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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하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인데 어째서 오묘하게 존재한다는 묘유와 함께 쓰일까요? 또 유라고 하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인데 왜 그것을 진공이라고 할까요? 이 모순처럼 보이는 네 글자는 수많은 구도자들을 고민해 봐 드렸습니다. 하지만 민국 시대의 고승이신 허운 노스님께서는 아주 평범한 물 한 그릇으로 2009의 수수께끼를 명쾌하게 풀어내셨습니다. 그날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있었고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받은 사람도 있었죠. 그 이야기를 오늘 여러분께 들려드리겠습니다. 때는 민국 23년 가을 복권성 고산 용천사의 어느 선방이었습니다. 전용 예불이 막 끝난 시각 서산으로 넘어가는 붉은 노을이 낡은 나무창을 통해 들어와 청벽돌 바닥에 얼룩덜룩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각지에서 모여든 참선 수행자들은 허운 노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선방 중앙에 둘러앉아 있었습니다. 강소성에서 온 거사님도 계셨고 멀리 운남과 귀주에서 험한 길을 걸어온 행각승 그리고 복권성 현지 사찰에 젊은 스님들도 있었죠. 이들의 공통점은 불법에 대해 깊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경전에 반복해서 나오는 진공 묘유라는 네 글자가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공이라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인데 수행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또 누군가는 현실에 분명히 존재하는데 왜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합니까라며 혼란스러워했습니다. 며칠 전 명회라는 대담한 제자가 용기를 내어 허운 노스님께 여쭈었습니다. 노스님 제자가 수년 동안 불경을 읽었으나 진공 묘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공과 유는 본래 반대인데 어떻게 통일될 수 있습니까? 부디 자비를 베풀어 가르침을 주십시오. 허운 노스님은 그 말을 듣고 긴 하얀 눈썹을 꿈투라시며 주름진 얼굴에 자비로운 미소를 드셨습니다. 좋습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시니 명회뿐만 아니라 많은 제자들의 눈빛에도 같은 갈망이 서려 있음을 보셨지요. 노스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습니다. 좋다 모두가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으니 내일 저녁 예불 후에 노승이 너희를 위해 진공 묘유에 대해 이야기해 주마. 이 소식이 전해지자 용천사의 모든 대중이 들떴습니다. 허운 노스님은 이미 100세가 넘으신 고령이라 평소 공개적인 법문을 거의 하지 않으셨기에 이번 기회는 정말 희유한 인연이었습니다. 다음 날 저녁 선방은 일찌감치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상주하며 수행하던 40 여 명의 제자 외에도 소문을 듣고 달려온 승가와 소가 제자들로 선방은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누군가 호롱불을 켰고 그 어스름한 불빛 속으로 허운 노스님께서 시자와 함께 천천히 많이 들어오셨습니다. 시자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 있었고 노스님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시자는 쟁반을 노스님 앞 작은 탁자에 내려놓았습니다.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보니 쟁반 위에는 평범한 청자 그릇에 맑은 물이 반쯤 담겨 있을 뿐이었습니다. 다들 의아해 했습니다. 설마 노스님께서 저 물 한 그릇으로 법문을 하시려는 걸까? 허운 노스님은 서둘러 입을 열지 않으시고 그저 고요히 앉아 물을 응시하셨습니다. 선방은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창밖에서 들려오는 가을 풀벌레 소리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향 한 자루가 탈 시간이 흘렀습니다. 성격 급한 제자들은 조미수셨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차 고요한 상태로 접어들어 노스님의 시선을 따라 물을 바라보았습니다. 마침내 노스님께서 입을 여셨습니다. 그 목소리는 늙으셨으나 힘이 있었고. 고요한 선방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입니까? 대중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물 1 그릇입니다. 그렇다 물 한 그릇이다. 노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른 손을 뻗어 그릇을 들어 눈앞으로 가져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물그릇 안에 무엇이 있느냐? 이 질문에 사람들은 멍해졌습니다. 