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계명
信天함석헌
바울 서간에 어디 그런 귀절이 있는 걸로 압니다만 누가 신앙에 대해 묻거든 미리 평상시에 알아 준비해 두었다가 잘 대답하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다 그렇게 할 수는 물론 없지만 적어도 믿는 일은 그렇습니다. 물론 잘 몰라도 적정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 믿으려 하는 사람을 위해서 한 말이지, 몇십 년을 믿으면서도 묻는 말에 대답도 못하는 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불교 같은 데서도 ‘초발심(初發心)’ 이라고, 처음에 믿자는 생각을 내면 그 내는 그 한 생각의 공덕만 해도 극악무도한 죄를 다 범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 용서받고 정토왕생(淨土往生)한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자고 한번 크게 결정을 내리는 용기를 내도록 하기 위해서 한 말이고, 한번 결심을 하면, 그 다음에는 믿음을 그 생활로 나타내야 할 것 아닙니까? 그 다음은 그러노라면 믿지 않을 때보다 의문이 자꾸 생길 게 아닙니까? 현실에 부대끼니까, 모르고서는 옳게 할 수가 없으니까, 거기 대해서는 내 무슨 판단이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히브리서」의 기자가 말하기를 “너가 믿는 걸로 하면 벌써 이제는 햇수가 많아져서 어른이 되어 굳은 음식을 먹어야 하겠는데 아직도 어린애처럼 젖을 먹어야 하니 되겠느냐” 즉 신앙의 초보 되는 것만을 자꾸 반복해서 되겠느냐 하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나라 기독 신자보고 바로 해주어야 할 말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열심으로 부르짖는데 갈 길을 몰라 하는 사회보고는 한마디의 대답이 없을 뿐 아니라, 여리고 길을 내려가던 제사장마냥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갑니다.
그러면 신앙의 초보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인해서 죄 사함을 얻는다고 하는 것과,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과 죽은 후에 부활한다, 그런 것들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기초되는 초보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를 이 말에 비추어보면 아직도 초보적인 상태라고 해야겠습니다. 1세기나 됐으니까 나이로 한다면 어른인데, 아직도 굳은 음식을 못 먹고 젖만 빨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굳은 음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히브리서」5장 14절에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성숙한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무슨 문제에 닥칠 때에 옳고 그르고를 판단할 줄 아는 일, 어느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어느 것이 사탄의 일인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저 쿵덕쿵덕하는 ‘굿’ 구경을 가서 저도 모르게 으쓱으쓱 춤을 추며 구경을 하다가 다 끝난 후에 떡이나 먹는 놀음이 아닙니다. 선과 악이 싸우는 이 역사의 싸움터에서 그리스도 편에 서서 생명을 걸고 싸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믿는다면서 하나님의 맨 백성이라 자랑은 하면서 그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한테 책망으로 하게 한 말입니다. 그건 언제고 들어맞는 말입니다. 오늘도 그대로입니다.
믿는 거야 하나님이 계신다든지, 인간은 죄인이라든지, 죄 사함을 얻어야 된다든지 모두 물론 중대한 것이지만, 그것을 안다고 그리스도 사람은 아닙니다. 그것으로 악을 이기지는 못합니다. 판단이 나와야 하겠는데, 십자가를 바로 믿었다면 자연히 그 판단할 실력이 붙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못하니까 이제 그런 책망이 나온 것입니다. 종교라면 그저 “구원 얻는다” 그런 말에만 쓸려서, 죽지 않고 산다니까 그저 좋아서, 값없이 준다니까 달려갈 줄만 아는 것은 아직도 욕심만이고 도덕의식은 없는 어린애 같은 심리지, 인생의 의무와 역사의 뜻을 아는 장성한 사람은 못됩니다. 근본 되는 원리를 말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체험되어 생활화되지 못한 원리는 마치 소화되지 못한 영양가 높은 음식같이 많이 먹었으면 먹었을수록 늘 해됨이 크고, 심하면 죽습니다.
