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주 텍스트
박지웅 시인
1969년 부산에서 태어났고, 오래된 한옥의 다락방에서 시를 읽고 쓰며 청년시절을 보냈다.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나왔다. 2004년 《시와사상》 신인상,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즐거운 제사」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너의 반은 꽃이다』(2007, 문학동네)와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2012, 문학동네)가 있고, 공저로 『흐느끼던 밤을 기억하네』 등이 있다. 어린이를 위한 책 『헤밍웨이에게 배우는 살아 있는 글쓰기』, 『모두가 꿈이로다』, 『꿀벌 마야의 모험』 등을 쓰거나 옮겼다. 제11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현재 도서출판 호미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
유랑의 풍습 / 박지웅
전생에서 내 가져온 재물인가
슬픔에게 바치는 서글픈 뇌물인가
한숨이여, 기억이 남긴 몹쓸 유산이여
무너진 흙더미 같구나, 내 불쌍한 행복아
내 생을 출발시킨 무관심한 봄은
어디로 갔는가, 가벼운 협박처럼 나를 쫓는
햇살 피해 나 울적한 그늘에 앉았네
가을은 계급장 떨어진 보병 같은 나무를
내 앞에 세워두고 또 가버리고
동의하지 않은 이 유랑에 대해
초췌한 철학은 한 번도 설명하지 못했네
나 공연히 일어나 이생으로 넘어왔네
나는 왜 나에게 죽음을 전수했는가
매미가 울면 나무는 절판된다 / 박지웅
붙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우는 것이다
숨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들키려고 우는 것이다
배짱 한번 두둑하다
아예 울음으로 동네 하나 통째 걸어 잠근다
저 생명을 능가할 것은 이 여름에 없다
도무지 없다
붙어서 읽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읽는 것이다
칠 년 만에 받은 목숨
매미는 그 목을 걸고 읽는 것이다
누가 이보다 더 뜨겁게 읽을 수 있으랴
매미가 울면 그 나무는 절판된다
말리지 마라
불씨 하나 나무에 떨어졌다
늑대의 발을 가졌다 / 박지웅
눈밭에 찍힌 손바닥이 늑대 발자국이다
나는 발 빠르게 손을 감춘다
손가락이 없으면 주먹도 없다 주먹이 없으니 팔을 뻗을 이유가 없다 한 팔로 싸우고 한 팔로 울었다 한 팔로 사랑을 붙들었다
내가 바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두 주먹 꼭 쥐고 이별해보는 것, 해바라기 꽃마다 뺨을 재어보는 것, 손가락 걸고 연포 바다를 걷는 것, 꽃물 든 손톱을 아껴서 깎는 것, 철봉에 매달려 흔들리는 것, 배트맨을 외치며 정의로운 소년으로 자라는 것
내 손가락은 너무 맑아서 보이지 않는다, 내 손가락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여기서 시는 끝이다, 앞발을 쿡쿡 찍으며 늑대의 발로 썼다
아래는 일기의 한 대목이다
옷소매로 앞발을 감춘 백일 사진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태웠다 뒤뜰로 가 간장 단지를 열고 손을 넣어보았다 손가락이 떠다니고 있었다, 고추였다, 뼈 없는
어미 자궁에 네 발의 총알로 박혀 있을 손가락들, 어미의 검은 우주를 떠돌고 있을 나의 소행성들, 언젠가는 무화과나무 위를 지나갈 것이다
손가락들이 유성처럼,
홍시 / 박지웅
웅아, 아버지 돌아가셨다
기차가 고향역 들어설 때 누이는 연하고 붉은 말을 전했네
얼마나 어루만졌을까 물렁물렁한 한마디
식구들 돌아가며 볼 비빈 따뜻하고 반질한 말
받쳐 든 손끝이 먼저 우는지 가늘게 떨렸네
우리 다 함께 살던 옛집 창호에 놀처럼 가라앉는 말
혀를 빼고 의자에 박혀 있다가 보았네
식구(食口)들 둘러앉아 꾸역꾸역 먹어치워야 할,
열리면서 익어버리는 부음의 열매
오로지 하늘 무너지는 순간 벼락처럼 열렸다가
우리가 발음하기 전에 이미 잠들어 있는 말 잠들었어도
어쩌자고 불씨처럼 안고 다니는 그 말
상업의 내력 / 박지웅
목련 하나에 장정 여섯이 붙었다
한번 긴 실랑이가 끝나고
목련도 담장에 기대 쉬고 있다
삽날이 뿌리 탁탁, 끊어 들어올 때도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의연함은 때때로 구타로 이어진다
그를 묶고 몇몇은 억센 힘으로 줄 당기고
한둘은 돌아가며 발길질한다
후두둑 후두둑, 생니 쏟으며 앞으로 기우는
저 목련은 봄날의 약사기도 했다
해마다 그가 내민 흰 약봉지 받아가던
봄을 앓는 자들은 새로운 북카페에 앉아
유리창 갈듯 쉽게 풍경을 갈아치우는
상업의 내력에 붉은 밑줄을 그을 것이다
풍경은 대부분 환경에 먹히고
먹이사슬의 최고 단계에는 이윤이 있다
장정들이 더러운 기분으로 목련을 밟는다
봄날에 때 아닌 눈사태 푹푹, 길이
끊어지고 있다
놋쇠황소 / 박지웅
놋그릇에 뼈다귀 하나 건져내
나는 구석구석 빠는 놈, 나는 허둥지둥
빠는 놈, 나는 침을 묻히는 놈
밥뚜껑에 쌓이는 뼈들
한때 소의 한 축이었으나 그림자도 없다
세상에 무덤덤한 일이 어디 있나
이 놋그릇이 소에게는 생지옥이다
옛 팔라리스왕은 나를 놋쇠황소에 집어넣고
배 밑에 장작을 때어 내 몸에 있는 춤을 모두 꺼내었다
훗날 왕도 형틀에 들어가 춤을 추었다
국물을 들이켜며, 뼈도 못 추린 이야기
국물도 없는 가난한 생을 떠올리다 문득
저세상의 바닥까지 깨끗이 비우는 게 산목숨이라니
그럴 줄 알았다 여기가 지옥이다
벽에 붙은 도가니탕 얼마 꼬리곰탕 얼마 수육 얼마
망자의 가격이 매겨진 비문을 훑으며
입을 벌린다, 아아 나는 나의 뱃속을 돌고 돌았구나
밥자리에 다소곳이 따라붙는 놋쇠그림자
오래전 나는
내가 살아있는 것에 반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