누군가는 물이라 했고 누군가는 그저 맑은 물일 뿐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했으며 또 누군가는 깊이 생각하여 수토의 전기가 있고 만물을 적시는 성질이 있습니다라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허운 노스님은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자세히 보아라. 이 물 속에 물의 본체라고 부를 만한 고정 불변하는 것이 있느냐. 명회가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레 대답했습니다. 물은 흐르는 것이라 고정된 형상이 없습니다. 본체라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는 듯합니다. 잘 보았다. 노스님은 찬하시며 말씀을 이으셨습니다. 보아라. 이 물을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된다. 땅에 쏟으면 지세를 따라 흐르고 추위를 만나면 얼음이 되며 열을 받으면 수증기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렇다면 묻겠다. 어떤 것이 물의 진짜 모습이냐? 대중은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확실히 물의 형태는 천변만화하니? 어떤 것을 본래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요? 허운 노스님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물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 보아라. 우물에서 길어왔습니다. 한 제자가 답했습니다. 그 우물물은 어디서 왔느냐? 땅속 수맥에서 왔고 수맥의 물은 빗물이 땅으로 스며들어 된 것이고 빗물은 하늘에 구름이 응결된 것이며 구름은 강과 바다에서 증발한 것이다. 강과 바다의 물은 또 어디서 왔느냐? 이렇게 끝없이 묻자 대중은 물의 근원인 무궁무진하여 최초의 시작점을 찾을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게다가 물은 끊임없이 순환합니다. 오늘 그릇에 담긴 물이 어제는 구름이었을 수도 내일은 땅속으로 스며들 수도 있는 것이죠. 노스님은 대중이 무언가 깨닫는 기색을 보이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물 한 그릇이 실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체를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고 그 근원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으며 고정된 형태 또한 찾을 수 없다. 이 물의 존재는 전적으로 온갖 인연의 화합에 의존한다. 날씨 지형 온도 그릇 등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 이 인연들이 끊임없이 변하니 물의 상태도 끊임없이 변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물에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영원불변한 자성이 있느냐 없다. 깨달음이 빠른 몇몇 제자들은 이미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성이 없습니다. 이것을 일러 공이라 합니다. 허운 노스님의 목소리가 장엄해졌습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제법 공상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법에 고정 불변의 자성이 없다는 뜻이다. 모두 인연이 모여 생겨나고 인연이 흩어지면 사라진다. 보아라 맑은 기운이 화합하고 산천의 기운과 그릇이라는 조건이 갖추어져 비로소 너희 눈앞에 이 물 한 그릇이 나타난 것이다. 이 인연들을 떠나서 물이 어디에 있겠느냐? 근방은 정적에 휩싸였습니다. 모두가 이 말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공은 허무가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뜻이며 모든 것은 인연의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명회가 갑자기 일어나 격동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스님 물이 공하여 자성이 없다면 지금 제가 보는 이 물 만졌을 때의 차가움 마셨을 때의 갈증 해소는 또 어떻게든 일입니까? 이 모든 것이 가짜입니까? 이 질문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의문을 대변했습니다. 방금 공의 의미를 이해했지만 눈앞에 현실은 너무나 생생했기 때문입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요? 허운 노스님은 미소 지으셨습니다. 그 미소에는 깊은 자비와 지혜가 담겨 있었습니다. 노스님은 천천히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질문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려는 두 번째 뜻이다. 여러분 공은 없음이 아니다. 공은 자성이 없다는 뜻이지만 자성이 없다고 해서 그 작용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작을 불러 그 물을 한 모금 마시게 했습니다. 시작은 공손이 물을 받아 조심스레 마셨습니다. 어떠냐 차갑고 답니다. 갈증이 풀리느냐? 4시원합니다. 어째서 갈증이 풀렸느냐? 물을 마셨으니까요. 