이번에 강릉엘 가서 집회를 하면서, 본래 갈 때부터 마음에 걸린 것이 준비가 없이 간 것입니다. 퀘이커들은 본래 준비하지 말라 그러지요. 예배를 드리러 가면 가서 무엇을 말할까 미리 준비를 하고 가질 말라고 합니다. 좋은 말이에요. 그렇게 의식적으로 하지 않고 텅 빈 마음으로 가야만 속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생각을 해서 하면 하나의 지식은 될는지 모르지만, 그 우리가 예배시간에 겨누는 것에는 이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을 비워서만 될 수 있습니다. 말 준비를 하기 보다는 속을 비우기를 힘쓰고 있노라면 어느새 속이 밝아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밝아지는 그것은 알기 쉽게 말하면 위에서 혹은 속에서 오는 지혜니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까, 하나님의 계시라고 할까, 그런 것이 우리에게 사리(事理)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 옳고 그르고를 아는 그런 능력이 자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준비 아니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수양회라 한다면 그저 남들도 하니까 나도 하는, 그저 가면 어떻게나 되겠지 그런 것이어서는 될 수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정성을 드려야 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준비를 못한 것이 내 잘못입니다. 일 년 전부터는 몰라도 적어도 몇 달 전부터는 마음을 거기 쓰고 연구하여 계획을 세웠어야 할 것인데 그것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맘에 많이 걸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 어떻게 돼서 강사로 오시기로 했던 분이, 그것도 한번만이 아니고 두 번 세 번 우리가 알아보았는데 염려없이 오실 것같이 됐던건데, 급기야 시일의 여유가 다 없어진 다음에 못 오신다고 그러니까 좀 어려웠습니다. 그 마음에, 그러니까 그거는 뭐 그 사람이 못 오는 것은 그 사람의 일이니까 다시 더 말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로서 그걸 당할 때에는 거기 대해서 대답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남은 몰라도 나로선 그럴 때에 당황해서는 못쓰는 건데, 첨에는 좀 난처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후에 내 맘에 얻은 대답은 “그러니까 그거는 하나님이 우리더러, 누가 와서 말해줄 것을 기대하지 말고 너희가 해봐” 하는 것 아니냐 하고 생각이 됐습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는 “그럼 네가 해봐”로 들렸습니다.
이것을 우연이라면 우연이라고 그럴 수 있지요만,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 우연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당해진 것은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주시는 데는 좋은 걸로 내게 주시는 것도 있고, 문제를 제시해서 우리를 테스트를 해보시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나쁜 의미의 테스트가 아니라 우리 실력이 얼마나 한가를 보시느라고, 그래서 더 길러주시기 위해서 하시는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피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진작 준비를 할 수도 없고, 이럭저럭 꿰맬까 하는 생각은 물론 없었고, 그저 있는대로 그럼 당한 문제에 대답을 해봐야지, 그러고 갔습니다.
그래서 갔는데 그분이 특히 「요한복음」을 연구하는 분이라고 그래서 나도 또 평소에도「요한복음」을 많이 읽기 때문에 그럼 이번에 한 번 더 깊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까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고 가서 3일 동안 말을 했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는 이번에 생각하는 중에 중요하다고 느꼈던 것을 말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퀘이커라고 하지만 퀘이커는 반드시 이 길로만 가야 한다든지 그런 건 아니지요. 다른 교파도 있을 수 있고 어느 길이든 관계없는 건데, 퀘이커들은 더구나 “우리 길만”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퀘이커는 퀘이커대로의 제 길이 있으니까, 그럼 그 길을 내가 왜 가느냐? 따라가는 그 의미가 무어냐? 감리교도 아니고, 장로교도 아니고, 천주교도 아니고 퀘이커인 데는 무슨 뜻이 있느냐? 이번에 하루 이틀 거기서 지내면서 느낀 것이 그것입니다. 내가 택해서 갔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갔다고 하여야 할 것인데, 과연 길은 좋은 길을 잡았다 하는 느낌입니다.
