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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 - 황수영
『물질과 기억』의 부제가 '신체와 정신의 관계에
관한 시론'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베르그손은 우
선 심신관계, 곧 정신과 물질의 관계 문제에 천착한
다. 데카르트가 정신과 물질을 각각 '사유 실체'와
'연장 실체'로 구분하고 각각을 독립된 ‘실체’로 규
정하면서 심신관계의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이후
이 문제는 철학과 과학의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말
브랑슈나 라이프니츠와 같은 거장들은 심신관계의
문제에 대해 '심신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없지
만,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해 일치한다’라는 ‘심신평
행론’을 내놓는다. 이에 반대하면서 정신 작용 역시
대뇌의 분자운동의 결과라고 보는 유물론적 입장이
등장하기도 하고, 생물학의 발달에 따라 생명체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생기론 같은 사조들이 등장하기
도 했다.
이렇게 오기간 지속된 논쟁을 일단락 지은 것이 바로 베르그손이다. 베르그손은 신체와 정신과의 관계, 즉 ‘물질’과 ‘정신’과의 관계를 ‘이미지’와 ‘기억’이라는 독특한 개념들로 설명하면서 근대의 심신관계 및 인식론에서 드러난 난점들을 가볍게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이 책 『물질과 기억, 시간의 지층을 탐사하는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이하,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에서 저자는 베르그손이 어떻게이런 난점을 넘어서고 있는지, 그럼으로써 어떤 철학의 지평이 새롭게 열리고 있는지를 『물질과 기
억』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
다.
1)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미지이다 - ‘이미지 존재
론’
눈앞에 찻잔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눈을 뜨면 찻
잔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사라진다. 이렇게 지각되
는 대상을 베르그손은 ‘이미지’라고 부른다. 이뿐만
이 아니다. 눈을 돌리면 시야에 들어오는 책상, 의
자, 책, 화분 심지어 사람들까지, 지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이미지이다. 나아가 지금 내
눈 앞에 있지 않은 모든 것들, 곧 존재하는 모든 것
들 역시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들은 모두 과학적 법
칙에 따라 서로 작용·반작용하는데, 이들 중에 특이
한 이미지들이 존재한다. 자극에 자동적으로 반응
하지 않고, ‘고유한 방식에 의해 선택’을 하는 듯이
보이는 이미지들이 그것인데, 이런 이미지들이 바
로 생명체이며, 그 중 가장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나의 신체이다. 이런 생명체들은 삶에 필요한
방식으로 이미지들을 ‘지각’하고 반응을 선택하거
나 유보한다. 예컨대 우리는 찻잔을 볼 때, 그 실재
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차를 마시기 위한' 것으
로 지각한다. 소가 풀을 뜯을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소는 풀의 개별적인 특성(예컨대 이 풀이 토끼풀인
지 씀바귀인지)을 지각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풀
일반'을 지각한다. 따라서 우리가 무언가를 지각한
다는 것은 무언가를 더하는 과정이 아니라 존재하
는 모든 것, 곧 ‘전체 이미지'에서 필요하지 않은 부
분을 빼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베르그손 철학의 기본이 되는 ‘이미지
존재론’이다. 저자는 이 책 『이미지와 기억의 미
학』을 통해 이 ‘이미지 존재론’에, 실재론과 관념
론 사이에서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온 인식
론의 문제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베
르그손이 인식을 존재로 전환해버림으로써, 실재를
가정할 필요가 없는 존재론이 완성되었기 때문이
다.
우리에게 물질은 '이미지들'의 총체이다. 그리고 우
리가 이미지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관념론자가
표상이라고 부른 것 이상의 존재, 그리고 실재론자
가 사물이라고 부른 것보다는 덜한 존재, 즉 사물과
표상 사이의 중간 길에 위치한 존재이다. 베르그
손, 『물질과 기억』, 22쪽(본문 56쪽에서 재인
용).
2) 모든 과거는 기억으로 남는다 - ‘순수기억’
영화 「메멘토」에서 주인공의 기억은 15분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 그래서 ‘나’를 유지하기 위해 끊
임없이 기억을 몸에 새겨야만 한다. 올리버 색스의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나오는 지미
라는 환자의 사례는 더욱 심각하다. 이 환자의 기억
은 1분도 지속되지 않는다. 말하고 추론하는 능력
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그의 기억은 19세에서 멈
춰 있고, 45세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19세의 정체
성을 가지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런 현대적인 사례들을 들어 보
이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동일성(identit
y)의 문제가 기억의 작용을 고려하지 않으면 답할
수 없는 문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이를 통해
데카르트나 칸트와 같은 합리주의 진영의 철학자들
이 ‘기억’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살피고 있다. 이
들 합리주의 진영의 철학자들에게 이 기억의 문제
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영구불변한 ‘진리’를
중시했던 데카르트는 기억과 상관없이 진리는 매순
간 시도할 때마다 동일하게 나타나야 하며, 의식은
존재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실체이
기 때문에 자기동일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
았다. 칸트는 영혼이 하나의 실체인지 부분들로 이
루어져 있는지를 묻는 문제 자체가 이율배반적인
것이며 인간의 지성으로는 답할 수 없다고 주장한
다.
