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 제대로 한 날
유월 초순 화요일이다. 주말부터 아내가 병실에 머물러 부재중이라도 생활에 불편을 느끼지 못함에서 그간 내가 살아온 중년 이후 삶의 편린을 보는 듯하다. 산사 템플 스테이보다 더 간소한 아침밥을 해결하고 병실 아내에게 문자로만 안부가 오갔다. 이후 현관을 나서 등굣길에 올랐다. 아침 일찍 들녘을 산책한 후 마을도서관에서 지난번 마음에 두고 못다 읽은 책을 볼 요량이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동네 상가에서 테이크아웃으로 커피를 한 잔 받았다. 아침부터 활동하는 시간이 남들보다 많아 카페인으로 정신을 맑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들녘으로 나가면 가게를 만날 수 없기에 여건 될 때 확보해 두었다. 주남저수지를 비켜 간 죽동마을을 산책 기점으로 정했기에 원이대로로 나가 대방동을 출발 대산 들녘 상리마을로 가는 32번 녹색버스를 타려는 길이다.
외동반림로 보도를 따라 생태 하천으로 복원된 반송 소하천 곁을 걸으니 며칠 전 흰뺨검둥오리 가족이 떠올랐다. 어미가 예닐곱 마리 새끼를 거느리고 먹이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행동반경을 넓혀 어디로 따났는지 보이질 않았다. 대신 그러렁대는 소리가 들려와 냇바닥을 내려다보니 황소개구리 한 마리가 어슬렁거려 폰 카메라를 꺼내 렌즈를 확대해 피사체로 삼아 사진에 담았다.
스무날 전 개통된 간선도로 급행버스 운행체계(S-BRT)로 바뀐 정류소에서 대산 들녘 상리로 가는 버스를 골라 탔다. 충혼탑을 둘러 가는 가로변에는 현충일을 앞둔 호국 영령을 위로하는 현수막이 추모 분위기를 돋우어 마음이 숙연해졌다. 창원대로로 나간 버스는 명곡교차로로 되돌아 와 도계동 만남의 광장에서 용강고개를 넘어 용잠삼거리에서 동읍 행정복지센터 앞을 지났다.
주남저수지를 비켜 간 버스는 대산 들녘 상리 종점을 앞둔 죽전마을을 지날 때 내렸다. 창원에는 시내에 메타스퀘어 가로수가 우람한 거리가 있는데, 죽동에서 대방마을로 가는 들녘에도 곧게 뻗어간 길에 메타스퀘어가 자랐다. 하늘 높이 솟구쳐 자라는 메타스퀘어의 열병을 받으며 걸었다. 차량이 드물게 다니는 한적한 시골길이라 인도가 확보되지 않아도 보행에 어려움이 없었다.
들녘은 비닐하우스를 걷고 모내기를 마쳐 갔다. 윗대방마을을 지나 대산 산업단지가 보이던 들판에서 가술로 들어 낯익은 거리를 지나 마을도서관으로 갔다. 아까 버스에 내렸을 때로부터 1시간 반 걸렸는데 1번 마을버스를 탔더라면 곧장 닿았을 데를 일부러 먼 곳에서 내려 걸었다. 때로는 동판지나 주남지에서 내렸을 때는 그보다 먼 거리를 걸었던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지난주 마을도서관을 찾았을 때 서가에서 뽑아두고 읽지 못한 ‘마흔에 읽는 소펜하우어’를 펼쳤다. 저자 강용수는 젊은 날 독일로 유학을 다녀온 쟁쟁한 철학자로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 전념하며 작년 펴낸 이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올랐다. 출판사는 책 제목에서 ‘마흔’을 겨냥해도 ‘예순’을 넘겨 읽어도 손해 봤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내 마음을 흔들어준 책이었다.
직장을 찾으려거나 결혼을 앞둔 청년들이 이 책을 먼저 읽고 자신의 미래를 열어도 좋을 듯했다. 저출산 정책 입안자나 청춘 선남선녀들이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나라 출산율이 바닥에서 헤어나지 않을까도 싶다. 안타깝게도 스스로 생을 하직한 유명 정치인이 있다만 그들도 이 책을 먼저 접했더라면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않았을 듯했다. 철학이 쉽고 재미났다.
점심때가 되도록 도서관에 머물면서 강 교수의 책을 단숨에 완독했더니 책 제목 따라 20년은 젊어진 기분이 들었다. 열람실을 나와 국숫집으로 들어 점심을 해결하고 오후는 국도변에서 아이들의 하굣길을 살폈다. 아침에 지나왔던 반송 소하천 황소개구리와 어제 신전마을 골목길에서 봤던 태산목꽃이 머리에 맴돌아 시상으로 삼아 시조를 2수 남겼다. 이만하면 밥값은 한 셈이었다. 24.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