동시켰으며, 10월 24일 이 한계선마저 철폐하여 국군과 유엔군 가릴 것 없이 지상군부대들이 최대한의 전투력을 동원하여 한.만 국경선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21일 부터 총진격작전으로 10월 26일에는 박천-태천-운산-온정-희천-이원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제6사단 제7연대는 마침내 한.만국경선의 초산까지 진출하고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꽂았다. 이때가 1950. 10. 26일 14:15분이다.
그러나 이보다 하루 앞선 10월 25일, 구군 제1사단과 제3사단은 운산 북쪽과 함흥 북쪽 수동에서 각각 중공군 1명을 최초로 사로잡았고, 국군 제2군단의 정면에 수 미상의 중공군이 출현하여 치열한 교전을 치르게 됨으로써 주공군의 개입이 처음으로 전장에서 확인되었다.
제 2절 작전 계획
1. 유엔군의 북진작전계획
초산 ●제6-7-1대대
벽동
고장 ●제6-7연대 강계
중공군 제125사
중공군 제40군 중공군 제38군
중공군 제39군 ●제6-2연대 희천●제6사-7/19연대
온정리 ● 제8-10연대
구성 ●국군제1사
운산 묘향산(1,909m)
태천 ↑
영변 덕천 영원
정주 박천 ↑
↗●제6사 , 희천으로
↗ 개천 맹산
안주 ↖ 북창
↖ ↑● 제6사
순천 ← ↖
숙천 ↖
↑ 성천 ● 제6-2연대 양덕●제6-19연대
강동 ● 제6-7연대
평양●국군 제1사
맥아더 장군은 제8군이 38도선을 돌파하던 10월 15일 웨이크섬에서 트루만 대통령과 전략회담을 가졌으며 여기서 한국전쟁의 승리를 낙관하고 추수감사절 안에 적의 공식적인 저항을 종식시킬 수 있다며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맥아더 원수는 10월 17일 새로운 북진 한계선을 설정하고 제8군은 전선의 좌측 선천-청산장시-회목동-고인동-덕실리 방향으로 기동하며, 제10군단은 우측 덕실리-풍산-성진을 향하여 진격토록 하였다.
이 선은 전의 정주-함흥선부다 48km 이동한 것으로한.만국경선까지는 대체로 48~64km 남겨두었다. 그리고 이 선 북쪽으로는 국군만이 작전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10월 20일 부로 제1군단의 작전통제권이 제8군에서 미 제10군단으로 전환되었으며 국군 제7군단을 유군 예비로 전환하여 제8군 예비가 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국군 제3군단이 10월 16일에 창설되어 신편된 제5사단('50.10.8 재창설)과 제11사단('50.8.7일 창설)을 배속시키고 후방지역, 즉 인제-양양에서 서울-춘천 남쪽까지의 후방지역 방어임무를 수행토록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명령에 의거 평양점령 후 10월 20일에는 숙천.순천지역에 공수작전, 동부에서는 미 제10군단이 선천-성진을 연하는 맥아더라인을 향하여 진격을 계속 하였다.
원산교두보는 당초 메8군 주력이 38선을 돌파한 후 1주일내에, 미 제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하여 점령토록 되었으나 국군 제1군단이 승선도 완료하기 전인 10월 10일에 점령함으로써 제10군단은 행정적 상륙을 하고 국군 제1군단은 제3사단으로 원산지역 방호를, 수도사단으로영흥-함흥. 흥남 축선으로 진격토록 하였다.
2. 유엔군의 총 공격명령
맥아더 장군은 10월 24일 미 제8군사령관과 제10군단장에게 전 부대를 동원하여 최대한의 속도로 국경선까지 진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미 제1군단은 군단의 좌익인 미 제24사단에게 청천강을 건너 신의주를 목표로 진격하고, 군단의 우익인 국군 제1사단은 안주-운산축선을 따라 수퐁호로 진격토록 하였다.
또한, 국군 제2군단장은 제6사단을 좌, 제8사단을 우로 하여 벽동-중강진까지 진출하기 위해 제6사단은 희천-온정리축선을 따라 벽동-초산을 탈환하고 제8사단은 희천-강계축선으로 진출하여 만포진과 중강진을 탈환토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1군단은 동해안도로 및 무산도로를 따라 진격하여 국경선을 점령한 후 지역내를 평정한다. 단 미 제7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이 진출할 때가지 일부 부대를 장진호, 부전호, 풍산을 향해 진격시켜 압박을 계속한다.
원산지역을 방어중인 제3사단은 그 임무를 미 제1해병사단에 인계한 후 주력을 후속하며 미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로 진출하여 강계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단 미 제3사단이 도착할 때까지 일부는 원산-함흥지역을 방어한다. 미 제7사단은 이원지역으로 상륙하여 풍산 및 부전호를 거쳐 백두산 남쪽으로 진출한다. 미 제3사단은 원산-함흥을 방어하면서 태백산맥 속의 게릴라를 소탕하는 한편 군단의 보급로를 엄호토록 했다.
제 3 절 서북부와 동북부 지역의 진격전
1. 개 요
낭림산맥 서부지역의 압록강을 향한 공격은 10월 21일 07:00시에 시작되었다. 이때, 북한군은 10월 18일부터 평양에서 철수를 개시하여 제239연대로 지연전을 전개토록 하고 그 주력은 청천강을 도하한 후 방송을 통하여 그들의 수도는 신의주라 보도하고, 동시에 일선부대들에게는 결사항전을 호소하면서 기계화 부대인 제17, 105기계화사단을 정주로, 제4보병사단을 강계로 집결시키고 있었으나 유엔군은 이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10월 20일, 미 제187공수연대가 숙천에 공수, 투하하고 적의 도로차단과 포로 구출작전을 감행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포로는 3,818명 잡았다.
따라서 미 제8군은 미 제1군단을 좌로, 국군 제2군단을 우로 하여 좌측 미 제1군단은 미 제24사단(영 제27여단과 호주대대 배속)을 구성-신의주축선으로, 국군 제1사단은 군단의 우측을 방호하며 안주-운산-수풍발전소축선으로 진출하고, 미 제1기병사단은 국군 제1사단의 뒤를 따르도록 하였다.
우측의 국군 제2군단은, 제6사단을 성천-순천-개천-희천-회목동-판하동-고장-초산축선으로 진격하되 제2연대는 온정리에서 서북쪽 압록강변의 벽동으로 진출하고, 제8사단은 성천-가창-북창-덕천선으로 진격하여 이 선에서 강계-중강진 방면을로 진격토록 했다.
동부지역은 국군 제3사단이 미 제1해병사단의 원산상륙을 지원하며 제26연대는 수동지역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는 수도사단 제18연대와 교대하였다. 미 제1해병사단이 상륙하고, 미 제7보병사단이 이원에 상륙하고, 미 제3사단이 원산에 상륙하자 홍원-신포-신북청으로 각각 이동, 배치하였다.
수도사단은 영흥을 출발하여 제18연대는 함흥을 점령한 다음, 장진호 방향으로 기동, 장진선의 수동지역을 국군 제3-26연대에 인계하고 부전호 방향으로 주력을 지향하여 신흥리-수상리선에서 적과 교전을 하다 미 제7사단에 인계하고 오노리로 이동하였고, 제1연대는 흥남.흥원을 점령하고 풍산으로 진격하여 미 제7-17연대에 이 지역을 인계하고 단천으로 이동, 제1기갑연대와 길주를 점령하고, 제1기갑연대는 영흥-함흥-신북청을 경유, 단천을 점령하고 제1연대와 길주를 점령한다.
한편 미 제10군단장은 10월 26일 국군 제1군단은 동해안선을 따라 북동국경지대로 진격하고, 미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를 따라 진격하며, 미 제7사단은 북청-혜산진으로, 미 제3사단은 원산-함흥지역을 경계토록 하였다.
2. 피 ● 아 전투력 비교 및 당시 상황
가. 북한군 상황
당시의 북한군은 3개 군단, 9개 사단으로 총 90,000여 명이고 전차 및 자주포는 96대 수준이었다.
서부지역의 북한군은 아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1차 사령부를 희천, 2차는 강계로 정하는 한편 1차 방어선을 안주-개천-덕천선의 청천강으로 정하고, 제2차 방어선은 희천선, 제3차 방어선은 강계선으로 하여 최후의 저항을 기도하고 있었다.
특히 정주-온정리를 연하는 80km선에 제17, 105기계화사단을 비롯한 제4사단과 제47사단을 배치하여 신의주-초산-강계 방면으로 퇴각하면서 아군을 험준한 산악지대로 유인하였다.
동부지역의 북한군은 원산 방어에 패주한 2개 사단 규모의 적과 등지에서 증원된 제507여단, 제41사단, 그리고 장진호 부근에 나타난 중공군 124사단이 아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특히 제2전선부대와 인민유격대의 조직을 강화하여 10월 16일 부터 활동에 들어갔으며 미 제9군단이 전방에 투입되지 못하고 병참선 경계를 해야 했고, 국군 제3군단도 이들의 토벌작전에 투입되어야 했다.
그리고 드디어 중공군이 10월 19일, 계획대로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 국경안으로 제13병단이 들어왔다.
나. 아군 상황
유엔군은 국군 8개사단, 미군 7개 사단, 영 1개 여단 등 총 200,000여 명에 전차/자주포 80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서부지역의 아군은 미 제1군단이 미 제24사단(영 제27여단 배속, 호주 대대 포함)이 신의주방면으로, 국군 제1사단ㄴ을 수풍발전소 방면으로, 미 제1기병사단은 국군 제1사단을 후속토록 하였다.
국군 제2군단은 제6사단을 초산 방면으로, 제8사단은 강계-중강진 방면으로 진격토록 하였다.
이 기간 중 제2군단장 유재흥 소장이 10월 24일 부로 육본 참모차장으로 전임되고, 후임에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이 부임하였다. 그러나 3일 후 다시 유재흥 소장이 군단장으로 재부임하였다.
