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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4일 사순 제3주일
제1독서 : 탈출 3,1-8ㄱㄷ.13-15
제2독서 : 1코린 10,1-6.10-12
복 음 : 루카 13,1-9
1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5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6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하느님을 찾는 여정
-체험, 겸손, 회개, 열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김형석 교수는 100세에도 여전히 정정하여 얼마 전 책도 펴냈다 합니다.
70년대 안병욱 교수와 더불어 참 많이 읽었던 교수님의 수필집이었습니다.
교수님은 100세 노년 성공적 삶의 세 필수적 요소로 ‘지혜, 취미, 봉사’를 꼽았습니다.
전폭적으로 공감합니다만 가톨릭 수도사제인 제가 보기엔 결정적으로 하나가 빠졌으니
바로 하느님과의 소통인 기도입니다.
얼마 전 전혀 뜻밖의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어느 지인이 본당 50년사를 만들면서 본당 출신인 저에게 명함판 사진을 부탁해 드렸는데
다른 사진 없느냐며 물었고, 혹시 여권 사진을 보자 했습니다.
현재의 여권에 붙은 사진과 이미 폐기된 여권에 붙은 사진 둘을 갖다 드리니
폐기된 여권이 사진이 좋다 하며 가져갔습니다.
그제서야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바로 폐기된 여권에 붙은 사진이 바로 제일 젊게 나왔다는 것입니다.
나이에 맞게 당당하게 살아 온 저에겐 전혀 생각지 못한 충격이었습니다.
새삼 사람들이 얼마나 젊음을 선호하는지 깨달았고 하루하루의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면서
나이에 맞게 아름답게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은 하느님을 찾는 여정이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라 고백합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은 우리 삶의 전부라 고백합니다.
여기서 부각되는 체험, 겸손, 회개, 열매의 네 요소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체험입니다.
하느님을 체험해야 영혼이 살고 육신이 삽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체험하고 알아야 나를 알고 비로소 무지에서 해방됩니다.
어제 본기도의 첫 부분,
‘하느님, 영광스러운 이 성사로, 세상에 사는 우리가 천상 것을 맛보게 하셨으니,---’ 대목도 생각납니다.
바로 하느님 체험을 뜻하는 천상 것의 맛입니다.
오늘 탈출기의 모세의 하느님 체험이 인상적입니다. 불타는 떨기 속에 나타나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주님은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셨고, 모세는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응답합니다.
주님은 외로운 광야에서 양떼를 돌보던 모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모세는 주님을 만나 소명을 받았고, 주님은 당신 이름을 계시하셨습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자신을 알았고 주님을 앎으로 비로소 참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모세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참 나를 발견하여 새롭게 시작된 모세의 삶입니다.
말 그대로 주님과의 운명적 만남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만나 부름 받았기에 지금 여기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두 번의 만남이 아니라 매일 평생 끊임없이 만나 체험해야 하는 하느님입니다.
둘째, 겸손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 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지혜와 겸손입니다.
흙에 어원을 둔 겸손과 사람입니다. ‘흙humus’처럼 ‘겸손humilitas’해야 비로소 ‘사람homo’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겸손할 것을 당부합니다.
“그들이 악을 탐냈던 것처럼 우리는 악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투덜거린 것처럼 여러분은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그들은 파괴자의 손에 죽었습니다. 이 일들은 본보기로 그들에게 일어난 것인데,
세상 종말에 다다른 우리에게 경고가 됩니다.”
하루하루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무슨 경고입니까? 겸손해야 한다는 경고이자 가르침입니다.
겸손한 자들은 결코 불평 불만하여 투덜거리지 않습니다. 원망, 절망, 실망의 삼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섰다하면 넘어집니다. 삼가 깨어 조심하여 겸손하게 살라는 경고입니다.
셋째, 회개입니다.