허운 노스님은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보아라 물의 성품은 공하여 고정된 자성이 없지만 갈증을 해소하는 작용은 있느냐 없느냐 있다. 차가운 느낌도 있고 단맛도 있다. 이것이 바로 묘류다. 허은 노스님의 목소리가 마치 큰 종소리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0이라는 것은 아무 작용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공하기 때문에 고정된 자성이 없기 때문에 만물은 비로소 변화할 수 있고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생각해보아라. 만약 물에게 고정 불변의 자성이 있다면 네모난 그릇이나 둥근 그릇에 맞춰 변할 수 있겠느냐 얼음이나 수증기로 변할 수 있겠느냐 만물을 적실 수 있겠느냐? 바로 공하여 자성이 없기에 온갖 묘한 작용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묘한 작용은 뜬금없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의해 생겨나므로 묘유라고 한다. 선방 안에 작은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몇몇 제자들의 논에 깨달음의 빛이 스쳤습니다. 하지만 노스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야 함을 아셨습니다. 노스님은 다시 그릇을 들어 대중에게 자세히 관찰하게 하셨습니다. 이 수면이 아주 평온해 보이지 않느냐 그렇다 하지만 이 평온함이 진짜 고요함일까? 자세히 보면 물은 겉보기에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실은 기류에 따라 미세하게 움직이고 빛과 그림자에 따라 변하고 있다. 한순간도 진짜 멈춰 있는 적이 없다. 그래서 고요함 속의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 속에 고요함이 있다. 또 이 물이 투명하고 맑아 보이지만 자세히 살피면 그 안에 미세한 먼지가 있고 생명체의 씨앗이 숨겨져 있어 완전히 텅 빈 물건이 아니다. 맑음 속에 탁함이 있고 탁함 속에 말금이 있다. 노스님의 손이 살짝 흔들리자 수면에 파문이 일어났습니다. 이 물결을 보아라 한 관 한 권 퍼져나간다. 묻겠다 파도는 물이냐? 그렇습니다 누군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또 다른 누군가 대답했습니다. 너희들의 말은 모두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허운 노스님은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파도는 물이다. 파도는 물을 떠나 존재할 수 없고 물이 없으면 파도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도가 곧 물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물은 고요할 수도 있어 꼭 파도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도는 곧 물이고 물은 곧 파도지만 파도가 물의 전부는 아니다. 이것이 불일부리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의 돌이다. 여기까지 말씀하신 뒤 노스님의 어조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더 깊은 곳으로 가보자. 우리가 이것을 물 한 그릇이라고 할 때 우리는 사실 물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규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22름은 우리 마음이 붙인 라벨일 뿐 물 자체에는 물이라는 이름이 없다. 우리 분별심이 물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액체라는 형상을 정하고 갈증 해소라는 기능을 나눴을 뿐이다. 그래서 물 자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저 그 순간의 인연이 드러난 것일 뿐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고 분별과 집착도 없다. 더 깊이 보자 허운 노스님은 그릇을 더 높이 들어 등불빛이 물을 통과해 벽에 어른거리게 하셨습니다. 이 물 한 그릇은 하나의 물건이냐? 여러 개의 물건이냐 대중은 멈칫했습니다. 쉬운 질문 같았지만 막상 대답하려니 어려웠습니다. 한 나이 든 스님이 시도했습니다. 전체로 보면 하나이고 나누어 보면 무수히 많습니다. 잘 말했다. 하지만 노스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다 많다 하는 것도 우리 마음의 분별임을 알 수 있다. 물 자체에는 하나라는 상도 없고 많다는 상도 없다. 우리는 전체를 하나라 하고 물방울로 나누면 많다고 하지만 물 자체는 하나도 아니고 많음도 아니다. 그저 여요하게 움직이지 않는 본래 상태일 뿐이다. 선방은 점점 더 고요해졌고 모두가 숨을 죽이고 노스님의 말씀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진공 묘유가 말하는 이치가 바로 이것이다. 진공은 완공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이 아니다. 진공은 모든 법의 본성이 형상도 없고 생겨나지도 말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늙지도 줄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 본성은 마치 물의 본질과 같아서 고정된 실체를 찾을 수 없지만 그 작용은 진실하여 헛되지 않다. 