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 철이 지나고 --, 쉬었던 절집 답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군위 삼존불
군위 삼존불은 나에게 아주 의미 있는 불교 유적이다.
그런데도 이제야 절 이야기를 하는 것은 대중 교통을 이용하여 찾아가기에는 불편한 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백팔사 찾아가기를 아내와 함께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찾아가는 절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지금 임시로 탑의 형태로 쌓아, 모전석탑의 흔적을 알려주고 있으므로, 예전에 절집이 있었을거라 추측해본다. 뿐만이 아니라 나는 지금껏 열 번도 더 군위 삼존불을 찾았다. 혼자서도, 아내와 둘이서도, 우리 가족이, 답사팀을 따라서, 내가 팔공산 유적지를 답사하는 모임을 만들어서도 여기를 찾았다.
군위 삼존불이 있는 곳이 옛 절의 터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나는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을 보관한다.
1962년 이었다. 군위에 제 2 석굴암을 발견하였다면서, 우리나라 전 매스컴이 북치고, 장구쳐서 요란했다. 고고학 교수로 봉직하고, 지금은 은퇴한 친구가 군위 삼존불을 찾아가지고 제안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이다. 나는 그 친구와 경주에서 5시에 출발하여 안동에 이르면 통학열차가 되는 칙칙푹푹 기차를 타고, 봉림 역에 내렸다. 들에는 지금처럼 벼들이 노랗게 익어가면서 온 들녘이 황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논둑에는 메뚜기들이 풀석거렸다. 먼 길인 것을 느끼지 못하고, 달리다가, 걷다가 하면서 군위 삼존불이 계시는 곳에 닿았다. 삼존 부처님은 온 몸에 햇볕을 가득 받고 계셨다.
바위 절벽 바로 아래로는 개울물이 흘렀다.
노오란 낙엽 몇 잎이 한가로이 떠있어, 물길따라 맴돌기도 하고, 재빨리 떠내려가기도 한다. 개울 바닥의 자갈돌 위로는 물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영남문화회가 이번 가을 답사지로 군위군으로 정했다. 군위군이 대구시로 편입하였고, 군위군의 문화원장님이 안내를 맡았다고 했다. 나는 아내와 기꺼이 참가했다. 대중교통이 불편하여 답사한 절 105寺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곳이니, 마치 횡재라도 한 기분이다. 답사 버스가 삼존불이 계시는 곳에 닿았을 때도 가을 햇살이 부처님의 온몸을 비추었다.
그러나 삼존불이 있는 이곳의 풍광이 옛 같지 않았다. 맑은 물이 흐르던 개울은 양편에 돌로 둑을 쌓아서 물길을 가두어 두었고, 바닥에는 자갈돌도 보이지 않는다. 흐르는 물의 양도 줄었고, 물빛도 왠지 탁해 보인다.
돌다리로 개울을 건느니, 비로자나불 부처님이 우리를 맞아준다. 절집도 산듯하게 세워져 있지만, 왠지 부처님이 거처하시는 곳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절집의 이름이라도 있나 하여 두리번거렸으나, 절집의 이름은 없다고 하였다. 절집을 답사할 때마다 아내는 법당의 부처님을 찾아뵙는다. 여기서는 법당으로 들어갈 마음이 없는 듯하다.
삼존불이 계시는 바위 절벽 아래의 너른 터에 서서 올려다 보았다. 그때는(1962) 삐거덕삐거덕 소리를 내면서 흔들리던 나무계단이었는데, 지금은 모양도 산빡한 돌계단이다. 그러나 자물쇠로 채워져 있어, 멀리서 부처님을 우럴어보는 것으로 예배를 드러야 겠다. 이렇게 고개를 뒤로 하여 올려다 보는 것이 신앙심을 더 굳게 한다는 생각이다.
