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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제1독서 : 이사 7,10-14; 8,10ㄷ
제2독서 : 히브 10,4-10
복 음 : 루카 1,26-38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경청敬聽과 순종順從의 사람, 동정 마리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예전에는 ‘성모 영보 대축일’이라 불리었습니다.
‘영보領報’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천사에게서 들었다는 뜻입니다.
마침 오늘은 성모 영보 수녀회의 주보 축일이자 수녀회 과천 본원에서는
인 마리아 수녀와 동료 수녀들의 서원 25주년 은경축 미사가 있어 축하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자리는 문제가 아니다/어디든 뿌리내리면 거기가 자리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작고 낮은 자리/하늘 사랑 가득 담아
샛노랗게 피어난 수선화/감동이다-
얼마 전 인용했던 시입니다. 지금도 거기 그 자리에 여전히 피어있는 감동의 수선화입니다.
흡사 오늘 복음의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의 마리아를 상징하는 듯한 수선화입니다.
하느님께 장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가 어디에 살든 충실한 당신 종들을 한 눈에 환히 보시며 찾아 주시고 늘 함께 하십니다.
어제 수도원을 찾았던 분에게서도 성모님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자매님은 되는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하나 없네요. 영원히 현재진행형의 어려움이시네요.
삶은 순종입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사세요. 주님께서 성모님과 함께 하셨듯 자매님과도 함께 하십니다.”
말씀드린 후 부부가 함께 “성령께 바치는 기도”,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행복기도”를 낭송토록 한 후,
사순시기 매일 하루 한번 함께 낭송하도록 당부드렸습니다.
복음의 마리아뿐 아니라 참으로 어려운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믿음의 삶을 사는 이들을 향한 주님 천사의 전갈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나자렛 작은 고을의 마리아를 찾은 주님 천사의 복음입니다.
얼마나 존귀한 품위의 마리아의 삶인지 확인시켜 주는 주님의 천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성실한 순종의 삶을 사는 이들과 늘 함께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어제도 고백성사를 본 네 분 수녀님에게도 보속으로 위 말씀을 처방전으로 써드렸습니다.
언젠가 이 말씀을 보속으로 어느 수녀님에게 써드렸을 때
“보속이 아니라 보석이네요!” 찬탄의 말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합니다.
동정 마리아는 누구입니까?
첫째, 마리아는 경청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 천사의 인사말을 듣는 순간 마리아는 몹시 놀랐지만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참으로 침묵 중에 귀 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청하는 마리아임을 깨닫습니다.
영성생활의 기초가 경청의 들음입니다.
분도 규칙서 맨 처음 나오는 말마디도 “들어라! 아들아”로 시작되며
성서의 예언자들이 끊임없이 강조하는바 역시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와 직결되는 경청입니다. 잘 들을 때 비로소 주님과의 대화이자 소통인 기도가 시작됩니다.
참으로 주님의 총애를 받는 경청의 사람, 마리아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이어 주님의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속내를 낱낱이 전달해 줍니다.
요셉과 더불어 주님께 지극한 신뢰를 받았던 마리아임을 깨닫습니다.
평상시 주님과 깊은 관계에 있었던, 참으로 경청의 사람이자 기도의 사람인 마리아임을 봅니다.
둘째, 마리아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경청에 이은 지체 없는 순종입니다. 사랑의 순종, 순종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개방이자 위탁입니다.
다음 마리아의 말이 나오기 전 온 우주가 죽은 듯이 고요한 긴장 중에 싸여 있었다는
아오스팅 성인의 주석도 어디선가 본적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응답에 전 인류의 구원이 달린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참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자신의 신원을 정확히, 분명히 파악한 마리아입니다.
주님을 향해 마음 활짝 열어 믿음과 사랑으로 응답한 마리아입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마리아가 고마웠을 것입니다.
마침내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으로, 순종의 믿음으로 주님의 구원역사는 차질 없이 실행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리아처럼 사는 이들과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모전자전, 그 어머니에 그 아들입니다. 히브리서 예수님 역시 순종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바로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하여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성화은총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거룩한 순종의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종이며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우리가 세상에 온 존재이유임을 깨닫습니다.
