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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응정(姜應貞)
[요약정보]
자(字) 공직(公直)
호(號) 중화재(中和齋)【補】(주1)
본인본관 진주(晉州)
거주지 은진(恩津)【補】(주2)
시대 조선 전기
활동분야 문신 > 문신
부 강의(姜毅)
[관련정보]
[생원시]성종(成宗)14년(1483)계묘(癸卯)식년시(式年試)[생원]2등(二等)14위(19/100)
1483년 2월 14일
강자어(姜子魚) 변린(變鱗) ? ~ ? 진주(晉州) 병과(丙科) 12위
강혼(姜渾) ? ~ ? 진주(晉州) 1등(一等) 4위
강준(姜濬) ? ~ ? 금천(衿川) 3등(三等) 4위
강이온(姜利溫) ? ~ ? 진주(晉州) 3등(三等) 29위
강혼(姜渾) 사호(士浩) 목계(木溪) ?~? 진주(晉州)1등(一等)1[장원(壯元)]위
강응정(姜應貞) 공직(公直) 중화재(中和齋) ?~? 진주(晉州) 2등(二等) 14위
강말손(姜末孫) ? ~ ? 진주(晉州) 3등(三等) 12위
강준(姜濬) ? ~ ? 금천(衿川) 3등(三等) 38위
강신효(姜藎孝) ? ~ ? 진주(晉州) 3등(三等) 67위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가족사항]
[부(父)]
성명 : 강의(姜毅)
품계 : 가선대부(嘉善大夫)
관서 : 검교 중추원부사(檢校中樞院副使)
[주 1] 호 : 『대동야승(大東野乘)』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을 참고하여 호를 추가.
[주 2] 거주지 : 『대동야승(大東野乘)』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상세내용]
강응정(姜應貞)에 대하여
생졸년 미상. 조선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 공직(公直), 호 중화재(中和齋).
부친은 첨지중추부사 강의(姜毅)이다.
은진에 살면서 효행으로 이름이 있었다.
1470년(성종1) 효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1483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유생으로 김용석(金用石)‧신종호(申從濩)‧박연(朴演)‧손효조(孫孝祖)‧정경조(鄭敬祖)‧권주(權柱)등과 함께 주자의 고사에 따라 향약을 만들고, 《소학》을 강론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소학계(小學契) 또는 효자계(孝子契)라 하였다.
부모의 병간호가 지극하였고, 죽은 뒤에는 여묘(廬墓)의 예를 다함으로써 고향에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은진 갈산사(葛山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成宗實錄, 燕山君日記, 海東名臣傳, 燃藜室記述, 國朝人物志,
秋江師友錄
[집필자]신해순(申解淳)
2005-11-30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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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3권, 1년(1470 경인/명성화(成化) 6년) 2월 7일(병진) 6번째기사
충청도관찰사 김양경과 경상도의 관찰사 윤자등이 도내의 열녀, 효자등을 아뢰다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김양경(金良璥)이 치계(馳啓)하기를,
“은진(恩津)사람 학생(學生)김계전(金繼田)의 처 민씨(閔氏)는 남편이 일찍 죽으니, 피눈물을 흘려 3년동안 여묘(廬墓)살이하여 소금과 채소를 먹지않고 애훼(哀毁)하는 것이 예에 넘쳤으며, 지금 11년이 되었는데도 소의(素衣),소식(素食)으로 술, 과실, 파, 마늘을 입에 넣지않고, 인하여 묘옆에 살고있으면서 조석전(朝夕奠)과 곡읍(哭泣)하여 슬퍼하는 것이 한결같이 초상(初喪)때와 같으니, 보는 사람이 슬피여기지않은 이가 없습니다.
같은 고을 사람 강응정(姜應貞)은 첨중추(檢中樞) 강의(姜毅)의 아들인데, 어미가 오랫동안 병을 앓으니, 강응정이 두어 달동안이나 옷에 띠를 풀지않고 밤이 새도록 자지않았습니다. 또 아비가 병이 위급해지니, 강응정은 분향하여 하늘에 빌면서 몸으로 대신하기를 구하였고, 똥을 가져다가 맛보아 병이 덜하고 더한 것을 점쳤으며, 부모가 죽자 5년동안이나 여묘(廬墓)살이하며 술, 과실, 소금, 채소를 먹지않았습니다.
문의(文義)사람 학생(學生)이귀화(李貴和)의 처 양씨(楊氏)는 남편이 일찍 죽으니, 집 북쪽에 장사하고 조석전(朝夕奠)을 반드시 친히 행하였으며, 복(服)을 마치자 아비가 개가시키려 하니, 양씨가 스스로 목매어 죽으려하므로, 아비가 두려워하여 그쳤으며, 매양 절일(節日)을 만나면 친히 묘(墓)에 제사하였는데, 늙고 병들어서 가지못하게 되자 목욕재계하고 묘를 향하여 절하였습니다.
같은 고을 사람 박씨(朴氏)는 그 남편이 죽으니, 3년동안을 여묘살이하고도 차마 떠나지 못하여 다시 1년을 살았으며, 드디어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매양 초하루, 보름에 반드시 친히 제사하여 지금 20여년이 되었는데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하였고,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윤자(尹慈)는 아뢰기를,
“예안(禮安)사람 수의교위(修義校尉)우석보(禹錫寶)는 어려서부터 효성으로 양친을 받들어 혼정신성(昏定晨省)을 폐하지 않고, 나가고 들어오면서 반드시 얼굴을 보여 고하고, 매양 식사에 반찬을 살피며 반드시 맛있는 것을 갖추었습니다. 아비가 죽으니, 홀로 묘옆에 살며 거적자리를 깔고 풀을 베개삼아 잠을 자면서 애통하고 훼척(毁瘠)하는 것이 지나치게 심하였으며, 조석으로 친히 밥을 지어 전(奠)을 드리고, 날마다 흙을 지고 돌을 메어다가 분역(墳域)을 영조(營造)하며 3년을 마쳤습니다. 또 어미가 죽으니, 우석보는 나이 이미 66세인데도 조석으로 또한 모두 몸소 밥을 지어 전(奠)드리면서 3년동안 한번도 집에 이르지않았는데, 향리 사람들이 칭송하여, ‘우석보는 고려[前朝]의 충신 우탁(禹倬)의 후손이니, 그 충효가 스스로 가법(家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칠원(漆原)사람 학생(學生)송한문(宋漢文)은 어미가 미친병을 얻었는데, 송한문이 스스로 손가락을 끊어서 가루를 만들어 술에 타서 드리니,
병이 마침내 나았습니다.
창녕(昌寧)사람 전군사(郡事)박주(朴胄)는 부모가 모두 늙었는데, 박주가 조석으로 곁을 떠나지않고 효성으로 봉양하는 것이 간곡하고 지극하였습니다. 아비가 죽으니, 3년동안 여묘(廬墓)살이하였는데, 어미가 죽어서도 또한 그와 같이 하였습니다. 상(喪)을 마치니, 매일 사당에 조석제를 행하면서 새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천신(薦新)하여 죽은 부모 섬기기를 산 부모같이하여 조금도 게을리함이 없었습니다.
김해(金海)사람 전사성(司成)권형(權衡)은 어려서부터 효행이 있었는데, 등제(登第)하여 헌납(獻納)이 되었으나, 부모가 모두 늙었으므로, 사직하고 돌아와 봉양하며 조석으로 곁을 떠나지않았습니다.
조정에서 불러서 초계군수(草溪郡守)를 제수하였으나, 벼슬에 있은 지 수년만에 또 사직하고 부모를 끝내 봉양하여 모두 80세가 되어서 죽었는데, 권형이 거상(居喪)하면서 지나치게 훼모(毁慕)하여 죽을 지경이 되니, 한결같이 향리(鄕里)에서 칭찬하며 경모하였습니다.
같은 고을[邑]사람 전주부(主簿)반석철(潘碩澈)은 효행이 있어서 부모가 죽으니, 친히 돌과 흙을 져다가 영장(營葬)하고, 묘옆에서 여묘(廬墓)살이하면서 슬픔과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상을 마치니, 매일 아침 사당에 참배하고, 출입할 때에 반드시 고(告)하고, 삭망(朔望)에 반드시 제사하며, 시물(時物)을 만나면 문득 천신(薦新)하였습니다.
동래(東萊)사람 김득인(金得仁)은 아비가 일찍 죽었는데, 효성을 다하여 어미를 섬기다가 어미가 죽으니, 3년동안 여묘살이하며 피눈물을 흘려 몹시 쇠약해졌습니다. 묘가 바다 어귀에 있는데, 마침 왜인(倭人)이 몰래 도둑질을 하여도 김득인이 오히려 묘곁을 떠나지않고 흙집속에 숨어서 조석전을 폐하지 않으니, 왜적 두어 사람이 와서 겁박(劫迫)하다가 김득인이 효성이 있는 것을 알고는 칭탄(稱歎)하고 가서 뒤에 쌀을 가지고 와서 주었습니다”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이것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상항(上項)의 민씨(閔氏)등은 소행이 탁이(卓異)하여 향리에서 칭찬하고 탄복하니, 마땅히 포상(褒賞)을 가하여 후래(後來)를 권하여야 합니다. 청컨대 아울러 정문(旌門), 복호(復戶)하고 임사(任使)할만한 사람은 이조(吏曹), 병조(兵曹)로 하여금 자급(資級)을 승진하여 녹용(錄用)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忠淸道觀察使金良璥馳啓: “恩津人學生金繼田妻閔氏, 夫早死, 泣血, 廬墓三年, 不食鹽菜, 哀毁踰禮, 至今十一年, 素衣、素食, 酒果、葱蒜亦不入口。 仍居墓側, 朝夕之奠, 哭泣之哀, 一如初喪, 見者無不哀之。 同縣人姜應貞, 檢中樞姜毅之子, 母久病, 應貞數月衣不解帶, 終夜不寐。 夕, 父病革, 應貞焚香禱天, 求以身代, 取糞嘗之, 以占差劇。 及父母歿, 廬墓五年, 不食酒果、鹽菜。 文義人學生李貴和妻楊氏, 夫早死, 葬于家北, 朝、夕奠必親行之。 服闋, 父將奪其志, 楊氏欲自縊, 父懼乃止。 每遇節日, 親祭于墓, 及老病, 不能往, 則齋沐, 向墓而拜。 同縣人朴氏, 其夫歿, 廬墓三年, 不忍去, 復居一年, 遂剃髮爲尼, 每朔望, 必親祭, 至今二十餘年, 不少懈。” 慶尙道觀察使尹慈啓: “禮安人修義校尉禹錫寶, 自幼, 孝奉兩親, 不廢定省, 出入必告面, 每食視饌, 必具甘旨。 父歿, 獨居墓側, 寢苫枕塊, 哀毁過甚。 朝、夕親炊爨以奠, 日負土擔石, 以營墳域, 終三年。 及母死, 錫寶年已六十六, 朝、夕之奠亦皆親執炊爨, 三年未嘗至其家, 鄕人稱之曰: ‘錫寶, 前朝忠臣禹倬之後, 其忠孝, 自有家法。’ 漆原人學生宋漢文, 母得狂疾, 漢文自斷手指爲末, 和酒以進, 病遂愈。 昌寧人前郡事朴冑, 父母俱老, 胄朝夕不離側, 孝養懇至。 父歿, 廬墓三年; 母死, 亦如之。 喪畢, 每於祠堂, 行朝夕祭, 有新物必薦, 事亡如生, 無少解怠。 金海人前司成權衡, 自少有孝行, 及登第爲獻納, 以父母俱老, 辭職歸養, 朝夕不離側, 必奉甘旨。 朝廷徵授草溪郡守, 居數年又辭, 終養父母, 皆以八十死。 衡居喪, 過毁濱死, 一鄕稱慕。 同邑人前主簿潘碩澈, 有孝行, 父母歿, 親負石擔土以營葬, 廬于墓側, 盡其哀誠。 喪畢, 每朝謁祠堂, 出入必告, 朔望必祭, 遇時物, 輒薦之。 東萊人金得仁, 父早歿, 事母盡孝; 母死, 廬墓三年, 泣血枯槁。 墓在海口, 適倭人潛行剽竊, 得仁猶不離墓側, 隱土宇中, 不廢朝、夕奠, 倭賊數人來刦之, 知得仁有孝誠, 稱歎而去, 後以米來與之。” 禮曹據此啓: “上項閔氏等所行卓異, 鄕里稱服, 宜加褒賞, 以勸後來。 請竝旌門、復戶, 其堪任使者, 令吏、兵曹, 陞資錄用。” 從之。
성종 91권, 9년(1478 무술/명성화(成化) 14년) 4월 8일(기해) 4번째기사
심원이 국가의 정황에 대해 상소하다
주계부정(朱溪副正) 심원(深源)이 상서(上書)하였는데, 이러하였다.
예전에 상(商)나라 탕왕(湯王)은 여섯가지 일로 자기를 꾸짖자, 하늘에서 비가 내렸고8316), 송(宋)나라 경공(景公)은 덕(德)있는 말 세 가지를 하자, 형혹성(熒惑星)이 자리를 옮겼다고 하는데8317), 이제 전지(傳旨)가운데의 열 가지 일은 오늘날의 깊은 병통이 아닌 것이 없으니, 전하께서 이미 아시는데 신이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구언(求言)의 전교를 받으니, 마음으로 시사(時事)의 근심할 만한 것을 알면서 어찌 차마 잠자코 있겠습니까? 신이 어릴 때에 농장(農莊)에서 자라서 백성의 일을 눈으로 보았는데, 농부와 홍녀(紅女)8318)의 어렵고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무릇 조도 경비(調度經費)는 비록 나라의 정한 제도가 있어서 일찍이 많이 거두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겠지만 탐학(貪虐)한 수령과 간교한 아전들이 별도로 많은 명목을 만들어서 함부로 거두는 것은 어찌 능히 다 금하였겠습니까? 깊고 먼 시골의 백성들은 일찍이 발길이 성읍(城邑)에 이르지 아니하였으니, 진실로 견딜 수없는 일이 있을지라도 능히 현리(縣吏)에게 스스로 분변하는 자가 적은데, 하물며 능히 자사(刺史)의 뜰에 가서 스스로 분변하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백성이 궁해도 〈세금〉거두는 것은 더욱 급하게 하니, 아아 전하께서 비록 어진 마음을 가지고 계시며 인자하다는 소문이 있으면서도 백성들이 은혜를 입지 못하고 사정(事情)이 위에 통하지 아니하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또 권문(權門)의 종[奴]들이 재산을 많이 저축하여 때를 타서 사채(私債)를 거두고 놓는데, 이식(利息)을 취하는 것이 절도가 없으며 추수함에 미쳐 빚을 독촉하는 무리가 연달아 와서 집주인의 위엄을 빌어 호소할 데 없는 백성을 침해하므로, 개와 닭도 편히 쉬지 못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농가에서는 풍년의 괴로움이 흉년보다 심하니, 어찌 백성이 궁하고 또 원망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근래에 고을에서 군사를 징발하는데에 비록 친상(親喪)을 당하여 3년상(三年喪)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어도 모두 탈정기복(奪情起復)8319)한다고 하니, 심히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신이 또 듣건대, 유사(有司)에서 풍수설(風水說)의 요망한 말에 의거하여 국도(國都)에 관계가 있는 산기슭의 땅에는 모두 사람의 집짓는 것을 금하고 혹은 이미 지은 집을 철거까지 한다고 하니, 후손에게 남길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전하는 군사에게 상제(喪制)를 마치도록 허락하여 풍속을 돈독하게 하고, 산기슭의 인가(人家)를 금하지 말게 하여 요사한 말을 물리치며, 권문(權門)의 사채(私債)를 금하여 궁한 백성을 살게하소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만약 사채를 금하면 가난한 자가 의뢰할 곳이 없으니, 아직 그대로 두어서 궁(窮)하고 굶주리는 것을 구제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나, 신은 그렇지않다고 생각합니다. 궁한 백성을 진제(賑濟)하는 것은 바로 수령의 책임이며 권문에서 사사로이 할 바가 아닙니다. 예전에 대부(大夫)의 집에서는 닭, 돼지를 기르는 이(利)도 살피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사채를 놓는 일이겠습니까? 지금 백성가운데 사천(私賤)이 십중팔구가 되고 양민(良民)은 겨우 한둘뿐인데, 편하고 부유(富裕)한 자는 모두 사천이고 빈곤한 자는 모두 공천(公賤)과 양민입니다. 그러한 까닭은 무릇 수령이 부임할 적에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아는 이나 알지 못하는 이가 모두 술과 고기를 가지고 전송하면서 그 노비(奴婢)를 잘 보호해 주기를 청하니, 상하(上下)에서 풍속을 이루어 이름하여 ‘칭념(稱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수령이 된 자는 모두 그 문벌(門閥)에서 많이 나왔기 때문에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으므로 무릇 공역(公役)이 있으면 공천과 양민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고 사천에게는 미치지아니하므로, 양민과 공천은 견디지못하여 대개 도망쳐 숨어서 사천에게 품팔이하는 자가 많으니, 비록 대대로 전(傳)하는 땅과 집이 있을지라도 보존하지 못하고 모두 권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로 말미암아 사천은 날로 편하고 부유하며, 향린(鄕隣)의 생활할 바를 잃는 것을 이용하여 무릇 환난(患難)이 있으면 다투어 서로 헐뜯고 모함하는데, 하물며 서로 구호하겠습니까?