묘유는 신류 고정 불변의 존재가 아닙니다. 묘유는 연기하는 만법이 비록 성품은 공하지만 작용은 뚜렷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며 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노스님은 그릇을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수면을 가볍게 톡 치셨습니다. 층층이 동그라미가 퍼져나갔습니다. 보아라 내 이 손가락질이 진짜 존재하느냐 그렇다. 이 물결이 진짜 일어났느냐? 그렇다 하지만 손가락은 공하다. 인연으로 생긴 사 대의 화합이라 고정된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물결도 공하다 찰나에 생겼다 사라지니 실체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공한 손가락이 공한 수면에 가으니 진실한 작용이 일어나고 진실한 파문이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진공은 묘유를 방해하지 않고 묘유는 진공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깊이 말하면 이 손가락과 물은 2개의 물건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하나다. 왜냐하면 둘 다 지수 화풍 사대가 화합하여 이루어졌고 모두 2년 소생이며 선품이 공하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온 우주 만물은 하나의 재성 즉 공성이다. 그러나 현상적으로는 각기 다르다. 손가락은 손가락이고 물은 물이다.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이사무에 사사무에다. 이 말씀을 듣던 명회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스님 이제야 알겠습니다. 진공 요유란 만법의 본성은 공하지만 현상은 뚜렷이 존재한다는 것 공은 유를 방해하지 않고 유는 공을 떠나지 않으며 공의 본체에 유해 작용이 있고 체와 용이 둘이 아니라는 중도 실상임을 깨달았습니다. 허운 노스님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일부분을 깨달았구나 아주 좋다.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공과 유는 둘이 아닐 뿐만 아니라 애초에 2개의 물건이 아니다. 우리가 공이라 하고 유라 하는 것은 너희를 이해시키기 위한 방편일 뿐 실제 제법의 실세 장애는 공도 없고 유도 없다. 심지어 공유 불이라는 개념조차 내려놓아야 한다. 모든 개념은 언어문자일 뿐 방편이지 구경이 아니다. 그때 선반 구석에서 한 도스님이 벌떡 일어나 크게 세 번 웃더니 눈물을 흘리며 허운 도스님께 저를 울렸습니다. 제자가 오늘에야 빌어서 30년 동안 마음을 잘못 썼음을 알았습니다. 진공 묘유는 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생각하나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공하면서도 공하지 않고 유하면서도 유하지 않습니다. 노스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다른 제자들도 잇따라 일어나 저를 올렸습니다. 무언가 깨달은 듯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이해가 될 듯 말 듯하여 고뇌하고 있었습니다. 허온 노스님은 이를 모시고 좀 더 실제적인 인도가 필요함을 아셨습니다. 여러분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깨달음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진공 요유를 체험할 수 있는지 말해주겠습니다. 여러분이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무엇이 보입니까? 방이 보이고 침대가 보이고 창밖 하늘이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이 공입니까 유입니까? 대중은 망설였습니다. 방금 들은 법문대로라면 공이라 해야겠지만 눈앞에 분명히 있으니 없다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노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난처해 하는군요. 사실 간단합니다. 본성으로 보면 공입니다. 인연 화합이라 고정된 자성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현상으로 보면 유입니다. 분명히 눈앞에 나타나 작용하고 있으니까요. 중요한 건 여러분이 어떤 마음으로 그것들을 대하느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것들을 신류 영혼 불변의 존재로 집착하면 탐욕과 애착이 생깁니다. 좋은 건 가지고 싶고 싫은 건 밀어내고 싶어 하죠. 이것이 번뇌의 근원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의 본성이 이 공함을 이해하면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집착하지 않는다는 건 아무렇게나 내버려 둔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무상함을 알기에 인연따라 대응하되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옷이 있다고 합시다. 입으면 편안합니다. 묘유의 관점에서 이 옷은 존재하고 작용이 있습니다. 잘 사용하고 아껴 입으세요. 하지만 동시에 알아야 합니다. 이 옷은 언젠가 낡고 해져서 여러분을 떠날 것입니다. 