좌우간 마리아의 거룩한 순종으로 이사야의 예언이 실현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지극한 순종의 믿음 덕분에 참 좋은 임마누엘 예수님을 선물로 받은 우리들입니다.
‘보라, 세상 끝 날 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약속하신 임마누엘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우리의 영원한 사랑이자 도반이신 주님께서
우리 모두 당신의 종으로서 순종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시편을 통한 예수님의 고백은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려 세상에 온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주님의 뜻을 찾아 실행해야 하겠습니다.
이래야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은총과 기쁨이 가득한 삶입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요한복음 1장 1절은 이렇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신앙생활에 대한 어려움을 느끼시는 어떤 형제님께서 이 성경 말씀을 이렇게 바꿔 말합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안 돼.’였다.”
안 되는 것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계명이 족쇄이고, 자신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요? 자기 뜻대로 되는 것만 무조건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렸을 때, 제 어머니는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습니다.
아래 앞니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어머니께 이빨이 흔들린다고 하자,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튼튼한 이빨이 새롭게 나온다면서 말이지요. 저는 무서움과 두려움에 뽑지 않겠다면서 대항했습니다.
제가 원하지 않는다고 어머니께서 “그래, 네가 이렇게 싫어하니까 뽑지 말자.”라고 하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말로 설득하시다가 소용이 없자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꼭 움켜쥐고는 앞니를 뽑으셨습니다.
분명히 제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오히려 이빨을 뽑아주지 않는 것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치를 뽑지 않으면 덧니가 나서 나중에 교정하느라 더 힘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아시기 때문에 제가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이빨을 뽑으셨던 것이지요.
이렇게 원하지 않아도 사랑한다면 때로는 고통과 시련으로 다가오는 일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안 돼’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어쩌면 이 ‘안 돼’가 우리를 위한 사랑은 아닐까요?
그리고 이 사랑을 아는 사람만이 “네”라면서 순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순명하신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라는 천사의 인사를 받기에 합당했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순명으로 인해 우리가 커다란 선물을 받습니다.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며,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분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앞에 ‘안 돼’라는 상황이 계속 주어질 것입니다. 그때 주님의 뜻에 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나쁜 길로 이끌지 않습니다.
순간에는 이해하기 힘든 사랑이지만 분명히 더 큰 선물을 받게 됩니다.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기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성경을 보면,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0)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되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이 말씀에 결국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은 바로 마리아의 이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순명으로 인하여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실 당시의 풍습을 생각하면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임신하여 배가 불러온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응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습니다. 사실 순종 없는 믿음은 그림의 떡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고 하셨지만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복종이 없이 천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현주).
그렇다면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할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종’은 그야말로 노예를 뜻합니다.
그러기에 이 말에는 그 고통을 미리알고 그것을 참아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그 종에게 견디어 내는 희망을 주는 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하신대로’라고 라는 말씀이 우리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함께야).
“종은 자신의 의지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의지를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당신이 쉼을 원하시면 저는 사랑으로 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일하라고 명을 내리시면 저는 일을 하면서 죽고 싶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일상 안에서 언제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선인이나 악인이나 모두에게 은총을 쏟아 부어주십니다.
그러나 은총을 알아채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연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연장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도구가 되는 기쁨을 놓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감수하면서 단테의 표현대로
"처녀인 어머니로서의 고통", 그리고 "아들의 딸" 즉 하느님의 딸로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길에서 고통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1,35) 하였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우리를 덮어 죽기까지 믿음에 따르는 순명의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따르는 경청의 달인이요, 행동하는 어머니이셨습니다.
우리도 일상 나에서 다가오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대로 행하는 성모님을 닮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 31)
한상우 바오로 신부
노오란 봄꽃들이
여기저기서 탄생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주님의 탄생입니다.
주님의 탄생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약속은
주고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우리들 가운데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옵니다.
약속이
아름다운 것은
실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약속으로
아무도 가지 않았던
그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주님 탄생은
하느님의 약속으로
구체화되며
하느님의 약속은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마리아를
빛나게 합니다.
주님 탄생 예고로
마리아는
어머니가 되어갑니다.
마리아는
이 믿음 안에서
신앙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신앙의 여정은
약속을 따르는
결단의 순간순간이 됩니다.
