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세에 별세한 고 장영희 서강대교수 (1952년~2009년)는 생후 1년 만에 1급 소아마비로 살아오면서 평생 세 번의 암과 투쟁하면서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글을 남겼다. 내가 살아보니까 ~~ 사람들은 남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다. 그래서 남을 쳐다볼 때는 부러워서든, 불쌍해서든 그저 호기심이나 구경 차원을 넘지 않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 정말이지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든,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든 중요한 것은 그 내용물이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 남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내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를 남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 낭비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가치를 깎아 내리는 바보 같은 짓인 줄 알겠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 결국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고 알맹이더라.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더라. 예쁘고 잘 생긴 사람은 TV에서 보거나 거리에서 구경하면 되고 내 실속 차리는 것이 더 중요하더라. 재미있게 공부해서 실력 쌓고, 진지하게 놀아서 경험 쌓고, 진정으로 남을 대해 덕을 쌓는 것이 결국 내 실속이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더라.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 남의 마음속에 좋은 추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더라. 우리 나이면 왠 만큼은 살아본 거지? 이제 우리 나이면 무엇이 소중하고 무엇이 허망함인지 구분할 줄 아는 나이 진실로 소중한 게 무엇인지 마음 깊이 깨달아 지는 나이 남은 시간 동안 서로서로 보듬어 안아주고 마음 깊이 위로하며 공감하고 더불어 같이 지낼 수 있는 친구의 소중함을 깨우쳐 알아지는 나이 장영희 교수(張英姬, 1952~2009 56세 별세)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 첫돌을 앞둔 어느 날, 아기는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기는 눈만 깜빡이며 울지도 못했다. 엄마는 아기를 안아 달랬다. 그때 아버지가 갑자기 “아, 소아마비!”라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 아기는 두 발을 모두 쓸 수 없는 1급 소아마비가 되었다. 엄마는 아기를 업고 10년 동안 매일 침술원을 다녔다. 그 아기가 장영희(張英姬, 1952~2009)이다. 엄마는 딸이 초등 3학년까지 업어서 학교로 데려다 주었다. 등교할 때 눈이나 비가 오면 ‘목숨을 걸고’ 가야 했다. 엄마는 눈이 오면 눈 위에 연탄재를 깔았고, 비가 오면 한 손으로는 딸을 받쳐 업고 다른 손으로는 우산을 들었다. 겨울이면 딸의 다리 혈액 순환이 잘되라고 두툼한 솜이 들어간 바지를 아랫목에 넣어 따뜻하게 데워 입혔다. 세수와 아침 식사 그리고 보조기를 신는 일까지 모두 엄마가 도와주었다. 딸이 등교했어도 엄마는 딸을 화장실에 데려가기 위해 두 시간마다 학교에 왔다. 아버지 장왕록 교수와 어린 장영희 번번이 거절당해도 굴하지 않은 아버지 아버지는 장애인 딸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남들처럼 똑같은 교육을 받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활학교가 아니라 일반 학교에 보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일반 학교에서는 신체적 장애를 이유로 입학을 거부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지원할 때도 입학시험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중학교를 찾아 다니며 시험만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번번이 거절당했다. 아버지가 서울사대 교수였기에 서울사대 부속 중학교 교장의 배려로 시험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체력장은 면제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 학과 시험에서 한 문제도 틀리면 안 되었다.