이로써 양민과 공천은 날로 더욱 유리(流離)하여 부자(父子)가 서로 보호하지 못하고 부부가 서로 돌보지 못하니, 민생(民生)의 어려움이 오늘보다 심함이 없으며, 나라의 근본이 튼튼하지 못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신이 살피건대, 지금 경외관(京外官)의 고만(考滿)8320)의 오래고 빠름이 이미 다른데, 전하께서 즉위(卽位)하신 처음에 하교(下敎)하기를, ‘육조낭관(六曹郞官)으로 고만(考滿)한 자는 모두 수령으로 제수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지하고 행하지 아니하시니, 이로써 수령의 임명이 더욱 천해졌고, 또 수령에서 경직(京職)에 제수된 자가 얼마 안되어, 또 수령에 임명되면 두번 세번 보외(補外)8321)되어 오랫동안 승직(陞職)되지않으니,
수령이 된 자가 어찌 불우(不遇)함을 탄식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조금의 재예(才藝)가 있거나 세력을 가진자는 모두 수령이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니, 만일 어버이를 위하는 자가 아니면 대개는 불령(不逞)하고 무식(無識)한 무리로서 처자(妻子)를 먹여살리기 위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백성들에게 함부로 세금을 거두어 사리(私利)를 취하고 권세가(權勢家)에게 뇌물을 주는 것만 알 뿐이니, 그 임금의 근심을 나누어서 다스림을 함께 하며 정사에 부지런하고 백성을 불쌍하게 여기는 일에는 어떠하겠습니까?
지난번 김주(金澍)의 일이 또한 징험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는 지금 수령들의 예사일인데, 단지 김주만 불행히 실패하였을 뿐이다.’라고 하니, 그렇다면 수령이 될 만한 사람을 얻기가 또한 어렵지 아니하겠습니까? 신은 청컨대 고만(考滿)의 월수(月數)를 개정하여 경외관(京外官)의 차이가 없게 하여, 수령으로서 고만한 이는 먼저 육조낭관으로 제수하고 육조의 고만(考滿)한 자는 먼저 수령으로 제수하며, 또 좌병(座屛)8322)에 8도 고을의 수령의 이름을 써서 상시로 보고 살피며, 가끔 제비를 뽑아서 공명정직(公明正直)하고 대체(大體)를 잘 아는 신하를 비밀히 보내어 바로 그 고을에 이르러 백성의 병폐를 조사하여서 출척(黜陟)을 가하면, 수령의 탐혹(貪酷)함이 없어지고 순리(循吏)8323)가 많아질 것입니다. 지금 비록 어사(御史)를 보내지만, 맡는 바가 많고 전교를 받는 것이 은밀하지 못하기 때문에 윤명(綸命)8324)이 겨우 내리자마자 소문이 먼저 이미 사방에 전달되니 아무리 밝게 살피는 어사일지라도 어디로 쫓아가서 거핵(擧覈)하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감사(監司)가 된 자가 모두 말하기를, ‘한 도의 수령이 최(最)8325)에 해당되는 자가 몇이나 있겠는가? 만약 참되게 출척(黜陟)한다면 온전한 사람이 없을 것이지만, 허다한 고을의 뒤에 와서 현재의 수령을 대신할 자도 이와 같지 아니할 것을 어찌 알겠는가? 모두 내치면 맞이하고 전송하는 폐단만 더할 것이니, 차라리 용납해 두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며 인순고식(因循姑息)하여 풍속을 이루었으니,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하물며 감사가 갈리는 것은 겨우 주기(周期)8326)이니, 고을을 순행해 살피는 것이 겨우 한두번에 지나지 아니하는데, 어찌 능히〈수령의〉어질고 어질지못함을 다 알겠습니까? 그런데도 한 가지 일과 한 가지 허물로써 갑자기 출척(黜陟)을 가한다면, 어찌 그릇되지 아니하겠습니까?
지금을 위하는 계책으로는 감사를 신중하게 임명하여 그 벼슬에 오래 있게 하고 기년(期年)으로 바꾸지말게 하면, 수령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자세히 알 수 있어 출척이 그릇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땅이 좁아서 반드시 유현(遺賢)8327)이 없을 것이다. 만일 있다면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라고 하나, 신은 홀로 그렇지 아니하다고 생각합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십실(十室)의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이 있다.’고 하였는데, 우리나라만이 어찌 홀로 그러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오직 좌우에게 구하기를 독실히 아니하고 쓰기를 오로지 아니하는데에 있을 뿐입니다.
신이 듣고보아 기억하는 자도 오히려 두서넛이 있으니, 함양현(咸陽縣)에 사는 정여창(鄭汝昌), 태인현(泰仁縣)에 사는 정극인(丁克仁), 은진현(恩津縣)에 사는 강응정(姜應貞)이라고 하는데, 모두 성현(聖賢)의 무리입니다. 신의 듣고 본 바로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천만 사람의 듣고 보는 것이겠습니까?
아아! 부열(傅說)8328)이 고종(高宗)8329)을 만나지 아니하였으면 일개 농부(農夫)로 있었을 것이며, 여상(呂尙)8330)이 문왕(文王)을 만나지 아니하였으면 일개 어옹(漁翁)일 뿐이었을 것인데, 누가 알았겠습니까? 신이 또 보건대, 효자 경연(慶延)은 사직(社稷)의 기국(器局)이며 백리지재(百里之才)8331 )가 아니므로, 전하께서 특별히 불러보시자 당시에 중외(中外)의 유식한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한 세대가 흥(興)하는데는 반드시 한 세대의 신하가 있는 것인데, 성상이 성명(聖明)하여 즉위한 날이 오래되었으나 아직 인재를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경연을 불러 보시니 반드시 합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급을 뛰어올려서 6품 벼슬을 임명하자 듣는 자가 모두 말하기를, ‘장차 크게 쓰고자 하기때문에 두루 거쳐서 시험하려는 것이다.’라고 하며, 궁촌(窮村)의 등용되지 못한 선비들이 모두 격앙(激昻)하여 목을 늘이고 기다렸는데, 마침내 이산현감(尼山縣監)으로 돌아가자 듣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사람은 침정(沈靜)온후(溫厚)하며 편벽(便僻)하고 첩급(捷給)8332)한 재주가 없어서 세상에서 물리치는 바가 되었으니, 진실로 슬프고 한스럽다. 젊어서 벼슬을 구하지 못하고 늙어서 벼슬에 오르면 마침내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6기(六期)8333)를 지나면 이미 지나치게 늙을 터인데, 생애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한즉 이 일은 자못 선비를 권려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지금 인재얻는 문(門)이 적지아니하니, 이를테면 과거(科擧), 보거(保擧)8334), 이임취재(吏任取才), 음취재(蔭取才)등의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는 학문(學文)은 많으나 실무(實務)의 경험은 적으며, 보거는 인아(姻婭)8335)의 연고가 아니면 뇌물과 청탁의 무리이며, 이임취재와 음취재는 가벼이 보고 마음을 쓰지아니하니 한갓 문구(文具)8336)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로써 인재를 얻고자한다면 소홀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전하께서 본래 마음을 알고 있는 덕(德)이 높은 선비를 불차탁용(不次擢用)8337)하여 좌우에 두고, 각각 덕업(德業)이 충분히 갖추어져서 족히 사표(師表)가 될만한 자가 있으면 천거하게 하며, 그 다음은 뜻이 독실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마음이 어질고 행실이 닦여진자를 모두 인견(引見)하고 경사(經史)와 시무(時務)를 물어서 과연 어진가를 살핀 뒤에 임용(任用)하면 천거하는 자가 사사로이 쓰이지못할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세종조(世宗朝)에는 공경대부(公卿大夫)로 부유(富裕)한 자가 심히 드물었고 풍속이 검소함을 숭상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이제까지도 이를 칭송하는데, 이제는 위로는 공경대부부터 아래로 여항(閭巷)에까지 호협(豪俠)한 자들이 서로 화식(貨殖)하기를 다투어서 작은 이익을 극진히 헤아리며 사치를 서로 숭상하고 남의 것을 부러워하여 남과 같게 하기를 애쓰며, 잔치에는 먼 지방의 진미(珍味)가 상에 가득하고 혼인에는 먼저 장획(臧獲)8338)재산을 논하기 때문에, 시속(時俗)을 따라 사치를 아니하는 자가 드뭅니다.
퇴폐한 풍속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탄식할 만합니다. 신은 청컨대 공경대부들에게 모든 사치에 관계되는 일을 일체 금하게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신이 살펴보건대 전고(前古)의 제왕(帝王)으로 어진이를 써야옳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가 없었으나, 그 누가 어진사람인지 알지 못하였으며 알게 됨에 미쳐서는 또 뜻이 맞지 아니함이 많았습니다. 간사한 이를 버려야 옳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가 없었으나, 그 누가 간사한가를 알지못하였으며 알게 됨에 미쳐서는 또 용인(容忍)함이 많아서 나라를 망하는데에 이르게 한 자가 많았습니다. 신이 모르기는 하나, 전하께서는 지금의 집정자(執政者)를 모두 어질다고 여기십니까? 어진이와 어질지 못한이가 섞였다고 여기십니까?
비록 어질지 못한 이가 많으나 어진이를 얻지못하였으므로,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부득이하여 인원을 갖춘 것이라고 하십니까? 또는 조종(祖宗)께서 이미 전에 들어써서 〈전하께〉주었으므로 마땅히 어질고 어리석음을 묻지아니하고 아울러 용납하여 조종의 뜻을 저버리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당(唐)나라 요(堯)임금같은 성인(聖人)은 간사한 이와 광관(曠官)8339)을 용납하는 실수가 없었을 듯하나, 사흉(四凶)8340)이 벼슬에 있었으므로 다음의 순(舜)임금이 곧 이들을 죄주었고, 한(漢)나라의 고조(高祖), 세조(世祖)와 당나라 태조(太祖)는 모두 창업(創業)한 불세출(不世出)의 임금이라 마땅히 사람을 임명하는데에 실수가 없었을 것이라 하겠으나, 한 때의 공신(功臣)이 끝내 몸을 보전하지못하거나 혹은 벼슬을 맡지못하였으며, 혹은 그 병권(兵權)을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보면 비록 조종의 훈신일지라도 진실로 이윤(伊尹)8341), 여상(呂尙), 자방(子房)8342)같은 무리가 아니면 권세를 빌려주어서 은혜를 상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진평(陳平)8343)의 재주는 가히 더불어 초(楚)나라를 도모할 수는 있었으나 더불어 수성(守成)8344)할 수는 없었으니, 기묘한 계책은 많으나 그 중(中)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조께서는 하늘이 준 용지(勇智)와 일월(日月)처럼 밝음으로써 사람을 쓰는데에 구비(具備)한 것을 구하지아니하고 장점과 단점을 비교하고 헤아려서 한 가지 재주에 이름이 있는 자는 쓰지아니함이 없기때문에 한 때의 선비가 반린부익(攀鱗附翼)8345)하여 모두 등용되었는데, 이제 성명(聖明)이 세조에게 미치지 못하면서 그 신하들을 모두 쓰고자하니, 그 벼슬을 옮기는 즈음에 어긋나고 잘못됨이 없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세조께서 무인년8346)에 예종(睿宗)에게 훈계하시기를, ‘나는 어려움을 당하였으나 너는 태평할 것이다. 일은 세상을 따라 변하는 것인데, 만약 네가 내 행적(行跡)에 국한되고 변통할 줄을 모르면, 이른 바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끼워 맞추는 격이다.’라고 하셨고, 《전(傳)》에 이르기를, ‘사시(四時)의 차례는 공(功)을 이루어 놓은 자는 물러난다.’고 하였으며,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신하가 총애(寵愛)와 이익으로 이루어 놓은 공(功)에 머물러 있지아니하면, 나라는 영구히 아름다움을 보전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전하는 살피소서.
아아! 예로부터 임금은 누구라도 곧은 사람을 등용하고 굽은 사람을 버리고자 하지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거처가 존귀(尊貴)하고 몸을 엄하게 가지며 여러 신하와 더불어 접하는데에는 절차가 있으니, 단정하고 공손하지 아니함이 없으므로, 응대(應對)에 능숙하고 말을 꾸며서 잘하는 자가 사랑을 받게 되어 혹 간사한 것을 충성된 것으로 여기고 속이는 것을 곧은 것이라 여기니, 이에 주(周)나라 사윤(師尹), 진(秦)나라 이사(李斯), 당(唐)나라 이임보(李林甫), 양국충(楊國忠), 송(宋)나라 왕안석(王安石), 진회(秦檜), 한탁주(韓侂胄)의 무리가 그 뜻을 펴게된 것입니다. 아아! 그 때를 당하여 임금이 능히 스스로 알고 밝게펴서 유전(流傳)하지 못하였으므로 후세 사람들을 슬프게 하였는데, 또한 후세에서 지금을 보는 것이 지금에서 예전을 보는 것이 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오직 전하는 살피소서.
신이 듣건대 학교는 왕정(王政)의 근본이며 정치를 내는 근원이라고 하는데, 이제 안으로는 국학(國學)8347)으로부터 밖으로는 향교(鄕校)에 이르기까지 스승이 된 자는 거개가 부유(腐儒)로서 겨우 구두(句讀)만을 해득(解得)하였으므로, 비록 10년에 이를지라도 옮겨서 승직(陞職)을 하지 못합니다.
이로써 교화(敎化)가 허물어지고 인재(人才)가 쇠모(衰耗)하여 능히 서로 숭상하지 못하며, 유학(儒學)을 배우는 자는 경서(經書)에 정숙(精熟)한 것을 스스로 누(累)라고 여기며 전적(典籍), 교수(敎授)가 될까 두려워합니다.
지금을 위하는 계책으로는, 어진 공경(公卿)들로 하여금 각각 경서에 밝고 행실을 닦아서 사표(師表)가 될만한 자를 천거하게 하여, 전하께서 모두 인견(引見)하고 경서를 강(講)하게 하여 그 사람의 고하(高下)에 따라서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관원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다음은 각도의 향교에 나누어서 가르치게 하며, 국학(國學)에서는 차례로 승천(陞遷)하여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러서 우천(右遷)8348)하게 합니다. 그리고 일찍이 〈대사성을〉지낸 자는 또한 지사(知事)의 벼슬로서 윤차(輪次)로 관(館)8349)에 출사(出士)하여 학도(學徒)를 가르치게 하고, 외방(外方)에는 감사(監司)로 하여금 훈도(訓導)를 검핵(檢覈)하게 하여, 그 직책에 능한 자를 추천하여서 교수(敎授)에 보임(補任)하고, 교수로서 그 직책에 능한자는 매년 각도에서 1인씩 초탁(超擢)8350)하여 서용(敍用)하게 하며, 고(考)에 비록 한 번이 중(中)일지라도 파출(罷黜)하여 풍속과 교화를 진흥시키소서.