회개해야 삽니다. 하느님을 만나 회개할 때 비로소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 전반부의 가르침입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이 변을 당한 것은, 실로암 탑이 무너져 죽은 열여덟 사람은 죄가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불행이나 불운은 죄와는 무관합니다. 백해무익한 죄책감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죄를 찾아 벌하는 인과응보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죄의 결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회개를 촉구하는 표징으로 읽어야 합니다.
두 번씩 반복되는 주님의 분명한 말씀입니다.
“아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하느님 내리시는 재앙의 심판이 아니라 스스로 죄로 말미암아 자초하는 재앙의 심판입니다.
탓할 분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지체 없는 회개로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평생 부단한 회개입니다. 하여 우리 삶은 회개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넷째, 열매입니다.
회개의 열매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신망애의 열매입니다.
인생가을이 되어도 열매 없는 인생이라면 참 허무할 것입니다.
예전 가을 수확기 흉작으로 인한 ‘텅 빈 허무’의 배밭 풍경을 잊지 못합니다.
종전의 풍작 후 수확후의 ‘텅 빈 충만’의 배밭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과연 인생사계로 압축할 때 우리는 어느 계절에 위치해 있는지요.
인생 열매는, 신망애의 영적 열매는 잘 익어가고 있는지요.
바로 오늘 복음의 후반부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회개의 열매에 적절한 비유입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으라 연장되는 우리의 날들입니다.
포도 재배인과 주인의 대화입니다. 흡사 주인이 하느님이라면 포도 재배인은 예수님처럼 생각됩니다.
“보게, 내가 삼년 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 가?”
혹시 이런 처지는 아닌지요. 회개가 없으면 열매도 없습니다.
말만 많고 사랑의 실천이 없으면 흡사 잎사귀들은 무성한 데 열매 없는 나무처럼 공허할 뿐입니다.
회개할 때 영혼의 향기에 순수한 마음이요 이런 ‘마음의 토양’, ‘마음의 나무’에서 지혜와 자비,
온유와 겸손, 신망애의 탐스런 열매들입니다.
다음 포도 재배인의 간청은 그대로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드리는 예수님의 간청처럼 들립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우리 모두 이 말씀을 엄중하게 받아 드려야 합니다.
부단한 수행으로 우리 마음의 나무들 둘레에 거름을 주며 가꾸고 돌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마음의 나무들이 풍성한 좋은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느님을 찾는 여정중의 네 요소, 체험, 겸손, 회개, 열매를 마음 깊이 꼭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시편103,8과11) 아멘.
사순, 그리고 봄과 생명
류해욱 요셉신부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벌써 사순 제 3주일입니다.
여러분들, 사순절하면 어떤 느낌이 가장 큽니까?
이 기간 동안 웃음을 삼가고 근신해야 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면, 어떤 절제를 할 것인가? 어떤 희생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십니까?
금연이나 금주를 생각하십니까? 단식을 생각하십니까?
단식이나 절제나 희생을 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순절은 결코 오늘 복음에서처럼
자기가 단식을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울상을 지어야 하는 때는 아닙니다.
사순절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때가 언제입니까?
부활절이 결정되는 날에 따라 조금씩 시기가 빠르기도 하고, 늦기도 합니다마는
대개 사순절은 해빙기에 시작됩니다. 절기로 입춘이 지난 때이지요. 봄이 오는 때입니다.
봄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고, 무엇보다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해빙기에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순절이 해빙기에 시작된다는 것을 상기할 때, 거기 깊은 상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저는 사과 과수원집 아들입니다.
이 시기, 이제 추위가 슬그머니 뒷걸음치며 멀어져 가고
봄의 소리가 얼음 밑으로 들려오는 이 시기가 오면 과수원은 바빠집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과수원에서 사과나무가 잘 자라도록 가지치기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기치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필요 없는 부분, 영양가 없는 부분을 제거하는 것이지요.
바로 영양가 있는 곳으로 영양가를 모우기 위해서이지요.
새 생명을 위해 미리 죽어야 할 부분을 잘라내는 일입니다.
쉽게 말해, 가지치기는 죽은 부분을 없애고 생명의 기운을 모우는 작업입니다.