장영희는 잠자지도 먹지도 않고 공부만 했다. 그 결과, 중학교 입학시험에 ‘기적같이’ 합격했다. 대학들도 장애인에 대해서는 철벽이었다. 아버지는 서강대 영문학과장인 미국인 신부를 찾아갔다. 입학시험 이야기를 했더니 “시험을 머리로 보는 것이지 다리로 보나요?”라며 “장애인이라고 해서 시험 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이렇게 해서 장영희는 서강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아버지 장왕록 교수는 60여 권의 영미문학 번역서를 냈다. 「그리스 로마 신화」, 「대지」, 「인간의 굴레」, 「달과 6펜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명작들을 한국에 소개했다. 학생 시절의 장영희 슬픈 소망을 품고 초등학교 때 장영희네 집은 서울 제기동의 작은 한옥이었다. 그곳은 골목이 많아 아이들이 즐겁게 뛰놀았다. 엄마는 딸이 집에서 책만 읽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골목에 아이들이 모일 시간이면 대문 앞에 방석을 깔고 딸을 앉혔다. 아이들은 술래잡기, 사방치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를 했다. 장영희가 할 수 있는 것은 공기놀이밖에는 없었다. 친구들은 기특하게도 장영희를 배려했다. 심판을 보게 하거나 책가방과 신발주머니를 맡으라고 역할을 주었다. 바로 그 골목에서 ‘잊을 수 없는 사람’을 만났다. 장영희가 집 앞에 혼자 앉아있었다. 그때 엿장수가 가위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엿장수는 목발을 옆에 세워놓고 앉아있는 장영희를 보더니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리어카를 멈추고 장영희에게 다가왔다. 엿장수는 미소를 지으며 깨엿 두 개를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면서 “괜찮아”라고 했다.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차리지 못했다. 장영희는 후에 그 엿장수가 한 말 ‘괜찮아’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 격려해주는 말, 부축해주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장영희에게 작은 소망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창경원에 가보는 것이 소망이었다. 학교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창경원으로 소풍을 갔다. 장영희는 다리가 불편해 소풍에 따라갈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들려주는 창경원은 마냥 신비롭기만 했다. 중학교 때는 영화관에 가보는 것이, 고등학교 때는 ‘학원’을 다니는 것이 소망이었다. 그리고 대학 때는 다방에 가보는 것이 소망이었다. 당시 다방들은 2층이나 3층 혹은 지하에 있어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릴 수가 없었다. 그 불편한 다리로는 창경원, 영화관, 학원, 다방도 갈 수 없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픈 소망이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장영희네 가족이 서울 가회동에 있는 작은 한옥에 살던 때몄다. 옆집에는 한쪽 다리를 못 쓰는 소년이 살았다. 그의 집에는 병든 어머니가 있었다. 소년의 꿈은 아나운서였다. 소년이 장영희 집에 놀러 오면 노래자랑이나 원맨쇼를 신나게 했다. 어느 여름날, 장영희는 침을 맞고 엄마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서 중절모를 눌러쓴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가 걸친 옷은 모두 아버지 옷이었다. 도둑은 모녀를 보자 뛰기 시작했다. 다리를 절뚝였다. 옷을 이것저것 잔뜩 껴입어 잘 뛰지도 못했다. 모녀는 필사적으로 쫓아갔다. 결국 도둑을 잡았다. 잡고 보니 옆집에 사는 그 소년이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어머니의 병이 심해져 병원에 모셔가려고 도둑질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용서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후에 엄마는 딸에게 “그때 그 소년을 잡지 말걸 그랬지…”라고 했다. 시련이 닥치고 절망에 빠져도 장영희는 뉴욕 주립대에서 유학 생활을 마무리하고 박사학위 논문 심사만 남겨 놓고 있었다. 논문은 각고의 노력 끝에 전동 타자기(당시 컴퓨터는 대중화되어 있지 않았다)로 완성했다. 그때 LA에 사는 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가려고 트렁크에 한 권뿐인 논문 최종본을 넣었다. LA에 도착하니 언니는 한국으로 떠나고 없었다. 다시 뉴욕행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 한 친구가 공항까지 마중 나왔다. 그 친구가 장영희에게 대학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기 집에 잠시 있자고 해서 그곳으로 갔다. 도착해 막 커피를 마시려고 하는데, 친구 딸이 뛰어들어오더니 도둑이 차 트렁크를 열고 짐을 몽땅 가져갔다고 말했다. 