동부지역은 첫번째는 10월 16일부터 10월 30일까지 국군 제3사단이 원산-함흥지역을 방어하는 가운데 수도사단 단독으로 함흥-장진-, 북청-풍산선을 봉쇄하면서 주력으로 길주를 점령하고, 미 무렵 미 제10군단이 원산 및 이원에 상륙을 완ㄹ료하엿다.
두번째는 11월 1일 이후부터 11월 말까지의 작전으로 한.미 양군이 장진호-혜산진-부령선을 지향하고 총 진격하게 된다.
3. 서북부지역 진격전
서북북지역 진격상황
중강진
강계
초산
벽동 적31사
수풍저수지
삭주 국6-7연 장진호
적32사 적18사
희천
신의주 국6-2연
구성 운산 적26사
태천
정거동 미21연 덕천
정주 영27여 국1사
미8군=미10군단
신안주
국6사
숙천 미24사 순천
양덕 국6사
국1사 강동
평양
국1사, 미 1기병, 미187공수단
가. 숙천. 순천 공수작전('50. 10. 20~22)
미 제8군은 지상군이 평양을 향하여 진격하고 있을 때, 김포비행장에는 미 극동군사령부의 예비전력인 제187공수연대전투단이 작전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10월 20일 공수부대요원들은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새벽 02:30분에 기상하여 출동준비를 하여, 14:00시에 목표 상공에 낙하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105밀리 곡사포와 탄약, 90밀리 대전차 포 등 중장비도 투하 되었다.
낙하지역은 평양 북방 56km의 숙천과 그 동쪽으로 17km 떨어진 순천지역이다. 이 지역은 경의선 철도와 만포선 철도가 이어지는 곳으로 군사요충지다.
한편 평양탈환 후 미 제24사단의 선두로써 청천강을 향하여 북진하던 영 제27여단이 영유까지 진격하여, 이곳 일대에 낙하된 제3대대는 숙천 남방 12km지점의 어파리와 영유에서 방어중인 북한군 제239연대의 2,500여 명을 남과 북에서 협공하였다.
또한 제2대대는 순천에서는 순천 북쪽 약 9km지점의 터널에서 200여 명의 미군 포로가 학살되었다는 주민제보로 수색작전을 벌려 생존자 23명을 구출하고 66구의 시체를 찾아냈다. 이 포로들은 생존자의 증언에 의해 훨씬 전에 서울에서 압송되었으며 17일 150명씩 300여 명을 두개의 열차에 싣고 평양을 떠나 철로를 수리하면서 가던중에 공수부대가 낙하되었고 2번째 열차가 폭격을 피해 터널 속에서 머물렀다.
10월 20일 저녁때 기차에서 내려 저녁식사를 타 먹으려고 기다리다 그대로 경비병에게 살해당하고 열차와 경비병들은 밤에 떠나 버렸던 것이다. 이 부대는 평양에서 북쪽으로 진격중인 미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 제1대대 및 제70전차대대 1개 중대로 편성된 특수임무부대와 21일 09:00시에 연결되었다.
10월 22일 공수연대가 연결할 때까지 전과는 사살 2,000명, 포로 3,818명이었으며 공수연대는 피해는 공수낙하시 46명, 지상전투에서 65명 등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되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평양함락 전인 10월 12일경에 북한군의 주력이 빠져났고 포로도 후송시켰다고 한다.
나. 영변-운산 진격전('50. 10. 22~31)
국군 제1사단은 수풍리로 진격하라는 군단명령에 따라 10월 24일 11:00시경에 안주(평양 북방 65km)에서 청천가을 도하하여 운산(안주 북방 40km)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사단 좌익인 제12연대는 구룡강 서쪽에서 용산동(안주북방 22km)을 탈환한 다음 운산 정면으로 돌입할 예정이었으며, 우익의 제15연대는 구룡강 동쪽에서 운산 동측방을 공격할 게획아래 영변 방면으로 기동하고, 예비인 제11연대는 안주에 대기하다 용산동에 진입할 계획이었다.
10월 24일 15:00시에 영변에 도착한 제15연대는 연대보다 2일 먼저 도착한 제6사단 제19연대 제3대대가 영변을 확보하고 있엇음으로 양개부대가 연결한 다음 제19연대 병력은 차량으로 제7연대가 위치한 희천으로 떠나고 제15연대가 인수하였다.
그러나 제12연대는 용산동 남쪽 1km 지점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출이 중단되고 제15연대의 전차소대와 협공하여 용산동을 탈취하였다. 10월 25일 아침 국군 제1사단의 운산공격이 시작되었다.
10월 25일 11:00시에 운산으로 진입한 제1사단은 최종 목표인 수풍댐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그 중간 목표인 청산장시를 향해 북쪽으로 진출하다 제15연대가 교전하는 적이 북한군이 아닌 중공군임을 식별하고 즉시 사단에 보고 하였으며 11:44분에 중공군 포로 1명을 포획하였다.이것이 이 전쟁에서 최초의 중공군 포로였다.
"너 누구냐?"
"나 짱골라 해~"
"너 말고 또 어디에 있는냐?"
"운산 10,000명, 희천 10,000명 있어 해"
"너 거짓말 하면 죽는다 해?"
"알았다 해"
"점차 함정으로 들어가는 국군 과 미 제1기병사단"
하지만 유엔군과 군 수뇌부는 믿으려 하지 않았고 대수롭게 생각했다. 미 제1군단은 좌일선의 미 제24사단이 순조롭게 진출하는데다 국군 제1사단 정면에 출현했다는 중공군은 북한군을 증원하기 위해 투입된 소규모 일 것으로 가볍게 판단하고 10월 25일 16:00시를 기해 압록강을 목표로 총공격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국군 제1사단의 좌익 제12연대는 그런대로 진지를 확보하였으나 제15연대는 가중되는 적의 압력에 뒤로 밀리기 시작하였다. 사단 예비인 제11연대를 전방에 증원하는데 중공군이 사단 좌측으로 침투해 운산-용산동간 도로를 차단하여 운산지역에 들어간 모든 부대들이 퇴로가 막히게 되었다.
"미 제1기병사단의 국군 제1사단 초월공격(10. 29~10.31)"
미 제8군은 이런 중공군의 개입을 믿지 않으려 했으며 미 제1군단에게 군 예비인 미 제1기병사단으로 국군 제1사단을 초월하여 수풍댐으로 진격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기병사단은 10월 29일 제8기병연대를 용산동에 진출시키고, 10월 30일에 제5기병연대가 용산동에 도착하자 제8기병연대는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 15연대의 전선을 인수하기 위해 운산으로 진출하였다.
이로서 운산의 서반부는 미 제8기병연대의 3개 대대가, 그리고 동반부는 국군 제15연대 제1,3대대가 각각 배치되었다.
다. 순천-개천-희천 진격전
국군 제2군단은 평양탈환작전을 위해 원산-덕원을 출발하여 서북진 했으나 미 제1군단의 급속한 진출로 제7사단 제8연대만 평양탈환작전에 참가하고 진격방향을 바꾸어 성천으로부터 순천-개천-희천으로 진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군 제6사단은 10월 19일 성천을 점령한 후 바로 순천-개천-희천방향으로 진로를 바꾸어 진격함으로써 제6사단 제7연대가 모든 8군 부대중 가장 북쪽에서 진격하게 되었다.
제2군단장 유재흥 소장은 군단의 목표는 희천이며 이를 위해 제6사단이 개천을 탈환 후 희천으로 진격하고, 제8사단은 덕천을 탈환한 후 구장동을 경유 희천으로 진격하고, 제7사단은 육군본부의 통제를 받도록 하였다.
이에 제6사단은 제7연대와 제19연대를 공격제대로 하고 제2연대를 예비로 순천-개천-안주-희천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7연대는 10월 20일 07:00시에 순천으로 진격하게 되는데, 바로 미 제187공수연대가 미군 포로를 구출하려 낙하하였는데 21:00시경 국군 제6사단과 연결하게 되었으며 순천 북쪽 약 9km지점의 터널에서 200여 명의 미군 포로가 학살되었다는 주민 제보로 수색작전을 벌려 생존자 23명을 구출하고 66구의 시체를 찾아냈다.
"북으로 가는 북한군, 북으로 달리는 국군"
제7연대 제2대대는 선두제대로서 21일 06:00시에 개천 남쪽 15km까지 진출했다. 도중에 적 1개 중대를 만나 섬멸했다. 이때 연대장으로부터 제1,2대대를 초월하여 개천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3대대는 차량을 이용 신속하게 전진하였다.
"대대장님, 저기 적이 몰려가고 있습니다"
"뭐야 얼마나 되는데?"
"1개 대대는 됩니다"
"야, 그냥 놓아두고 전속력으로 달려"
달리면서 외쳤다, "전쟁은 이제 끝났으니 총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함성을 지렀다. 그러자 북한군은 당황하여 총을 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고 산으로 숨어들었다.
"개천역으로 보급 물자와 장비를 싣고 들어오는 기차"
10월 21일 밤 개천을 점령한 제3대대는 사주경계를 하고 있는데 신안주쪽에서 개천역으로 기차가 들어온다. 북한군 기차다. 국군이 질풍처럼 달려오다 보니 그들은 여기에 아군이 있을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중대장님, 저기 무슨 기차가 오고 있습니다."
"대대장님, 기차가 들어옵니다"
"기다려라, 우리 사격구역 중앙에 올 때가지 기다려라, 명령은 내가 내린다"
뿌~응, 뿌~응 기차가 역에 들어섰다
"쏴라"
이렇게 하여 열차를 잡았는데 그 안에는 소련제 전차 7대, 각종 화기, 적의 군복이 많이 있었다. 이걸 3대대장은 대대본부 요원과사병들에게 한 벌씩 나누어 입도록 하였다.
"대대장님, 또 옵니다"
"뭐야 이번에도 기차야?"
"네 저 뒤에 서서히 들어오고 있습니다"
"전과 동, 기다려라 내가 쏘라고 하면 쏴라" 이렇게 하여 열차를 두 번이나 잡는 쾌거에 사기는 진작되었다.