사순절은 생명의 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준비, 죽은 부분을 없애고 생명의 기운을 모우는 시기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순절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 무엇이고,
생명이 아닌, 죽은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때입니다.
생명을 위해 죽은 부분은 과감히 버리는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한편 우리 안에 죽은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이제 하느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으시도록 마련해 드리는 시기입니다.
사순절은 봄의 손짓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겨울은 이제 가고 있다고, 더 이상 겨울에 미련을 두지 말라고,
다시 말해, 우리의 옛 삶에 미련을 두지 말고, 과감히 돌아서서 생명에로 우리 자신들을 열라고 초대합니다.
그 생명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승리하신 생명입니다.
사순절은 우리에게 가만히 속삭입니다. 마치 얼음 밑에서 흐르는 시냇물처럼 속삭입니다.
우리의 죽은 부분들을 뒤에 그냥 내버려두라고, 거기 미련을 두지 말라고 가만히 우리의 귀에 속삭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여전히 남아있는 겨울의 파편들, 잔설들을 인식하되,
그것에 미련을 두지 말고 이제 그것들을 버리고 돌아서라고 속삭입니다.
눈부신 봄의 향연을 향해 몸을 돌리라고 속삭입니다.
바로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도록 준비하라고 들려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삶의 “겨울”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과정들을 통과하기 마련입니다.
제가 겨울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말하자면,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마치 죽는 것과 같은 체험을 하는 시기를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삶에서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은 시간들을 통과하기 마련입니다.
제게도 이 시기는 길고 힘들었습니다. 춥고, 어둡고 우울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춥고 어둡고 우울하고 지치게 만드는 시간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모두 생명으로부터 우리를 절연시키는 겨울이라는 계절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편 그 추위는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과정임을 생각합니다. 겨울에 춥지 않으면 병충해가 심해집니다.
그런데 비록 추위가 필요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이제 더 이상 이 추위에 떨 필요도, 미련을 둘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이 추위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헤아릴 때, 그 추위가 우리 삶의 과정이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는 작은 빛을 밝혀 주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 겨울의 추위가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전혀 의도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삶에 닥쳐오지요.
저에게 뇌졸중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들, 그 추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고 다만 인간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아픔 뿐 아니라 실연을 당하기도 하고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내가 아닌 너무나 사랑하던 사람이 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가족의 죽음을 맞아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겨울의 추위가 우리가 저지른 어떤 행위로부터 오기도 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탓이지요. 우리가 신뢰를 저버렸을 때,
약속을 깨뜨렸을 때, 친구를 이용했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죽은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때로는 우리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오기도 합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정신적인 아픔을 체험하기도 하고 깊은 실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우리 자신을 탈진 지경에까지 몰아가기도 하고
우리자신을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이든 겨울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의 삶을 메마르게 하거나 심지어 죽게 합니다.
이 음침하고 우울한 음계를 밟으며 섬뜩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계절의 징조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한다면,
가족이나 이웃과 더불어 서로 잘 화합하며 살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의 동료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가 다소 위축되거나 이유 없는 분노가 일고 있다면,
우리의 삶은 아직 찬바람이 부는, 때로는 칼바람으로 살을 에는 겨울이지요.
우리가 자신에게 정말 진실하다면, 우리에게 이와 같은 겨울은
한 번 찬바람이 불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불고 또 불어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계절의 순환 안에서 겨울은 또 다시 우리 삶에 찾아듭니다.
또한 우리는 살아가면서 겨울의 사람들, 겨울 사나이나 겨울 마녀,
찬바람이 이는 사람, 얼음장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 않습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들의 겨울은 너무 깊어서 결코 봄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마치 두꺼운 얼음이 겹겹이 쌓여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겨울에 압도되어 결코 인생의 따뜻함이나 웃음과는
담을 쌓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적어도 저는 삶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났었지요.
그러나 저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명이 바로 우리 안에 죽은 겨울을 몰아내고 다시 생명을 가져오시는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안으로부터, 그리고 우리의 밖으로부터 겨울이 우리를 메마르고 죽게 했던 장소들을 점검해 보도록 초대합니다.