장로교를 그만둘 때에 내가 그만둔다고 무슨 뭐 교리적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일본 갔다가 우치무라 선생 모임에 가게 됐으니 그렇게 된 것이지, 무교회 신앙이란다고 무슨 장로교 신앙과 전혀 다른 그런 무엇이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우치무라 자신도 말했지만 “내 신앙은 아주 오래고 오랜 옛날부터 있는 신앙(古信仰)”이라고 그랬습니다. 정통이라면 참 정통적인 신앙이었습니다. 퀘이커 모임에 온 것도 미리 퀘이커를 알아서 이럴까 저럴까 생각을 해서 그 길로 간 그런 것도 아닙니다. 나의 저지른 잘못 때문에 나로선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갈 길이 막혀져서 신앙의 친구라는 사람들을 다시 내편에서 친구라고 말할 수가 없어졌는데 그때에 어떻게 돼서 퀘이커를 알게 돼서 그리로 가보았는데, 이제 생각하면 이 길이 참 좋은 길이다, 이겁니다.
왜 그러냐면 이번에 이「요한복음」을 다시 읽으면서 더욱 느낀 것이지만, 예수님의 전도방침이 변경이 됐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일반적으로 “우리가 각 촌에 다니며, 될 수 있는대로 널리 다니면서 이 도를 전파해야 된다”고 그러면서 아주 그 창창한 그런 앞길을 놓고 나섰습니다. 그 마음을 내가 도저히 추측하긴 어렵지만 소수의 갈릴리에서 난 무식한 사람들은 그래도 다 무엇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요한복음」에서는 그걸 잘 알아볼 수 있습니다. 벳세다에서 그 소수의 사람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무엇을 찾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다나엘 같은 사람으로 대표되는, 베드로, 요한, 안드레 등등 입니다. “저 사람이 정말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사람에겐 거짓이 없다.” 그러니까 뭘 확실히 내용을 풍부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진지하게 찾는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그걸 보시고 좋아서, 거기다 큰 기대를 아마 미리 거셨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외양으로, 경치로 봐도 갈릴리 그 부근은 예루살렘보다 좋아요. 예루살렘은 푸른 걸 볼 수가 없지요. 사방이 어디를 봐도 다 돌멩이고 그런데, 갈릴리는 참 푸른 지대입니다. 그 푸른 갈릴리에서 ‘찾는 푸른 마음’을 가진 청년들을 모아가지고 마을 마을을 찾아다니며 전도를 시작하던 시대는 그야말로 참 창창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올라오면서 형편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도 처음에는 하늘나라가 참 쉽게 실현이 되는 걸로 그렇게 믿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 말씀 가운데도 “여기 섰는 사람들 중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 하늘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걸 볼 사람도 있을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해서 보면 하늘나라는 내적인 속에 있는 나라지, 바깥에 오는 기적적인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점이 아주 주의할 만한 것이라고 나는 자꾸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무리 내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아주 쉽게 확신을 가지고 “나와 같이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죽기 전에 하늘나라가 임하는 걸 볼거라”고 그러는 걸 보면, 앞길을 아주 밝게 생각을 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몇 차례 올라가면서 형편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전도방침도 달라졌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서 다시 갈릴리로, 요단 강 건너 편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으로 다니면서 제자들을 데리고 특별훈련을 하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에는 물론 생각도 많이 하시고 기도도 많이 하셨을 것입니다. 그때의 그 심경은 알 수가 없지요. 그것은 영원한 비밀이지요. 비밀이란 무슨 우리에게 감추기 위해서 비밀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그걸 말씀하지 않으셨으니, 또 누가 감히 추측할 것도 아니니까 비밀이라면 비밀이지요.