전하께서 즉위(卽位)한 이래로 공(功)이 같아도 상(賞)을 주는 것에 높고 낮음이 있었으며, 죄는 같은데 형벌에 가볍고 무거움이 있는 것이 많았으니, 어찌 상벌(賞罰)이 적중함을 잃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살펴보건대, 부렴(賦斂)이 과중한 것과 공역(工役)이 번거로운 것과 혼인이 때를 잃는 것과 하정(下情)8351)이 위에 통하지못하는 것은 수령에게 달려있고 수령의 근본은 감사에게 있는데, 감사를 옳은 사람을 얻고 상벌이 적중함을 얻는 것은 쓰고버리는 여하에 달렸습니다. 지금의 폐단을 구제하려는 자들이 모두 법을 엄하게 하고자하는데, 법이 세밀할수록 폐단이 많은 것은 알지못하는 것입니다. 예전 진(秦)나라 말기에 이미 옳은 사람을 얻지못하고 다만 법에만 맡기니 법밖의 간사함이 심하므로, 법이 세밀하지 못하다고 하여 다시 가혹하고 엄한 법을 만들어서 그 흐름이 백성으로 하여금 수족(手足)을 놓을 바가 없게 하여〈나라가〉흙이 무너지는 듯한 형세가 되어 구(救)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겠습니까? 인재를 얻는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인재를 얻는 것이 급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이바지함이 학교에 있는 것은 알지못하며, 사람들이 모두 학교가 근본이 되는 것은 알면서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는 것은 알지못합니다. 동중서(董仲舒)8352)가 말하기를, ‘임금이 된 이는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여 백관(百官)을 바르게 하며, 백관을 바르게 하여 만백성을 바르게 하면, 멀고 가까운 지방이 감히 한결같이 바르지 아니함이 없어서, 요사한 기운이 그 사이를 틈탈 수 없고 음양(陰陽)이 순조롭고 풍우(風雨)가 때를 맞춘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천년토록 바뀌지 아니할 정론(定論)입니다. 오직 성명(聖明)께서 여기에 뜻을 두시면, 오늘의 재이(災異)가 상탕(商湯)의 가뭄이나 태무(太戊)의 상곡(桑穀)8353)과 같이 다시 종묘(宗廟)와 생민(生民)의 복이 되지 아니할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註8316]상(商)나라 탕왕(湯王)은 여섯가지 일로 자기를 꾸짖자, 하늘에서 비가 내렸고: 상(商)나라 탕(湯)임금이 즉위하자 7년동안 가뭄이 계속되었으므로, 스스로 재계(齋戒)하고 회생이 되어 상림(桑林)에서 여섯가지 일을 가지고 스스로 꾸짖었더니, 천리에 구름이 모여들어서 수천리의 땅을 적셨다는 고사.註8317]형혹성(熒惑星)이 자리를 옮겼다고 하는데: 춘추시대 송(宋)나라 경공(景公)때에 형혹성(熒惑星)이 심성(心星)을 침범하니, 경공이 이를 근심하여 사성(司星)자위(子韋)를 불러물었는데, 경공이 자위와 더불어 말하면서 덕(德)있는 말 세 가지를 하였더니, 자위가, “하늘이 반드시 인군(人君)께 세 가지 상(賞)을 내려서 오늘 저녁에 마땅히 형혹성이 30리[舍]를 옮겨갈 것입니다.”하였는데, 과연 이날 저녁에 형혹성이 30리를 옮겨갔다고 하는 고사. 형혹성이 나타나면 재화(災禍)가 일어난다고 함.註8318]홍녀(紅女): 길쌈하는 여자.註8319]탈정기복(奪情起復): 상중에 벼슬에 나가는 일.註8320]고만(考滿): 관리의 임기가 찬 것.註8321]보외(補外): 높은 지위에 있는 관원(官員)이 잘못이 있을 때에 지방의 수령(守令)으로 좌천(左遷)시켜서 징계(懲戒)하는 일.註8322]좌병(座屛): 자리에 치는 병풍 註8323]순리(循吏): 법을 잘 지키고 열심히 일하는 수령.註8324]윤명(綸命): 임금의 명령.註8325]최(最): 전최(殿最), 즉 고사(考査)의 상등을 말함. 전최라는 것은, 관찰사가 각 고을 수령(守令)의 실적을 조사하여 중앙에 보고하는 일로서, 성적을 고사할 때 상(上)을 최(最), 하(下)를 전(殿)이라고 하여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시행하였음.註8326]주기(周期): 만1년 註8327]유현(遺賢): 등용되지않은 어진이.註8328]부열(傅說): 은(殷)나라때 정승.註8329]고종(高宗): 은나라 임금.註8330]여상(呂尙): 주(周)나라 강태공(姜太公).註8331]백리지재(百里之才): 고을을 다스릴 만한 재능 註8332]첩급(捷給): 민첩하고 말에 능숙함 註8333]6기(六期): 6년의 임기.註8334]보거(保擧): 높은 관원이 담당 관아(官衙)의 관원가운데에서 재주가 있거나 공로가 많은 사람을 자기가 책임지고 임금에게 천거하던 일.註8335]인아(姻婭): 사위집 편의 사돈 및 동서집 편의 사돈의 두루 일컬음. 사위의 아버지 곧 사돈을 인(姻)이라 하고, 여자 형제의 남편끼리 곧 동서끼리를 아(婭)라고 함.註8336]문구(文具): 형식적인 이름만 있는 것 註8337]불차탁용(不次擢用): 차례를 밟지않고 벼슬에 올려서 씀.註8338]장획(臧獲): 종.註8339]광관(曠官): 직무를 태만히 하는 관리.註8340]사흉(四凶): 요대(堯代)의 네 사람의 악인(惡人). 공공(共工), 환도(驪兜), 삼묘(三苗), 곤(鯀)을 일컬음.註8341]이윤(伊尹): 은(殷)나라의 유명한 재상.註8342]자방(子房): 한(漢)나라 창업공신인 장양(張良).註8343]진평(陳平): 한(漢)나라 개국공신.註8344]수성(守成): 창업한 나라를 지킴.註8345]반린부익(攀鱗附翼): 용의 비늘을 끌어잡고 봉황의 날개에 붙는다는 뜻으로, 영주(英主)를 섬겨 공명(功名)을 세우는 것.註8346]무인년: 1458 세조4년.註8347]국학(國學): 성균관.註8348]우천(右遷): 높은 자리로 영전함.註 8349]관(館): 성균관 註8350]초탁(超擢): 남을 뛰어넘어 뽑아씀.註8351]하정(下情): 민정(民情).註8352]동중서(董仲舒): 전한(前漢)때의 학자.註8353]상곡(桑穀): 은(殷)나라 태무(太戊:中宗)때에 뽕나무와 닥나무 두 그루가 조정에 났는데, 하루 저녁에 한아름이 되었다. 임금이 이를 두려워하여, 재상 이척(伊陟)의 말에 따라 덕(德)을 닦았더니, 두 그루의 나무가 말라죽었다는 고사
○朱溪副正深源上書曰:
昔商湯以六事自責, 而天乃雨, 宋景公有善言三, 而熒惑徙舍。 今傳旨中十事, 無非今日之深患, 而殿下旣知之, 臣復何言? 然承求言之敎, 心知時事之可憂, 而安忍默默也? 臣少時長於農莊, 目覩民事, 其農夫紅女之艱苦, 不可勝言。 夫調度經費, 雖曰國有定制未嘗厚斂, 而貪宰猾吏別作多少物目, 橫斂濫收者, 其能盡禁歟? 幽遠之民, 其足迹未嘗至城邑, 苟有不得其所, 能自辨於縣吏者鮮矣, 況能自辨於刺史之庭乎? 由是民窮而斂愈急, 嗚呼! 在殿下雖有仁心仁聞, 而民不被澤, 情不上通者, 良以此也。 又有權門僕隷, 多蓄私債, 乘時斂散, 取息無度, 迨秋成, 督逋之徒項背相望, 假家主之威, 侵虐無告, 雖雞犬亦不得寧息。 故農家豐年之苦, 甚於凶年, 奈之何民不窮且怨也? 臣聞近來州郡之發兵也, 雖有親喪願行三年者, 竝奪情起復, 甚非美事也。 臣又聞有司據風水妖說, 乃於國都有干山麓之地, 幷禁人作舍, 或至撤已構家, 甚非燕翼昭謀之道也。 願殿下許軍士終喪制, 邇風俗, 勿禁山麓人家, 以闢邪說, 禁權門私債, 以蘇窮民。 或曰: “若禁私債, 則貧者無所仰給, 莫若姑存之, 以救窮餓”, 臣以爲不然。 賑濟窮民, 乃守令之責, 非權門所得私也。 古者大夫之家, 雞豚且不察, 況私債乎? 今者齊民之中, 私賤十居八九, 良民僅一二, 而安富者摠是私賤, 貧困者摠是公賤(是公賤)與良民, 所以然者, 凡守令之赴任也, 公卿大夫知與不知, 皆持酒肉而餞之, 請其奴婢完護, 上下成俗, 名之曰: “稱念。” 爲守令皆亦多出於其門, 故不敢不從, 凡有公役, 皆令公賤良民當之, 不及於私賤, 良民公賤不能支, 率多逃遁, 以傭諸私賤, 雖世傳田宅亦不能保, 盡歸諸權門。 由是私賤日益安富, 而利其鄕隣之失所, 凡有患難, 爭相擠陷, 況於相周乎? 以是良民公賤日益流離, 父子不相保, 夫婦不相顧, 民生之艱, 莫甚今日, 邦本可謂不固矣。 臣按今之京外官考滿之久速旣異矣, 而殿下卽位之初, 下敎曰: “六曹郞官考滿者, 幷除守令。” 俄而寢不行, 以是守令之任益賤, 而又自守令除京職者未幾, 而又任守令再三補外, 久未陞職, 則爲守令者安得無坎壈之嘆? 故稍有才藝挾勢者, 咸不願守令, 苟非爲親者, 則率皆不逞無識之徒, 爲妻孥口腹之養者, 但知橫斂於民, 以營私賄權而已。 其於分憂共理, 勤政恤民, 末如之何。 曩者金澍之事亦驗矣。 人皆曰: “此當今守令之常事也, 但金澍不幸見敗耳。” 然則守令之得人, 不亦艱哉? 臣請改考滿月數, 不使京外官有異, 而守令考滿者, 首除六曹郞官, 六曹考滿者, 首除守令, 而又於座屛書八道州郡守令之名, 常時觀省, 往往抽韱, 密遣公明正直深知大體之臣, 直抵其郡, 詢訪民瘼, 以加黜陟, 則守令之貪酷戢, 而循吏多矣。 今也雖遣御史, 所掌多而受敎不密, 故綸命纔下而先聲已達於四境, 雖明察御史, 何從而擧覈? 臣聞爲監司者莫不曰: “一道守令當最者有幾? 若誠爲黜陟, 則無全人矣, 許多州郡, 後來繼今者, 又安知不如是也? 與其盡黜以滋迎送之弊, 不若容之爲愈也”, 姑息成風, 莫之奈何。 又況監司之遞僅及周期, 巡審州郡不過一再, 何能悉知其賢否也? 猶以一事一過奄加黜陟, 安得不謬也? 爲今之計, 愼任監司而久其職, 不以期遞, 則得以詳知守令賢否, 而黜陟不謬矣。 臣聞人皆曰: ‘我國褊小, 必無遺賢。 如有之, 安得不知?” 臣獨以爲不然。 傳曰: “十室之邑, 必有忠信”。 我國何獨不然? 惟在左右求之不篤, 用之不專耳。 以臣耳目所記, 尙有數三, 居咸陽縣曰鄭汝昌, 居泰仁縣曰丁克仁, 居恩津縣曰姜應貞, 皆聖賢之徒也。 臣所聞見猶且如此, 況以千萬人之耳目乎? 嗚呼! 說不遇高宗, 一農夫耳, 呂不遇文王, 一漁翁耳, 誰得以知之? 臣又見孝子慶延, 社稷之器, 非百里之才也, 殿下特召見之, 當時中外有識者, 皆以爲一 ‘代之興, 必有一代之臣, 上有聖明, 卽位日久, 猶未得人, 而今乃召慶延, 必有所合。’ 俄而超階任以六品職, 聞之者皆曰: “將欲大用, 故歷試耳”, 窮村遺逸之士, 莫不激昻, 延佇以待之, 竟以尼山縣監歸, 聞之者皆曰: “此人沈靜溫厚, 無便辟捷給之材, 乃爲世所擯, 良可嗟恨。 少不干祿, 臨老待價, 竟何益哉?” 今若經六期, 已過老矣, 生涯幾何? 然則此擧殆非勸士之道也。 今得人之門, 不爲少矣, 有曰科擧, 曰保擧, 曰吏任取才、蔭取才。 然科擧則多文而少實, 保擧則若不是姻婭之故, 是賄謁之徒, 若吏任、蔭取才, 則慢不致意, 徒爲文具耳。 乃欲以此得人, 可謂踈矣。 爲今之計, 擧殿下素所知心碩德之士, 不次擢用, 置諸左右, 令各擧有德業充備足爲師表者, 其次篤志好學, 材良行修者, 皆引見之, 訪以經史時務, 以審其果賢, 然後乃任用, 則薦者不得容私矣。 臣聞在世宗朝, 公卿大夫富者甚鮮, 俗尙儉素, 民到于今稱之, 今也上自公卿大夫, 下至閭巷, 豪俠爭相殖貨, 計盡錙銖, 以華侈相高, 歆羡於人, 營營思齊, 至於燕飮, 則遐方珍味, 狼藉於案, 婚娶則先論臧獲財産, 故不隨俗奢靡者鮮矣。 頹敝風俗, 一至於此, 良可歎也。 臣請公卿大夫凡干華侈之事, 一切禁之便。 臣按前古帝王莫不知賢可用, 而不知其誰爲賢, 及其知也, 又多不合。 莫不知邪可去, 而不知其誰爲邪也, 及其知也, 又多容忍, 以至於敗國者多矣。 臣未知殿下以今執政者爲皆賢耶? 賢不肖混耶? 雖多不肖, 然賢旣不能得, 位旣不可虛, 不得已備員耶? 抑以爲祖宗旣用之於前以貽之, 固當不問賢愚而幷容之, 以不負祖宗之意耶? 唐堯之聖, 似無有容奸曠官之失, 而四凶在位, 舜乃罪之, 漢高祖ㆍ世祖、唐之太祖, 皆創業不世之主, 宜無任人之失, 然其一時功臣, 終不能保, 或不任事, 或收其兵權。 觀此則雖祖宗勳臣, 苟非伊、呂、子房之輩, 不可假權而傷恩也。 故陳平之才, 可(興)〔與〕謀楚, 而不可與守成, 以其多奇計而未有其中也。 我世祖以天錫勇智日月之明, 與人不求備, 校長量短, 名一藝者無不庸, 故一時之士攀鱗附翼, 而咸得其用, 今聖明不及世祖, 而欲盡用其臣, 無奈遷轉之際舛錯失當耶? 故世祖於戊寅年訓睿宗曰: “予當屯而汝當泰。 事隨世變, 若汝局於吾迹, 而不知變通, 則所謂圓鑿而方枘也。” 傳曰: “四時之序, 成功者去。” 《經》曰: “臣罔以寵利居成功, 邦其永孚于休”, 惟殿下察之。 嗚呼! 自古人主誰不欲擧直而措枉? 然居尊持嚴, 其與群臣接之有時, 問對有節, 莫不端恭捷給眩姸沽寵, 故或以奸爲忠, 以詐爲直, 此周之師尹、秦之李斯、唐之林甫ㆍ國忠、宋之安石ㆍ秦檜ㆍ侘胄之輩, 得以肆其志也。 嗚呼! 當其時人主不能自知, 而昭布流傳, 使哀後人, 又安知後之視今, 不爲今之視古耶? 惟殿下察之。 臣聞學校, 王政之本而出治之源, 今也內自國學, 外至鄕校, 爲師表者, 率皆腐儒, 僅解句讀, 雖至十年, 不見遷陞。 以是敎化陵夷, 人才衰耗, 莫能相尙, 業儒者以精熟經書爲自累, 恐爲典籍敎授也。 爲今之計, 莫若令賢公卿, 各擧經明行修堪爲師表者, 殿下皆引見之, 講經書, 隨其人高下, 爲成均館及四學之員, 其次分敎各道鄕校, 國學則以次陞遷至大司成右遷, 而曾經者, 亦帶知事職, 輪次仕館以敎學徒, 外則令監司檢覈訓導, 而能於其職者薦之補敎授, 敎授而能於其職者, 每年各道各一人超擢敍用, 於考雖一中亦罷黜, 以振風敎。 殿下自卽位以來, 功同而賞有高下, 罪一而罰有輕重者多矣, 豈非賞罰之失中也? 由是觀之, 則賦斂所以重, 工役所以煩, 婚嫁之失時, 下情之不通在守令, 守令之本在監司, 監司之得其人, 刑賞之得其中, 在用舍如何耳。 今之救弊者, 皆欲峻法, 殊不知法密而弊多。 昔秦之末, 旣不得人而徒任法, 法外之奸滋甚, 則以爲法不密, 乃更爲刻峻, 其流至於吏民無所措手足, 土崩之勢成而莫之救也。 然則何爲而可? 典人! 人皆知得人之爲急, 而不知其具在學校, 人皆知學校爲本, 而不知其源之有在也。 薰仲舒曰: “爲人君者正心以正朝廷, 正朝廷以正百官, 正百官以正萬民, 遠近莫敢不一於正, 而無有邪氣間其間, 陰陽調而風雨時”, 誠千載不易之定論也。 惟聖明留意焉, 則安知今日之沴不如商湯之旱, 大戍之桑更爲宗廟生民之福乎?
성종 91권, 9년(1478 무술/명성화(成化) 14년) 4월 9일(경자) 3번째기사
세조조의 훈신을 쓰지말라고 한 심원의 상소에 대해 논의하다
주계부정(朱溪副正) 심원(深源)을 명소(命召)하여 묻기를,
“상소중의 말은 모두 현재 이미 행하고 있는 일인데 그 가운데 ‘세조조(世祖朝)의 훈신(勳臣)을 쓰지 말라.’고 한 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다.