그리고 어디에서 하느님께서 사랑의 새 삶을 살도록 우리를 위해 마련하시는지를 바라보라고 속삭이듯 들려줍니다.
오! 우리는 얼마나 겨울이 끝나기를 염원했습니까?
우리 안에 죽은 나무 등걸에 새순이 돋아나기를, 절연되었던 외부와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갈망했습니까?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죽은 나무 등걸이 새순이 돋아나도록 준비를 할 때입니다.
이 사순절이 시작되는 오늘이 바로 그분이 새 생명을 주시기를 청하면서 우리 자신을 열어야 할 때입니다.
자,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전체를 아우르며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사순절은 해빙기입니다. 얼음이 녹고 강물이 흐르는 봄입니다.
나무가 잘 자라도록 가지치기를 하는 시기이며 추위가 뒷걸음치는 시기입니다.
사순절은 생명의 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준비를 하는 시기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순절은 우리 안에 있는 죽은 것들을 알아보는 때입니다.
그리고 그 죽은 것에 미련을 두지 않고 과감히 버리는 때입니다.
그분이 새 생명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여, 사순절은 희망의 때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집에 살고 있는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이 가족의 유일한 생계수단은 아주 여윈 암소 한 마리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집에 지혜로운 현자가 찾아갔습니다.
현자는 이 집을 한참 돌아보더니 제자에게 몰래 이 암소를 절벽으로 데리고 가서 떨어뜨리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스승의 말을 어길 수가 없어서 시키는 대로 했지만, 제자는 한 동안 자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이 마을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집에 살고 있었던 가족이 으리으리한 집을 짓고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 이유를 물으니, 암소가 없어져서 필사적으로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묘목을 가꾸고 약초를 심어서 팔다보니 지금처럼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시도와 모험을 가로 막는 ‘야윈 암소’는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고정관념을 우리는 절벽에서 과감하게 떨어뜨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창조하셨을까요?
혹시 “음... 오늘은 뭐 재미난 일이 없을까?
작고 웃긴 피조물들을 좀 만들어서 그것들이 뭘 하는지 지켜볼까?”라면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지루하셔서 우리가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진흙을 가지고 장난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레네오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베푸실 대상으로 우리를 지어 만드셨습니다.”
맞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궁극적인 계획은 이 땅 안에 당신의 사랑이 가득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살고 있을까요?
또한 적극적으로 그분의 계획에 참여하고 있나요?
우리는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기도를 외우고 전통과 예식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하느님의 궁극적인 계획이 펼쳐지기에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포도밭과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은유로 자주 쓰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역시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선택된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만 사랑 받기를, 자기들만 구원받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이런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인해 하느님 사랑이 이 땅에 열매 맺을 수가 없게 만듭니다.
그래서 잘라버리겠다고 하지요.
우리도 그러한 것은 아닐까요?
단순히 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또한 단순히 미사 참석과 기도문을 외운 것만으로 모든 것을 다했고,
또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이런 착각이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고 있는 나의 ‘야윈 암소’인 것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포도 재배인 처럼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기회를 줍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사랑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나를 막는 내 안의 야윈 암소를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심보를 바꾸는 것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예. 행복하시게 지내신 분은 행복에 행복을 더하시고,
혹시라도 행복하지 못하셨다면 지금부터 행복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은 우리 마음이 문제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회개에로 초대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을 회개라고 알고 있습니다.
회개란 쉬운 말로 심보를 바꾸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 지상의 마음가짐에서 하늘을 향한 마음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신자 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는 누구라고 했죠? 예, 배신자.
그러면 신부가 제일 싫어하는 신자는 누구라고 했죠?
원불교 신자, ‘원망’하고, ‘불만’이 가득하고 ‘교만’한 신자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이 ‘사랑’하고 ‘포용’하며 ‘겸손’의 마음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찌 되었든 대표적인 배신자 베드로는 위기를 모면하고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닭이 두 번째 울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15,72).