짐공의 관점에서 본래 인연 화합물이라 영원한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입을 때 즐겁고 낡았을 때도 슬프지 않습니다. 자연의 법칙 인연의 생명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이나 좌절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묘유의 관점에서 그 어려움은 실제로 존재하니 무시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진공의 관점에서 그 어려움 또한 2년이 만든 것이니 조건이 바뀌면 자연이 사라짐을 아십시오. 그러니 과도하게 걱정하거나 짓눌릴 필요 없습니다. 평상심을 유지하며 지닌 4대1000명 하십시오. 노스님의 말씀은 점점 깊어졌습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는 어차피 다 공한데 굳이 수행할 필요가 있나라고 합니다. 이는 악취공 잘못된 공에 빠진 것입니다. 모든 것이 공하기 때문에 수행해야 합니다. 무엇을 닦습니까? 가짜 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실상을 바라보도록 이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수행하려면 치열하게 해야지 게으르면 안 된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수행 자체도 2년 소생벌이라 성품이 공함을 알아야 합니다. 수행할 때 최선을 다하되 수행한다는 상 깨달았다는 상 부처가 되겠다는 상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수행하는 사람도 공하고 수행법도 공하며 깨달음도 공하기 때문입니다. 천체공이어야 진짜 수행입니다. 누군가 묻습니다. 삼륜체공이라면 성불도 공한데 수행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또한 오해입니다. 성불은 확실히 공하지만 성분의 묘용은 공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하고 법을 설하며 신통을 보이십니다. 이는 묘유의 발현입니다. 그래서 불경에 꿈속에서는 육도가 분명히 있지만 깨어나면 대천세계가 공하다고 했습니다. 미혹할 때는 윤회가 리얼하지만 깨달으면 꿈과 같고 환상 같아 본래 공적합니다. 그러나 그 공적함은 육도 윤회를 방해하지 않고 윤회는 공안 본성을 떠나지 않습니다. 선방 안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빛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허운 노스님은 시절 인연이 무르익었음을 아시고 마지막 점검을 하셨습니다. 다시 그 물그릇을 눈앞으로 들어 올리셨습니다. 여러분 다시 보십시오 이 물이 진짜입니까? 아 가짜입니까? 진짜입니다 가짜입니다. 반은 진짜고 반은 가짜입니다. 진짜도 가짜도 아닙니다. 대답이 분분했습니다. 노스님은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묘요로 보면 해가래 작용이 있으니 진짜고 진공으로 보면 실체가 없어 찰나의 변환이 가짜다. 반진반가라함은 공유 부리를 이해한 것이고 비진 비가라 함은 분별을 초월한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노스님이 목소리를 높여 대중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하지만 너희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전히 의식으로 분별하고 입으로만 떠들고 있구나. 진정한 진공 요유가 무엇이냐 이 물그릇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입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너희의 마음 너희의 당하일염 지금 이 한 생각에 있다. 말씀이 끝나자마자 노스님은 그릇에 물을 바닥에 확 뿌렸습니다. 콴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물이 흩어졌습니다. 노스님께서 대**성 하셨습니다. 물이 땅에 쏟아졌다 흙으로 스며들고 공기 중으로 흩어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자 묻겠다. 이 물은 어디로 갔느냐 공해졌느냐 유해졌느냐 사라졌느냐 존재하느냐 의식으로 분별하지 말고 생각으로 헤아리지 말고 곧바로 관조하고 체득하라 말해보라. 이 외침과 동시에 선방의 제자 몇 명이 몸을 부르륵 떨더니 눈을 크게 떴습니다. 그리고 화난 깨달음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스님께 절을 올렸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오직 마음으로 전해질 뿐이었습니다. 명회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 순간 그는 사무처 깨달았습니다. 모든 본체는 여여하여 생멸이나 증감이 없구나. 그릇에 있어도 그 무리요 땅에 쏟아져 너 흑예스미고 공기에 흩어져도 여전히 그 물이다. 생별이 있다고 보는 것은 우리 마음에 망상 분별일 뿐이다. 진공과 묘유는 2개의 경계가 아니라 제법 실상의 양면이구나. 손등과 손바닥처럼 달라 보이나 실은 둘이 아니다. 한 젊은 스님은 내내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가 이때 박장대소 했습니다. 원래 이렇군요. 원래 이랬습니다. 30년 나그네 길에 낙엽 지고 싹 틔우길 몇 번이던가? 복숭아 꽃 한 번 본 뒤로는 다시는 의심치 않네. 