네가 무슨 마음을 가지고 이를 말하였는가?”하자,
심원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신의 말을 듣고자 하시면, 빌건대 친대(親對)를 허락하소서.”하니,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인견(引見)하였다. 심원이 아뢰기를,
“대저 창업(創業)하는 임금은 뜻이 성공하는데에 있으므로 비록 한 가지의 재예(才藝)를 가진 자라도 모두 거두어 쓰나, 수성(守成)하는 임금은 이와 달라서 모름지기 재주와 덕(德)이 겸비(兼備)된 뒤에야 쓰는 것입니다. 세조조 에는 한가지 재주와 한가지에 능하다고 이름하는 자는 단점(短點)이 나타나도 장점(長點)을 헤아려서 임용(任用)하지아니함이 없었으며, 인연으로 공(功)을 얻어서 드디어 훈신(勳臣)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전하께서 옛 훈신이라고 하여 모두 녹용(錄用)하였으니, 그 녹용된 자들이 필시 다 어질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만약 어질지 못한 자가 있어서 죄를 범한다면, 벌을 주면 은혜가 상할 것이고 벌을 주지아니하면 법을 폐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가 공신에게 일을 맡기지아니한 까닭이며 송(宋)나라 태조(太祖)가 병권(兵權)을 거둔 까닭입니다. 또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신하가 총애와 이익으로 이루어 놓은 공(功)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영구히 나라가 아름다움을 보전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뜻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 전대(前代)의 일을 거울삼아서 훈구(勳舊)를 임용하지않으면, 공신을 보호할 수있고 은혜를 상하게 함이 없을 것이며, 법을 폐하게 함이 없을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의 대신들은 모두 세조조의 훈구인데, 이들을 버리고 장차 누구를 쓸 것인가?”하자,
심원이 말하기를,
“신은 옛 신하들을 모두 쓸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 재주와 덕이 겸전(兼全)한 자는 쓰고 어질지못한 자는 쓰지 말자는 것입니다.
또한 영웅호걸(英雄豪傑)로 숨어있는 자가 무궁무진(無窮無盡)하니, 비록 옛 신하는 아닐지라도 어찌 쓸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작은 일이 아니므로 내가 마땅히 참작해서 헤아리겠다.”하였다.
심원 이 나가자 도승지(都承旨) 임사홍(任士洪)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데에는 모름지기 기구(耆舊)8355) 를 써야한다고 여겨집니다. 만약 조종조(祖宗朝)의 신하를 쓰는 것이 부당(不當)하다고 한다면, 주공(周公)은 무왕(武王)을 도왔으니, 성왕(成王), 강왕(康王)에 이르러서 버려야 하는 것입니까? 비록 작은 허물이 있을지라도 마땅히 너그러이 용납하여 한가로운 자리에 두고 국정(國政)에 참여하게 함이 가하며, 만약 큰 허물이 있으면 비록 법으로 다스릴지라도 또한 가합니다. 심원은 다만 옛 글을 읽었을 뿐이고 시의(時宜)에 맞추어 조처(措處)함을 알지 못하니, 이는 진실로 어리석고 망령된 사람입니다. 또 말하기를, ‘정극인(丁克仁), 정여창(鄭汝昌), 강응정(姜應貞)은 성현(聖賢)의 무리이다.’라고 하였는데, 정여창과 강응정은 어떤 사람인지 알지못하나, 정극인은 문종조(文宗朝)에 일민(逸民)으로 천거되어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며 다만 뜻이 강개(慷慨)한 것이 남과 조금 다를뿐인데, 어찌 성현의 무리라고 하겠습니까?
또 말하기를, ‘경연(慶延)은 사직(社稷)의 기국(器局)이며 백리지재(百里之才)가 아닌데 이제 수령으로 제수하였으므로 듣는자가 모두 슬퍼하고 한탄한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신이 듣건대, 경연은 문재(文才)가 있어서 이백(李白)8356)이 될만하다고 하여 백의(白衣)로서 들어와 한림(翰林)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제 경연이 재행(才行)이 있어서 성균관(成均館)의 벼슬을 주어 자제(子弟)들을 가르칠 만하다고 하여 특별히 불러서 사재주부(司宰主簿)를 삼았으나, 두고보니 그 재주와 능함이 남보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는 모두 심원의 과장된 말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상소한 말을 보고 뜻을 둔 바가 있다고 생각되어 불러서 물었는데, 그 말은 모두 유자(儒者)의 범론(泛論)이었으며 다른 뜻은 없었다.”하였다.
임사홍이 또 아뢰기를,
“요즘 조신(朝臣)들이 자못 말을 쉽사리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간(諫)하는 말에 따르고 어기지 아니하시니, 이 때문에 대간(臺諫)이 부당한 말을 하는 일이 많습니다. 어찌 대간의 말이라고 하여 다 따르겠습니까? 만약 일을 말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옛날을 참작하고 지금을 헤아려써서 시행할 만한 것으로 생각한 연후에 말해야하며 그렇지아니하면 한갓 구차한 말일 뿐입니다. 이제 대간에서 어유소(魚有沼)와 허종(許琮)의 죄를 굳이 청하는데, 허종과 어유소의 일은 진실로 잘못입니다. 허종은 곤외(閫外)8357) 의 일을 맡아서 사졸(士卒)의 환심을 고취하고자하여 이로써 계청(啓請)하였으니, 이는 다만 절목(節目)에 소홀하였던 것뿐이며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조정에서 사람을 골라 쓰는 것을 모두 유사(有司)에 부여(付與)하였는데, 한마디 말의 실수때문에 죄를 주면, 신은 후일에 비록 말할만한 형세가 있을지라도 장차 아뢰는 자가 없을까 염려됩니다. 오직 성상의 마음으로 짐작하시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작명(爵命)은 진실로 인신(人臣)이 사사로이 할 수없는 바인데, 일이 진실로 잘못되었다. 그러나 훈구대신(勳舊大臣)을 어찌 한가지 실수때문에 견책(譴責)하겠는가?”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인신(人臣)은 마땅히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도록 임금에게 경계하는 말을 올려야 하는데, 임사홍의 말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실언(失言)한 죄를 피할 바가 없다.”하였다.
註8355]기구(耆舊): 기로(耆老)와 구신(舊臣).註8356]이백(李白): 당나라 시인 이태백.註8357]곤외(閫外): 도성의 밖.
○命召朱溪副正深源, 問曰: “疏中之言, 皆當今已行之事, 其曰: ‘勿用世祖朝勳臣’ 者, 予不解。 爾將何心言之耶?” 深源對曰: “ 殿下欲聞臣言, 乞賜親對。” 上御宣政殿引見。 深源啓曰: “大抵創業之主志在成功, 雖一才一藝者, 皆收用焉。 守成之君異於是, 須才德兼備然後用之。 在世祖朝, 名一藝一能者, 較短量長, 靡不任用, 因緣得功, 遂爲勛臣。 今殿下以爲勛舊竝錄用之, 其用之者, 未必皆賢。 儻有不賢者犯罪, 則罰之傷恩, 不罰廢法, 此光武所以不任事, 宋祖所以收兵權也。 且《書》曰: ‘臣罔以寵利居成功, 邦其永孚于休’, 亦豈無意歟? 願殿下鑑前代之事, 勿任勛舊, 則功臣可保全, 而恩可無傷, 法可無廢矣。” 上曰: “今之大臣, 皆世祖朝勛舊, 捨此將誰用哉?” 深源曰: “臣非以爲舊臣皆不可用也。 其才德兼全者用之, 其不賢者去之耳。 且英雄豪傑, 其伏也無盡, 雖非舊臣, 豈無可用之人?” 上曰: “此非細事, 予當酌量之。” 深源出, 都承旨任士洪啓曰: “臣意以爲朝廷用人, 須用耆舊。 若以祖宗朝臣爲不當用, 則周公相武王, 至成王、康王而棄之乎? 雖有小過, 當優容置之(間)〔閒〕地, 使與聞國政可也, 若有大過, 雖繩之以法亦可。 深源但讀古書, 而未得時措之宜, 此誠愚妄人也。 且曰: ‘丁克仁、鄭汝昌、姜應貞聖賢之徒’ 也, 汝昌、應貞未知何等人, 克仁在文宗朝, 以逸民擧拜正言, 但心志慷慨, 稍異於人耳, 未豈聖賢之徒也? 且曰: ‘慶延是社稷之器, 非百里之才也, 今乃除爲守令, 聞之者莫不嗟恨。’ 初臣聞延有文才, 以爲李白以白衣入爲翰林, 今延有才行, 可授成均館職, 訓誨子弟。 旣而特召拜爲司宰主簿, 見之則其才能未有異於人者。 是皆深源大言也。” 上曰: “予見疏語, 以爲意有所在, 召問之, 其言皆儒者泛論, 非有他意。” 士洪又啓曰: “近日朝臣頗有易言之弊。 今殿下從諫弗咈, 以故臺諫多有不當言之事, 豈以爲臺諫之言而盡從耶? 若欲言事, 當酌古準今, 惟可以施諸用然後言之, 不然則徒爲苟焉耳。 今臺諫固請魚有沼、許琮之罪, 許琮、有沼事固非矣。 琮任閫外之事, 欲鼓士卒之歡心, 以是啓請, 此特節目踈闊耳, 非有他心也。 且朝廷選用人物, 皆付之有司, 而以一言之失罪之, 則臣恐後日雖有可言之勢, 將無啓之者。 惟在聖心斟酌耳。” 上曰: “爵命固非人臣之所得私, 事誠非矣。 然勛舊大臣, 豈可以一失譴責之乎?”
【史臣曰: “人臣當以納諫進戒於君, 而士洪所言如此, 失言之罪, 無所逃矣。”】
성종 91권, 9년(1478 무술/명성화(成化) 14년) 4월 15일(병오) 3번째기사
남효온이 혼인, 수령의 선발, 내수사의 폐지등에 대해 상소하다
유학(幼學) 남효온(南孝溫)의 상소는 이러하였다.
“신은 초야(草野)의 한 백성으로서 몸이 성대(聖代)를 만나 태평의 덕화(德化)를 입으니, 개나 말이 그 주인을 사랑하는 정성으로써 강개(慷慨)하여 배운 바를 말하고자한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 이달 초하루에 하늘에서 흙비[土雨]가 내리자 이튿날 하교(下敎)에 이러이러 하였으니, 아아! 상림(桑林) 의 육책(六責)과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자신을 반성하고 덕행을 가다듬은 것이 이에서 더할 수 없습니다. 마음 쓰심이 이와 같으니 재이(災異)가 변하여 상서가 될 것입니다. 성왕(聖王)이면서 스스로 훌륭하다고 여기지 아니하고 아랫사람에게 구언(求言)하시므로, 신이 스스로 어리석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우러러 하나라도 얻어 본받으려 합니다. 신이 그윽이 보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아가 정치의 요도(要道)를 묻고 어진 이를 구하기를 미치지 못할 것처럼 하시며 간하는 말에 따르기를 굴리듯 하고 전대(前代)에 거행하지 못한 예(禮)를 거행하시며 전대에 행하지 못한 일을 행하시어, 금년에는 친히 석전(釋奠)을 행하시고 명년(明年)에는 친히 적전(籍田)을 가신다하며, 금년에는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시고 명년에는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신다하며,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조서(詔書)와 농사를 권려하는 글을 잇달아 내렸으니, 참으로 근고(近古) 이래로 있지아니한 성주(聖主)이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재이(災異)가 내리는 것이 또한 많습니까? 경인년8363) 여름에는 적지천리(赤地千里)이었고, 임진년8364)에는 가을에 복숭아와 오얏꽃이 피었으며, 정유년8365)에는 산이 무너지고 가물며 황충(蝗蟲)이 있었으며, 무술년8366)에는 지진과 흙비가 있었습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하늘이 성상을 사랑하여 그 덕을 닦게 하는 것이므로, 성주(聖主)는 두려워하여 몸을 닦고 마음을 반성하는 것이 마땅할 줄로 압니다.
돌이켜 보건대, 신이 어리석고 고루하여 재이(災異)가 일어난 이유와 재이를 막을 방법은 진실로 알지 못하나, 귀와 눈으로 보고 들은 바대로 우선 그 억측한 뜻을 진술합니다.