안내하시는 분은 ‘제 2 석굴암’이라 부르지만, 삼존불을 처음 발견하였을 때는 칡넝쿨로 가려 있어서 부처님의 거처지인 줄을 몰랐다고 하였다. 내가 아는 지식으로는,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서 인생사 어려운 일들을 풀어주시옵소셔, 라며 기도를 올리던 기도처였다는데, 그때의 매스컴이 호들갑을 떨면서 제 2 석굴암이라 했다. 마치 메아리를 울리듯이 전 언론매체가 한 목소리를 냈다.
또 제 2 석굴암이라 부르지만, 경주의 석굴암보다 100년 전에 조성하였으므로 여기가 제 1 석굴암이라고 하였다. 나는 불교미술을 양식사 방법으로 공부했다. 무릎이 빈약하여 인체 조성비가 부조화를 이루고, 협시 보살은 몸을 세 번 비튼 3굴 상(트리방가)이라서, 700년 전후의 양식으로 알고 있다. 하여간에 내가 옳다는 것이 아니고, 나는 그렇게 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 부처님이 팔공산에 계시는 부처님 중에는 제일 년세가 많으시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 안내자의 말이나, 내 생각도 훤히 알고 계실텐데 말씀이 없으신 것은 나도 배워야 하리라.
사실은 바위절벽이 있고, 그 아래로 물이 흐른다면 거의 틀림없이 우리의 고대 신앙에서 제의를 올리는 곳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무당이 굿을 하던 곳이다. 더군다나 절벽을 학소대라고 하였으므로 불교 이전부터 우리의 신앙지였고, 중국에서 신선사상이 들어오면서 전국 곳곳에 개명을 하여 학소대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오늘의 답사지에 포함되어 있는 인각사도, 절 앞에는 우뚝 솟은 바위 절벽이 있고, 그 아래로는 물이 흐른다. 수량도 엄청 많아서 지금은 여름이면 아이들이 물놀이를 즐기려 모여드는 곳이 되었다. 이곳의 이름도 학소대이다. 그 앞에 불교의 성지인 인각사가 들어왔으니 군위 삼존불의 탄생과 맥을 같이 한다.
더욱이, 인각사 앞의 학소대 바로 옆의 산봉우리가 옥녀봉이다. 고대 사회 때 우리의 산신이 모두 여신이다. 중국의 신선사상이 홍수처럼 몰아쳐서, 우리의 산신은 모두 자기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도매금으로 옥녀가 되었고, 여 산신이 거처한 곳은 옥녀봉이 되었다. 바로 우리의 토속 신앙터였음을 말해준다. 이런저런 사유들을 종합해보면 불교 성지인 군위 삼존불은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으로 인기를 잃었지만, 아래 마을 사람들의 가슴 속에 묻혀 있던 한을 풀어주었던 토속신앙의 옛 성지를 제 2석굴암이란 이름으로 되찾았으리라 생각한다. 갓바위도 그렇고 ------, 팔공산에는 그런 흔적들이 무수히 많다.
어쨌거나 팔공산은 불교 신앙이 뿌리내리는 시기가 아주 늦다. 역사의 조명을 받은 시기는 9세기 후반이다. 신라의 왕자, 심지대사가 팔공산으로 출가하여 환성사와 동화사를 창건한 것이 팔공산이 불교 전성기를 만났으리라. 그만큼 팔공산은 우리의 토속신앙이 오래 동안 주인의 자리를 지켰으리라.
나는 바위절벽 아래에서 삼존불 부처님을 우럴어 보면서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더 나아가서 나의 손자손녀까지도 지비심을 베풀어 주십사고 빌었다.
또 하나는, 예전에 답사팀들과 여기를 방문하였을 때 내가 아는 불교미술 지식을 자랑하듯이 펼쳐내고, 내 이야기를 듣지 않고 다른 곳에서 어슬렁거리는 답사팀원이 있으면, 싫어하고 미워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불교에 관심을 가지신 분의 분야가 모두 달랐다. 그 분들은 자기의 전공분야가 아니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기가 아는 것과 다르게 말하면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부처님, 나 또한 그러하였으니, 나의 잘못을 용서해주소서.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의 말도 귀 기울여 듣겠나이다. 나무아미타불!
첫댓글 선생님
군위 삼존불 배우고, 익히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