허운 노스님은 미소로 깨달은 제자들을 바라보시고 나머지 대중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부러워할 것도 조급해 할 것도 없다. 깨달음의 인연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느 도노하는 이도 있고 점수하여 점호하는 이도 있고 오랜 세월 갈고 닦아야 개압하는 이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정견을 지키고 치우치지 않으며 꾸준히 정진하는 것이다. 오늘 우승의 말을 조금이라도 알아들었으면 그만큼이 너희의 몫이다. 아직 모르는 이도 의심을 품고 참고하면 언젠가 몸과 마음이 홀연히 열리는 날이 올 것이다. 기억해라 진공 요유는 현묘한 이치가 아니라 일상의 실상이다. 옷 입고 밥먹는 것이 그것이요? 행주자화가 그것이며 운혁하고 물 긷는 것이 그것이다 없는 곳이 없고 없는 때가 없다. 돌아가서 일상 속에서 많이 관조하고 체득해라. 나무를 볼 때 인연에 모이고 흩어짐을 보아 공인지 유인지 살피고 구름을 볼 때 생별 무상을 보아 진짜인지 가짜인지 살피라. 내 마음의 생각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공인지 유인지 살피라 이렇게 시시때때로 참고하고 체득하면 언젠가 통 밑이 빠지듯 확연해질 것이다. 여기까지 말씀하신 노스님은 잠시 멈추셨다.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이셨습니다. 오늘 법문은 여기까지다. 노승이 진공 묘유 네 글자를 말했지만 사실은 마음 심 한 글자다. 진공은 마음의 체 본체요 묘유는 마음의 용 작용이다. 이 마음을 떠나 이야기할 진공은 없고 이 마음을 떠나 드러날 묘유도 없다. 예 조사께서 만법은 마음에서 나온다 하셨고 마음밖에 법이 없다 하셨다. 너희가 명심 견성 마음을 밝혀. 성품을 봄하면 자연이 진공 묘유에 통달할 것이고 진공 요유에 통달하면 자타가 일체요. 본래 둘이 아님을 알 것이다. 허운 노스님은 말씀을 마치고 천천히 일어나 합장하며 아미타불을 염송하시고는 선방을 나가셨습니다. 선방 사람들은 법문의 여운에 잠겨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눈을 감고 사유하는 사람 낮은 목소리로 감로를 나누는 사람 기쁨에 겨워 흐느끼는 사람 쏟아진 물은 사라졌지만 그 물이 보여준 실상은 사람들의 마음 밭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날 밤 용천사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밤새워 참고하는 이들로 가득했죠. 어떤 이는 좌선 중에 몸과 마음이 탈락하여 공성을 맛보았고 어떤 이는 경행하다 문득 마음이 열려 실상을 보았으며 어떤 이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 천광이 땅을 비추던 진공 묘유의 참뜻을 깨쳤습니다. 다음 날 새벽 허훈 노스님께서 뒷산을 산책하시는데 명회가 뒤따라와 공손이 여쭈었습니다. 스님 제자가 밤새 곰곰이 생각하여 진공 묘유에 대해 더 깊이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모든 번뇌와 고통은 이 이치를 몰라서 생기는 것 같습니다. 유에 집착하면 탐내고 이를까 두려워하며 공에 집중하고 도착하면 소극적이고 염세적이 됩니다. 오직 진공 요유를 진정으로 깨달아야 세간에 처하되 세간에 물들지 않고 출세간을 지향하되 입세간의 행을 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세상에 참여하되 초연하여 얽매이지 않고 모든 선을 행하되 머무름이 없는 것이지요. 허운 도스님은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맞다 진공 요
유는 현실 도피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잘 다루는 법을 가르친다.
가 공하니 집착하지 않아 놓을 수 있고 방아착 묘용이 뚜
뚜렷하니 능이 들어서 행할 수 있다. 제기 들고 놓고 노코드
4 선택 사이에서 마음을 단련하고 성품을 닦는 것이 바로
수행이요 성불 작조의 기초다 스님 한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명회가. 계속 물었습니다 만법이 다 공하면 인과도 공한 것.
인과가? 공하다면 선하게 업고 뭐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것은 많은? 제자들이 품고 있던 의문이었습니다 허운 노스님은. 걸음을 멈추고 진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질문이다. 인과라는 것도. 연기법이라 성품은 본래 공하여 정해진 실체가 없다 그러니 인과도. 공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과의. 상 모습과 용 작용은 터렁
만큼도 어긋남이 없다. 불공 불멸이다. 왜냐하면 인과 역시 인연소.
인연에 의지해 작용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성품이 공하여
정해진 실체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엄력과 인연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니가 과거에 악한 원인을 지었어도 지금 발심하여 참회하고 널리 선업을 행
하면 선현으로 악인을 전환하여 악과가 생기지 않게 하고 선과가 드러나게 할
있다 만약 인과가 실제하는 고정불변의 법이라면 참회나 수행은 아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봅시다. 그러므로 진공 요유는 너에게 인과의 성품이 공함을 알아.
에 상에 얽매이지 않게 하고 동시에 인과의 작용이 분명함을 알아 기심
기심독념과 언행을 조심하게 가르친다. 이것이 가명은 있으나 필경공화국 공화되.