"대대장님, 저기 적이 쌔까맣게 옵니다"
날이 밝아 10월 22일 새벽, 신안주쪽에서 1개 사단규모의 적이 개천쪽을 향하여 후미에 전차 10대가 뒤따르며 행군대열을 지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대대장은 쌍안경으로 적정을 살피고 즉시 전 병력을 개천 서남쪽으로 전개시켜 기다렸다.
"대대장님 쏠까요?" 제1중대장의 보고였다
"아냐 더 기다려"
"대대장님 쏠까요?" 제2중대장의 보고다
"대대장님 쏠까요?' 제3중대장의 긴급한 목소리다.
"쏘라" 신호탄이 오르고 일제히 집중사격으로 화망에 걸려든 북한군은 허둥대며 사방팔방으로 패주하였다. 아침 식사를 마친 대대는 전장정리를 할 사이 없이 07:00시경 희천을 향해 출발했다.
제19연대는 10월 21일 13:30분에 순천을 출발하여22일 개천을 거쳐 영변쪽으로 기동하였다. 뒤를 이어 사단(-2)이 기동하여 22일 개천까지 진출하였다.
제7연대장은 10월 22일 제3대대장으로 보고를 받고 제3대대를 개천에 잔류시키고, 제1대대로 제3대대를 초월하여 희천을 탈한하라고 명령하였다. 제1대대장은 06:00시에 순천을 출발, 개천에서 제3대대를 초월하여 구장동에 무혈입성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청천강 도하지점인 원참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미 공군 폭격으로 교량이 파괴되고 고급승용차 22대를 비롯한 일산트럭과 미군트럭등 100여 대가 즐비하게 버려져 있었다.
제1대대는 원참도섭장에서 제1중대를 선두로 청천강을 건너 진격 도중 화평참(구장동 동북방 13km) 북쪽 도로변에서 식사 중인 북한군 장교 13명을 생포하고 그 주변 마을에서 500여 명의 북한군을 교전 끝에, 저항하는 자는 사살하고 대부분 포로로 생포하였다.
이러다 보니 포로가 늘어나 포로들을 처리하는 문제가 발생하여 경상자와 연소자 및 양민으로 인식되는 포로는 무장을 해제하여 귀향조치하고 간부를 포함한 극렬분자만 골라 압송하였다.
10월 23일, 06:00시를 기해 제7연대 제1대대는 화평참을 출발 희천으로 진격을 개시하였으며 16:00시경 희천을 탈환하게 되는데 T-34전차 20대와 의약품 및 보급품을 실은 화차 6량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연대장의 명에 의거 진격을 멈추고 야간 경계에 들어갔다.
그리고 사단예비인 제2연대는 제7연대가 희천을 탈환하자 사단장의 명에 의거 온정리를 탈환하기 위해 구장동 동쪽 자작으로 급거 진출하여 이곳에서 청천가을 건너 도보로 온정리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제19연대(-)는 제2연대와 교대하여 사단의 예비로 군우리에 대기하였고 제3대대는 영변에 대기하였다.
라. 초산, 벽동 진격전('50. 10. 23~10. 26)
(1) 초산 진격전
초산 진격전
초산 10.26 14:15
강계 중공군 제38군
벽동 고장 국6-7연, 개천으로 10.29밤
중공군 125사
북진 중공군 40군 희천 국8-10연, 국6-19연, 국6-7연
국6-2연
중공군 39군 국1사=국6사 온정리
운산 묘향산
태천
영변 구장 덕천 영원
박천 개천
(가) 전투 개요
국군 제2군단은 제6사단을 좌, 제8사단을 우로하여 초산과 만포진을 목표로 각각 주야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제6사단은 10월 23일 밤 희천에 돌입하여 초산까지는 불과 80km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사단은 제7연대가 가장 선두에서 진격을 재촉하고, 연대는 희천에서 서쪽으로 돌진하여 극성령을 넘어 회목동-판하동-고장으로 제1대대를 선두로 진출하고 있었다.
제7-1대대는 초산 시가를 통과하며 수미상의 적으로부터 저항을 받았으나 격퇴하고 드디어 10월 26일 14:15분에 압록강변인 신도장에 도착하여 태극기를 꽂았다.
진격도중 만나는 적은 남침당시에 신녕-조림산 전투에서 국군 제8사단 및 제6사단과 전투를 벌였던 북한군 제8사단으로 아군을 적 진지 깊숙히 유도한 연후에 포위, 섬멸할 의도로 진격로 양측 감제고지를 점령하고 불의의 기습으로 아군을 강타하고자 하였다.
(나) 전투경과
제6사단장 김종오 장군은 제7연대로 초산, 제2연대로 벽동을 목표로 진격토록 하고 제19연대는 온정리에 집결보유토록 했다.
이에 따라 제7연대는 제1대대가 희천에서 10월 23일 14:00시에 진격을 개시하여 회목동에 20:00시에 도착하였다. 한편 제3대대는 연대본부와 같이 구장동에서 차량으로 온정리-회목동-용연까지 진출했다.
제7연대 제1, 2대대는 초산을 향해 진격중 양강동에서 도로 양쪽 고지에서 적의 기관총 사격을 받고 양개 대대를 전개하여 제압하면서 판하동에 도착하였다.
"우리 앞에 국방군이 왔다. 빨리 도와줘라?"
진격 중에 계속 중공군이 들어왔다는 지역주민 첩보가 이어지는 가운데 판하동에서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적의 통신선을 발견하고 풍장에 있는 소속 미상의 적에게 허위 정보를 흘려 빨리 증원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이보라우 동무, 우리 8사단인데 국방군이 지금 발 밑에 왔소, 빨리 지원하라우"
"거 무시기 소리요, 소속이 정확히 어디요?"
"내래 아새끼 동무, 우리 8사단 본부 후발팀이요. 빨리 지원하라우?"
이런 기만통신에 적은 1개 소대 30여 명이 차량으로 지원을 나왔고 모두를 포로 잡았고 다시 한번 중공군의 정보를 입수하였으나 사단 지휘부는 설령 중공군이 들어왔다 치더라도 대수로운 존재가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였다.
연대는 계속하여 10월 25일 판하동에서 고장에 으르는 가도를 따라 진격하며 풍장 동남족 고지일대의 적 2개 중대규모로 부터 저항을 받고 극복하며 진출하였다. 적은 독전까지 감행하면서 최종 발악을 하는 것이였다.
연대는 제1대대 제1중대를 선두로 초산으로 진격하고 사단장 김종오 장군도 실제 진두지휘를 위해 선발대와 가던중 교통사고를 당하여 들것에 실린 채로 작전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리고 10월 26일 14:15분에 초산 을 점령하고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꽂았다. 연대 주력은 고장에 적의 반격에 대비하였다.
(2) 제2연대의 벽동 진격전
제2연대는 10월 25일 온정리에서 벽동(온정리 서북방 75km)을 목표로 진격을 개시하여 북진(온정리 서북방 15km)으로 진격 중 선두인 제3대대가 동림산 (1,165m)기슭에서 중공군(제40군 제118.119.120사단)과 조우하여 피아간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총포성이 산야를 흔들고 쾡과리와 피리 소리가 들짐승을 놀라게 하였다.
이들은 북한군이 아닌 중공군이었으며 포로가 된 중공군 병사는 "그들이 10월 17일부터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제2연대는 10월 26일 중공군에 온정리를 피탈당하고 퇴로가 차단되어 붕괴된 채 태평방향으로 철수하였다.
전투중 제6사단은 중공군 및 북한군 사살 2,411명 포로 524명이었고 아군의 피해는 전사 27명 실종이 무려 1,792명이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마. 북창-덕천. 영원-희천 진격전
북창-덕천-영원-희천 진격전
희천 10.26 13:00 국8-10연
묘향산 1905
적
구장 10.25 15:00
적
덕천 영원 국8-10연
국8-16연
알링령
개천
북창 국8사 맹산
(1) 전투 개요
군단의 우익을 담당한 제8사단은 제6사단 제7연대가 희천을 탈환한 10월 23일에 덕천(평양 동북방 90km)을 덕천을 탈환하였다. 당시 제8사단은 제10연대로 하여금 맹산(덕천 동남방 25km)을 경유하여 영원(덕천 동북방 20km)으로 진격톨고 하고, 제16연대는 북창(평양 동북방 75km)을 경유하여 덕천으로 진격하도록 하고, 제21연대는 사단의 예비로써 사단사령부와 함께 진격했다.
제8사단장 이성가 준장은 10월 24일 군단장 유재흥 소장으로부터 희천-강계축선으로 진격하여 만포진과 중강진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따라, 10월 24일 아침 덕천을 출발한 제16연대는 25일 15:00시에 구장동에 도착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제21연대가 도착하였다. 사단장은 이곳에서 제16연대를 예비로 하고 제21연대를 선두로 희천을 향해 출발, 10월 26일 14:00시에 신흥동에 이르렀을 때에 군단으로부터 공격중지 명령이 하달 되었다. 이 때가 바로 제6사단 제2연대가 온정리에서 중공군에에 격파되어 분산철수하고 있을 때였다.
사단의 우익 제10연대는 24일 16:00시에 영원 북방 송평동을 거쳐 26일 13:00시에 희천에 도착하였다.
(2) 전투 경과
제8사단장 이성가 준장은 군단으로부터 10월 24일 희천-강계 축선으로 진격하여 만포진과 중강진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0월 24일 07:00시에 덕천을 출발한 제16연대는 묘향산 서측방 통로를 따라 구장동으로 진출하던 중에 두일령과 탁고개 사이의 분지인 천동 일대에서 포로를 250명을 포획하였다. 그리고 계속진격하여 25일 15:00시에 구장동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사단 에비인 제21연대와 덕천 동측방으로 위력수색차 나갔던 제16연대 제3대대가 그 뒤를 이어 구장동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제21연대를 사단의 좌일선으로 희천으로 진출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제6사단 제2연대가 중공군의 포위에 걸려들어 이를 구출하기 위해 먼저 희천에 와 있던 제6-19연대, 그리고 영원 북방에서 송평동을 거쳐 희천에 들어간 제8-10연대가 온정리로 출동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제8사단의 임무가 전환되어 제2연대의 구출작전과 군단 철수부대의 엄호작전을 전개 하게 되었다.
