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가 돌아왔다 (외 2편)
박미라 꽃 핀 나뭇가지를 흔들어보거나 저 혼자 깊어진 초록 이파리에 침을 뱉거나, 심심하다, 심심하다, 지나가는 바람에게 붉은 길을 들켰다 끊길 듯 이어진 저 붉은 길의 시원을 들쑤시고 묵은 제사에 다녀가는 오촌 당숙처럼 바람은 그저 지나가는데 어디서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인가. 오래전 다녀간 파리가 돌아왔다. 어떤 이름을 부를 때나 맑은 물에 헹구고 조심조심 깜빡여보던 눈 속의 붉은 길이 속절없이 드러났다. 굳이 감추자는 것은 아니었다고, 그냥, 고단했다고 눙친다. 비문증이라는 버젓한 문패 뒤에서 쏟아져 나온 파리 떼를 감당하면서 잠깐 아득해진다. 떼거리라는 말은 밝은 세상에서도 무서워라. 이미 노마드 족의 신민이 된 나는 이 붉은 길들을 어떻게든 파묻을 것인데 돌아왔으니 돌아갈 곳도 있겠지. 길 없는 것들에게는 어떤 길도 무섭지 않아라.
전조 증상
벽지 안쪽 가득 곰팡이가 피었다는 은밀한 말씀 듣는다 어쩌자고, 피었다는 말은 여기서도 환한가 그러니까 곰팡이 꽃이 피어 번지고 번져서 벽에 가득하다는
그 집에는 곰팡이도 피고, 검버섯도 피고, 시름도 피고, 마침내 고독까지 우거져서 꽃그늘 아래 홀로, 하마 들릴까, 웃자란 귓바퀴를 창틀에 걸어두었는데 저 물속 같은 혼자가 놀랄까, 세상이 모두 까치발로 지나가더라고 도대체 이 꽃소식을 어떤 꽃나무에 걸어야 하나
빗소리 외전
빗소리를 흠모하여, 푸른 이파리들을 내 귀로 삼았다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맨 처음이 하늘이거나 마음이었다면 오리나무 밑을 뛰어가던 숨소리와 콩 튀듯 다급한 빗소리가 같은 목소리인 걸 알아들을 것이다 얼마나 멀고 깊은 길을 지나왔는지 소리의 격론이 어떻게 바다에 이르는지 없는 길을 더듬거리거나 제가 제게 참수당하다가도 마침내 고요해지는 것은 잦아든 것이지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바다도 가끔씩 크게 뒤집힌다 빗소리와 아무 연고 없는 나도 수시로 뒤집힌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 그렇게 살 걸 그랬나? ―시집 『파리가 돌아왔다』 2023. 10 ------------------------ 박미라 / 199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서 있는 바람을 만나고 싶다』 『붉은 편지가 도착했다』 『안개 부족』 『우리 집에 왜 왔니』 『이것은 어떤 감옥의 평면도이다』 『울음을 불러내어 밤새 놀았다』 『비긋는 저녁에 도착할 수 있을까』, 수필집 『그리운 것은 곁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