그 하나는, 혼인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시경(詩經)》에서 관저(關雎)8367)를 첫 머리로 한 것과 《역경(易經)》에 건(乾), 곤(坤)을 바탕으로 한 것은 부부(夫婦)의 도를 바르게 한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남자가 성장하면 아내를 두기를 원하고 여자가 성장하면 시집가기를 원하는 것은 고금에 통하는 도리입니다. 옛 성인으로 그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한 분이 있었으니, 문왕(文王)이 기(岐)8368)를 다스린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때를 당하여 궁중(宮中)의 덕화(德化)가 집으로부터 나라에 미쳐서 남녀가 바르고 혼인을 때맞추어 하니, 안으로는 원망하는 여자가 없고 밖으로는 원한을 가진 남자가 없어서 천지가 화합(和合)하고 음양(陰陽)이 순조로워서 당시에는 요사한 기운이 그 사이를 틈타는 것이 없었으니, 도요(桃夭)8369)의 시(詩)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그렇지 못하여 혼인하는 즈음에 사치를 다투어 숭상하여 남에게 이기기를 힘쓰기 때문에 사족(士族)의 자녀가 혼인할 시기를 잃어서 원한을 가진자가 많고, 혹 그 부모가 죽으면 형제와 친족들은 재물에 탐욕을 내어 그 무후(無後)한 것을 이롭게 여겨서 마침내 아내를 두거나 시집가는 것을 못하게 하므로 원망하는 기운이 심하여 천지의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으로는, 혼인에 빙폐(聘幣)8370)하는 즈음에 사치한 물건을 일체 금하고, 나이가 20세로서 혼인하지 아니하면 부모가 있는자는 부모를 죄책하고 부모가 없는 자는 형제를 죄책하며 형제가 없는 자는 족당(族黨)을 죄책하고 족당이 없는 자는 관가(官家)에서 음식과 의복을 주어서 남녀의 예(禮)를 이루게 하여 혼자 사는 원한을 없어지게 해야 할 것입니다. 원한의 기운이 사라지면 음양이 화하고 음양이 화하면 재이(災異)를 막을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수령을 고르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송(宋)나라 신하 주희(朱熹)가 효종(孝宗)에게 올린 상소에 이르기를, ‘사해(四海)8371)의 이해(利害)는 백성들의 휴척(休戚)에 달려있고 백성의 휴척은 수령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에 달려 있다.’고 하였으니, 좋은 말입니다. 대개 천하의 정사를 임금이 능히 스스로 다스릴 수 없으므로 여러 수령에게 나누어 맡기는 것인데, 진실로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백성이 그 재앙을 받습니다. 지금도 수령을 선택하는 법이 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잡과(雜科)의 무식한 무리와 권문(權門)에 뇌물을 주고얻는 무리가 또한 많이 있어서, 백성을 다스리는데에 어둡고 정사를 돌보지 아니하며, 재물 쓰기를 절약하지 아니하고 백성을 부리기를 때에 맞추지 아니하며, 흉년이 들면, 백성을 무육(撫育)하는 방법이 어긋났다는 벌(罰)을 받을 것을 근심하여 사실대로 아뢰지 아니하고, 유민(流民)이 굶주리는 것을 고하면 양식을 주는 것을 계산하고 감독하는 수고로움을 근심하여 때를 맞추어서 주지 아니하니, 누가 능히 빈배에 굶주림을 참고 한말, 한되의 은혜를 기다리겠습니까? 이리하여 옮겨 부잣집에 가서 사채(私債)를 빌리므로, 손발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노력하는 공이 마치기를 기다려 채찍질하는 괴로움이 더욱 심하니, 이른 바, ‘눈앞의 종기는 고쳤으나 심장에 있는 살을 깎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부자는 전토가 천맥(阡陌)8372)을 연하였으나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으니, 혹은 부잣집에 의탁하여 종이 되고 혹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마을이 쓸쓸하며 열집에 네댓집이 없어지는데도, 감사(監司)가 된 자는 오로지 공급(供給)과 수응(需應)을 잘하는 것을 어질다 여기고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는 근심은 묻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령들이 마음대로 탐혹(貪酷)하여 백성의 고혈(膏血)을 착취하니, 의창(義倉)의 많은 속미(粟米)가 반은 사가(私家)로 들어가고 반은 권문(權門)으로 들어가도 예사로이 부끄러워함을 알지 못합니다. 슬프도다! 우리 백성이 누구를 의지하며 누가 구제하겠습니까? 그 호소할 곳은 하늘8373)에 부르짖는 것뿐인데 미칠 수가 없으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으로는, 중한 법으로 다스리는 것보다는 먼저 사람을 고르는 것만 같지 못하며 이미 맡긴 뒤에 의심하는 것보다는 맡기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선택하는 방법은, 먼저 이조(吏曹)에 책문(責問)하여 글을 강(講)하고 논난(論難)하며, 겸하여 서판(書判)8374)을 살펴서, 이조에서 가한지를 본 뒤에 사헌부에 올리고 사헌부에서 가한지를 본 뒤에 의정부에 올리며 의정부에서 가한지를 본 뒤에 전하께 올리고 전하께서 가한지를 본 뒤에 등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전선(銓選)이 반드시 정밀할 것이고, 백성을 다스리는 벼슬에 옳은 사람을 얻을 것이며, 백성을 다스리는 벼슬에 옳은 사람을 얻으면 백성의 원망이 사라질 것이고, 백성의 원망이 사라지면 재이(災異)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는, 사람을 쓰는 것과 버리는 것을 삼가는 것입니다. 국가에서 사람을 쓰는데에는 문과(文科), 무과(武科)가 있고 잡학과(雜學科)가 있으며, 승음(承蔭)의 절목(節目)이 있고 이임(吏任)의 절목이 있으며, 과목(科目) 외에 또 효자(孝子), 순손(順孫)을 찾아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경연(慶延 을 인견(引見)하고 임옥산(林玉山), 최소하(崔小河)를 거두어썼으니, 사람을 쓰는 것이 마땅하였으며, 즉위(卽位)하신 7년에는 송희현(宋希賢)이 재물을 탐함으로써 사형을 받았고, 9년에는 김주(金澍)가 장리(贓吏)로써 귀양을 갔으니, 사람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이 그윽이 보건대, 경연(慶延) 이 집에 있을 때에 효성한 마음이 순수하고 지극하여 하늘의 감동함이 또한 많았고, 규문(閨門)8375)이 엄숙하고 이웃과 화목하며, 또 마음은 성리(性理)의 바른 도(道)에 통하였고, 학문은 경제(經濟)의 재주가 있어서 모두 백리(百里)의 기국(器局)으로 기대하지 아니하였는데, 마침내 니산현감(尼山縣監)으로 귀임(歸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경연이 나이가 늙어서 물러가 죽을 날이 이미 가까웠데, 만약 6년을 지연하면 기이한 기국(器局)도 더욱 늙게 될 것이 염려됩니다. 또 신이 듣건대, 십실(十室)의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 한 사람이 있다고 하였는데, 산림(山林)의 유일(遺逸)이 어찌 몇 사람뿐이겠습니까? 성상께서 구하시는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예전 연(燕)나라 소왕(昭王) 이 곽외(郭隗)8376)를 섬기자 악의(樂毅)8377)와 극신(劇辛)이 이르렀으니, 이제 전하께서 경연을 신임하시면 경연보다 어진 사람이 천리를 멀다 아니하고 이르지 않겠습니까? 어진 사람과 군자(君子)가 조정에 많이 모여 왕가(王家)를 좌우에서 도우면 재이(災異)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는, 내수사(內需司)를 없앨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임금은 천하를 집으로 삼고 사해(四海)를 궁궐로 삼으니, 천하의 백성은 한 집 사람이며 나의 적자(赤子)8378)라고 합니다. 이런 까닭에 옛 임금은 백성과 더불어 이(利)를 다투지 아니하였고 사사로이 간직해 두지 아니하며, 그 궁중(宮中)에서 쓰는 바는 경(卿)의 녹(祿)의 10배(倍)이니, 녹(祿)이 경(卿)의 10배가 되면 사사로이 간직하는 것이 없어도 족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각 고을에 사제(私第)를 세우고 ‘본궁농사(本宮農舍)’라고 일컬으며, 사사로이 곡식과 포백(布帛)을 비축하여 날마다 백성들과 더불어 매매하여 이익을 취하고, 또 서울 안에는 내수사(內需司)를 세워 별좌(別坐) 몇 명과 허다한 서제(書題)8379)가 고을에 왕래하면서 주구(誅求)함이 끝이 없으며, 조운(漕運)해 올려와 많이 쌓아모아 놓아서 썩기까지 합니다. 혹은 이것으로써 음사(淫祀)를 수축하면서 말하기를, ‘국가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고 본궁(本宮)에서 사사로이 간직한 것이라.’고 하니, 아아! 하늘에 낸 재물은 단지 그 수(數)가 있을 뿐이므로, 백성에게 있지 아니하면 나라에 있을 것이고 나라에 있지 아니하면 백성에게 있을 것입니다. 신이 모르기는 하나, 내수사의 재물과 곡식은 다만 우리 백성에게 나온 것이 아닙니까? 우리 조정의 다스리는 도(道)가 멀리 삼대(三代)8380)를 따랐는데, 유독 내수사 하나만은 한(漢)나라 환제(桓帝)와 당(唐)나라 덕종(德宗)의 고사(故事)를 그대로 따르니, 신은 그윽이 이를 부끄러워합니다. 전하께서 지난날에 이미 그 폐단을 아시고 사채(私債)를 조금 줄이시자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목을 늘이고 다스려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음으로 망령되게 원하건대 전하께서 공명(公明)한 도량을 넓히시어 소민(小民)의 폐(弊)를 밝게 살피시고 빨리 이 사(司) 8381)를 혁파(革罷)하여, 노비(奴婢)는 장례원(掌隷院)에 소속시키고, 미곡은 호조(戶曹)에 소속시키며, 기용(器用)은 공조(工曹)에 소속시키고, 재백(財帛)은 제용감(濟用監)에 소속시키소서. 만약 왕자, 왕손, 공주, 옹주(翁主)가 궁(宮)을 나가 사저에서 살면, 장례원에서 노비를 이바지하게 하고 호조에서 전지(田地)를 이바지하게 하며 공조에서 기용(器用)을 이바지하게 하고 제용감에서 재백(財帛)을 이바지하게 하여 각각 정한(定限)이 있게하고 궁중에서 사사로이 수용(需用)하는 것은 왕제(王制)의 십경록(十卿祿)8382)에 의하여 대체(大體)를 온전히 하고 민심을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가 보존되고 민심이 기뻐하면 재앙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는, 무당과 부처를 물리쳐야 합니다. 신이 듣건대, 무당은 삼풍(三風)8383)가운데 그 하나이며, 부처는 본래 서역(西域)의 교(敎)인데, 옛 제왕(帝王)은 모두 외면하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보탬이 없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음사(淫祀)를 섬기면 복이 없다.’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유아(儒雅)8384)를 숭상하고 이단(異端)을 물리쳐서 무당[巫覡]을 성밖으로 내쫓고 승도(僧徒)를 저자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니, 온 국민의 복이며 우리 유자(儒者)의 다행입니다. 그러나 음사(淫祀)는 파하면서 국무(國巫)의 설치는 그대로 있으니, 신은 국무가 무슨 일을 맡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불교를 배척하면서 주지(住持)를 두는 것은 그대로 있으니, 신은 주지가 무슨 직사(職事)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한갓 국름(國廩)을 좀먹고 거짓 화복(禍福)을 과장해 말할 뿐입니다. 이에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나라에서도 성수청(星宿廳)이 있는데 소민들이 어찌하여 홀로 무당을 섬기지 아니할 것인가? 나라에도 선종(禪宗), 교종(敎宗)이 있는데 소민들이 어찌하여 홀로 부처를 섬기지 아니할 것인가?’라고 하여, 이에 사람들이 아첨해 섬기기를 다투어서 혹은 은혜를 빌고 혹은 가사(家祀)라고 일컬으면서 여름, 겨울이 없이 생고(笙鼓)의 소리가 끊어지지 아니하며 사람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이 모두 무당에게서 말미암는 것이라고 이릅니다. 혹은 칠칠재(七七齋)8385)라고 일컫고 혹은 수륙재(水陸齋)8386)라고 일컬으며 혹은 일재(日齋)라고 일컫고 혹은 재승반불(齋僧飯佛)이라고 일컬으면서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사람의 수요귀천(壽夭貴賤)과 사람이 죽은 후의 영고(榮苦)가 모두 부처에게서 말미암는다고 생각하니, 하늘에 대해 방자하고 신(神)을 속이는 것이 이보다 심함이 없으므로, 천지의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 것은, 이것이 한 단서입니다.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으로는, 바람이 지나가면 풀이 쓰러지고 표목(表木)이 바르면 그림자가 곧으며, 위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더 심하게 하는 자가 있으니, 전하께서 먼저 국무(國巫)를 없애면 음사(淫祀)가 저절로 없어질 것이며, 전하께서 먼저 주지를 없애면 불사(佛事)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그칠 것입니다. 이단이 없어지고 하늘과 사람이 화합(和合)하면 재이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는, 학교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전에 집에는 숙(塾)이 있고 당(黨)8387)에는 상(庠)이 있고 술(術)8388)에서 서(序)가 있고 나라에는 학교(學校)가 있어서, 사람이 나서 여덟살이 되면 소학(小學)에 들어가고 열다섯 살이 되면 대학에 들어가니, 어디에서나 배우지 아니하는 곳이 없고 한 사람도 선비가 아닌 자가 없습니다. 대악정(大樂正)은 나이와 덕이 고매(高邁)한 사람으로서 시서(詩書) 육예(六藝)의 글과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道)로 사람을 가르치기 때문에, 사람이 어려서부터 장성하기까지 습관이 몸에 젖어 천성(天性)처럼 되어 성리(性理)의 학문에 침잠(沈潛)되고 성현(聖賢)의 도(道)에 익숙하여, 이로써 어버이를 섬기면 효도하고 이로써 임금을 섬기면 충성하며 이로써 어른을 섬기면 공경하니, 재예(才藝)는 다만 여사(餘事)이었을 뿐입니다. 이제는 이미 가숙(家塾)과 당상(黨庠)은 없고 태학(太學)8389) 도 유명무실(有名無實)하며 훈고(訓詁)를 배우고 사장(詞章)을 익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에 박힌 것이 깊고 사람을 그르친 지가 오래되어서, 사유(師儒)가 된 자는 한갓 구두(句讀)만 일삼고 제자가 된 자는 갑을(甲乙)8390)의 이름을 다투어, 장구(章句)를 아름답게 꾸미고 병사여륙(騈四儷六)8391)하며 방계곡경(傍蹊曲逕)으로 다만 청운(靑雲)8392)만을 구하니, 전하께서 누구를 얻어서 부리겠습니까? 그 사이에 비록 한두 사람 학문의 이치를 궁구하며 참되고 올바른 선비가 있을지라도, 또한 태학에 나아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며 사유(師儒)가 거기에 맞는 사람이 아닌 것을 부끄러워하니, 그 뜻은 대개, ‘내가 저 사람에게서 도(道)를 배우려 하나 저 사람은 도(道)가 없으며, 내가 저 사람에게서 학업(學業)을 배우려 하나 저 사람은 학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이 보건대, 그 말 또한 그릇되지 아니합니다.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으로는, 성균관에 벼슬할 사람을 먼저 좌우에 물어서, 좌우에서 모두 좋다고 말한 뒤에 경상(卿相)에게 묻고, 경상이 모두 좋다고 한 뒤에 대부(大夫)와 사(士)에게 물으며, 대부와 사가 모두 좋다고 한 뒤에 백성에게 묻되, 백성이 모두 좋다고 한다면 반드시 현인군자(賢人君子)일 것입니다. 하나의 현인군자를 얻어서 사표(師表)를 삼으면 배우는 자의 익히는 바가 저절로 바르게 되며 사람들이 효제충신(孝悌忠信)의 귀함과 사장(詞章)의 말습(末習)이 비루(卑陋)함을 알아서, 학교가 일어나고 인재가 나올 것이니, 인재가 나와서 명신(名臣)이 성하게 되면 재이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는, 풍속을 바루는 것입니다. 사도(司徒)8393)의 벼슬이 폐지되고부터 풍속이 날마다 야박하여지고, 시서(詩書)의 교육이 해이해지면서부터 풍속이 옛 〈풍속을〉회복할 수없게 되었습니다. 헌의(獻議)하는 자가 모두 말하기를, ‘풍속이 날마다 야박해지는 것은 시세(時勢)가 그러한 것이다. 세상의 도의[世道]가 점점 떨어지고 인심이 요박(澆薄)하여 풍속이 옛날 상태로 돌아갈 수없는 것은 늙은 자가 다시 젊어질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나, 신은 그렇지 아니하다고 생각합니다. 당(唐)우(虞)의 풍속이 후하게 된 것은 당(唐)우(虞) 이전에 탁록(涿鹿)의 싸움8394)이 있었던 때문이며, 박읍(亳邑) 8395)의 풍속이 후하게 된 것은 박읍 이전에 하걸(夏傑)의 난(亂)8396)이 있었던 때문입니다. 한(漢)나라, 당(唐)나라의 풍속이 후세가 되어서는 문(文), 경(景)8397)의 덕화(德化)는 은(殷)나라 성왕(成王), 강왕(康王)에 비견할만하였고, 정관(貞觀)8398)의 정치는 옛날에 비하여 손색이 없었으니, 어찌 전대(前代)의 풍속은 한결같이 후하고 후세의 풍속은 한결같이 야박하기만 하겠습니까?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어지러워지는 것이 대대로 서로 이어져서, 다스려지면 다시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우면 다시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고려(高麗) 5백년동안 풍속이 지극히 나빠서 동성(同姓)끼리 혼인하여 짐승과 다름이 없었고 친상(親喪)을 줄여서 오랑캐의 풍속과 같았으며, 아들이 그 아버지를 평론하는 자가 있고 종[奴]이 그 주인을 평론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우왕(禑王)의 대에 미쳐서는 극도에 달하였는데, 비색(否塞)한 운수가 극도에 달하면 태평(泰平)한 운수가 오는 것이므로, 우리 조선(朝鮮)이 운(運)을 열어 열성(列聖)이 서로 이어서 그 전함이 전하께 이르렀으니, 바로 다스려짐이 극함을 당한 때입니다. 사도(司徒)의 법을 이제 다시 행할 만하고 시서(詩書)의 교육을 다시 거행할 만합니다. 전하께서 백성을 밝게 다스려서 백성이 착하게 변하여 화합(和合)하는 것은 당(唐)우(虞)의 풍속이며, 전하께서 스스로 덕을 공경하여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서로 양보하는 것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풍속입니다. 전하께서 효제(孝悌)를 돈독히 하시면 풍속이 저절로 돈후(敦厚)할 것이고, 전하께서 몸소 절약하고 검소하시면 풍속이 저절로 근본을 힘쓸 것이며, 전하께서 허명(虛名)을 싫어하시면 풍속이 날로 실질(實質)을 좇을 것이고, 전하께서 이(利)를 말하지 아니하시면 풍속이 날로 의(義)를 좇을 것입니다. 풍속이 옛 상태로 회복되는 것은 전하의 한 몸에 달렸는데, 누가 후세의 풍속은 옛 풍속을 회복할 수 없다고 이르겠습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우(虞)나라 순(舜)임금은 사흉(四凶)을 죄줌이 있었고, 공자(孔子)는 소정묘(少正卯)를 죽였으니, 완악하고 미련하여 가르침을 따르지 아니하는 자를 벌주는 것은 성인(聖人)도 면치 못한 바입니다. 이제 몸이 옥당(玉堂)에 있고 지위가 당상(堂上)에 이른 자는 녹(祿)이 적지 아니한데, 한 명의 누이[妹]를 포용하여 양식을 주어서 생활하도록 하지 않으니, 풍속을 손상시킴은 위에서부터 범하는데, 하물며 그 밑의 사람이겠습니까?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사람이 예(禮)가 없으면 비록 말이 능할지라도 역시 짐승과 같은 마음이 아니겠는가?’하였는데, 신 또한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아무리 학문이 있을지라도 장차 그것을 무엇에 쓸 것인가 생각됩니다.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주관(周官)의 불효(不孝), 불목(不睦)한 형벌을 써서 한 사람에게 벌을 주어 그 나머지 사람을 경계하여 교화를 행하면 풍속이 바르게 될 것이며, 교화를 행하여 풍속이 바르게 되면 재이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는, 소릉(昭陵)8399)을 추복(追復)하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세조혜장대왕(世祖惠莊大王)은 하늘이 준 용지(勇智)로써 일월(日月)같은 밝음을 가지시고 하늘과 사람의 도움을 얻어서, 큰 어려움을 깨끗하게 타개하여 집을 나라로 만들어서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롭다가 다시 안정되었고 이 백성이 이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뜻밖에 다스리는 교화가 바야흐로 흡족하게 되자 재앙이 그 틈을 일어가서, 병자년8400)에 군간(群奸)이 난(亂)8401)을 일으켜서 중외(中外)가 경동(驚動)하여 우리 사직(社稷)이 거의 기울었으나, 곧 잇달아 복주(伏誅)하여 거의 베어서 없앴는데, 남은 화(禍)가 소릉(昭陵)에 미쳐서 20여년동안 폐함을 당하여 원혼(冤魂)이 의지할 바가 없을 것이니, 신이 모르기는 하나, 하늘에 계시는 문종(文宗)의 영(靈)이 홀로 제사를 받기를 즐겨하시겠습니까? 신은 배우지 못하고 재주가 없어서 견문이 천박하고 고루하니, 어떤 일이 어떤 상서로움을 부르고 어떤 일이 어떤 재앙을 부르는 것인지 진실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을 상고하고 마음을 헤아리면 내 마음은 바로 하늘의 마음이며 내 기운은 바로 하늘의 기운이므로,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기운에 순응함은 바로 하늘의 마음과 하늘의 기운에 순응하는 것이고,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기운에 순응하지 아니하는 것은 바로 하늘의 마음과 하늘의 기운에 순응하지 아니하는 것이니, 하늘의 마음과 하늘의 기운에 순응하지 아니하는 것은 재이를 내리게 하는 소이(所以)입니다. 신의 어리석고 망령된 생각으로는, 소릉(昭陵)을 폐한 것은 사람의 마음에 순응하지 아니한 것이니, 하늘의 마음에도 아니한 바인 것을 따라서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말하기를, ‘이미 허물어뜨린 신주(神主)를 다시 종묘(宗廟)에 들이는 것은 예(禮)에 부당(不當)하다고 한다.’면, 오직 마땅히 존호(尊號)를 추복(追復)하고 다시 예장(禮葬)하기를 일체 선후(先後)의 예(禮)와 같게 하여, 이로써 민심에 답하고 천견(天譴)에 답하며 조종(祖宗)의 뜻에 답하여 예사일보다 만배(倍)나 뛰어나게 하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겠습니까? 만약 말하기를, ‘폐한 지 3대(代)를 지나 조종(祖宗)께서 거행하지 아니한 것을 이제 추복하여 예장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한다면, 청컨대 세조(世祖) 무인년8402)의 훈계(訓戒)로써 이를 밝히겠습니다. 예종(睿宗)께 훈계하시기를, ‘나는 어려움을 당하였으나 너는 태평함을 당할 것이다. 만약 나의 행적에 국한 되어 변통할 줄을 알지 못하면 나의 뜻을 따르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무릇 일은 행할 만한 때가 있고 행하지 못할 때가 있는데, 어찌 전대(前代)에 구애되어 변통함을 쓰지 아니하겠습니까? 하물며 우리 대명황제(大明皇帝)가 경태(景泰)8403)를 추복(追復)한 어짐이 천지간에 밝게있는데이겠습니까? 이는 바로 당대(當代)의 일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 유의(留意)하여 채택하시면, 어찌 재이만 그치게 할 뿐이겠습니까? 장차 신인(神人)이 화합하고 천지가 안정되며 만물이 육성되어서 모든 복된 물건이 이르지 아니함이 없을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천심(天心)이 인군(仁君)을 사랑하여, 재이를 보이는 것은 그 덕(德)을 굳게 하려는 소이(所以)이며, 화(禍)를 보이는 것은 그 뜻을 삼가게 하려는 소이(所以)이다.’라고 하였으니, 전하께서 그 덕을 굳게하고 그 뜻을 삼가면 오늘의 흙비[土雨]가 내일의 감로(甘露)8404), 예천(醴泉)8405)이 될 것입니다. 신은 여염(閭閻)의 한 포의(布衣)8406)이므로 천문(天門)8407)이 아홉 겹이라서 말을 올릴 길이 없었는데, 천재일우(千載一遇)의 때를 만나 특별히 구언(求言)의 조서(詔書)를 내려서 재이를 막을 방법을 듣고자 하시니, 마음속으로 기뻐서 많은 말이 광참(狂僭)됨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또한 가의(賈誼)8408)가 통곡하고 눈물을 흘린 뜻이며, 전석(田錫)8409)이 조석(朝夕)으로 근심한 마음입니다. 아아! 한(漢)나라 문제(文帝) 대(代)에는 정치의 융성함이 비할 데가 없었고, 태평흥국(太平興國)은 천년에 한번있는 좋은 시대이었는데도 두 신하의 마음이 이와 같았으니,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근심함이 지극하였습니다. 돌아보건대 신의 원하는 바는 창해(滄海)에 넓음을 더하고 일월(日月)에 빛을 더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니, 부월(鈇鉞)의 형벌을 너그럽게 하여 구언(求言)의 길을 넓힌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만번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하였다.
