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이레네오 성인은 1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스미르나(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한 그는 프랑스 리옹에서 사제품을 받고, 뒤에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 이레네오 주교는 특히 프랑스의 영지주의의 오류를 거슬러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는 일에 많은 힘을 쏟았다. 2세기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동한 그는, 영지주의 이단의 오류를 낱낱이 지적한 「이단 논박」이라는 유명한 저서를 남겼다. 성인은 200년 무렵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말씀의 초대
아모스 예언자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선포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약하다고 꾸짖으시며 바람과 호수를 잠잠하게 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으랴?>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1-8; 4,11-12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주님이 너희를 두고,
이집트 땅에서 내가 데리고 올라온 씨족 전체를 두고 한 이 말을 들어라.
2 나는 이 땅의 모든 씨족 가운데에서 너희만 알았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지은 너희를 나는 벌하리라.”
3 두 사람이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같이 갈 수 있겠느냐?
4 먹이가 없는데도 사자가 숲속에서 으르렁거리겠느냐?
잡은 것이 없는데도 힘센 사자가 굴속에서 소리를 지르겠느냐?
5 미끼가 없는데도 새가 땅에 있는 그물로 내려앉겠느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는데 땅에서 그물이 튀어 오르겠느냐?
6 성읍 안에서 뿔 나팔이 울리면 사람들이 떨지 않느냐?
성읍에 재앙이 일어나면 주님께서 내리신 것이 아니냐?
7 정녕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밝히지 않으시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
8 사자가 포효하는데 누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으랴?
4,11 “나 하느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뒤엎은 것처럼 너희를 뒤엎어 버리니
너희가 불 속에서 끄집어낸 나무토막처럼 되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복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23-27
그 무렵 23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24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25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26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27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체를 영해도 변하지 않는 이유: 나는 두려운 것을 닮아간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풍랑에 죽을까 봐 두려워하다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고는 예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
제자들의 두려움은 이제 자연에서 주님께로 변화되어갑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오늘 기적으로 원하신 일입니다.
우리 안에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성체성사로 그분을 모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킬 힘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두려워하기 전까지는. 왜냐하면 사람은 두려운 것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개는 훌륭하다’에서 배은망덕 견 영구가 나왔습니다. 영구는 착한 주인들을 뭅니다. 특별히 소유욕이 강해서 집을 자신의 것으로 여깁니다. 마당만 들어오면 통제가 안 됩니다. 주인들은 개에게 모든 것을 맞춥니다. 물리기 싫기 때문입니다. 문을 들어갈 때도 허락받고 산책할 때도 개에게 맞춰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개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은 두려운 것에 의해 변화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체 앞에서 두려워 떨어본 적이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손바닥보다 작은 밀떡 덩어리를 두가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속에 누가 계신지, 그 실체를 알면 어떻게 될까요? 까무러치고 말 것입니다.
그런 분에게 우리는 이래라저래라 청하기만 합니다. 그분이 이 세상 모든 걱정과 두려움을 한순간에 없애버릴 능력을 지니신 분임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을 청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는 사제가 들고 있는 그 작은 밀떡이 무엇인지 안다면 기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합니다. 타볼산에서 잠깐 신성을 보여주셨을 때도 제자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리고 요한 묵시록에서 요한이 그분을 천상에서 보았을 때는 납작 엎드렸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하느님으로 보고 두려워할 줄 알 때만 그분은 나를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나의 노력으로 성장시켜야 합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동석은 엄마를 매우 싫어합니다. 아빠의 친구였던 사람의 첩으로 들어가서 그 집에서 형들에게 매를 맞으며 자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도 엄마는 한 마디 미안하다는 말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는 비뚤어진 성격으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말기 암에 걸렸습니다. 동석은 놀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왜 그리 모질게 대하셨는지 알아보기 위해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합니다. 동석 의붓아버지의 제사에 모시고 갔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엄마 옥동은 동석의 편을 들어줍니다. 전에는 그렇게 해줄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 세 끼 밥을 먹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동석도 그런 엄마의 마음을 읽으며 조금씩 엄마를 용서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점점 두려워집니다. 엄마를 잃을까 봐. 사랑은 두려움을 수반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생기면 잃게 될까 두렵습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을 잃는 일입니다.
옥동은 동석이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끓어놓고 더는 일어나지 못합니다. 동석은 죽은 엄마를 끌어안고 한없이 웁니다. 이때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죽은 어머니를 안고 울며 난 그제서야 알았다. 난 평생 어머니, 이 사람을 미워했던 게 아니라 이렇게 안고 화해하고 싶었다는 걸. 이렇게 오래 안고. 지금처럼 실컷 울고 싶었다는 걸.”
어머니는 약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분이 사라지면 나의 변화 가능성은 사라집니다. 세상 것들을 두려워하며 그들의 노예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동석이 어머니와 동행하며 어머니를 잃는 것을 두려워할 수 있게 되었듯, 우리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그분을 잃는 것을 두려워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과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내 안에 가장 두려우신 분이 하느님임을 안다면 세상 다른 것은 두려운 것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그분 때문에 변하게 됩니다. 그분처럼 변하게 됩니다.
https://youtu.be/x7pJeL9pyDI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성인께서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의 믿음은 어떨까요? 당연히 믿음이 컸기에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냐고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인 역시 이 세상 안에서 믿음의 문제로 고민하신 분이 많다고 합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믿음이 없어. 나는 믿지 않아.”
성인이 된 마더 데레사도 믿음에 관한 고민을 많이 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믿음이 약하다’라고 고민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닐까요? 오히려 ‘나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만큼 교만하다는 증거일 테니 말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문명의 발달로 볼 것도 많고, 들리는 것도 너무 많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주님을 보기도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을 보는 것, 주님 목소리를 듣는 것을 아예 포기한다면 믿음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약한 믿음이 아니라, 없는 믿음이 되고 맙니다.
자신의 믿음 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약한 믿음에서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즉 주님을 보고 주님 말씀을 들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 성인들의 믿음에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믿음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을 오늘 복음에서 봅니다.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놀라운 표징들을 직접 두 눈으로 봤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을 때, 두려움 속에서 어떻게 할지를 모릅니다. 사실 제자 중에는 어부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돌발 상황을 잘 극복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자기의 능력도 믿지 못했고, 또 함께하는 주님의 힘도 믿지 못했기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자 아주 고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실 때처럼, 자연의 힘을 향하여 ‘주님’으로서 명령하십니다. 그만큼 자연을 향해서도 명령을 내려서 복종하게 하시는 큰 힘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분과 함께할 믿음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어떨까요? 예수님과 늘 함께했었던 제자들도 부족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하물며 우리의 믿음은 어떨까요? 한없이 약한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이 약함을 인정하면서, 조금 더 나아지는 노력을 계속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 조금씩 주님과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불만은 생활에 독을 섞어 놓는다. 참고 견디는 것은 생활에 시적인 정취와 엄숙한 아름다움을 준다(아미엘).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