제8사단 제10연대는 사단의 우익으로써 영원으로 진격하면서 두암리(영원 남방 10km) 고개에서 사로잡은 30명의 포로를 심문하여 이들이 북한군 제15사단이었다. 이들은 낙동강 전선의 영천 정면에서 전투에 참가한 부대로 이들은 철원지역에서 집결한 5,000명의 혼성병력이 언진산맥 통로를 통하여 강계 방면으로 북쪽으로 이동 중이라는 것이다.
제10연대는 계속하여 묘향산 우측 통로를 이용하여 10월 26일 13:00시에 희천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희천에서 제6사단 3개 연대와 제8사단 1개 연대가 궁지에 빠지자 군단장은 제8사단의 2개 연대를 구장동 북쪽에 전개시켜 철수부대를 수습하여 하였다. 그러나 이미 초산으로 진격한 제6-7연대는 제1대대가 초산, 연대(-)가 고장에 위치하고 있어 철수를 할 때는 이미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버렸다.
이에 제2군단은 10월 29일 군으로부터 미 제1군단 예비로 있던 국군 제7사단을 배속받아 군의 동측방을 방호하기 위해 11월 1일 구간동-덕천지역에 투입하였으나 이곳도 이미 중공군이 진출하여 제2군단은 개천-원리 일대로 철수하였다.
바. 서북부지역에 관련된 유해매화장 보고서 현황 과 위패 및 묘비 현황
(1) 유해매화장 보고서 현황
우리 전사에는 많은 전투와 희생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많은 희생이 현장에서 거두어지지않은채로 반세기가 지나갔다. 물론 많은 전사자의 유해가 현충원에 안장된 것도 사실이다. 또한 긴박한 상황에서 전우를 남기고 와애했던 우리 용사님들의 고통을 몇백번 이해하고 또 이해한다.
그러나 지난 70년동안 정부가 취한 행동은 뭐라고 이해해야 될지 잘 모르겠다. 60~70년대 밥먹고 살기 힘들다 하여 빗대는 시기는 이제 과거다. 그동안 대북문제도 김대중정부시절 등 화해의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많은 것을 그들에게 주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가 얻은 것이 뭐언지 뒤돌아 보면 언듯 생각나는 것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 밖에는 더오르는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을 위해 청춘을 던져 싸웠던 호국용사님들은 어떤 대우를 받고 있으며 그 유가족들의 생계는 누가 보장해 주었던가. 요즈음 회자되는 5.18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유공자 및 희생자들의 보장책과 비교하여 보면 많으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나만의 판단은 아닐 것이다. 이제 국가가 먹고 살만하지않은가, 그렇다면 6.25전쟁 참전용님과 그 유가족, 독립유공자등 좀더 폭넓게 지원책을 강구해야 되지않을까 한다.
여기에 열거되는 현황은 내가 2000년도에 당시 존재하던 영현중대에 보관중인 6.25전쟁 매화장 보고서를 분석한 현황이다. 매화장 보고서는 현지에서 상황이 긴박하여 유해를 수습하지 못하고 현지에 가매장한 기록으로 당시에 보관중인 현황이 약 9,000명 분이었다. 하지만 표기된 내용중에 매장위치를 기록하지 않은 것 등 해석이 곤란한 것들으 제외한 것이 약 8,400여 명 되었으며 이를 북한지역은 동부와 서부로 구분하여 중요 격전지와 연계하고 비교해 보면 많은 것이 의아한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주요 격전지 위주로 기록하겠다.
서부지역 매화장 보고서 현황은 만포진 2, 강계 4, 동창 2, 운산 6, 희천 4, 구성 2, 태천 3, 구장 10, 덕천 11, 개천 5, 안주.박천 3, 북창 9, 순천 4, 평양 16, 강동 8, 회창 4, 양덕 4, 토산 3, 이천 1, 철원 6, 김화 6, 금천 8명 등이다.
여기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강계나 만포진에 우리 군대가 올라간 기록이 없는데 피해사실이 있다는 것과 운산과 희천의 매화장 현황이 극히 적다는 사실, 그리고 초산으로 진격했던 제6-7연대의 고장전투에서의 아무런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상황이 워낙 긴박하니 몸만 나왔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면 전사기록에 포로는 몇백명 획득했다고 기록하면서 피해 현황도 정확히 기록해 놓아야 지금의 우리가 찾아갈 분석자료가 되는데 잘 후퇴(?)했다는 기록만 있고 참전 용산님들은 본인 등 몇명만 살아왔다고 한다면 문제가 아닌가 한다.
실제 국방부에서 발행한 6.25전재 국군 유해소재 증언집('00.12. 6.25전재 50주년 기념사업단)자료에도 현재 경계를 이루고 있는 철의 삼각지대를 제외하면 북진작전시 모든 전투지역의 유해 미수집 현황이 없다.
(2) 위패 및 묘비현황
그럼 여기서 위패 및 묘비현황을 통하여 한번 비교해 보기로 한다.
현재 현충원이 보관중인 위패 132,864위('00년)중 전사지역을 확인 가능한 유해는 남한지역이 176개지역 14,91명이고, 북한지역은 138개 지역 4, 872명이다.
이중 북한지역 4,862명은 100위이상 매장된 지역이 6개지역에 1,946명, 99~50위 이상이 8개 지역에 485명, 49~30위 이상이 6개지역 285명, 30위 미만이 118개 지역 2,156명이다.
그러니 쉽게 이야기하면 발굴가능지역이 명기된 위패카드는 19,843위이지만 이중에 매화장 보고서가 있는 유해는 불과 50%인 8,000여 명이란 뜻이다.
그러나 내가 직접 영현중대의 매화장 보고서를 검토한 결과는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위패 카드 132, 864위 와는 전혀 다른 9,000여 위에 불과하였고 북한지역의 현황도 현재 철원이나 금화지역 위주로 되어 있어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북한 지역 위패 세부현황은 차후 확인 예정)
다음에 현재 현충원에 묘비로 세워진, 안장된 유해중 북한지역은 금화지역에 3,050명, 개천 235명, 금성 96명, 월산령 87명, 원산 82명, 덕천 67명, 원동 26명, 평북 22명, 길주 21명, 황해 달전 20명 등으로 금화.금성. 원동을 빼면 운산이나 희천 등의 묘비는 있어도 그 숫자가 별로 안된다는 의미로서 얼마나 긴박하게 중공군의 1.2차 공세가 가멸차게 진행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사. 참전영사님 증언 기록
여기 처음부터 기록되는 내용은 모두가 내가 발굴작전을 수행하면서 기록은 남기기 위한 증언청취나 개인적인 친분관계에서 들은 내용으로 검증ㅚ지 않은 내용이니 오해는 없기를 바란다.
희천으로 진격한 제6사단은 제7연대가 초산을 점령을 위해 고장으로 진격하고 제2연대는 벽동으로 진출위해 운산으로 가고 이런 가운데 중공군의 기습이 진행되면서 퇴로를 열기 위해 제19연대가 미 제1기병사단과 함게 투입되게 된다.
"제19-1대대는 다 청천강에 빠져죽고 1개 소대만 살았다"
방귀길 참전용사(제19-1대대, '00) : 전쟁 기간중 유해를 직접 매장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전사자를 처리할 틈도 없이 방치한 채 철수하였다. 우리는 강계근처 회목동까지 진격했다가 철수하게 되었으며 중공군의 기습으로 청천강을 도하해야 하는데 대부분 강물속에서 다 죽었다. 도하해 보니 대대가 1개 소대 밖에는 안되는데 이마저도 구장동에 집결해 보니 분산 되어 8명만 남아 남쪽으로 낼오다 북한군 기마병을 만나 다시 역으로 북으로 청천강을 역도하하여 국군 제7사단을 만나 살아났다.
"중공군에 교육받고 동조자는 기차로 실어다 풀어주더라"
김석수 참전용사(제2-2대대.'00) : 나는 제8중대 81밀리 박격포 사수로 우리 부대는 '50. 10월 말경 벽동으로 북진을 하기 위해 온정리로 진출하였다. 온정리에서 숙영을 하고 벽동으로 이동하는데 온정 서북쪽 4km 지점에서 중공군 기습으로 소대원 8~9명이 전사했으나 유해는 교량옆에 방치하고 흩어졌다.
나는 여기서 부상하여 온정리 연대 수용소에 후송되었으며 10여 명의 부상자가 있었는데 그날 저녁에 다시 중공군 기습으로 7명은 포로가 되고 3명은 전사했다.
북진광산에서 3일간 머문 후 벽동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중공군에세 교육을 받고 그들에게 동조하는 포로(유엔군 25명, 국군 77명)는 다시 기차로 이동하여 온정리역(구간역으로 기억)에 도착하여 석방시켜 주었다. 이때가 11월 경인데 본대에 복귀하여 덕천 부근에서 다시 중공군에 포위되어 후퇴하다 온정리에서 입은 부상이 제발하여 평남 순천 군사령부 야전병원을 거쳐 평양 육군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철수시에 진남포에서 화물선으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부산 제2육군병원에서 '52. 2. 7일 퇴원하여 2월 10일에 통신학교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고 이등중사로 진급하여 수도사단 기갑연대로 배치되었다.