명하여 승정원에 보이게 하니, 도승지(都承旨) 임사홍(任士洪)이 아뢰기를,
“신이 이 상소를 보건대, 거기에 이르기를, ‘내가 저 사람에게서 도(道)를 배우려하나 저 사람은 도가 없고, 내가 저 사람에게서 학업(學業)을 배우려 하나 저 사람은 학업이 없다.’고 하였으니, 남효온은 한낱 유생(儒生)으로서 사유(師儒)가 적당한 사람이 아닌 것을 부끄러워함은 옳지 못합니다. 거기에 이르기를, ‘몸이 옥당(玉堂)에 있고 벼슬이 당상(堂上)에 이르러 녹(祿)이 후하지 아니한 것이 아닌데, 오히려 한명의 누이를 포용하여 양식을 주어서 생활하도록 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가리킨 바가 있을 것인데, 국가에서 이를 듣고 묻지 아니하면 또한 옳지 못합니다. 거기에 말한, ‘ 소릉(昭陵)을 추복(追復)하라.’는 것은, 이는 신자(臣子)로서 의논할 수 없는 바인데 지금 남효온이 마음대로 의논하였으니, 또한 옳지 못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소릉을 이제 다시 의논함은 부당하다. 그가 말한, ‘한명의 누이를 용납하지 못하였다.’고 한것은, 한 선비의 말을 듣고 물을 수는 없다.”하였다.
임사홍이 아뢰기를,
“이 상소는 심원(深源)의 상소와 서로 같습니다. 심원이 경연(慶延)과 강응정(姜應貞)을 천거하였는데 남효온도 경연을 추천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남효온의 무리에 강응정, 정여창(鄭汝昌), 박연(朴演)등과 같은 이가 있는데, 따로 한 무리를 만들어서 강응정을 추숭(推崇)하여 부자(夫子)8410) 라고 하고 박연을 가리켜서 안연(顔淵)이라고 하며, 항상 소학(小學)의 도(道)를 행한다고 이름하여 서로 이론(異論)을 숭상하니, 이는 진실로 폐풍(弊風)입니다. 한(漢)나라에는 당고(黨錮)8411)가 있었고, 송(宋)나라에서는 낙당(洛黨), 촉당(蜀黨)8412)이 있었습니다. 이 무리들은 예전에 미치지는 못하나 족히 치세(治世)에 누(累)가 되므로 점점 커지게 할 수 없습니다.
또 포의(布衣)로서 국가의 정사를 의논하니 더욱 옳지 못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이제 구언(求言)의 명령이 있었으니, 말이 비록 적중하지 못하였을지라도 어찌 물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註8363]경인년: 1470 성종원년.註8364]임진년: 1472 성종3년.註8365]정유년: 1477 성종8년.註8366]무술년: 1478 성종9년.註8367]관저(關雎): 시경의 편명.註8368]기(岐):지명.註8369]도요(桃夭):《시경》의 편명.註8370]빙폐(聘幣): 예물을 보냄.註8371]사해(四海):천하.註8372]천맥(阡陌):밭두둑.註8373]하늘: 임금을 가리킴.註8374]서판(書判): 서법(書法)과 문리(文理)에 우수한 자.註8375]규문(閨門): 집안 註8376]곽외(郭隗): 춘추시대 사람. 註8377]악의(樂毅): 연나라 명장.註8378]적자(赤子): 어린 아이.註8379]서제(書題): 서리(書吏).註8380]삼대(三代):하(夏)은(殷)주(周).註8381]사(司):내수사.註8382]십경록(十卿祿): 경의 10배의 봉급.註8383]삼풍(三風): 무(巫),음(淫), 난(亂)의 세가지 나쁜 풍속.註8384]유아(儒雅): 유교.註8385]칠칠재(七七齋): 사람이 죽은 지 49일 되는 날에 지내는 재. 삼계(三界), 육도(六道)에 가서 누리는 후생안락(後生安樂)을 위하여 독경공양(讀經供養)으로 명복을 비는 것.註8386]수륙재(水陸齋): 바다와 육지에 있는 고혼(孤魂)과 아귀(餓鬼)를 위하여 올리는 재.註8387]당(黨): 5백가(家) 註8388]술(術): 1만2천 5백호(戶).註8389]태학(太學): 성균관.註8390]갑을(甲乙): 과거를 가리킴.註8391]병사여륙(騈四儷六): 뜻보다 형식을 중시하는 미문조(美文調)의 문체.註8392]청운(靑雲): 벼슬.8393]사도(司徒): 주(周)나라 때 교육을 맡던 벼슬. 註8394]탁록(涿鹿)의 싸움: 치우(蚩尤)가 병란(兵亂)을 좋아했으므로, 황제(黃帝)가 탁록에서 치우를 주벌(誅伐)하였다는 싸움.註8395]박읍(亳邑): 은(殷)나라 초기의 수도.註8396]하걸(夏傑)의 난(亂): 하(夏)나라 말세(末世)의 걸(桀)임금은 폭군(暴君)이었으므로,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멸망시킨 것을 말함.註8397]문(文), 경(景): 한나라 문제와 경제.註8398]정관(貞觀): 당나라 태종(太宗)의 연호 註8399]소릉(昭陵): 문종비(文宗妃) 권씨의 능.註8400]병자년: 1456 세조2년.註8401]난(亂):사육신(死六臣)사건.註8402]무인년: 1458 세조4년.註8403]경태(景泰): 명나라 경제(景帝).註8404]감로(甘露): 단 이슬. 임금이 어진 정치를 하여 천하가 태평하면 하늘이 상서(祥瑞)로 내리는 것이라 함.註8405]예천(醴泉): 태평한 때에 단물이 솟는다고 하는 샘. 註8406]포의(布衣):벼슬없는 사람.註8407]천문(天門): 임금의 궁궐 註8408]가의(賈誼): 전한(前漢)때의 문장가로, 상소가 유명함.註8409]전석(田錫): 송나라때의 간의대부(諫議大夫).註8410]부자(夫子): 공자.註8411]당고(黨錮): 중국 후한(後漢)의 환제(桓帝), 영제(靈帝)때 환관(宦官)이 득세하자, 반대당이었던 진번(陳蕃), 이응(李膺)등 청절(淸節)한 학자들을 종신 금고에 처하여 벼슬의 길을 막아버린 일.註8412]촉당(蜀黨): 중국 북송(北宋) 철종(哲宗)때 심한 정쟁(政爭)이 있었던 당파로, 낙당은 정이(程頤)의 일파이고, 촉당은 소식(蘇軾)의 일파를 가리킴.
○幼學南孝溫上疏曰:
臣以草野一民, 身親聖代, 沐浴淸化, 犬馬戀主之誠, 慷慨欲言所學有年矣。 月初一日天乃雨土, 翌日下敎云云。 於戲! 桑林之六責, 周宣之修省, 蔑以加矣。 用心如此, 災可轉而爲祥矣。 聖不自聖而求言於下, 故臣不自度而仰効一得。 臣竊觀殿下卽位以來, 日御經筵, 延訪要道, 求賢若不及, 從諫如轉環, 擧前代所未擧之禮, 行前代所未行之事, 今年親行釋奠, 明年親耕籍田, 今年行大射禮, 明年行養老禮, 恤民之詔, 勸農之書, 相繼頒下, 眞近古以來未有之聖主也。 乃何災異之降亦多有之。 庚寅之夏, 赤地千里, 壬辰之秋, 桃李花開, 丁酉山崩旱蝗, 歲戊戌地震雨土。 臣固知天之愛聖上修其德, 宜聖主之恐懼而修省也。 顧臣愚陋固不知致災之由弭災之方, 以耳目所覩, 記姑陳其臆意。 其一。 正婚嫁。 臣聞《詩》首《關雎》, 《易》基乾坤, 正夫婦也。 故男子生而願爲之有室, 女子生而願爲之有家, 古今通義也。 古之聖人有遂其願者, 文王之治歧是也。 當是時宮中之化, 自家而國, 男女以正, 婚姻以時, 內無怨女, 外無曠夫, 天地和而陰陽時, 無有邪氣間其間者, 觀《桃夭》之詩可見矣。 今則不然, 婚嫁之際, 爭尙華侈, 務勝於人。 故士族子女多失時曠居, 或其父母已亡, 則兄弟族黨貪財欲貨, 利其無後, 至終不得有室有家, 怨氣滋甚, 傷天地之和, 非細故也。 臣愚妄意婚姻聘幣之際, 奢靡之物一切禁之, 年二十未婚嫁, 有父母者罪父母, 無父母者罪兄弟, 無兄弟者罪族黨, 無族黨者官給飮食衣服, 以成男女之禮, 以消曠居之怨。 怨氣消則陰陽和, 陰陽和則災可弭矣。 其一。 擇守令。 臣聞宋臣朱熹上孝宗疏曰: “四海利病, 係斯民之休戚, 斯民休戚, 係守令之賢否”, 美哉言乎! 蓋四海之政, 人君不能自治, 分諸守令, 苟非其人, 民受其殃矣。 今也選擇守令, 法非不嚴, 雜科無識之徒、權門賄賂之流, 亦多有之, 暗於治民, 不恤政事, 用財不以節, 使民不以時, 年凶歲歉, 則病其獲撫字乖方之罰, 不以實聞, 流民告飢, 則病其有監臨斗量之勞, 不以時給, 民孰能枵腹忍飢, 以俟斗升之惠? 於是轉而歸富家貸私債, 待其腁胝之功甫訖, 鞭撻之苦滋甚, 醫得眼前之瘡, 剜割心頭之肉。 是故富者田連阡陌, 貧者無立錐之地, 或托富家爲奴, 或剃頭髮爲僧, 閭閻蕭條, 什亡四五, 爲監司者, 專以供給需應爲賢, 而不問撫字心勞。 故守令肆意貪酷, 剝百姓膏血, 羨義倉粟米, 半輸私家, 半入權門, 恬不知愧。 哀我斯民, 誰因誰拯? 其所控告, 籲天無從, 此非細故也。 臣愚妄意繩以重法, 不若先擇, 旣任而後疑, 不若勿任。 選擇之方, 先責之吏曹, 講文論難, 兼省書判, 吏曹見可然後升之憲府, 憲府視可然後升之政府, 政府視可然後升之殿下, 殿下視可然後用之, 則銓選必精, 而臨民之職得人矣, 臨民之職得人, 則民怨消矣, 民怨消, 則災可弭矣。 其一。 謹用捨。 國家用人, 有文武之科, 有雜學之科, 有承蔭之目, 有吏任之目, 科目之外, 又有孝子順孫之搜訪。 引見慶延, 收用林玉山、崔小河, 用人當矣。 卽位七年, 宋希獻以貪婪受戮, 九年金澍以贓吏見竄, 捨人當矣。 然臣竊觀慶延家居孝心純至, 天感亦多, 閨門斬斬, 隣里穆穆, 又心通性理之正, 學有經濟之才, 國人皆不以百里之器期之, 竟以尼山縣監歸任。 臣恐延年老, 退死之日已近, 若遲六年, 則奇器又加老矣。 且臣聞十室之邑, 必有忠信, 山林遺逸, 豈特數人而已? 在聖上求之如何耳。 昔燕昭王事郭隗, 而樂毅、劇辛至, 今殿下信任慶延, 則賢於慶延者, 豈遠千里哉? 賢人君子濟濟在朝, 左右王家, 則災可弭矣。 其一。 革內需司。 臣聞人君以天下爲家, 四海爲宮, 天下四海之民, 一家人也, 吾赤子也。 是故古之人君不與民爭利, 不蓄私藏。 其宮中所需, 則十卿祿, 祿十倍於卿, 則一歲宮中無私需足矣。 今則不然, 各於州郡建立私第, 稱爲本宮農舍, 私蓄穀米布帛, 日與民買賣取息。 而又於京中立內需司, 置別坐數員, 書題許多人, 往來州郡, 誅求無厭, 漕運上來, 蓄積紅腐。 或以之營寺社, 或以之修淫祀, 曰非關於國廩, 乃本宮私藏。 嗚呼! 天之生財, 只有此數, 不在民則在國, 不在國則在民。 臣不知內需司之財穀, 獨不出於吾民乎? 我朝治道遠追三代, 而獨內需一司因循漢桓、唐德之故事, 臣竊恥之。 殿下於往日旣〔知〕其弊, 稍減私債, 一國之民延頸望治。 臣愚妄願殿下廓公明之量, 燭小民之弊, 亟革是(寺)〔司〕, 奴婢屬掌隷院, 田地穀米屬戶曹, 器用屬工曹, 財帛屬濟用監。 若有王子、王孫、公主、翁主出宮家居, 則掌隷院奴婢以供之, 戶曹田地以供之, 工曹器用以供之, 濟用監財帛以供之, 各有定限。 其宮中(私)〔所〕需, 依王制十卿祿, 以全大體, 以慰民心。 大體存而民心歡, 則災可弭矣。 其一。 闢巫佛。 臣聞巫於三風居其一, 佛本西域之敎, 古之帝王皆外而不納。 《經》曰: “不作無益”, 又曰: “淫祀無福。” 以此。 殿下卽位以來, 崇儒雅, 闢異端, 巫覡放出城外, 僧徒不許入市, 一國人福也, 吾儒者幸也。 然淫祀罷矣, 而國巫之設也猶存, 臣不知國巫主何事? 釋敎弛矣, 而住持之置也尙存, 臣未知住持職何事? 徒蠱食國廩, 虛張禍福之說而已。 是以百姓皆曰: “國家亦有星宿廳, 小民何事獨不事巫? 國家亦有禪敎宗, 小民何事獨不事佛?” 於是人爭謟事, 或祈恩, 或稱家祀, 無冬無夏, 笙鼓不絶, 以謂人死、人生、人禍、人福皆由於巫。 或稱七七之齋, 或稱水陸之齋, 或稱日齋, 或稱齋僧飯佛, 猶恐不及, 以爲人壽、人夭、人貴、人賤、人死、身後之榮苦, 皆由於佛, 慢天欺神, 莫甚於此, 傷天地之和, 此一端也。 臣愚妄意風行草偃, 表正影直, 上有好者, 下必有甚焉者。 殿下先革國巫, 則淫祀不勞而息, 殿下先去住持, 則佛事不勞而自止矣。 異端息而天人和, 則災可弭矣。 其一。 興學校。 古者家有塾, 黨有庠, 術有序, 國有學, 而人生八歲入小學, 十五歲入大學, 無一地非學, 無一人非儒。 而大樂正年德高邁, 敎人以詩書六藝之文, 孝悌忠信之道, 故人自少及長, 習與性成, 沈潛性理之學, 優游聖賢之道, 以之事親則孝, 以之事君則忠, 以之事長則敬, 而才藝特餘事耳。 今也旣無家塾黨庠, 大學亦有名無實, 訓誥之學詞章之習, 其入人也深, 其誤人也久, 爲師儒者徒事於句讀, 爲弟子者爭名於甲乙, 摛章繪句, 駢四儷六, 傍蹊曲經, 已干靑雲, 殿下誰得而使之? 其間雖有一二窮理之學誠正之士, 亦不肯就大學, 恥師儒之非其人。 其意蓋曰: “我於彼學道則彼無道, 我於彼學業則彼無業。” 以臣觀之, 其說亦不誣也。 臣愚妄意職成均者, 先問左右, 左右皆曰可然後問諸卿相, 卿相皆曰可然後問諸大夫士, 大夫士皆曰可然後問諸國人, 國人皆曰可則必賢人君子也。 得一賢人君子以爲師表, 則學者之習自爾正, 人知孝悌忠信之爲可貴, 而詞章末習之爲可陋, 學校興而人才出矣, 人才出而蔚爲名臣, 則災可弭矣。 其一。 正風俗。 自司徒之職廢而風俗日趨於薄, 自《詩》ㆍ《書》之敎弛而風俗不能復古。 獻議者皆曰: “風俗之日薄, 時勢然也。 世道漸下, 人心澆薄, 風俗之不可復古也, 猶老者不可復少也”, 愚以爲不然。 唐、虞之風俗爲可厚, 則唐、虞之前有涿鹿之戰, 以亳邑風俗爲可厚, 則亳邑之前有(夏傑)〔夏桀〕之亂。 以漢、唐之風俗, 爲後世則文、景之化擬諸成、康, 貞觀之治視古無讓, 豈前代之風俗一於厚, 後世之風俗一於薄哉? 一治一亂相承於世, 治則亂, 亂則治耳。 高麗五百年間風俗極否, 娶同姓無異禽獸, 減親喪自同獷俗, 子論其父者有之, 奴論其主者有之, 以及辛禑之世極矣。 否極泰來, 我朝啓運, 列聖相承, 其傳至於殿下, 則正當治極之秋也。 司徒之法, 今可復行也, 《詩》、《書》之敎, 今可復擧也。 殿下章百姓, 則於變時雍, 唐、虞之風俗也, 殿下皇自敬德, 則朝野相讓, 周文之風俗也。 殿下敦孝悌, 則風俗自邇厚矣, 殿下躬節儉, 則風俗自以務本矣, 殿下惡虛名, 則風俗日趨於實矣, 殿下不言利, 則風俗日趨於義矣。 風俗之復古也, 在殿下一身, 孰謂後世之風俗不能復古之風俗哉? 雖然臣聞之, 虞舜有四凶之罪, 孔子有正卯之誅, 頑囂不率敎之罰, 聖人所不免。 