주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인간의 연약함을 의탁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롭게 태어나서 주님의 으뜸제자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인물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2,15-16)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 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필리3,14).
바로 이것이 회개의 모습입니다.
만약에 과거에 매여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회개는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철저히 맡기고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나간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올지 모르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오늘이 선물로 주어졌고 오늘을 통해서 미래가 열립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라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6)하고 이르시자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19,9)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캐오는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삶의 변화된 모습을 구체적 행동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동의 변화 없는 회개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신부님께서 오랜만에 출신 본당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오래도록 살고 계신 신자분이 반가워하시며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한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오랜만에 친정에 오셨는데 떡이라도 해 오셨습니까?” 신부님께서 능청스레 대답하셨습니다.
“네, 그러잖아도 떡을 해 오려고 했는데 집사람이 없어서 못해왔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핑계를 댑니다. 집사람 핑계는 왜댑니까?
남편을 탓하고, 자식을 탓하며 부모를 원망하고 이웃을 시기하는 마음, 탓을 남에게 돌리는 심보를 고쳐야 합니다.
잘된 것은 자기가 잘해서 그런 것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으로 돌리는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삶의 회개입니다.
십자가의 오른쪽 강도를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하나가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하며 예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른쪽에 매달린 강도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습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23,42-43)
왼쪽 강도의 모습을 통해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남을 비방하고 모욕하는 마음입니다. 사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남의 잘못된 일을 보면
“내 그럴 줄 알았다. 네가 사는 것이 그 모양이더니 결국 그 꼴이구나”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심판하는 태도를 가질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추스르는 근신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그의 안쓰러운 모습에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또한 회개의 기회로 삼는 겸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오른쪽 강도처럼 마지막 순간에라도 마음을 돌려서 간구하면 주님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기회를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당한 불행이나 고통, 실로암 탑에 깔려 죽은 사람이나
그들은 ‘죄가 많아서’, ‘믿음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셨고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13,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재앙을 당하기 전에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변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말해주는 메시지입니다.
지금 여기서 준비하고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결코 우리의 멸망을 두고 보실 분이 아니십니다.
방탕했던 아들의 비유(루카15,21)을 보면 작은 아들이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라도 삼아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방탕하였던 아들은 겸손되이 저 밑바닥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버지의 머리위에 올라가서 아버지를 애먹이던 그가
품팔이꾼, 종의 모습으로 내려갈 수 있는 마음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기억을 통해
하느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정작 내 좋은 일에는
둘러리로 전락시키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 주님! 하면서도 참으로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지 못하고
오히려 종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음을 솔직히 인정해야겠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용서한 아버지,
그 아버지께서 우리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한 주간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감이 곧 회개요, 그리고 그 회심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되새기며 주님의 사랑을 드립니다.
성 아프라테스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이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 5)
한상우 바오로 신부
신앙의 진리들은
회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회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입니다.
회개는
소중한
우리의 생명입니다.
소중한 생명은
주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아갑니다.
참된
생명의 시작은
회개입니다.
생명의 방향은
회개에 있습니다.
회개의 본질은
가치를 일깨워주는
우리 인격의 실천입니다.
회개는
인간존중의
진실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만나는 것입니다.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
모두를 살리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회개로
생명의 질서에
순종하는 순종의
사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순종은 신앙의 기본이며
회개의 삶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생명의 날 되십시오.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하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순종임을
잊지 마십시오.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봉헌하는 것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
공자와 그의 제자 안자가 함께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 배의 사공은 그야말로 귀신처럼 노를 저어갔습니다. 안자가 물었습니다.
“나도 노 젓는 법을 배울 수 있겠는가?”
사공이 대답했습니다.
“물론입니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연습만 하면 곧 배울 수 있고,
잠수에 능한 사람은 배를 본적이 없더라도 바로 노를 저을 수 있습니다.”