"나무십자가에 새긴 전우, 우리는 찾아가지 못했다"
이록영 참전용사(제19-1대대.'00) : 나는 직접 유해를 매장했으나 찾아가지 못했다. '50. 10. 26일 07:00시경에 희천에서 회목동을 향해 출발하여 21:00시경 도착하여 전쟁 발발이래 처음으로 단잠을 잤다. 10월 28일 아침을 맞이했는데 보급품이 오지않았다. 중공군 3,000여 명이 온정리에 있고 제2연대가 공격했으나 실패하여 우리 19연대(-)와 8사단 10연대가 공격했으나 도 실패하여 우리 1대대보고 즉시 남하하여 온정리의 중공군 배후를 공격하라는 명령을받고13:00시에 회목동을 출발하여 18:00시경 우현진 북방고개(우현령) 중간에 도착했을 때에 중공군과 조우가 되었다. 다음날 2시간의 공격으로 고개를 점령하면서 손학동 일병이 전사하여 수색대 선임하사 김석태 중사가 유해를 수습하여 인근 마을 뒷산에 나무로 십자가를 세우고 가매장하였다.
전투가 끝나면 다시 돌아온다고 마을 노인에게 약속을 하고 계속 남진하러 더났으나 중공군의 계속적인 압력으로 연결작전을 못하고 떠나야 했다.
"중대원 130명이 70명이 되었다" "포로의 의리로 지형을 잘 이용하여 살아 나왔다"
황대형 참전용사(제15-1-3중대.'00) : 우리는 평양을 점령한 후에 순천과 개천가지 진격했다. 김소월의 영변을 지나 운산(지금은 구읍리, 온정리를 운산읍으로 승격시킴))에 도착하였다. 다시 운산에서 온정리(현재 운산읍)방향으로 진격해 10월 25일 밤 시기동까지 진격했는데 동쪽에 구룡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때까지는 아무일도 없이 진출이 수월했다. 그런데 10월 25일 밤에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는 포성과 적의 사격이 시작되어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우리 중대장 이덕영 대위가 부상을 당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중공군 제39군 예하의 3개 사단이 이 일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다.
북진중에 진급하여 대위가 된 소대장 고인식 대위가 중대를 지휘하며 부중대장 이형원 중위, 사병계 박종우 일병, 대대 통신장교 등 장교 4명과 병 38명이 모였다. 나는 경기관총 2정과 실탄 6통을 가지고 있었고 각자 개인화기는 휴대하였다. 우리는 탈출을 해야 했다. 전우의 시체나 다른 뭐를 생각하 겨를도 없다 온통 쏼라솨라하는 중공군놈 판이다. 산계곡에 숨어들었는데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바로 이때에 시변리에서 우리에게 포로로 잡혔던 소대장의 신의주 고향친구, 그는 어느새 우리가 같은 국군이 되어버렸다. 기관총 탄약수 역활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며칠을 헤맸는데 운산에 금광굴이 많았다. 바로 그 포로의 덕택으로 우리는 은신하며 며칠을 잘 버티고 은밀히 남쪽으로 탈출하여 3~4일이 지난 싯점에 도로에서 숙영주인 미군 155밀리 포병 부대를 만나 소대장이 손짓발짓으로 소통하여 그들은 즉시 비상을 걸어 출동대기하고 우리에게 트럭 한대를 주어 그걸 타고 영변으로 해서 박천 맹중리로 가서 분대와 합류하여 철수하게 되는데 130명이던 전우가 70명이 되었다.
"북한주민과의 동거, 그리고 잘못된 귀향조치"
황대형 참전용사(제15연대 제1대대, '03) : 운산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130명의 전우가 42명이 만이 함께 탈출하여 금광굴에 은거하는 등 숨어서 탈출을 계속하던 중에 어느 산속 마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다 어떻게 살아나 미군 포병의 도움으로 트럭을 타고 박천 맹중리로 가사 본대와 합류하였다. 청천강 하류의 북족인 그곳에서 일시 주둔라며 부대정비와 훈련을 하는데 수시로 주변 수색정찰을 나가곤 하였다.
그 당시는 동네에 비어있는 집들을 숙영지로 삼아 주간에는 우리가 사용하고 밤에는 민간인이 자도록 하면서 우리는 경게임무를 했다.
우리는 거의 1주일 이상을 한 곳에 머물렀고 보급사정이 좋지 않아 현지조달을 해야 했다. 지역주민들은 북한군 내무서원이나 지역인민위원들이 "국방군은 여자들을 강간하고 물건을 빼앗아 간다"고 선전하며 피난을 독려하여 빈집이 많았다.
그러다 수색정찰간 다른 민간인들로부터 20여명의 주민이 숨어있는 외단집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급습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나오라 해도 나오지않아 "예광탄을 쏘아 불질러라"하며 큰소리로 외치자 문을 열고 아주머니 둘이 먼저 나와 불을 켤 수 없어 일찍 잠들었다고 해명하며 사정이야기를 해서 확인결과 처녀 1명, 아주머니 4명, 10살 미만 아이들이 10여 명이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왜 국방군을 괴물로 봅니까?' 하자 역시나 국방군은 여자를 모두 잡아다 강간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다.
벌써 부엌에서는 밥과 국을 끓이고 고구마도 구웠다.
"군인 양반 몇살이요?" 한 아주머니가 물었다.
"금년에 부러진 마흔살이요"라고 답변했다.
"놀리지 마시라요. 국방군은 거짓말을 안한다며 왜 거짓말이요?" 따진다.
그러자 처녀인 여자가 나서며 "언니들이 말을 잘못 알아듣네. 마흔을 반으로 부러뜨리면 스무 살이잖소"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랬더니 아주머니들이 "정말 국방군 동무는 거짓말을 안 하시는구만"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정이 들어가며 거의 1주일을 방 4개에 다락방 2개가 있는 2개의 민가를 내무실로 삼아 생활하였고 대대본부가 있는 맹중리에는 가끔 위문공연도 있었다.
"또 나타나는 도깨비"
11월 말이 되어 태천을 공격한 후에 계속 북진하라는 명령에 먹다남은 식량은 모두 주민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고인식 중대장이 약속한 대로 고향(대령강 건너 영미에 사는 사람들)에 보내주기 위해 헌벙대장에게 부탁하여 보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였다. 그 주민들은 평양으로 가고 싶었다. 이미 중공군이 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몰랐다. 전쟁이란 것이 참 그렀다. 이미 한차례 붙어서 그리 다 죽었는데 정보가 어두워 중군군이 잠깐 나왔다 가버린 존재로 알았다. 그러니 그 주민들이 남쪽으로 피난할 수 있는 기회를 막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바로 진격하자마자 중공군이 또 동서남북에서 나타나 우린 대부분의 전우를 잃고 각자도생으로 살아나야 했다.
"구하리에서 중대장의 독전으로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한석태 참전용사(제1-15연대-1대대) : 고랑포에서 38선을 돌파하여 10월 11~17어간 우리는 구화리-시변리-율리로 진격전을 수행하는과정에 구화리에서 북한군 1개 대대의 저항으로 진출이 저지되었다.
중대장의 물러나지 못하도록 독전을 하면서 우리는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평양으로 빨리 가려는 경쟁심에 시체를 수습하지않고 바로 진격해 갔다.
"사실 그 많은 참전용사님들의 증언을 청취하는 과정에 서부지역 참전 부대인 제1,6,7,8사단의 용사님이 너무 안계셨다. 물론 다음 파트에서 몇분이 더 소개되겠지만 주로 금화와 평강등 철의 삼각지대에 관련된 참전용님이 많으셨다."
4. 동북부지역 진격전
백두산
청진
중강진 적
삼지연
신갈파진 혜산진
백암 적
삼수 국3-23연
적 미17연 적
미32연 갑산 국3-22연 수도사 길주
적
적 풍산 길주
미17연 국3-23연
신흥리 부전호 황수원호 내중리저수지 성진 적 ↘ ●수도-18연
장진호 부전 불개미재 후치령 단천
↗ 수도사
백암산 부전령 미31연 ↑
1740m ↑ ↗ 미7사 이원
고토리 ●제1연대 ●제1기갑연대
미7해병 ↗
황초령 신흥 북청
적
↗
●제18-1대대 ●제18연대(-)
오로리 신포
●제1연대 ↗
흥원
●제1기갑
국3-26연 함흥
●제18연대 ●제1연대
함주 흥남
정평
●수도사 영흥
고원
원산
가. 수도사단의 영흥-함흥 진격전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10월 13일 제3사단은 고원 및 원산 부근의 경비임무을 부여하여 미 제10군단의 원산상륙을 엄호하게 하였고, 수도사단을 단독으로 북쪽으로 이동 진격시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10월 17일 13:00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제1연대는 흥남을 공격하고, 제18연대는 함흥을 공격하며 제1기갑연대는 사단 예비로 임무를 수행하도록 명령하였다.
함흥 공격명령을 받은 제18연대장 임충식 대령은 10월 16일 06:30분 제2대대가 차량으로 영흥을 출발하여 정평으로 이동하였고, 제1연대는 고원으로부터 영흥 경유, 정평을 확보하고 이날 15:00시에 신흥리를 경유, 흥남을 향하여 공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1기갑연대는 5일간의 원산 경비임무를 끝마치고 함흥과 흥남지역에 전력을 집결하기 위해 영흥으로 부대이동을 끝내고 부대 정비를 하였다.
영흥에 설치된 사단사령부는 10월 17일 10:00시까지 함흥과 흥남을 점령하도록 하고, 제18연대를 함흥 정면으로, 제1연대를 흥남 점령 후 그 일부가 함흥으로 우회하는 양익동시공격전법으로 포위하기로 하였다. 제1기갑연대는 예비로 하였다.
이에 따라 10월 17일 05:00시를 기해 공격을 시작하여 11:30분에 함흥을 점령하였다. 계속 잔적을 소탕하면서 16:00시에 함흥 북쪽 감제고지인 반룡산을 점령하여 사주경계를 강화하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외치는 함흥 시민~~!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사항은 제18연대가 함흥 남쪽 4km까지 진격하고 있을 때, 함흥시에 있던 우익지하조직(자치대원)이 봉기하여 시내에서 유동하던 적과 육박전을 전개하는 한편, 군청을 위시하여 시내 여소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그동안 공산학정에 대한 분노가 일시에 폭발하여 터질 듯한 목소리로 '구 애국가를 높이 부르기도 하였으며, 이와 함께 거의 맨손으로 적 진영을 찾아 격멸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사복을 입은 의거학생들이 적과 치열한 총격전을 전개하고, 시내 주변의 파괴된 교량을 복구하는데 빗발치는 총탄에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나와 함께 복구하였다.