다만 그「히브리서」의 기자가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해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시고 간구하셨다”고 했으며.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셨다”고 했습니다(「히브리서」, 5장 7~8절). 그거는 출처가 어디인지 모르지만, 나는 본래 수십 년 전부터 그것을 읽고 아주 굉장히 놀라고 감사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쩌면 이런 말을 썼을까? 만일 이런 문구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예수라는 이를 기성품으로,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적적인 존재로만 알았을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는 나는 예수에게 참 가까이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요한복음」에도 “하나님을 미리 본 사람은 없었고 거기 본래 있던 데서 내려오신 이들밖에는 본 사람이 없다”고 했으니 하늘에서 오신 분인 것은 의심이 없지만, 그렇게 하는 말은 결코 정말 현실적으로 기적이 일어나 예수께서 벼락같이 떨어져왔다는 그런 말은 아닐 겁니다. 그게 다 우리의 속이 열려서 예수를 알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하늘에서 왔다는 말만 가지고는 예루살렘을 버리고 가이샤라로 내려가는 예수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히브리서」의 말을 보고서야 그때의 예수의 심경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전도방침이 이제 변경이 됐습니다. 그것은 내게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졌다고 해도 말이 되지 않고 처음에 잘못 생각했다고 해도 말이 안됩니다. 「히브리서」를 다시 읽고「요한복음」을 다시 씹어서만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요한복음」13장 이하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 성경 귀절들이야 전에도 여러 번 보고 생각도 했다면 늘 해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특별히 깊이 느끼게 됐다는 것은 또 다른 한 가지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민주주의 싸움에서 겪어본 실패의 쓴 잔입니다. 본래 성경의 이해와 체험은 서로 비례해 깊어가는 것입니다. 왜 그 말씀이 내 맘에 자꾸 들어오느냐 그러면 우리 일이, 민주 싸움이 그렇게 됐습니다. 민주 싸움, 나는 그래도 생각을 좀 하노라고 했고, 그 다음엔 안박사가 또 생각을 깊이 하는 분이어서 안박사하고 둘이 앉으면 늘 그런 얘기가 많이 오고 갔습니다. 일이 쉽게 되는 거 아니라고, 열심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고, 싸우는 분들은 다 곧 아주 쉽게, 조금만 노력을 하면 박정권은 맥없이 물러가는 걸로, 그럴 때 우리는 늘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물론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늘나라 문제와 같이 생각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역사에서 오늘의 민주주의 문제는 상당히 큰 문제로, 누구나 다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어서 빨리 성취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그렇게 쉽게는 안된다고, 감정적으로 급하게 쉽게 기대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정권의 변동 같은 그런 얕은 문제가 아니고, 긴 과거로부터 병이 단단히 든 역사 악이며, 또 박정권이라고 하는 것도 근 20년 내려오는 동안에 벌써 뿌리가 내릴 대로 내려서 상당히 깊은 것이기 때문에 쉽겐 안 된다고 몇 번이고 경고했지만, 그래도 그것을 믿지 않고 데모만 좀 크게 하면 될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이런 타격을 입은 것입니다.