안자가 사공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하자 공자가 말했습니다.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은 물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노 젓는 일에만 전념하게 되어 빨리 배울 수 있고,
잠수에 능한 자는 배가 뒤집어져도 당황하지 않기 때문에 더 빨리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두려움은 우리가 무언가 배우고 도전하는데 가장 큰 장애요인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엉덩방아 찧는 것이 두려웠다면 어떻게 스케이트를 배울 수 있었겠습니까?
두려워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두려움은 내가 다치거나 죽거나 손해볼까봐 내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보호기능입니다.
내가 죽으면 그래서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우리 안에는 죽어야 하는 ‘나’가 있습니다. 이것을 죽이면 두려움이 사라져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개’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회개를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아니 두려움을 사라지게하기 위한 행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우선 회개하지 않으면 그 두려움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부터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포도밭에 심겨진 무화과나무로 비유하십니다.
다른 포도나무는 다 열매를 맺는데 무화과나무만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 열매는 무엇일까요? 포도원지기가 원하는 열매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사랑’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을 위해 포도원지기는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포도 재배인’으로 등장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포도 재배인이 왜 무화과나무에 집착하실까요?
이 무화과나무는 왜 포도밭에 달랑 한 그루만 심겨져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 무화과나무는 스스로 포도나무와 다르다고 믿고 있는 나무입니다.
본성은 자신이 무엇이라 믿는 것입니다.
자신이 늑대라 믿으면 늑대가 되고 자신이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이 되며
자신이 예수라 믿으면 제2의 예수가 됩니다.
무화과나무는 그래서 자신이 특별하여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믿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을 상징합니다.
크게는 자신들만 선택받았다고 믿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기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신들이 특별하다고 여길까요?
바로 ‘두려움’ 때문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타인과의 차별을 두려고 합니다.
성경은 이런 경우 성을 쌓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그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해치는 자는 몇 배로 보복할 것이라 선포하며 자신만의 성을 쌓습니다.
로마도 힘이 강대할 때는 그러지 않았지만 점점 힘이 약해지자 성벽을 쌓아 적의 침임을 막으려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허물어진 실로암 탑이 이 상징입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는 뜻입니다. 파견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려야만 합니다.
주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 위해 내 뜻이 죽어야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파견되겠습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 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파견 받습니다.
그러나 상처받기 싫어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 있게 성호경도 긋지 못합니다.
이렇게 두려움이 있다는 말은 아직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회개를 위해서는 진정으로 자신을 봉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상징으로 빌라도가 제물을 바치려는 사람들을 죽여 그들의 피가 제물에 물들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예로 드십니다.
제물을 바치는데 자신은 죽지 않으면 그 제물은 아무 쓸모없습니다.
그냥 남는 제물을 바치고 자신은 죽지 않으려하니 그런 사람은 신앙을 지니고 있어도
두려움 때문에 온전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봉헌하는 예물에 나의 피를 함께 물들이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기 때문에 그 봉헌은 의미가 없게 됩니다.
봉헌은 자신의 교만의 탑이 무너지게 하여 자아를 죽이기 위한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고 모든 사람들과 섞이며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미국 CBS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서바이버’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우승한 ‘권율’ 씨가
강연을 목적으로 한국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서바이버란 오지에서 이루어지는 생존게임으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는 프로그램입니다.
당시 ‘권율’이란 한국 이름으로 참가해 국내에도 큰 이슈가 되었었는데,
5만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우승까지 했기 때문에 국내에도 많은 분들이 권율 씨를 알고 있습니다.
예일대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라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이런 특이한 방송에 나가게 된 것은
바로 두려움의 극복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인종차별과 강박증으로 인해 공황장애를 겪었던 권 씨는
지금의 두려운 삶을 이겨내기 위해선 ‘내가 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느끼고
이후부터는 ‘두려운 일에 오히려 도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 결심을 실천으로 옮기기 시작 했습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데도 스카이다이빙에 도전하는 것을 시작으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 대통령의 오바마 대선 캠프에 들어가고,
예일대 로스쿨에 들어가 변호사 자격증도 따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서바이버 경쟁에 도전하여 우승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두려움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돈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봉헌을 더 많이 해 보면 됩니다.
