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인이 누린 행복
언제부터인가 우리 집에서 시장을 사 봐 나르는 일이 전적으로 내 소관이다. 상세한 품목은 아내로부터 그때그때 전달받는 경우가 있어도 과일은 내 재량껏 융통성을 발휘해 살 여건은 된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자가 운전이 되지 않는 관계로 양손으로 들고 사다 나르기는 한계가 따랐다. 요즘은 인터넷 주문으로나 가게로부터 주문 배달도 가능하다만 자주 이용해 보지는 않았다.
생필품은 대형 할인 매장을 찾아 한꺼번에 사 콜밴으로 옮겨 나른 경우가 드물게 있기는 하다. 두부나 커피와 같이 소소한 것은 동네 농협 마트에서 구매하면서 수요일과 토요일에 열리는 장터도 이용한다. 특히 장터에서는 채소 위주 푸성귀가 나오는데 봄 한 철은 건너뛰어도 된다. 산자락을 누비면서 뜯어오는 산나물로 식탁이 풍성해 굳이 장터에서 채소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
과일의 경우 철 따라 종류는 달라지는데 구하는 방법이 여럿이다. 고맙게도 어디서 주기적으로 택배로 부쳐온 경우가 있다. 늦가을 고향에서 큰형님이 농사지은 대봉과 단감도 보내오면 한동안 먹을 수 있다. 나머지 다른 계절은 전적으로 내가 사다 나르는데 인터넷 구매를 제외한 다양한 경로다. 지인으로부터 구하기도 하고 얼굴을 익힌 노점상과도 인사를 나누며 지내는 사이다.
우리 집으로 사다 놓은 과일에서 내가 먹는 종류나 양은 극히 적은 편이다. 아내가 먹다 밀려 상하기 직전에 이르러 내 몫으로 돌아온다. 나도 통째로나 한 조각 먹고 싶어도 성큼 집어볼 형편이 되지 않아서다. 과일을 살 때마다 내가 사다 날라야 하니, 그 과일을 내 손으로 먹어 치우기는 손이 쉽게 가질 않았다. 저 과일이 동이 나면 언젠가는 내가 다시 사와야 할 일거리라서다.
우리 집에서 이런 제한된 과일 구매와 소비 성향에서 내가 자유로움을 누리는 때가 초여름 이즈음이다. 신록이 짙어 녹음이 무성해지는 늦은 봄에서 초여름 산야로 나가면 자연에서 절로 자라 영근 과일이 내 손이 뻗쳐 닿아주길 기다렸다. 강가로 나가면 높이 자란 뽕나무가 무성했고, 산기슭은 산딸기가 정글을 이루다시피 했다. 오디나 산딸기가 익어가는 숲은 나에게 해방구였다.
산천을 수없이 주유하는 나는 어디로 가면 오디가 익는 뽕나무가 무성하고 먹음직한 산딸기가 숲을 이루고 있는지 근교 식생에 대해 훤하다. 오디나 산딸기가 영그는 계절은 초여름 한 철만이라 짧은 기간 놓치지 않고 반짝 맛보는 아쉬움이 있기는 하다. 과일을 구매하느라 경비가 들지 않고, 사다 나르느라 힘을 들일 일도 없다. 그냥 발품을 팔아 길을 나서면 실컷 먹을 수 있다.
유월 초순 주중 목요일은 현충일이었다. 순국선열을 추모함이 어찌 이날만이겠느냐 마는 여느 날과 느낌이 다른 아침이었다. 국경일이 아닌 국가 추념일로 안식이 하루 주어져 근교 산자락 산딸기 체험 산행을 나섰다. 산행까지 이름 붙일 거리도 되지 않은 산책에 해당하는 가벼운 나들이다. 동정동으로 나가 북면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 굴현고개를 넘어간 지개리 입구에서 내렸다.
봄날에 두릅 순이나 취나물을 뜯느라 지형을 익혀둔 대한마을 뒷산으로 올랐다. 텃밭 어귀에서 오디를 한 줌 따 먹고 등산로가 있을 리 없는 숲으로 들었다. 바위틈도 마다하지 않는 마삭이 황토를 뒤덮어 지피식물로 자란 숲을 헤쳐 송전탑이 세워진 산등선으로 올라섰다. 어디선가 피어난 밤꽃 향기가 코끝에 스쳤다. 북향 비탈 묵혀진 단감과수원에는 산딸기가 군락으로 자랐다.
가시를 조심해 덤불을 헤쳐 산딸기나무 곁으로 다가갔다. 농익어 바닥에 떨어진 산딸기는 멧돼지가 주둥이로 뒤져 먹은 흔적이 보였다. 선홍색으로 익은 산딸기는 지천으로 달려 손을 뻗쳐 주섬주섬 따 입 안으로 넣자 즙과 함께 단맛이 물씬 느껴왔다. 누구로부터 제제나 간섭받을 일 없이 여유롭고 느긋하게 산딸기를 실컷 따 먹었다. 초여름 산행에서 자연인이 누린 행복이렷다. 24.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