이제 와서 보면 우리 생각이 옳았던 것을 알 수 있고, 이런 말을 하면 수긍을 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생각을 더 깊이 하지 않으면 안되는 때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예수에게서 배운 진리의 입장에서 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 모양으로 정치 본위, 경제 본위의 사회운동 정도만이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의 민주투쟁의 근본 결점은 아무런 원리의 주장이 없는 점입니다. 열심으로 사회비판을 하고 강한 투지를 가지기는 하지만, 그 인생관 역사관을 보면 신앙 없는 사람들과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는 이길 수도 없거니와 이겨도 무의미합니다. 우리는 또 다른 하나의 정권을 세우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하신 대로 인간을 근본적으로 건지자는 것이 우리 목적입니다. 간디가 영국의 지배세력과 싸우면서 사티아그라하를 내세운 것은 이 때문입니다. 사람 그 자체를 고치지 않고는 정권을 열 번 변경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내세우신 것입니다. 우리 목적은 그가 가르쳐주신 진리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의 가르침대로 하면 우리가 그의 참 제자가 될 것이고, 그러면 진리가 우리를 해방 시켜줄 것입니다.「요한복음」을 보노라면 그 점이 아주 분명해집니다. 그전에도, 이번에 강릉 가서도 나는 그 점을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퀘이커의 선 자리는 그런데 비추어본다면 상당히 중요한 자리에 있습니다. 수(數)야 적든지 많든지, 내가 알고서 택한 길이라고 감히 그럴 수는 없지만 참 바른 길에 섰습니다. 내가 그런 말을 하면 많은 젊은이들이 반대합니다. “문제가 이렇게 시급한데, 선생님, 언제까지 그렇게 평화주의적인 그런 걸로 보고 있으렵니까?” 그러지만, 그런 줄을 나도 다 알지만, 또 그런 비난이 올 줄도 알지만 나는 나대로의 보는 것이 있기 때문에 부끄럽지도 조금도 두렵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퀘이커의 택하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바깥으로 사건적으로 해결하자기보다는 ‘속의 분제’입니다. 예수께서 그러기 때문에 가이사라 빌립보로 내 려 가신 것입니다. 밖의 무슨 언론이니 인권이니 하는 것을 얻는 것보다는 장차 오는 것에 대해서 그 사람들 속에다 염려가 없으리만큼, 자기가 세상을 떠나게 될 때라도 마음 놓고 갈 수 있으리만큼 씨를 단단히 심어주고 가자는 것이 그 애타는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요한복음」13장 이하를 깊이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릴 것을 결심했고, 그러고는 그 씨를 제자들 가슴 속에 넣어주기 위해 전력을 다하신 것입니다.
그래 그 점을 특별히 알아야 하는데, 퀘이커로서 생각을 할 때는 더구나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다 각각 생각이 다르지만 퀘이커라는 사람들은 평화 증거 (Peace testimony)를 아주 큰 하나의 중심적인 명제로 생각을 합니다. 무슨 폭력적인 그런 걸로 일시에 해결을 하는 그런 걸 우리의 일로 생각할 수는 없고,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언제 가서 나타나든지 간에 근본악에 대한 싸움이니까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싸움을 싸우는 거라 그런다면, 당장 문제를 일반 혁명을 해서 시원한 세상을 보려고 하는 것보다는, 이 다음을 위해서 언제 가서 싹이 틀는지 언제 가서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겠는지 그것은 모르지만 그걸 위해서 두고두 고 깊이 준비해가는 이런 게 더 필요하다, 하는 생각을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퀘이커로서는 그걸 해야 한다 그 말입니다.
퀘이커도 처음에 싸울 때는 아주 낙관적으로 힘있게 했지요. 그랬는데 그후에 사회적으로 승인을 받고 나서 깊이 파고들기 시작한 것 같고, 그후 몇 해 전에 한동안 행동주의(actionism)가 나타나서 퀘이커가 앞장서서 해보기도 했지만, 그것도 불과 몇 해의 짧은 시간이었고 해놓은 결말로써도 뭐 그리 큰 결과를 본 것 없고, 그래서인지 그 열은 식어 버렸어요. 명년이면 또 대회가 모이겠는데, 그때면 또 어쩌겠는지, 퀘이커들은 상당히 생각하는 사람들이니까 무슨 문제가 나올는지 모르지만, 지난해에도 ‘변해가는 이 세계 속에 있어서의 퀘이커의 가는 길’ 이라고 그랬는데 거기도 무슨 명쾌하거나 힘있는 제시는 없었어요. 이번에도 또 기다려볼 일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의뢰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런 문제에서는 우리가 세계사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시점에 있는 거니까, 우리가 새 길을 열어봐야 합니다. 우리가 열기보다는 주어지는 새 길을 발견해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요 내부 핵심단체를 기르는 게 급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에 내 마음에 들어온 것이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은 옛날부터 있는 계명이지요. 그렇지만 또 새삼 주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그러시고 “너희가 서로 사랑해라” 그러셨습니다. 얼핏 듣기에는 그건 오해받기 쉬운 것인데, 너희 믿는 사람끼리만 특별히 사랑하라 그런 의미가 아니고, 그거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변함없는 그 의미 그 사랑이지만, 지금은 우선 문제가 이래서 당장 우리더러 세상을 대번에 밝히라고 하는 그거는 지금은 도저히 할 수가 없으니까, 그 가운데서 이 씨가 살아나려면 너희끼리 특별히, 이것은 신앙의 동지로 하늘나라의 말하자면 정예분자라고 할까, 좀 어폐 있는 말입니다만, 우리 자신들의 받은 이 일이 이다음을 위해서 외양으로보다 속으로 볼 때는 이게 도리어 더 확신이 가는 중대한 길이니까, 당장에 무슨 쉽게 결과를 거둔 다는 그것보다는 요것이 이다음을 위해서 혹은 십년 후 혹은 수백 년 후에 될는지도 몰라요, 아니 수천 년도 될는지도 모르지만, 이다음에 가서라도 “역시 이 길이 옳았다” 하는 그것을 증거를 할 수 있는 작업을 여기서 소수의 아주 소수에게 하는 말입니다.