그러면 돈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러면 돈이 더 많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회개를 한 사람이 하게 되는 행위입니다.
시간이 없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더 기도와 봉사를 많이 하면 됩니다. 그러면 더 시간적 여유가 있어짐을 느낄 것입니다.
사람이 두려우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두려운 사람과 더 함께 하기 위해 다가가면 됩니다.
그러면 생각보다 친절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남들에게 평가받는 것이 두려우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당당하게 나의 것을 드러내어 많은 평가를 받아보면 됩니다.
그러면 남들의 평가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도로에서 안전지대만 찾는 사람은 운전을 할 수 없습니다. 운전을 즐기려면 안전지대에서 나와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지 않으셨다면
당신도 세리와 죄인들과 섞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회개는 우리 자아를 죽여야만 온전해진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제물을 바치며 자기 자신 또한 바치는 것입니다.
렙톤 두 닢을 바치는 과부는 내일 먹을 음식 값까지 다 주님께 바쳤기 때문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나의 욕구 중에 소유욕과 육욕, 교만이 있는데
제물을 봉헌하는 것은 이 세 가지를 다 줄일 수 있습니다. 그
래서 십일조가 두려움을 없애는 좋은 방법인 것입니다.
제물에는 항상 내 자아의 피가 섞여야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제물은 또한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봉헌을 통해 두려움을 극복해보십시오.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회개는 자아를 죽이기 위해 두려움과 맞서 내가 두려운 일에 도전하게 만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루카 13,3.5)
오상선 바오로 신부(O.F.M :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많은 이들이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은 일을 알리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재앙을 하느님의 징벌로 여기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떤 사건으로 고통을 당하는 피해자에게서
'그런 일을 당해 마땅한' 탓을 찾기보다 연민과 애도를 보내기를,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보내시는 메시지를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회개는 부르심입니다. 초대입니다.
회개가 비단 희대의 사기꾼과 살인마 같은 이들에게 요구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회개의 의미를 너무 편협하게 축소하는 거지요.
회개, 회심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살펴 '하느님 자녀다움, 그리스도의 신부다움'에서 벗어난 부분을
성찰하고 그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어 '하느님 자녀다움, 그리스도의 신부다움'을 향해 나아가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완벽할 수 없기에 이 '다움'에서 벗어난 부분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답지 못함'에 실망하고 주저앉아 고착되지 않고 다시 방향을 하느님의 사랑에로 향하는
아름다운 신뢰의 여정이 곧 회개, 회심입니다.
제1독서는 이집트 왕자로 지내다가 동포를 돕느라 살인까지 저지르고 타지로 도망가 살던
모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대목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겪는 고난을 보시고 성조들과 맺었던 계약을 기억하신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민족적 해방의 역사를 시작하시려는 겁니다.
하느님의 신비스런 현현과 자기에게 내리시는 소명에 두려움을 느끼는 모세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 이름을 알려 주시지요.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신학교에서 철학을 배울 때 "있음(存在)이 선(善)이다!"(Ens est bonum!)란 진술을 듣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습니다. 좋은 것, 멋진 것을 선으로만 생각했는데
있는 것(존재)이 선이라뇨! 그렇다면, 하느님이 "선"이시라면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고,
"선 자체"이신 분이라면 "있음 자체"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를 "야훼", 즉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고 하시는가 봅니다.
이렇듯 모든 살아 있는 사람이나 동물, 식물들은 살아 있기에 선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다 선입니다. 살아 있음은 그래서 축복입니다.
계곡 낭떠러지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나 야생화가 더 아름답고 귀하듯이,
지금 삶의 조건이 취약한 가운데서도 해맑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아름답고 귀합니다.
있음(有)이 선이고 없음(無)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그대 있음에 내가 있고, 하느님 계시니 내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세의 옛 죄나 지금의 상태를 책망하고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새 계획을 향해 그를 존재적으로 돌려세워 방향을 바꾸어 주십니다.