한편 제1연대는 10월 17일 06:00시에 운남리를 출발하여 함흥을 공격하는 제18연대와 호응하여 10:00시에 흥남에 돌입하여 점령하였다.
나. 수도사단의 신흥-북청 진격전
함흥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후퇴한 북한군은 제42사단 제249연대의 약 6,000명과 제588포병대대의 포 3문, 전차 17대를 이끌면서 10월 18일에 오노리를 경유, 장진호 방면으로 퇴각하고 있었으며, 제588연대 일부와 마리훈련소 약 6,000명은 오노리에서 신흥 경유 퐁산방면으로 철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흥남 동북방에 있던 제598부대는 흥원 경유 나남 방면으로, 그리고 흥원에 주둔고 있던 제10여단은 갑산 방면으로, 신포 249여단은 혜산진 방면으로 각각 철수하고, 그 일부는 이원을 경유, 갑산으로 후퇴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따라 수도사단은 제18연대를 장진 및 신흥으로 공격하게 하고, 제1연대와 제1기갑연대를 흥남에서 흥원으로 공격하게 하였다. 또한 10월 18일 15:00시에 김백일 군단장 등이 참석한 함흥 입성식이 있었다.
"잊어서는 안되는 비극의 현장"
지금 우리에게도 전쟁 당시에 있었던 보도연맹 등의 무차별적인 민간인 피해사건에 대한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진상조사 결과를 통하여 많은 것들이 들어나고 있다.
하지만 아쉬움은 북한군이 진주하여 저지른 악행은 낱낱이 밝히지않고 주로 국군과 경찰에 의한 사건위주로 발굴과 결과 발표를 하여 어떻게 보면 아직도 그 "좌와 우"라는 극한 대립을 부추히는 모습이 보여 안타깝기만 하다.
여기 소개되는 내용은 바로 함흥에서만 있었던 비참한, 극악무도한 만행을 기록함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의 표리부동한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북한군은 함흥을 철수하면서 약 12,000여 명의 양민을 학살하였다. 그들은 양민을 학살하는데 있어서 장작으로 때려 죽이거나, 우물 속으로 밀어넣고 돌로서 압살하거나, 또 손발을 묶고 등뒤에 무거운 돌을 맨 다음 바다에 수장하는 등, 또 방공호나 지하실에 감금한 채 폭파한 다음 문을 봉쇄해 버리거나, 심지어는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해 버리는 등 천인공노할 온갖 수단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이미 원산진격시 과수원에 죽어있던 수백명의 양민학살 현장을 수도사단 제18연대 수색대원이던 전기풍 참전용사님의 증언을 통하여 알아보았지만 여기 몇가지를 더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함흥인민교화소(형무소)에서 700여 명, 함흥충령탑 지하실에서 200여 명, 함흥정치보위부 지하실에 300여 명, 함흥 북쪽 덕산 니켈광산에서 6,000여 명, 함흥 뒤산 반용산 4km에 달하는 방공호에 수천 명이 학살되어 그 숫자가 12,000여 명이다"
수도사단 제18연대는 함흥 점령에 이어 신흥을 20일에 점형하고 공격 개시 사흘째인 10월 21일에는 제1대대가 마전동에서 장진호 진격준비를 제2대대는 신흥 북쪽에서 신풍을 향해 공격중이였다.
수도사단 제1연대는 흥남에서 부대정비를 완료하고 흥원을 점령할 목적으로 10월 18일 15:00시에 흥남을 출발하여 흥원으로 진격하고 사단사령부와 기갑연대는 함흥으로 이동하였다.
수도사단장은 계속하여 제18연대로 장진-부전호 방면으로 적을 추격케 하고, 제1연대를 북청까지 진격한 다음, 풍산 방면으로 진격토록 하고, 단천-성진가도는 제1기갑연대가 추격하도록 하였다.
다.수도사단의 풍산-성진 진격전('50. 10. 23~30)
10월 하순에 접어든 이 무렵,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한랭한 고기압으로 기온은 점차 내려가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산악지역 공격작전은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10월 28일까지 함남의 주요거점을 점령하게 되고, 특히 제18연대가 개마고원지대에, 제1연대가 함경산맥에, 그리고 제1기갑연대가 마천령산맥에 각각 올라서게 되자 한.만 국경까지의 진격이 눈앞에 다가오게 되어 장병들의 사기는 고조되었다.
10월 29일 적 상황은 제18연대 정면인 부전호 남단에 증강된 1개 연대 규모의 병력과 중공군 약 2개 연대병력이 반격을 기도하고 있었고, 제1연대 정면의 적은 풍산에서 삼수 방면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당시 유엔군은 미 제7사단이 이원에 상륙하여 동 사단 제17연대가 상륙 즉시 풍산으로 기동, 혜산진 공격을 위해 험한 협곡을 따라 진출하고 있었다.
(1) 제18연대의 부전호 공격
함흥 북방 신흥에서 추격전을 전개하고 있던 제18연대는 10월 25일 연대지휘소를 오노리 남쪽 장흥에서 신흥으로 약진시키고, 마전동 부근에서 제3사단 제26연대와 진지를 교대한 제1대대는 다시 오노리를 경유, 신풍으로 진출하였고, 제2대대는 경흥에서 부전호 방면의 공격을 준비하고, 제3대대는 10월 25일 신흥으로 진출했다.
10월 26일, 연대지휘소는 신풍에 설치하고 황수원호 방면으로 진격하기 위해 화접치(불거미재) 공격을 시작했다. 화접치는 1,000~1,500m의 고원지대로 연대는 부전호 방향의 백암산-부전령 부근에 제2대대를 공격시킨 것에 비해 이 화접치 공격은 제3대대로 공격하여 돌파하게 되었다. 제3대대는 화접치를 돌파한 후 그 북쪽 수상리까지 진출한 후 다시 계속 평산리를 진출하고, 제2대대는 부전호 방면으로 진격하여 백암산-부전령(신흥-부전호 중간)가지 진출했으며 연대는 수상리로 약진하였다.
10월 28일, 제3대대는 수상리 북쪽으로, 제2대대는 진지는 1,740고지(백암산)의 적을 격퇴하고 점령하였다. 이때 전면인 원풍리에 북한군 약 500명과 중공군 전초부대 약 500명이 출현하여 최초로 중공군과 접전하게 되었다.
이때 제1대대가 부전호 남쪽 퇴수동과 백암산(1,740m) 및 부전령 북쪽 일대에서 계속 적과 대치상태로 교전중이고, 제3대대는 화접치 북쪽인 수상리 북쪽에서 적을 추격하고 있었다.
(2) 제1연대의 풍산 공격
북청까지 진격하였던 제1연대는 북청에서 정북방향인 후치령-황수원호-풍산을 점령하기 위해 10월 22일 그 진격방향을 동해안 연도가 아니라 풍산방향의 산악 험로를 따라 진격하게 되었다.
제1연대는 사단 명에 따라 10월 24일 황수원리-풍산을 거쳐 홍군 제1발전소를 점령할 목적으로 진격하게 되는데, 이때 적은 북청군과 풍산군의 경계인 후치령(1,335m)의 험한 애로지역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10월 27일부터 공격을 개시한 제1연대는 2일만에 제1, 2대대의 협동작전으로 이 지역을 완전히 확보하고 황수원리까지 점령하였다. 이어 풍산을 점령한 연대는 풍산-홍군을 점령하고 있다가 미 제7사단의 이원 상륙으로 전투 지경선이 변경되어 혜산진 방면의 진격임무를 미군에게 인계하고 연대는 동해안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단천으로 기동하다가 고성까지 진출하였다.
(3) 수도사단(-2)의 성진 공격
제1기갑연대는 홍원에서 신포를 경유, 북청으로 진격하고 있었는데 제1연대가 풍산 방면으로 진격하게 됨에 따라 제1기갑연대는 동해안 연도를 단독으로 진격하게 되었다.
연대는 10월 23일 12:00시까지 신북청에 진격하였고, 사단 사령부가 이날 북청에 설치되었다.
10월 24일 연대장 백남권 대령은 부사단장으로 전임되고 그 후임에 부연장 김동수 중령이 연대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10월 25일 19:00시에 단천을 완전히 점령하였고, 10월 26일 성진을 향해 공격을 시작하였다. 성진-길주방향으로 퇴각하던 적2개 대대규모가 단천-성진 중간의 천연적 요충지인 덕산리 마천령 중턱에서 포진지를 구축하고 기갑연대의 진격을 저지하려 하였다.
10월 27일 17:00시에 성진을 굽어보는 마천령 최고능선(873m)을 점령하고, 연대 지휘소도 마천령 입구의 두무동에 약진하였다. 연대는 10월 28일 미명을 기해 성지늘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마천령에서 퇴각한 적이 성진에 주둔하고 있던 적 제507부대의 주력과 합류하여 서북방 학성동 고지 부근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기갑연대장 김동수 중령은 즉시 제3대대를 좌로, 제1대대를 우로 공격하여 성진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제1대대가 마천령 875고지에서 04:00시에 출발했으나 적이 고지 하단 부근에 지뢰매설하는 것이 발견되어 전투가 벌어지면서 18:00시에 시 서북쪽 고지를 점령하고 야간 사주경계로 돌입하였다.
10월 29일 , 04:00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09:00시에 성진시-학성동- 서북쪽 외곾의 적 주력을 완전히 격멸하게 되었다. 기갑연대의 전과와 피해는 적 사살 190명, 포로 72명인 반면 전사 1명 부상 4명이었다.
