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 14:17 Let not then your good be evil spoken of: 18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meat and drink; but righteousness, and peace, and joy in the Holy Ghost. 19 For he that in these things serveth Christ is acceptable to God, and approved of men. 20 Let us therefore follow after the things which make for peace, and things wherewith one may edify another. Hast thou faith? 22 have it to thyself before God. Happy is he that condemneth not himself in that thing which he alloweth.23 And he that doubteth is damned if he eat, because he eateth not of faith: for whatsoever is not of faith is sin. 이 땅 삼차원 시공간에 살면서 더 높은 차원 곧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법을 묵상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서도 칭찬을 받는다. 의를 생각할 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는 자기가 확실히 알고 믿고 있는 것이 옳으니 상대방은 잘못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재판하는 자리에 앉아 정죄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령안에서 의를 행하면 평강이 있고 희락이 있다. 의를 행할 때 갈등이나 불화가 이는 것이 아니라 평화롭다(peace). 나아가 희락 곧 기쁨(joy)이 일어나야 하나님의 나라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는 무엇일까? 그리스도께서 그 피를 흘림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 주님은 세상이 잘못되었고 인류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악가운데 살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아셨다. 정죄하고 멸망시키시고 새롭게 인류를 창조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의 죄값을 대신 치뤄 주셨다. 그 결과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면서 지성소로 담대히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이로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는 어떤 이론과 노력으로 되는 의가 아니라 끊겼던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는 관계의 의다. 그런 의를 이 땅에 살면서 실천하는데 어찌 형제와 먹고 마시는 문제로 싸울 수 있겠는가? 오히려 형제들의 아픔을 대신 감당하면서 소원했던 관계가 회복되고 그 가운데 기쁨을 느끼는 일이 무수히 생겨나는 것이 우리의 의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주님이 승천하신 후 사도들은 그러한 의를 실천했다. 그러나 카타콤의 핍박과 환란이 사라지고 콘스탄티누스 2세가 교회를 국교화 하면서 어느덧 교회는 섬김의 자리를 걷어 차고 교황이라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의 자리에 앉아 관계의 의는 빛을 잃고 다시 율법과 권력의 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다. 이단으로 정죄하고 죽이고 그렇게 관계의 의를 잃고 율법의 의로 나아가면 하나님은 새로운 믿음의 사람을 택하여 그것을 무너트리고 관계의 의로 다시 회복시키셨다. 종교개혁은 개혁이 아니라 관계의 의에 대한 원형을 다시 찾는 운동이었다. 그들은 그 원형 곧 관계의 의를 찾아가는 과정속에 핍박과 박해가 있었지만 평강가운데 거했고 기쁨가운데 거했다. 그런데 그것이 그 당시만 그랬을까? 오늘날도 동일한 현상이 우리들 삶 주변에서 수없이 생기고 있다. 겸손하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겸손이다. 주 앞에 겸손하자! 존재의 의는 없다. 오직 주님께서 열어주신 관계의 의가 있고 그와 함께 평화와 기쁨이 상존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이것을 지키라 말씀하신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