장영희는 벌떡 일어나 “내 논문, 내 논문…” 하다가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대학 기숙사로 돌아왔다. 방문을 걸었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밥도 먹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 밤낮을 보냈다.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그 무거운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목발을 짚고 눈비를 맞아가며 힘들게 도서관을 다녔던 날들, 엉덩이에 종기가 날 정도로 밤새워 책을 읽었던 날들이 물거품이 되었다. 논문을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다. 정말 죽고 싶었다. 그때 마음속에서 이런 말이 들려왔다.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어렸을 때 그 골목길에서 엿장수 아저씨가 해준 말 ‘괜찮아’가 생각났다. 장영희는 그 말에 힘을 얻었다. 그래서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학교 식당으로 갔다. 그곳에서 토할 정도로 음식을 먹었다. 그러고는 논문지도 교수를 찾아갔다. “영희는 뭐든지 극복하는 사람이니 더 좋은 논문을 쓸 수 있을 것이다”라고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그러면서 학교로 오는 기차 속에서 울다가 잃어버린 콘택트렌즈를 사라며 100달러를 손에 쥐여주었다. 논문 훔쳐간 도둑에게 감사를 지도교수의 따듯한 격려에 힘입어 정확히 1년 후에 다시 논문을 썼다. 논문은 허먼 멜빌이 지은 「백경(Moby Dick)」에 대한 것이었다. 장영희는 논문 첫 페이지에 이렇게 헌사를 썼다. ‘내게 생명을 주신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께 이 논문을 바칩니다. 그리고 내 논문 원고를 훔쳐 가서 내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 다시 시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도둑에게 감사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목발 장영희(張英姬, 1952~2009)의 발자국 소리는 크다. 10m 떨어진 곳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다. 낡은 목발에 쇠로 된 다리 보조기까지 합쳐져서 내는 ‘정그렁’ 소리는 크게 들렸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걸으려 해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가장 힘이 들 때는 책을 찾으러 ‘도서관을 헤맬 때’라고 했다. 목발 때문에 책을 들고 옮길 수가 없었다. 또 원하는 책을 찾았어도 지나가는 사람을 기다렸다가 그 사람에게 책을 자기 자리까지 옮겨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온종일 책만 옮기다가 하루가 지나간 날도 있었다. 필요한 책을 겨우 찾아 읽고 글을 쓰려고 하면 도서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나와야 했다. 장영희는 누가 자신에게 ‘가진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목발’이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했다. 장영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목발에 의지했다. 한 번은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다가 갑자기 목발이 부러지면서 몸이 그대로 땅바닥에 굴렀다. 혼자서는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지나가던 사람이 발견하고는 기숙사로 연락해 룸메이트가 휠체어를 가져왔다. 뉴욕에 사는 오빠는 그 얘기를 듣고 다음 날 달려왔다. 독일제 새 목발을 사주었다. 그 목발은 주인과 함께 늙어 몸통이 긁히고, 패이고, 불에 탄 자국까지 생겼다. 언니가 그 낡은 목발을 보고 미제 ‘알루미늄발’을 보내왔다. 세상에서 본 목발 중에 ‘가장 아름다운 목발’이었다.
어느 여름날, 장영희는 미국 유학 중에 방학을 맞아 집에 다니러 왔다. 동생이 명동으로 쇼핑가자고 해서 따라 나섰다. 구멍 난 낡은 청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었다. 생전 처음으로 명동에 갔다. 동생이 어떤 가게에 걸린 원피스가 눈에 들었는지 한 번 입어보겠다고 했다. 그 가게의 문턱은 너무 높아 목발을 딛고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냥 밖에서 기다렸다. 가게 주인 같은 사람이 가게 문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장영희를 보더니 이런 말을 갑자기 내뱉었다. “나중에 와요. 손님이 있는 거 안 보여요?” 장영희는 이 말을 듣고 당황했다. 그 사람은 이어서 “나중에 오라는 말 안 들려요? 지금은 동전이 없다고요!”라고 말했다. 그 순간 동생은 옷을 입다 말고 그 사람에게 우리 언니를 무엇으로 보고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느냐고 대들었다.