세계에서 이게 가장 마이너리티(minority) 아니에요? 아주 소수 종교에요. 삼백 년 역사를 가졌으면서도 이제 수가 이십만 밖에 없고, 그것도 해마다 늘진 못하고 줄어간다고 하는 거요. 최근은 모릅니다만, 지난번에 갔을 때만 들어도 역시 수가 늘진 못해서 그랬는데, 그런 데다가 몸을 담았으니까 이걸 우리끼리, 당파심에 그러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맡은 것이 중대하기 때문에, 어떡하면 요걸 순수하게 지켜 살릴 수 있을까, 씨라는 건 순수해야 되지요. 본래 가지고 있던 그 특징을 잃지 말도록 그것을 기르는 것이 긴요해요.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여러 번, 그건 아주 여러 번 강조하셨어요. “너희가 서로 사랑해라.” 외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이것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러고 제자들을 놓고 기도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보냄을 받을 때 그런 것 같이, “내가 이제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냅니다. 세상에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속으로 보내는 것 같다”고 그렇게 공관복음에도 그랬지만, 그렇게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하시기 때문에 아주 단단히 깊이 생각을 하고, 당장으로 보면 세상으론 자격이 신통할 것 없는 것 같은데 다만 한 가지는 이대로 참되게 믿어보자는 ‘믿어보자’는 마음 하나 있는걸 보고, 베드로 같은 사람 실수가 얼마나 있는걸 알지 않아요? 베드로만이오? 다 도망가고 의심하고 그러는 건데, 그래도 그 조그마한 공동체를 건지자고 하는, 이제 지나온 역사니까 그러지만 그렇게 해놨어도 내려오다 또 몇 날이 못가서 잘못되지 않아요? 공동체, 모처럼 생긴,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 자기가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으면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묶어놓은 건데, 그것이 초대 교회인데 그것도 그대로 가지 못하고 그만 깨어지고 말았지만, 그 속에 산진리가 있어서 지금까지 온 건데, 약하다면 참 약하지만 그 속에 즉지 않은 영악한 씨가 있습니다. 참처럼 작은 것이 없고 사랑처럼 약한 것이 없지만, 그 작고 약한 것이 이 사나운 세상 물결 속에 오늘도 살아오면서 세상을 건집니다.
지금은 예수께서 사셨던 그때보다도 몇 갑절 험하고 악한 시대입니다. 여기서 어떡하면 그 정신을 우리 소수 속에서 살려갈 수가 있을까,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 아닐까. 작은 일에 충성하라. 그러면 큰 것으로 맡겨주신다 한 말을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이 믿어야 하는 때입니다. 이것이 이번에 갔다 오면서 얻은 지극히 작은 씨알입니다.
1981.8.9 퀘이커서울모임 감화말씀(정리 조형균)
친우회보 1981. 가을호
저작집30; 15- 51
전집20; 19- 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