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개 (외 2편)
이 잠
나는 해변의 개를 보고 해변의 개는 나를 본다
첫 번째 파도가 부서지고 모래 위에 태곳적 정적이 흘렀다
저 시커먼 짐승은 금방이라도 내게 무어라 말할 것만 같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두 번째 파도가 덮쳤다
해변의 개와 나 집채만한 파도에 갇혀 짧게 웅얼거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방의 말, 몸은 고스란히 떨고 있었다
나를 세상 끝, 그 끄트머리까지 달아나게 한 것은 무엇인가
누런 모래바람 속에 서 있게 한 것은
외로움에 치를 떨게 한 것은 무어란 말인가
세 번째 파도가 쳤다
세상과 결별한 마음 끝자리에 오도 가도 못한 채
막 바다가 시작되는 물결 위에 서서 나는 울었다
울다가 물끄러미 쳐다보는 해변의 개를 보았다
내게 무어라 말할 것처럼 주억거리며 다가온다
해변의 개와 나 말없이 손등을 핥는다
개는 나에게 열려 있고 나는 바다로 열려 있다
어떤 말도 이해할 수 있고 이해받을 수 있을 거 같은
개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
그리고 일곱 번째 파도가 밀려왔다
바람 같은 이별
모래 위에 흰 눈이 내리다
숲의 알리바이
남몰래 눈물 뿌리려 숲으로 가면 누군가 먼저 흘리고 간 눈물이 우산이끼를 적시고
슬픔에 대해 산꼭대기에 대고 웅얼거리려 하면 거미줄이 느닷없이 얼굴을 덮치고
울분을 쏟아내려 하면 문득 여러 갈래 산길이 앞을 막아선다
뭔가 일이 일어났거나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숲의 알리바이
나무가 모른 척 열매를 던진다 나뭇잎이 스리슬쩍 해를 가린다 새들이 눈알을 노린다
칡넝쿨이 다리 건다 돌멩이가 튀어오른다 낙엽들이 지렁이를 갉아먹는다
숲은 팽팽하다
팽팽한 숲의 오장육부를 홀려 쏘다니다 보면
슬그머니 눈물도 내려놓고 마음마저 놓쳐 버려 쑥맥이 되고 만다
그래도 차마 못 놓은 게 있어 긴 한숨 토하려 하면 숲은 어느새
집으로 가는 낯선 길을 영원처럼 풀어 놓는다
버찌가 익어 가는 동안
봄날 저녁 병을 얻어 나무 아래 한숨짓고 있었네
어두워지는 공중을 환하게 뒤덮은
수천의 꽃잎을 올려다보며 탄성을 질렀네
오, 벚꽃이여
지난 주말에는 초여름 비가 종일 내렸네
우산 받고 벚나무를 돌았네
나는어려운길을걸어가는사람나는어려운길을걸어가는사람
오늘 아침에는 바닥을 검게 물들인 버찌를 보았네
버찌가 검게 익어 가는 동안 병을 이기지 못하고 입맛마저 놓쳐버렸네
무심코 땅에 떨어진 버찌를 집어 입에 넣어 본 순간
버찌여, 잘 익은 쓴맛에서 입맛이 도네
모레나 글피쯤 꽃도 버찌도 사라진 그늘에 앉아
나뭇잎 주워 손바닥에 엎었다 잦혔다 하겠네
-시집 『해변의 개』(201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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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잠 / 본명 이성자. 1969년 충남 홍성 출생. 단국대 국문과 졸업. 1995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물의 집」 외 4편 당선. 시집 『해변의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