今有身居玉堂位至堂上者, 祿非不多矣, 而不得容一妹, 化糧資生, 傷風敗俗, 自上犯之, 況其下者乎? 《記》曰: “而無禮, 雖能言, 不亦禽獸之心乎?” 臣亦以爲人而不仁, 雖有文學, 將安用彼哉? 臣愚妄意殿下用《周官》不孝不睦之刑, 罰一人以警其餘, 則敎化行而風俗正矣, 敎化行而風俗正, 則災可弭矣。 其一。 追復昭陵。 臣謹按我世祖惠莊大王, 以天錫勇智, 挾日月之明, 得天人之助, 廓淸大難, 化家爲國, 宗社幾危而復安, 斯民旣死而復生, 不意治化方洽, 孽牙其間, 丙子歲群奸煽亂, 驚動中外, 幾傾我社稷, 已而相繼伏誅, 芟刈殆盡, 而餘禍所及昭陵, 見廢二十餘年, 冤魂無依, 臣不知文宗在天之靈肯獨享禴祀蒸嘗哉? 臣不學無術, 聞見淺鄙, 固不知某事招某祥也, 某事招某災也。 然稽之於事, 酌之心, 則吾之心卽天地之心, 吾之氣卽天地之氣, 人心人氣之順, 乃天心天氣之順, 人心人氣之不順, 乃天心天氣之不順, 天心天氣之不順, 災之所以降也。 臣愚妄意昭陵之廢, 於人心未順, 天心所未順, 從可知矣。 縱曰: “已毁之主, 禮不當復入宗廟”, 惟當追復尊號, 改以禮葬, 一如先后之禮, 以答民心, 以答天譴, 以答祖宗之意, 出於尋常萬萬也, 豈不美哉? 若曰: “廢之更歷三代, 祖宗所未擧行者, 今不可追復禮葬”, 則請以世祖戊寅之訓明之。 其訓睿宗曰: “予當屯而汝當泰。 若局於吾迹而不知變通, 則非所以順吾之志也”, 夫事有可行時 有不可行時, 豈可泥於前不用變通哉? 而況我大明皇帝追復景泰之仁, 昭昭在天地間哉? 此卽當代事也。 伏願殿下留神採擇焉, 則豈特災息而已? 將見神人和, 天地位, 萬物育, 諸福之物, 莫不畢至矣。 古人云: “天心仁愛人君, 示之以災, 所以固其德, 示之以禍, 所以謹其志”, 殿下固其德謹其志, 則今日之雨土, 明日之甘露醴泉也。 臣閭閻一布衣也, 天門九重, 無路可言, 千載一時, 特下求言之詔, 欲聞弭災之方, 中心悅懌, 下覺多言之狂僭。 所以然者, 亦賈誼痛哭流涕之意, 田錫憂在朝夕之心也。 嗚呼! 漢文之世, 治隆無比, 大平興國, 千載一時, 而二臣之心如此, 忠君憂國之至也。 顧臣所願, 欲夫滄溟益潤, 日月增華, 幸寬鈇鉞之誅, 以廣求言之路, 昧萬死以聞。
命示承政院, 都承旨任士洪啓曰: “臣觀此疏, 其曰: ‘我於彼學道, 則彼無道, 我於彼學業, 則彼無業’, 孝溫以一介儒生, 恥師儒之非其人不可也。 其曰: ‘身居玉堂, 位至堂上, 祿非不厚矣, 猶不能容一妹, 化糧資生’, 此必有所指者, 國家聞此不問, 亦不可也。 其曰: ‘追復昭陵,’ 此臣子所不得議, 今孝溫擅議之, 亦不可也。” 傳曰: “昭陵今不當復議之。 其曰: ‘不能容一妹者,’ 不可聽一儒之言而問之也。” 士洪啓曰: “此疏與深源上疏相同。 深源薦慶延、姜應貞, 孝溫亦薦慶延。 臣竊聞之, 孝溫之徒有如姜應眞、(鄭如昌)〔鄭汝昌〕、朴演等, 別爲一群, 推應貞爲夫子, 指朴演爲顔淵, 常以行《小學》之道爲名, 相尙異論, 此固弊風也。 漢有黨錮, 宋有洛黨、蜀黨。此輩不及於古,然足爲治世之累,漸不可長。且以布衣而議國家之政,尤不可。” 傳曰:“今有求言之令, 言雖不中,豈可問乎?”
성종 91권, 9년(1478 무술/명성화(成化) 14년) 4월16일(정미) 2번째기사
남효온의 상소에 대해 의논하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어제 유생(儒生) 남효온(南孝溫)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몸이 옥당(玉堂)에 있고 지위가 당상(堂上)에 이르면 녹(祿)이 또한 많은데, 오히려 한 명의 누이를 포용하여 양식을 주어서 생활하게 하지아니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인륜(人倫)의 큰일이다. 또 소릉(昭陵)을 폐한 것은 선왕조(先王朝)8413)의 일이므로 형편이 회복하기 어렵다. 경등은 아는가?”하니,
영사(領事) 정창손(鄭昌孫)이 대답하기를,
“신이 그 상소를 보니 말이 모두 지나쳐서 적절하지 못하니, 진실로 채택하여 행하기가 어렵습니다.”하였고,
영사 심회(沈澮)는 말하기를,
“한 명의 누이를 용납하지 못한다는 말은 반드시 가리킨 바가 있을 것이니, 국문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구언(求言)하고서 도리어 국문하는 것은 불가함이 없겠는가?”하였다.
정창손은 말하기를,
“과연 상교(上敎)와 같습니다.”하였고,
동부승지(同副承旨) 이경동(李瓊仝)은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남효온은 주계부정(朱溪副正) 심원(深源)이 천거한 서생(書生) 강응정(姜應貞)의 무리인데, 효온의 무리가 일찍이 성균관에 있을 때에 스스로 서로 추존(推尊)하여 강응정을 부자(夫子)라고 일컫고 박연(朴演)을 안연(顔淵)이라고 일컫기까지 하며, 그 나머지를 차례로 지목하여 괴이한 행동을 창조했다고 합니다. 예전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처사(處士)들이 횡의(橫議)하였는데, 이제 성명(聖明)하신 밑에서 어찌 횡의가 있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를 붕당(朋黨)이라고 이르는 것은 옳지 못하다.
내버려두고 국문하지않는 것이 옳다.”하였다.
이경동이 또 아뢰기를,
“남효온의 상소가 주계부정의 상소와 서로 같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한 손에서 나온 것인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효온이 비록 주계부정과 함께 의논하여 상소를 썼을지라도, 어찌 억측으로 국문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이경동이 말하기를,
“남효온이 천거한 최소하(崔小河)는 신이 일찍이 보건대, 그 효행(孝行)은 알 수 없으나 일을 다스리는 것은 남과 다른 바가 없습니다.”하였고,
지사(知事) 홍응(洪應)은 아뢰기를,
“최소하는 후진(後進)의 선비이므로 신이 자세히 알지못하나 경연은 신과 같이 성균관에 있었는데, 사람됨이 말이 적고 사람들과 더불어 희학(戱謔)하기를 즐겨하지아니하며 재주와 능함이 없었습니다. 또 벗이 없으므로 질실(質實), 순박(淳朴)하다고 이르는 것은 가하거니와,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고 이를 수는 없으니, 참으로 이른바 일개 부유(腐儒)일 뿐입니다.”하였으며,
이경동은 말하기를,
“남효온이 이르기를, ‘내가 저 사람에게서 도(道)를 배우고자 하나 저 사람은 도가 없고, 내가 학업(學業)을 묻고자하나 저 사람은 학업이 없다.’고 하였으니, 스승과 제자사이에 말을 이같이 할 수가 없습니다.”하였고,
정창손은 말하기를,
“전자에 김돈(金鐓), 김말(金末)은 모두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착한 자로서 항상 성균관에 벼슬하면서 가르침에 도(道)가 있었기 때문에 인재를 성취한 공이 많았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현재에는 과연 스승이 될만한 자가 없는가?”하니,
홍응이 말하기를,
“남효온이 말하였을 뿐만아니라 신도 또한 듣건대, 유림(儒林)에서 모두 성균관에는 한 사람도 가르침을 맡을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하였고,
장령(掌令) 박숙달(朴叔達)은 말하기를,
“전일에 성상께서 유진(兪鎭)을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삼고자하니, 이조(吏曹)에서 아뢰기를, ‘유진은 한 명의 누이를 보호하지못하여 시장에 다니면서 구걸하게 합니다.’고 하여, 이로써 추고(推考)함을 당하였으나, 그때는 유진이 벼슬이 낮고 녹(祿)이 박하여 형편이 보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버려두고 죄주지 아니하였는데,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성균관안의 장관(長官)으로 가르치기를 부지런히 하는자는 과연 없습니다. 동지사(同知事) 홍경손(洪敬孫), 임수겸(林守謙), 대사성(大司成) 권윤(權綸)등은 오래 그 직임에 있었으나, 또한 후학(後學)을 성취시킨 공효가 없으니,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단정한 자를 골라서 그 벼슬을 맡게하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하였으며, 이경동은 말하기를,
“이제 만약 홍경손등의 벼슬을 바꾸면 저들이 반드시 말하기를, ‘서생(書生)의 상소로 인하여 갈린 것이다.’라고 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이제 벼슬을 바꾸는 것은 옳지못하다.”하였다.
註8413]선왕조(先王朝): 세조.
○御經筵。 講訖, 上顧謂左右曰: “昨日儒生南孝溫上疏言: ‘身居玉堂, 位至堂上, 祿亦多矣, 猶不能容一妹, 使之化糧資生’, 此固人倫大事。 且廢昭陵, 先王朝事, 勢難復之。 卿等知否?” 領事鄭昌孫對曰: “臣見其疏, 言皆過越不切, 固難採行。” 領事沈澮曰: “不能容一妹之言, 必有所指, 問之何如?” 上曰: “求言而反問言者, 無乃不可乎?” 昌孫曰: “果如上敎。” 同副承旨李瓊仝曰: “臣聞孝溫, 朱溪副正深源所薦書生姜應貞之徒也。 孝溫之輩嘗居館時, 自相推尊至以應貞稱夫子, 以朴演稱顔淵, 其餘以次目之, 創爲詭異之行。 昔戰國時, 處士橫議, 今聖明之下, 豈宜有橫議者乎?” 上曰: “謂之朋黨不可, 置而勿問可也。” 瓊仝又啓: “孝溫疏與朱溪疏相同, 臣意疑出一手也。” 上曰: “孝溫雖與朱溪共議作疏, 安可以臆度而問之乎?” 瓊仝曰: “孝溫所薦崔小河, 臣嘗見之, 其孝行則未可知也, 治事固無異於人者。” 知事洪應啓曰: “小河後進之士, 臣未詳知, 慶延則臣同時居館, 爲人寡言, 不喜與人戲謔, 旣無才能。 又無朋友, 謂之質淳則可, 不可謂社稷之臣, 眞所謂一腐儒耳。” 瓊仝曰: “孝溫云: ‘我欲於彼學道, 則彼無道, 我欲於彼問業, 則彼無業’, 師(第)〔弟〕之間, 言不可若是。” 昌孫曰: “曩者金鐓、金末皆經明行修者也, 常仕成均館, 敎誨有道, 故多有成就之效。” 上曰: “今時果無爲人師者乎?” 洪應曰: “非徒孝溫言之, 臣亦聞儒林咸言館中無一人自任敎誨者也。” 掌令朴叔達曰: “前日上欲以兪鎭爲弘文館副提學, 吏曹啓曰: ‘鎭不能庇一妹, 使行乞於市’, 以此被推。 然其時鎭位卑祿薄, 勢不能庇, 故置而不之罪, 今則未可知也。 館中長官果無敎誨不怠者。 如同知事洪敬孫ㆍ林守謙、大司成權綸等, 久處其任, 亦無成就後學之效。 擇經明行修者, 使帶其職幸甚。” 瓊仝曰: “今若改敬孫等職, 則彼必以爲因書生上疏而遞之矣。” 上曰: “然。 今不可改差也。”
성종 91권, 9년(1478 무술/명성화(成化) 14년) 4월 24일(을묘) 1번째기사
한명회가 심원과 남효온의 상소에서 교결을 지적함에 이를 의논하다
경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영사(領事) 한명회(韓明澮)가 아뢰기를,
“전일에 주계부정(朱溪副正) 심원(深源)이 올린 글에 이르기를, ‘세조조(世祖朝)의 공신(功臣)은 쓸 수 없다.’고 하였으니, 노신(老臣)은 이를 듣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세조는 중흥(中興)한 불세출(不世出)의 임금이신데, 심원이 어느 신하를 가리켜서 쓸 수 없다고 하지아니하고 세조의 공신은 모두 쓸 수 없다고 말하였으니, 신은 매우 통분(痛憤)합니다.”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주계(朱溪)의 이 말은 깊은 뜻이 없는 것이다. 내가 인견(引見)하고 가리키는 뜻을 물으니, 주계가 말하기를, ‘공신(功臣)이 만약 죄를 범하여, 벌을 주면 은혜가 상할 것이고, 벌을 면하게 하면 의(義)가 상하게 되니, 이 때문에 쓰기를 원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는데, 그 말과 소(疏)의 뜻이 같지 아니하니 말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어찌 글의 뜻을 논하겠는가? 또 상소는 세조를 배척한 것이 아니고 다만 공신을 쓰는 것이 불가하다고 한 것이다.”하니,
한명회가 말하기를,
“그 세조 때의 공신을 쓰지말라고 말한 것은 세조를 비난하고 헐뜯은 것입니다. 또 듣건대 남효온(南孝溫)도 글을 올려 소릉(昭陵)을 추복(追復)하자고 말하였다 하는데 남효온이 심원과 더불어 교결(交結)하였기 때문에 그 말한 바가 서로 같으니, 이를 점점 자라나게 할 수가 없습니다.”하였고,
대사헌 유지(柳輊)는 아뢰기를,
“소릉을 추복하고 공신을 임용하지못하게 한 몇 말은 반드시 정유(情由)가 있을 것입니다. 또 이들은 서로 교결하여 붕비(朋比)의 형상이니, 청컨대 국문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말한 바가 비록 그를지라도 이미 구언(求言)하였는데 또 국문하는 것이 옳겠는가? 저들이 비록 편당을 하였을지라도 능히 무엇을 하지못할 것이다. 광동(狂童)의 일을 어찌 족히 국문하겠는가?”하였다.