하지 않는 중도의 성품이다. 명회는 화련되어 했습니다. 제자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진공 묘유는 저희에게 중도를 행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유이면서 유에 머물지
하지 않고 공이면서 공에 머물지 않으니 방일하지 않습니다. 선이면서
선이면서 선에 머물지 않으니 오만하지 않고 악이면서 악에 머물지 않으니 타락하지 않습니다. 자기 책
일을 다하되 내면은 청명하고 깨어 있어 외경에 끌려다니지 않고 망염에 휩쓸리지 않는 것입니다.
니다 바로 그렇다. 허문 노스님은 흐뭇하게 웃으셨다. 네가 거기까지 깨달았으니 참으로 기특하다.
그러나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행은 또 다른 문제다. 이치 리를 깨달았으면 이제 일상에서 실천하며 닦아 이와 사가 원만하게 융합되어야 한다. 이사 원흉 기억해라. 진공 묘유는 입으로 하는 이론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 상태다. 증득하고 닦을 수 있는 해탈의 길이다. 네가 진정 이 경계에 들어서면
모든 순간이 자제하고 기쁨이며 열반의 묘심임을 갈게 될 것이다. 세월은 흘러 그날의 법문으로부터
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허운 노스님께서 물 한 그릇으로 진공 묘유를 설파하신 이야기는 대대로 전해지며 수많은 후학들.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그 물그릇은 우리 생명이다 생명은. 견고해 보이지만 찰나에 흐르고 인연이 모이면 태어나고 흩어지면 사라진다 영혼불변의. 실체는 없다 그러나. 생명 속에 온갖 체험 히로의 락과 생로병사는 너무나 생생하고 각기 작용이 있다. 진공 묘유를 깨달으면 무상함 속에서 본심을 보고 변화 속에서 불변의 성품을 보며 생명 속에서 불생불멸의 체를 체득할 수 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그 물그릇은 이 세상이다. 세상은 삼라만상으로 복잡해 보이나 실은 만법이 공성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산하 대지와 1월성 신 초목과 짐승이 뚜렷이 나타나 각자 인연을 따르고 작용을 다한다. 진공 묘유를 깨달으면 분주함 속에서 청명함을 지키고 소라남 속에서 고요함을 얻으며 오염 속에서 청정을 보존하고 만상 속에서 진열을 볼 수 있다. 또 어떤 이는 말합니다 그 물그릇은 우리 마음이다. 마음은 모양이 없어 공하지만 만상을 포용한다 깨달으면 지혜요. 분별하면 취사 선택이라 느끼고 짓는 작용이 실령스럽고 묘용이 무궁무진하다. 진공 요유를 깨달으면 망염 속에서 진심을 찾아내고 번뇌 속에서 보리를 보며 생사 속에서 열반을 징득하고 기용 작용을 일으킴 속에서 텅 빈 성품을 체득할 수 있다. 사실 이런저런 해석들은 모두 진공 요유가 보편적 실상이라 모든 법에 적용되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들도 결국엔 국영이 아닙니다. 진공 요유는 모든 설명을 초월하여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불가 사이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스스로 안에서 증득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냉난자* 오늘날 우리가 허운 노스님의 이 법문을 되새겨 보아도 그 깊은 지혜와 울림은 여전합니다. 특히 물질만능주의와 조급함이 만연한 이 시대에 우리에게는 마음을 비추고 방향을 잡아줄 진공 요유의 지혜가 더욱 절실합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명예와 부 지위에 집착하며 어 불안해하고 심신이 지쳐 있습니까? 그들은 이 외적인 것들을 실유로 여겨 필사적으로 쫓습니다. 얻으면 기뻐하고 잃으면 슬퍼하며 평생 그 노예가 됩니다. 진공 교유를 안다면 이 모든 것이 인연소생이라 본래 공하여 영원할 수 없음을 알 것입니다. 이것은 노력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노력하되 평상심을 유지하고 득실과 취사 선택에 초연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행복과 안녕을 얻습니다. 우리 자신을 봅시다. 감정에 갇혀 기쁘면 들뜨고 슬프면 죽을 것 같고 화나면 불타오르고 걱정하면 애가 끊어집니다. 진공 교류를 안다면 이 감정들 또한 인연이 만든 것이라 본래 공하고 정해진 실체가 없음을 합니다.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집착하거나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감정이 없으라는 게 아니라 감정이 일어날 때 깨어 있어서 휩쓸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와 청량을 얻습니다.