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10월 30일 전방지휘소인 단천에서 미 제10군단의 장진호 및 풍산 지역 전투참가로 인한 전선 정리에 임하고 있었는데, 제18연대는 부전호-수상리 일대에서 함흥 북쪽 서양리로 이동시켜 길주-청진 방면으로 추격케 하고, 제1연대는 풍산에서 단천으로, 제1기갑연대는 성진 점령이 후 계속 길주 방향으로 추격시킬 계획이었다.
이 무렵 제18연대는 부전호 남단과 화접치 북쪽 수상리 일대에서 진지를 강화하고 있었으며, 제1연대는 이날 고성에서 단촌으로, 제1기갑연대는 성진 북쪽 3KM지점의 학성동 부근에서 진지를 점령하고 다음 작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전투결과 수도사단은 10월 16일 정평 공격부터 함경남도 일대의 진격은 길주-명천 등지를 공격하기 우해 10월 31일 제1연대는 풍산에서 단천으로 이동하였고, 제18연대는 수상리에서 서양리로 이동할 준비를 갖추게 되고, 제1기갑연대는 성진을 점령한 다음 그 북쪽 학성동까지 진격하여 사단에서 최전방에서 차기 작전을 위한 준비를 하게 되는데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번개부대"라 칭했다. 진격속도가 빨라 미 제7사단 전술 항공통제반이 해상에서 통제하고 있었다.
결국 수도사단은 제18연대가 장진호 방향으로 진출하는 미 제1해병사단에 전술지역을 인계하고, 제1연대는 풍산-혜산진 방향으로 진출하는, 이원에 상륙한 미 제7사단에 전술지역을 인계하고, 사단은 동해가도를 따라 두만강까지 진격하기 위한 전력 집결의 일단이었다.
다. 원산지역 후방작전('50. 10. 16~26)
(1) 개 요
제3사단은 10월 8일 이후 수도사단과의 긴밀한 협동작전을 전개하여 10월 10일에는 원선 서남쪽에 이슨ㄴ 적의 저항선을 돌파하고 원산시가지를 완전히 점령한 다음, 10월 15일에는 소전반도-영흥-고원-마전ㄹ리-안변을 연결하는 원산 서북방의 외곾선을 확보하고 지역내 북한군 잔류부대를 섬멸하였다.
그 후 10월 26일 원산에 상륙한 미 제1해병사단에 원산지역 방어임무를 인계하고 함흥으로 주력을 이동시켜 연포비행장-흥남-흥원-신포 일대까지 병력을 분산배치하여 해안선 일대를 방어하다가 미 제3, 제7사단이 각각 원산 및 이원에 상륙하자 함흥지역 후방지역 작전을 끝내고 흥원-신포-신북청으로 이동, 배치 하였다.
이때 북한군은 원산에서 저항한 제5사단과 42사단, 제12사단 및 원산 경비여단 등의 도합 20,000여 명선으로 두 노선을 따라 퇴각하였다. 곧 적은 주력을 정평-지경리 등지에 강력 배치하여, 아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고, 일부는 평원가도를 따라 후퇴하면서 마식령-양덕 사이에서 아군의 평원선 진격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또한 낙동강선에서 후퇴하지 못한 패잔병들로 구성된 유격대와 패잔집단은 대관령-단발령-마식령을 잇는 태백산맥과 마식령산맥 등 산악지대를 근거로 강릉-주문진-고성-고저(통천)-마전리 등, 아군의 주요 후방 지역ㅇ 침투하여 후방교란과 보급로 차단을 감행하려 하였다.
국군 제3사단은 수도사단과 원산지역 일대의 적을 섬멸하고, 10월 15ㅇㄹ에 제1, 2대대는 원산부근과 안변을 경계하고, 제3대대는 덕원-양덕간의 마식령으로 이동하였다. 글고 제26연대는 고원에 집결하여 전탄강 일대의 방어선을 확보하였다.
한편 수도사단은 제18연대 선두로 함흥 및 흥남을 목표로 진격하여 영흥을 경유, 정평 남쪽으로 금진강선을 돌파하고 있었다.
(2) 전투경과
제1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제3사단은 원산과 그 부근일대를 경계하는 동시에 미 제1군단의 원산상륙을 지원하고, 수도사단은 영흥-정평-함흥 및 파춘장-흥남 축선을 따라 진격하여 적을 격멸하라고 명령하였다.
국군 제3사단은 10월 16일 원산지역의 경계 임무를 부여받고 원산을 중심으로 , 제22연대는 원산비행장-고저-안변지역에 중점을, 제23연대는 영흥만의 북안인 호도반도-수달리선과 평원가도상의 마전리선을 연결하는 원산항의 외곽선을 , 제26연대는 북측인 고원을 중심으로 문천-고원-영흥 지역을 경계함으로서 수도사단과 접촉을 유지하였다.
당시 육본은 10월 16일부로 제3군단과 제1유격단을 새로 창설하였으니, 총반격작전으로 신장된 보급로의 경계와 병참시설의 확보를 위하고 후방지역에 잔존하고 있는 북한군 잔당들을 토벌하기 위해 1950년 8월 27일 제11사단을 창설한데 이어, 10월 1일 대구에서 제5사단을 재편하여 이 양개 사단으로 이날 제3군단을 창설하였다. 동군단은 서울-춘천-인제-양양선 이남의 잔당을 토벌하고 적 유격대를 분쇄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으며, 제1유격단을 창설(5개대대, 1.2.3.5.6대대)하여 그 이북지역의 적 융격대를 격멸하게 하였다.
(가) 원산 남부지역 전투
제22연대의 각 대대는 원산-원산비행장-고저-안변 지역에서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북한군은 강릉에 침입하여 주문진으로 북쪽으로 이동하던 적이 10월 17일 태백산맥으로 잠입하여 10월 18일, 대관령과 단발령에 출현하여, 단발령의 적은 외금강으로, 대관령의 적은 주문진으로 침입하게 되는데 그 숫자가 약 7,000명으로 추산되었다.
이에 따라 사단은 원산방어를 제23연대에 맡기고 제22연대가 10월 21일 08:00시에 원산-고저-외금강-온정가도를 따라 남으로 출동하여 온정리에 이르고 있을 때에 적은 10월 25일 고성남쪽에서 준동하던 2,000여명이 북쪽으로 이동 중이었고, 금강산에도 1,500명이 집결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대는 사단의 명으로 다시 원산의 평정임무 수행을 위해 제3대대만을 고저에 남기고 원산으로 이동하였다.
(나) 원산항 외곾지역 전투
제23연대 제1대대는 10월 16일 호도반도에 진출하여 미 제10군단의 원산항 소해작전을 방해하는 적을 섬멸하고, 제2대대와 연대본부는 어운리에 위치하고, 제3대대는 마전리에서 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10월 17일에는 국방장관 명으로 전 사병이 1계급 특진이 주어져다. 이 시간에 수도사단 제18연대는 함흥을, 제1연대는 흥남을 점령하였다.
그런데 10월 18일 영흥만에서 미 해군의 소해작업을 지원하던 우리 해군함정 2척이 기뢰에 접촉되어 한척은 기관이 정지되고 한척은 침몰되었다. 이에 따라 상륙일을 소해작업이 끝나는 날까지 연기를 건의하여 맥아더사령부의 승인을 득하였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으10월 20일 맥아더사령부로부터 동해북부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인수하여 미 해병 제1사단은 언산에 상륙하면 국군 제3사단으로부터 그 임무를 교대하며, 미 제3사단 상륙시 다시 교대하여 함흥으로 이동하여 장진호로 진출하도록 하고, 미 제7사단은 이원-북청-혜산진으로 진격하고, 미 제3사단은 상륙과 동시에 미 해병사단의 임무를 인수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1군단은 장진 방면 경계부대인 수도사단 제18연대를 제3사단과 교대시켜 수도사단 전병력으로 동해안 가도를 다라 성진으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다) 원산 북부지역 전투
국군 제3사단 제26연대는 고원일대를 경계중에, 강릉 일대에 약 3,000명의 적이 침입하여 주문진으로 북상하고, 문천 서쪽 15km지점에 있는 소두류산(558m)에도 900명이 출몰한다는 정보에 따라 10월 18일 제2대대가 소두류산일대에 출동하였으며 적은 2,300명으로 추산되고 산악지대로 들어가 철석산(소두류산 남쪽 6km)으로 도주하였다.
(라)함흥지역으로 이동
제3사단은 제26연대로 수도사단 제18연대의 임무를 교대하고 10월 24일 장진 방면의 발전소를 목표로 진격토록 하여 25일 상통리로 진출, 제18-1대대와 임무를 교대하였다.
미 제10군단은 10월 25일 원산항의 소해작업이 끝나는 즉시 흥남항을 소해키로 하였으며,이에 따라 국군 제3-23연대는 원산지역 평정업무를 제22연대에 인계하는 한편, 함흥으로 연대본부는 이동하였다.
제26연대는 수도사-제18연대와 교대하기위해 상통리에 진출중 상통리 북방 5km 지점인 연대봉698m)에 적 1개 대대 규모가 진지를 구축하고 장진발전소에 4,000여 명, 장진호 일대에 무려 50,000여 명의 적이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에 따라 제26연대는 10월 26일 05:00시에 연대봉을 공격했으나 진전을 보지못했다.
그러나 제26연대가 장진호 남쪽 제1, 제2발전소 부근에 도달했을 때에 1명의 포로를 생포하여 확인결과 중공군으로 확인되었고 바로 장진호에 있는 병력은 중공군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연의 일치로 바로 서부전선의 국군 제1사단의 중공군 포로 최초 획득과 날자가 같다.
제23연대는 제22연대에 원산 경계임무를 넘기고 함흥으로 이동하여 함흥과 연포비행장 경계임무를 수행하고 제22연대만이 원산에서 미 제10군단의 상륙을 기다라고 있었다.
이와 같이 한국군 제1군단의 유기적인 작전이 순조롭게 진전되고, 10월 26일 원산항에 미 제1해병사단이 입항하였다. 10월 16일 인천항을 출발하여 10월 19일 영흥만에 도달하여 소해작업의 지연으로 7일간을 해상에서 머물다 비로소 원산항에 입항하였다.