기사관(記事官) 안윤손(安潤孫)이 아뢰기를,
“성명(聖明)하신 주상의 밑에서 어찌 붕당(朋黨)이 있겠습니까? 다만 남효온 과 강응정(姜應貞), 박연(朴演)등 약간 명이 소학계(小學契)를 만들어, ‘소학 의 도(道)를 행한다.’고 이름하고 때때로 여럿이 모여서 강론(講論)하며, 강응정을 부자(夫子)라고 일컫고 박연을 안연(顔淵)이라고 하면서 혹은 스스로 서로 표방(標榜)하고, 혹은 기롱하고 없신여기는 것의 말하는 바는 알 수 없으나, 한 때의 유생(儒生)으로 비웃지아니하는 자가 없었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추핵(推劾)하려고 하더라도 모두 전해들은 말이므로, 말에 관련되는 자가 많아서 사실을 밝혀내기가 어려울 것이다.”하였는데,
유지(柳輊)가 말하기를,
“구언(求言)한 것은 당시의 폐단을 듣고자 하는 것인데, 이같이 부도(不道)한 말은 국문하여도 무방합니다.”하였다.
임금이 좌우에게 묻기를,
“어떻게 할까?”하자,
영사 노사신(盧思愼), 정언(正言) 성담년(成聃年)이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구언(求言)으로 인하여 말하였으니, 말이 비록 맞지아니할지라도 이는 광동(狂童)의 일이므로 추국(推鞫)하는 것은 미편(未便)합니다”하였다.
○乙卯/御經筵。 講訖, 領事韓明澮啓曰: “前日朱溪副正深源上書曰: ‘世祖朝功臣不可用’, 老臣聞之, 未解其意。 世祖中興不世之主, 深源不指某臣爲不可用, 而泛言世祖功臣不可用, 臣切痛憤。” 上曰: “朱溪此言, 甚無意。 予引見問指, 朱溪云: ‘功臣若犯罪, 罰之則傷恩, 免之則傷義, 是以不願用也。’ 其言與疏意不同, 然所言如是, 何論疏意? 且疏非斥世祖, 只言功臣不可用也。” 明澮曰: “其言不用世祖勛臣者, 所以非毁世祖也。 且聞南孝溫亦上書, 言追復昭陵, 孝溫與深源交結, 故其所言相似, 漸不可長。” 大司憲柳輊啓曰: “復昭陵, 不任功臣, 此兩言必有情由。 且此人相交結朋比之狀, 請問之。” 上曰: “此人所言雖非, 旣求言而又問之可乎? 彼雖朋比, 無能爲也。 狂童之事, 烏足問哉?” 記事官安潤孫啓曰: “聖明之下, 何有朋黨? 但孝溫與姜應貞、朴演等若干人作小學契, 名曰行《小學》之道, 時時群聚講論, 稱應貞爲夫子, 朴演爲顔淵, 或自相標榜, 或譏侮者之所言, 未可知也, 然一時儒生莫不笑之。” 上曰: “若推之, 則皆傳聞之說, 辭連者衆, 難鎰情。” 柳輊曰: “求言欲聞時弊, 如此不道之說, 鞫之無妨。” 上問左右曰: “何如?” 領事盧思愼、正言成聃年曰: “此人等因求言而言, 言雖不中, 乃狂童之事, 推鞫未便。”
성종 151권, 14년(1483 계묘/명성화(成化) 19년) 2월14일(정축) 3번째기사
생원 강혼, 진사 이상 등 각각 1백인을 뽑다
생원(生員) 강혼(姜渾), 진사(進士) 이상(李瑺)등 각각 1백인을 뽑았다.
○取生員 姜渾 、進士 李瑺等各一百人。
강이온(姜利溫) - [생원진사시] 성종(成宗) 14년 (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29위
강세준(姜世準) - [생원진사시] 성종(成宗) 14년 (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38위
강말손(姜末孫) - [생원진사시] 성종(成宗) 14년 (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12위
강응정(姜應貞) - [생원진사시] 성종(成宗) 14년 (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二等) 14위
강자어(姜子魚) - [문과] 성종(成宗) 14년 (1483) 계묘(癸卯)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丙科) 12위
강신효(姜藎孝) - [생원진사시] 성종(成宗) 14년 (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67위
연산 31권, 4년(1498 무오/명홍치(弘治) 11년) 8월 16일(기묘) 2번째기사
십철(十哲)이라고 칭한 자를 국문하게 하다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강응정을 칭하여 부자(夫子)라한 자는 누구이며, 문도(門徒)가 되어 십철(十哲)이라 칭한자는 누구인가 국문하라.”하였다.
○傳旨義禁府曰: “稱 姜應貞 爲夫子者誰? 作爲門徒, 稱十哲者誰? 鞫之。”
연산 31권, 4년(1498 무오/명홍치(弘治) 11년) 8월 16일 기묘 3번째기사
승정원에서 강응정을 국문하는 일의 부당함에 대해 아뢰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자광이 아뢴 바 강응정(姜應貞)을 추고(推考)하는 일은, 신등은 미편하다고 생각되옵니다. 응정이 30년 이전에 뜻이 같은 자를 모아서 소학계(小學契)를 만들어 소학의 도로써 일을 삼으니, 당시 사람이 조롱하기를 부자(夫子)라 하였던 것이온데,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추론(追論)할 것이 없사오며 또 소위가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것이 아닌데 어찌 꼭 국문을 하오리까?”하니, 전교하기를,
“너희들은 다만 명령을 받들 따름이요, 서로 구원해서는 아니된다.”하였다.
○承政院啓: “子光所啓姜應貞推考事, 臣等以爲未便。 應貞退計三十年間, 聚同志者, 作《小學》契, 以《小學》之道爲事, 時人譏之曰夫子, 歲月已久, 不宜追論。且所爲之事,非關繫綱常,何必鞫之?” 傳曰:“爾等但承命而已,不可相救。”
중종 12권, 5년(1510 경오/명정덕(正德) 5년) 10월 10일(계사) 1번째기사
《대학》을 진강하다가 선비의 학습 태도와 교육방식등에 대해 의논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대학(大學)》의 진강(進講)을 시작하였는데, 참찬관(參贊官) 김세필(金世弼)이 강하여 ‘속된 선비들의 기송(記誦)과 사장(詞章)의 풍습’이란 대문에 이르러 아뢰기를,
“삼대(三代) 이하 세상의 유자(儒者)들은 오로지 사장(詞章)만을 숭상하여, 그들의 학문은 다만 구두(句讀)를 배울 뿐이고 의리(義理)의 근원을 탐구하지않기 때문에 세상에는 참선비[眞儒]가 없고 사습(士習)은 날로 낮아져서, 이치를 깊이 연구하고 마음을 바르게하는 선비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선비들의 풍습도 오로지 사장(詞章)을 업으로 하고 경술(經術)을 정미하게 다스리지않아서, 능히 마음에 성현도학(聖賢道學)의 깊은 뜻을 깨달은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하고,
헌납 성세창(成世昌)은 아뢰기를,
“옛글에 이르기를, ‘머리는 곧게 가지고, 발은 무겁게 움직이며, 앉는 것은 시동(尸童)처럼 하고, 서는 것은 재계하는 것처럼 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옛날 배우는 자의 의용(儀容)의 절도(節度)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배우는 자가 간혹 성현을 흠모하여 조금만 옛사람의 행한 절도를 실행하면, 경박한 무리들이 떼를 지어 그를 가리키며 우활(迂闊)하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선비된 자가 스스로 몸을 닦는데 굳세지못하며, 조정에 서기에 이르면 다만 술잔기울이는 것을 즐겨할 뿐입니다.”하고,
세필이 또 아뢰기를,
“지금 학교(學校)의 사습(士習)이 무너져서, 유자(儒者)중에 간혹 성현의 언동(言動)의 절도를 흠모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떼를 지어 괴이하게 여기며 흉보고 헐뜯곤 합니다. 이 폐단을 구제하는 방법으로써 마땅히 사람을 골라 사표(師表)로 임명하고 진작(振作)시켜 교양(敎養)하게 한다면 어찌 그 효과가 없겠습니까? 옛사람이 사표를 가리켜 말하기를 ‘유자(儒者)의 영수(領袖)’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사람을 골라서 지금의 유자의 영수를 삼으소서.”하고,
영사 성희안이 아뢰기를,
“조종조(祖宗朝)에는 명유(名儒)가 있었습니다. 강응정(姜應貞)이란 자는 자못 학술의 조예가 있고 또 효행(孝行)이 있어서, 사류(士類)가 모앙(慕仰)하여 모여서 스승으로 삼았는데, 그 무리들이 말하기를 ‘……(1자 빠짐)…법이 있다.’하였습니다. 혹 그를 가리켜 ‘강부자’(姜夫子)라고 글로 써서 비웃는 자가 있었으므로, 그 무리들이 물의에 어긋날까 두려워서 다 흩어져 갔습니다. 지난번에는 정성근(鄭誠謹)이 성종(成宗)을 위하여 3년상을 입자, 폐주(廢主)가 그를 궤이(詭異)하다고 하여 큰죄를 주니, 이로부터 사습(士習)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신은 지금 늙어서 제생(諸生)들의 하는 일이 어떠한지 자세히 알지못하나, 그 사이에 어찌 한 사람의 학행(學行)높은 이가 있는 것을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헐뜯는 자가 없겠습니까?”하고,
참찬관 이자견(李自堅)이 아뢰기를,
“송(宋)나라 때에 두 정자(程子)는 참선비였는데, 소식(蘇軾)이 그를 바르지 않다고 헐뜯고 비웃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무리가 서로 나무라고 헐뜯어서 당파를 이루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인들 어찌 이와 같은 풍습이 없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깊이 살피시어 학행이 있는 이는 포상하고 경박하여 덕행이 없는 자는 징벌하게 하소서.”하였다.
세필이 또 아뢰기를,
“만약 상벌(賞罰)을 가지고 선비를 가르친다면 그것은 이(利)로써 유인하고 협제(脅制)하는 술책입니다. 지금 교도(敎導)하는 방법은 윗사람이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하여 인도하는데 있고, 그 다음은 사표(師表)에 어진사람을 얻어서 교양의 직책을 맡기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몸소 행하여 교화(敎化)를 인도하시고 또 사유(師儒)를 선택하여 오랜 세월을 기다리면서 《시경(詩經)》청청자아(菁菁者莪)3276)의 교화를 이룩하소서.”하고,
자견이 아뢰기를,
“비록 상벌로써 선비를 가르칠지라도, 그 사이에 스스로 절목(節目)이 있는 것입니다.”하고,
세필이 또 아뢰기를,
“금과옥조(金科玉條)가 지극히 상밀(詳密)한데, 어찌 따로 절목(節目)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근일에 국가에서 한 가지 일을 행하고, 한 가지 정령(政令)을 발할 때마다 번번이 절목을 마련하는데, 이것은 지금의 폐단입니다”하고, 희안이 아뢰기를,
“상벌은 가장 교육의 방법이 아닙니다.”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때 생원 김식(金湜), 조광조(趙光祖)등이 김굉필(金宏弼)의 학문을 전수(傳受)하여, 함부로 말하지 않고 관대(冠帶)를 벗지 않으며, 종일토록 단정하게 앉아서 빈객을 대하는 것처럼 하였는데, 그것을 본받는 자가 있어서 말이 자못 궤이(詭異)하였다. 성균관이 ‘그들이 스스로 사성십철(四聖十哲)이라 일컫는다.’고 하여 예문관, 승문원, 교서관과 통모(通謀)하여 그들을 죄에 몰아넣으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경연관이 힘써 말한 것이다.
註3276]청청자아(菁菁者莪): 임금이 빈객을 맞아 연회를 베풀 때 연주하는 노래로, 어진이를 구하는 뜻. 《시경(詩經)》소아(小雅)에 “물가엔 푸른 쑥이 있는데, 어진이를 만나니 기쁘기 그지없도다.”하였다.
○癸巳/御朝講。 始進講《大學》。 參贊官金世弼, 講至俗儒記誦詞章之習, 乃曰: “三代以下, 世之儒者, 專尙詞章, 其學文只句讀而已, 不究義理之源, 世無眞儒, 士習日下, 不見窮理正心之士。 我國士習, 專以詞章爲業, 不精治經術, 能心得於聖賢道學之蘊奧者, 無一人焉。” 獻納成世昌曰: “古云: ‘頭容直足容重, 坐如尸立如齋。’ 皆古之學者儀容之節。 今之學者, 或有歡慕聖賢, 稍行古人所行之節, 澆薄之輩, 群指以爲迂, 故儒者不能自强於脩身, 至於立朝, 則只以杯酒娛樂而已。” 世弼曰: “今學校士習大毁, 儒者或有慕賢聖言動之節, 則必群怪詆毁。 救之之方, 宜擇人以任師表, 委以作成敎養, 則豈無其效乎? 古人指師表曰: ‘爲儒者領袖。’ 殿下宜擇人, 以爲今之儒者領袖。” 領事成希顔曰: “在祖宗朝, 有名儒姜應貞者, 頗有學術, 又有孝行, 士類慕仰, 聚而師之。 其徒言有法, 人或指爲 ‘姜夫子’, 筆之於書, 譏笑之, 其徒恐犯物議, 皆散去。 頃者鄭誠謹, 爲成宗, 行三年之喪, 廢主以爲詭異, 置之大罪。 自此儒者之習大毁。 今臣年老, 不能詳知諸生所爲何如, 然其間豈無一有學行之高, 而群聚相詆者乎?” 參贊官李自堅曰: “宋之時, 兩程爲眞儒, 而蘇軾誹詼不正, 故其徒相爲詆毁, 至於立黨, 今豈無如此之習乎? 願殿下深察, 其有學行者, 褒奬之, 輕薄無行者, 懲罰之。” 世弼曰: “若以賞罰敎士, 則是利誘脅制之術也。 今之敎導作成之方, 在於上之人躬行心得以導之。 其次擇師表之賢者, 以任敎養之責也。 願殿下躬行率化, 又擇師儒, 悠久待之, 以致菁莪之化。” 自堅曰: “雖以賞罰敎士, 其間自有節目。” 世弼曰: “金科玉條, 詳密無餘, 何別有節目? 近日國家, 行一事, 發一政, 每每磨鍊節目, 此當今之弊也。” 希顔曰: “賞罰最非敎育之方也。”
【史臣曰: “是時生員金湜、趙光祖等, 傳金宏弼之學, 不放言不脫冠帶, 終日危坐, 如對賓客, 有效之者, 言頗詭異。 成均館以爲, 自稱四聖十哲, 通於藝文館、承文院、校書館, 欲致於罪未果。 故經筵官力言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