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갈등과 다툼은 대부분 나 나를 너무 무겁게 여겨. 내 의견 내 이익 내 체면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진공묘를 안다면 이 나라는 것도 오온의 화합인 가짜 모습이며 본래 공함을 알 것입니다. 내가 공하니 내 견해 내 집착 내 이익도 실체가 없습니다. 자아를 없애라는 게 아니라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남에게 관대하고 너그러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과 조화롭고 선현과 복을 짓습니다. 허운 노스님은 물 한 그릇으로 진공 요유를 다 설명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도리는 물 그릇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 매 순간의 체험 속에 있습니다. 아침에 거울을 볼 때 그 영상은 공입니까? 유입가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밥을 먹을 때 그 맛은 공입니까? 유입니까? 일할 때 그 일은 공입니까? 유입니까?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말로 따질 필요 없습니다. 그저 곧바로 관조하고 체득하십시오. 깨어있는 마음으로 분별 없이 바라보면 진공요유가 이토록 간단하면서도 심오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눈앞에 있으니 간단하고 생명의 본질을 꿰뚫으니 심오합니다. 만약 우리가 진공 요유를 정말 증득한다면 삶은 어떤 경지가 될까요? 냉막해지는 게 아니라 모든 중생이 한 몸임을 알기에 더 자비로워질 것입니다. 소극적이 되는 게 아니라 연기성 공을 알기에 마땅히 모든 선을 행하며 더 지혜롭고 정진할 것입니다. 현실을 떠나는 게 아니라 세간법 속에서 출생안법을 세우고 생사 속에서 대해타를 얻어 더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이것은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구나 수행을 통해 증극할 수 있습니다. 허운 노스님의 100년생애가 바로 진공요유의 가장 좋은 본복이었습니다. 홍진 속에서 수행하고 수행 속에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삶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요? 답은 이미 나왔습니다. 일상 속에서 지금 이 순간 체득하는 것입니다. 산속으로 들어갈 필요 없이 생활의 모든 디테일 속에서 깨어 있으십시오. 옷 입을 때 옷의 인연을 보아 미추에 집착 말고 밥 먹을 때 음식에 귀함을 보아 맛을 탐하지 말고 걸을 때 발걸음의 기멸을 보아 빠르고 느림을 좇지 말고 잘 때 생각의 생명을 보아 혼침에 빠지지 마십시오. 이렇게 호흡마다 관조하고 움직임 바다 체득하면 어느 날 문득 총 밑이 빠지듯 진공 요유가 딴 곳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청정한 한 생각 속에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찻잔을 들 때 그 향기 온도 느낌이 묘유의 현현이요. 이 모든 것이 찰나에 흐르니 본 근성공이며 공하면서 공하지 않고 유하면서 유하지 않은 그것이 바로 진공 묘유입니다. 허운 노스님의 그 물그릇은 이미 흙으로 돌아가 흔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물이 보여준 실상과 진리는 영원히 빛나고 있습니다. 물은 사라져도 물의 본성은 사라지지 않고 형상은 변해도 실상은 여여부동합니다. 이것이 진공묘유의 가장 깊은 뜻입니다. 시끄러운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그 물그릇과 같습니다. 때로는 고요하고 때로는 격동치며 때로는 안개처럼 흩어지고 때로는 단비가 됩니다. 하지만 어떤 상태든 우리의 본성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공성이요 진여이며 불성입니다. 진공묘유는 도피가 아니라 더 잘 사는 법입니다. 모든 일이 공함을 알아 가볍게 가되 묘용이 있기에 책임을 다하는 것 들고 놓고 오가는 사이에 부동심을 얻고 취사 선택 속에 대자제를 성취하는 것 이것이 수행이요 돌을 깨닫는 것이며 생명의 궁극적 의미입니다. 그 옛날 허운 노스님의 법문에 수많은 제자가 깨달았듯 오늘 이 이야기를 듣는 우리도 무언가 느낌이 있을 것입니다. 억지로 구할 필요도 조급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진실한 구도심으로 꾸준히 배우고 수행하면 언젠가 우리도 본래 면목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알게 될 것입니다. 진공묘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