정평
영흥
●제26-2대대 ●제23-1대대
고원 호도반도
●제26-3대대
●제3사단 문천 영흥만 신도 여도
●제23-2대대
원산 갈마반도
●제22-2대대
안변
●제22-1대대
●제22-3대대
고저
신고산 통천
철령
황초령 황초령역 신흥리
장진 제1발전소
보장역
중흥장
삼기역
장진 제2발전소
화기촌역
연대봉(698m)▲
장진 제3발전소
상통리
오노리(영광)
↘
함흥
↘
흥남
바. 동북부지역에 관련된 유해매화장 보고서 현황 과 위패 및 묘비 현황
(1) 유해매화장 보고서 현황
이미 서북부지역에서 개요부분은 설명을 햇으니 참고 하기 바라며 다시한번 부연 설명하지만 여기에 열거되는 현황은 내가 2000년도에 당시 존재하던 영현중대에 보관중인 6.25전쟁 매화장 보고서를 분석한 현황이다. 매화장 보고서는 현지에서 상황이 긴박하여 유해를 수습하지 못하고 현지에 가매장한 기록으로 당시에 보관중인 현황이 약 9,000명 분이었다. 하지만 표기된 내용중에 매장위치를 기록하지 않은 것 등 해석이 곤란한 것들으 제외한 것이 약 8,400여 명 되었으며 이를 북한지역은 동부와 서부로 구분하여 중요 격전지와 연계하고 비교해 보면 많은 것이 의아한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주요 격전지 위주로 기록하겠다.
동북부지역 매화장 보고서 현황은 나남 1, 내중리저수지 1, 장진호 중화리 4, 장진 9, 장진 고토리 4, 오노리 5, 황초령 남쪽 보장역 9, 신흥 4, 흥남/함흥 8, 양덕 4, 원산 6 등이다.
그렇다면 여기 외에 피해사실이 없는 것일까?
물론 다음 중공군의 총공세시에 다시 부연 설명되겠지만 분명한 것은 자료가 거의 없다. 현재 남쪽 지역의 전투기록이나 전사자의 자료는 많이 발굴하여 자료가 존안되고 있지만 이건 정말 어쩔수 없는 현실에 생존해 계신 참전용사님들의 증언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다 전사한 용사님의 흔적은 솔직히 찾기어렵다. 슬픈 이야기같지만 지금 전사책은 산자의 증언에 방점을 찍었다.
"미군에 지원간 우리 용사님들의 기록이 없다"
특히 미 제7사단의 50%이상이 국군 카츄사로 채워져 출동했는데 그 전투의 핵인 신흥리에서의 피해현황이 없다. 다시말하면 미군으로부터 자료를 받지못한 것인지 우리는 전시에 미군측에 병력은 지원했으나 그런 문제는 당시로서는 어쩔수 없이 모르는체 지나쳤는지 분명 이 싯점에서는 한번쯤 집고 넘어가야하지 않을까 한다.
아니면 미군측과 협조하여 그 관련자료를 받아야지, 북한군이 미군에 넘겨주는 유해를 다시 미군으로부터 돌려받는 현재와 같은 모습은 슬프다.
내가 발굴단에 근무시에 이미 하와이 미군 유배발굴 감식단에 몇번의 출장을 통하여 미군에 보내진 장진호 지역의 유해(일명 K사업)가 미군측에 넘겨져 미군이 인류학적분석을 마치고 순차적으로 우리 용사님을 넌겨주고 있다. '20년도에 성남비행장으로 귀환한 유해가 바로 그 유해의 부분이다.
이제 우리가 직접적으로 참여하여 북으로부터 우리 용사님을 돌려받고, 유해를 발굴해야한다."
우리가 지금 추진중인 화살머리고지 전투 유해발굴처럼 북에서 숨져간 우리 용사님을 발굴하는 과업을 빨리 추진해야하지 않을까 한다. 나는 업무 수행중에 몇명의 북한 탈북자와 그리고 실제 탈북한 용사님을 만나 관련 사실을 들었다. 당시에 있었던 포로수용소 인근, 광업소 인근에는 웬만한 곳에 유해는 다 있다. 그런데 굶주린 동포들의 삶을 영위하는 차원에서 대부분 개간되고 훼손되어 더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본다.
실제 국방부에서 발행한 6.25전재 국군 유해소재 증언집('00.12. 6.25전재 50주년 기념사업단)자료에도 현재 경계를 이루고 있는 철의 삼각지대를 제외하면 북진작전시 모든 전투지역의 유해 미수집 현황이 없다.
(2)위패 및 묘비 현황
그럼 여기서 위패 및 묘비현황을 통하여 한번 비교해 보기로 한다.
현재 현충원이 보관중인 위패 132,864위('00년)중 전사지역을 확인 가능한 유해는 남한지역이 176개지역 14,91명이고, 북한지역은 138개 지역 4, 872명이다.
이중 북한지역 4,862명은 100위이상 매장된 지역이 6개지역에 1,946명, 99~50위 이상이 8개 지역에 485명, 49~30위 이상이 6개지역 285명, 30위 미만이 118개 지역 2,156명이다.
그러니 쉽게 이야기하면 발굴가능지역이 명기된 위패카드는 19,843위이지만 이중에 매화장 보고서가 있는 유해는 불과 50%인 8,000여 명이란 뜻이다.
그러나 내가 직접 영현중대의 매화장 보고서를 검토한 결과는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위패 카드 132, 864위 와는 전혀 다른 9,000여 위에 불과하였고 북한지역의 현황도 현재 철원이나 금화지역 위주로 되어 있어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북한 지역 위패 세부현황은 차후 확인 예정)
다음에 현재 현충원에 묘비로 세워진, 안장된 유해중 20명 이상 지역이 북한 동북부지역은 원산 82명, 길주 21명 정도다. 마찬가지로 장진호나 신흥리 등의 유해는 요즘 미군에서 들어온 몇 구를 제외하면 없다는 뜻이다.
사. 참전용사님 증언 기록(민간인 포함)
여기 처음부터 기록되는 내용은 모두가 내가 발굴작전을 수행하면서 기록을 남기기 위한 증언청취나 개인적인 친분관계에서 들은 내용으로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니 오해는 없기를 바란다.
참전용사 권오선(수도사-1연대본부 수송보좌관) : 제1연대가 함흥에서 흥원에 진입하던 '50. 10. 20일경 흥원읍 북동쪽 야산에 10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현장(사랑산 252m)을 목격했다. 본인은 당시 수송관 보좌관으로 임무수행중이었으며 흥원을 지나는데 길 옆 야산에 수많은 국군이 있었는데 수습하지 않고 그냥 통과했다. 나중에 들으니 후속하는 부대에서 인근에 매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사에 이 시기에 수도사단에서 100여 명의 희생이 발생한 전투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일까? 아마도 퇴각하는 북한군이 국군 포로를 데리고 가다 집단학살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인근 길 옆 야산에서 그냥 따발총으로 갈기고 그들은 패주했다고 봐야한다.
" 다이나미이트 폭발로 제18연대 5중대 다 죽었다"
민간인 제보자 정재선(당시 22세, 평양공대 2년. '00) : 나는 '50. 10월 말경 신흥 원평면 천불산리에서 국군 유해를 매장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
당시 제보자는 학생신분으로 총동원령이 내려 끌려가게 되었는데 응하지않고 고향인 함흥으로 내려와 있었다. '50. 10월 말경 명덕광산 위쪽에서 북한군과 국군이 교전이 있었는데 국군이 승리했다고 한다. 당시에 아버지가 광산에 근무했고 가족이 모두 광산근처에서 살았는데 하산하는 국군을 따라 함께 내려오는데 천불산역 근처에서 엄청난 량의 다이나마이트가 있었는데 이를 중대장이 폭파해 버리고 가야한다고 했다.
하지만 광부인 제보자의 아버지가 너무 많은 량이라 큰일난다고 만류하였으나 중대장은 무시해버리고 중대원을 2열 종대로 길 옆에 대기시켜 놓고 일부 인원을 데리고 가서 2M정도의 도하선에 불을 붙이고 모두 대피하라 하여 하천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데 폭발했다.
그러나 너무 폭발위력이 대단하여 중대원 대부분이 죽고 제보자 여동생도 죽었다. 그 후에 미군이 들어와 치료했으나 너무 부상정도가 심하여 치료가 어려웠고 미군 불도저로 느티나무 아래 개활지에 구덩이를 파고 본인 여동생까지 모두 묻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이나 피해기록이 남아있는 자료가 없다. 제보자 본인 여동생까지 죽었고 함께 매장됐다는 제보에서 있을 수 있는 내용이라본다. 전사적으로는 10월 20일 제18연대 제1대대는 오로리에서 장진호로 진격하고, 제2대대가 신흥을 점령후 부전호를 향해 진격하는 과정에 있었으니 아마도 제18-2대대가 아닌가 한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느티나무가 살아있고(느티나무 수명이 천년이 됨), 주변이 훼손되지않고 남아있기를 바랄뿐!
참전용사 서의문 (제3-23연대 제2대대.'00) : 나는 제3-23-2대대 8중대 1소대장이었다. '50. 10. 10일 원산을 점령한 후 연대는 원산 비행장을 경계하고 대대는 12일 마전리 계곡에서 경계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에 워낙 많은 피난민이 움직이고 또한 북한군 패잔병이 수없이 포로로 붙잡혀 처리할 방법이 묘하여 무기만 제외하고 웬만하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이것을 이용하여 북한군이 패잔병으로 위장하여 아군경계 위치에 접근하여 10월 15일 기습적으로 대대를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런데 마전리에 있던 의무대에 환자 10여 명이 남아있었는데 북한군이 모두 학살해버렸다. 하지만 어떻게 처리를 못하고 현장에 방치한 채 10월 16일 원산으로 복귀하였다고 한다.
위의 전사내용은 실제 전사내용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 이런 류의 피해가 발생하리라 보나. 하지만 우리 매화장보고서나 어디에도 기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