이렇게 모세는 회개의 순간을 마주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복음에서는 또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잘라 버리라고 요구하는 포도밭 주인과,
한 해만 더 기회를 주길 청하는 포도 재배인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포도밭 주인을 심판자이신 하느님으로, 포도 재배인을 중재자 예수님으로 보는 견해도 가능하겠지만,
오늘 제게는 이 말씀이 다른 각도에서 다가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즉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친히 회개를, 회심을 하시는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분께서 그동안 해오시던 재배 방식을 바꾸어 더 아끼고 더 섬세히 돌보시기로 마음을 바꾸시는 겁니다.
무화과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어 자기다움을 회복하도록, 주님의 많은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고도
이웃과 세상을 향해 작은 열매 하나 제대로 맺지 못하는 돌 같은 우리가
'하느님 자녀다움, 그리스도의 신부다움'을 회복하도록 말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강한 어조로 우리의 진정한 회개를 촉구합니다.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1코린 10,12)
이만하면 잘 살고 있다고, 내가 지은 죄라면 다 내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나를 건드리는 타인들 탓이라고,
아무리 내 속을 뒤져봐도 회개할 게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권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 구원이라는 원대한 꿈을 시작하셨지만,
"영적 양식을 먹고 영적 음료"(1코린 10,3.4)까지 마신 그들도 탐욕과 불평을 일삼다가 결국
"광야에서 죽어 널부러졌습니다."(1코린 10,5)
사도는 이를 "본보기, 경고"라고 반복해 이야기하며 우리의 느슨해진 양심을 흔듭니다만,
그 과정에서 가장 아프고 상처받으신 분은 그 모든 일을 사랑으로 계획하시고 끌어가신 하느님이십니다.
사순 제3주일에 우리는 우리의 '다움'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더 큰 수고를 결심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회개는 우리 각자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되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회개는 거름을 주었는데도 열매 맺지 못하면 잘라내 버려질까
두려움에 떨며 자기를 뒤지고 난도질하며 추궁하지 않고, 그토록 나를 귀하게 여겨
애지중지 살려내시려는 하느님 사랑을 기억할 때 가능합니다.
사실 과일나무는 심어서 바로 열매를 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원 밭에 사과나무 묘목을 심었는데 3년이 지나서야 1-2개 달리기 시작하더니 5년이 되니 좀 달리더라구요.
제대로 달리게 되려면 10년은 되어야 할 것 같더라구요.
오늘 나무 주인도 꽤 성급해 보이는군요.
3년이 지나도 아무 결실 없으니 잘라 버리라구요. 종이 옳습니다.
1년만 더 기다리면 그때부터 열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그때도 안 열리면 잘라 버리라고 하는 종의 말은 이미 그럴 리가 없음을 알고 하는 말일 테지요.
뭐든지 다 때가 차야합니다. 하느님 나라조차도 "때가 차서"야 오게 됩니다.
회개도 영적인 까달음도 때가 차야 오게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이제 봄입니다. 올 한 해만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열매 맺어야만 하는 올해입니다. 절박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때"가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명심하십시오. 딱 올 한 해입니다.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복음의 종처럼 믿고 확신합니다.
1년 후 벗님 여러분이 소담스런 열매를 맺으리라는 것을,
예수님 친히 여러분을 기르고 가꾸어서 회개의 열매를 맺도록 하시리라는 것을.
오늘 내 삶의 조건이 풍요롭지 못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이렇게 살아 있음을 경축합시다.
그리고 함께 있어 주는 모든 이들에게도 감사하고 축복합시다.
"하느님, 저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가 아니라 그냥 있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 친지, 친구들에게도 고백합시다.
뭘 잘 해 줘서가 아니라 함께 살아줘서, 함께 있어줘서 진짜 고맙다고...
그래서일까요? 사도 바오로는 오늘 코린토인들에게 이렇게 말하네요.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투덜거린 것처럼 여러분은 투덜거리지 마십시오."(1코린 10,10)
그저 살아 있음에 감사드리는 주일되시길 축원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