이런 일화도 있었다. 장영희는 연구실에서 학생들의 성적을 평가하고 있었다. 성적을 평가할 때 가장 어려운 일은 A나 B, B나 C의 경계선에 있는 학생들의 성적이었다. 늘 ‘혹시 그 학생이 청년 가장은 아닐까? 혹시 부친이 실직 중이지 않을까? 혹시 낮은 성적을 주어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등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등의 고민을 했다. 장영희는 ‘어떤 학생’의 영어 발음이 수업 중에 정확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는 B+와 A- 중 어느 것을 줄 것인지 고민하다가 연구실을 나왔다. 다음 날, 출근길 신촌로터리에서 신호등이 바뀔 때를 기다리다가 전철 입구에서 한 노인이 추운 겨울날에 나무 부채와 여성용 스카프를 팔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많은 사람이 오고 가지만 그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한 젊은이가 노인에게 다가가더니 부채 두 개를 집어 들고는 돈을 냈다. 노인은 기뻐했다. 그 젊은이는 부채가 필요해서 산 것이 아니라 추위에 떨고 있는 노인이 불쌍해서 그 부채를 산 것이었다. 그 젊은이가 바로 그 ‘어떤 학생’이었다. 연구실에 오자마자 그 학생의 성적을 조금도 망설임 없이 A를 주었다. 안타까운 일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퇴근하려고 연구실 문을 열다가 깜짝 놀랐다. 문 앞에 짧은 머리에 해쓱한 얼굴의 깡마른 학생이 혼자 서 있었다. 오랫동안 복도에서 서성이며 연구실 문을 두드릴까 말까 망설였던 것 같았다. 연구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학생은 죽음까지도 생각하는 심한 강박증을 앓고 있었다. 산다는 것이 고통이며 병원 약도 소용이 없다고 했다. 장 교수는 종교를 가지라는 말, 이성 친구를 사귀어 보라는 말 등으로 충고했다. 그러고는 저서 한 권을 주며 독후감을 써오라고 했다. 학생을 다시 오게 하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학생은 장 교수의 수업을 듣는 청강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메일함을 열어보니 그 학생이 보낸 메일이 와있었다. 내용을 읽어보니 자신을 이해해 주고 위로해 주어서 고마웠다는 말과 함께 독후감을 제출하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죄송하다는 글이 적혀있었다. 아무래도 유서 같았다. 그래서 서둘러 해당 학과에 연락해 그 학생을 찾으라고 했다.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나서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학생이 지하철 선로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장영희는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빈 껍데기 같은 말로 위로해 준 것이 후회되었고, 끝까지 그 귀한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재현아! 너무 늦게 네 이름을 불러 본다. 재현아, 미안해. 네 믿음에 보답하지 못해서. 네 생명을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정말 미안해.”(수필 ‘재현아!’에서) 죽음의 그림자 그녀는 결국 미국으로 건너가 1985년 뉴욕주립대학에서 영문학 박사를 취득했다. 그 해 귀국한 그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24년간 모교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시련은 장애인으로서의 생활에 그치지 않았다. 2001년에는 유방암, 2004년에는 척추암이 그녀를 엄습했다. 굳은 의지로 이를 모두 이겨낸 그녀는 2008년 다시 찾아온 간암은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2009년 5월 결국 생을 마감했다. 장영희 교수는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믿음으로 투병 와중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서 여러 권의 책을 냈다. 그 중에 인터넷에 자주 등장하는 글 ‘내가 살아보니까’는 2009년 그녀가 병상에서 쓴 마지막 책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의 한 소제목이다.
Can't Help Falling in Love / Ella Robe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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