이와는 달리 베르그손에게 의식은 곧 기억이다. 의
식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느끼고 경험한 모든 내용
을 포함하는 것이며, 의식상태는 끝없는 흐름 속에서 연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흘러갔다고 해서 완전
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현재 의식에 나타나
지 않을 뿐인데, 베르그손은 이런 의식을 '무의
식’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의식은 넓은 의미에서는
개인이 살아오면서 경험한 전체이고, 좁은 의미에
서 현재 의식에 떠오른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식은 바로 기억인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의 성격이란 무엇인
가? 그것이 우리가 출생 이후부터 살아온 역사, 심
지어 출생 이전의 역사를 응축한 것이 아니라면 말
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출생 이전의 성향들도 함께
간직하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우리는 과거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가지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
리가 욕망하고 의지하고 행위하는 것은 원초적 영
혼의 만곡을 포함하는 과거 전체와 더불어서이다.
·베르그손, 『창조적 진화』, 21쪽.
여기에서 베르그손의 지속 개념을 잘 보여주는
‘순수기억’이라는 개념이 도출된다. 내가 태어나서
부터 겪어온 나의 개인적 체험 전체, 사라지지 않고
마치 눈사람처럼 끊임없이 부풀면서 존재하는 개인
의 체험 전체를 베르그손은 '순수기억'이라는 개념
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개념에 기초하여 베르그손
은 『물질과 기억』의 다음 저서인 『창조적 진
화』를 통해 본격적으로 개인의 정신을 생명과 물
질의 지속 그리고 우주적 흐름 속에 위치시키고 있
다. 베르그손 전체 철학의 체계에서 본다면 이 순수기억은 우주적 지속의 일부이며 생명적 지속의 연
장인 개인적 지속이다. 다시 말해 개인의 체험 전체
는 우주 전체가 겪어온 모든 체험의 일부이며, 생명
이 탄생하면서부터 지금의 자신에게까지 이어져온
체험의 연장이다.
3) 19세기 과학 발달의 영향과 과학적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
앞서 언급했듯이 베르그손은 「물질과 기억』을
통해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베르그손은 19세기까지 생물학, 생리학, 병리
학에서 이뤄진 성과를 광범위하게 참조했다. 특히
베르그손은 실어증에 관한 기존의 과학적 탐구들을
꼼꼼히 참조하면서, 기억이 뇌의 일정부분에 저장
된다는 ‘대뇌국재화론'을 비판하고 기억의 형이상
학적 측면을 밝혀낸다. 그가 볼 때 의식과 뇌의 관
계를 탐구하는 것은 과학을 벗어난 철학적 영역이
며, 따라서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영역에서 벗어나
과학으로 형이상학의 영역까지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베르그손은 과학적
환원주의를 비판하고 형이상학에 과학을 보완하는
역할을 부여한다. 철저히 과학적 토대에 입각해 관
찰 내용을 분석하고 나서, 그 전체의 통합적 의미를
파악하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과학적 해석을 넘어서
는 철학적 통찰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런 심신관계에 대한 관심과 과학적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은 베르그손 철학의 철학사적 배경에서
기인한다. 베르그손은 흔히 멘 드 비랑, 라베송으로
이어지는 프랑스 유심론을 완성한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베르그송의 철학은 하나의 철
학 전통으로 재단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베
르그손은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에서 생겨난 모순
을 해결하려는 다양한 철학적 노력들(독일 관념론,
영국 경험론, 프랑스 계몽주의 등)을 비판적으로 종
합하고 19세기 생물학과 심리학의 발달에서도 일
정한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 체계를 수
립하기 때문이다.
베르그손을 통해 만나는 생명과 성찰의 철학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베르그손은 다양한 측
면에서 근대의 난점들을 넘어서고 있다. 그는 주체
와 객체의 이분법,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을 ‘이미지
존재론’과 ‘기억’이라는 지속의 이론 속에서 해소하
여, 인간 중심주의와 과학 만능주의로 나아가던 근
대 이성의 기획에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베르그손의 철학이 지금, 여기의 우리에
게는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무엇보다 과학은
형이상학과 상호보완적으로 작업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생명의 영역
에서 오직 '지성'의 관점만으로는 생명 현상을 올바
르게 설명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새겨 들어야 할
지점이다. 작년 말 ‘황우석 사태’로 드러난 우리 사
회의 일반적 가치관에서 생명에 대한 어떠한 성찰
도 없는 맹목적 과학주의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
이다.
꼭 ‘황우석 사태’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한국 사회에
서 과학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획득한 것처럼 보인
다. 과학에 올바른 성찰을 제시해야 할 과학철학은
과학의 시녀로 전락해 버렸다. 분자생물학의 발달
로 생명의 기초를 DNA분석을 통해 낱낱이 밝힐 수
있다는 입장이 대두되고 있으며, 이제 생명에 대한
과학의 지배는 이제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오늘날 한국 사회가
베르그손과 만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 베르그손의
생명 형이상학은 인간 내부에 잠재하는 생명적 직
관을 개발하도록 촉구하고, 보편적 인류애와 전체
생명계에 대한 감성을 고양시킬 수 있는 철학이다.
황수영이 소개하는 이런 베르그손 철학과의 만남은
그녀의 말처럼 “오늘날 한국 사회의 황폐화된 생태
학적 감수성을 고양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