돌보아주시는 분은
언제나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주님 탄생 예고로
우리 삶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를 향한
하느님과의 관계임을
잊지 마십시오.
약속은 끝내
우리 안에서 실현되는
구원의 기쁜 소식임을 믿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정해놓은 결승선을 향해 달린다
전삼용 요셉 신부
인간은 자신이 규정해 놓은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행동합니다.
자신이 늑대라고 자신을 규정해놓으면 사람임에도 늑대처럼 행동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라고 합니다.
각자 자신이 어때야 한다고 믿고 있고 그래서 그렇게 행동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왜 그렇게 살아야하느냐고 우울해하기도 합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누군가 자신을 더욱 가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마인드풀 tv’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유튜버인 정민 씨는 어렸을 때부터 심한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렸습니다.
그 원인은 돈을 벌기 위해 딸을 돌볼 수 없는 형편이었던 어머니에게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그녀는 항상 바빴던 어머니와 애착관계를 형성할 수 없었습니다.
능력 있는 어머니였기 때문에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은 없었지만
부모의 사랑이 부족하였기에 세상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불면증과 불안장애로 인해 급기야 ‘자해’에 중독되었습니다.
자신처럼 부모에게도 관심 받지 못하는 존재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믿게까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손목을 긋고 붉은 피가 솟아나오면 그때야 받아야 할 벌을 받았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충족적 예언’입니다.
자신이 벌을 받아야만 한다고 믿었기에 그 예언을 충족시켜 주었을 때 비로소 평화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마치 중독처럼 자주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부모의 사랑 부족으로 자신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여 그것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피카소의 어머니는 피카소에게 엄청난 가치를 부여해주었습니다.
피카소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내게 그러셨죠.
‘네가 군인이라면 장군이 될 것이다. 네가 성직자라면 교황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저는 화가였어요. 그래서 피가소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사람은 각자 자신의 가치를 자신이 평가해놓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런데 가끔은 자기 가치를 가치 없게 평가해놓고 살면서도 그것이 겸손인줄 압니다.
제가 “여러분은 사람입니까, 하느님입니까?”라고 물으면 거의 모두가 “당연히 사람이죠!”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자기 충족적 예언입니다. 사람이라 평가해 놓은 사람은 절대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합니다.
이미 자신의 크기를 그만한 어항 속에 가둬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께 제시된 것은 실로 엄청납니다.
바로 하느님도 아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예언이었습니다.
즈카르야는 예언자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에도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도 아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에도 “아멘!”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이것이 교만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을 믿지 않고 오늘 복음말씀에 가브리엘 천사가 한 말대로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자신을 절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아의 자기비하적인 예언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믿지 않으니 자기를 만드신 분을 믿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그렇다면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교만은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저는 개에요!”라고 하는 것이 불효이듯, 하느님께 “저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불효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믿기 원하십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제가 감히 어떻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겠어요?”라고 하셨다면
인류 구원은 시작도 못하고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겸손하신 이유는 자기 충족적 예언이 아니라
하느님의 우리 자신에 대한 예언을 믿으셨다는 데 있습니다.
겸손은 만들어진 내가 아니라 만드신 분을 믿는 데서 옵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하와에게
“너는 선악과를 따먹어야 하느님처럼 돼!”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선악과가 없으면 너는 아무 것도 아니야!”란 뜻입니다.
부모님이 “공부를 잘 해야 세상에서 잘 살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도
“공부 못하면 넌 세상에서 아무 쓸모도 없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숨만 쉬고 있어도 하느님임을 믿기를 원하시고 무엇이든 될 수 있음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믿으라고 하시는 이 예언을 깊이 새겨봅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못 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남미여행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볼리비아는 비자가 있어야 합니다.
대사관에서는 인터넷 신청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직접 방문해서 비자 신청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기준은 50세 이상이었습니다. 저는 인터넷으로 접수하였지만,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월요일과 화요일은 50세 이상이 전화 예약을 하고 직접 비자 신청을 하는 날입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디지털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50대 이상의 분들이 함께 신청할 수 있었습니다.
컴퓨터에 있는 사진의 크기를 줄이거나 늘릴 수 있다면, 파일을 첨부하고 보낼 수 있다면,
영어문장을 꼼꼼하게 읽을 수 있다면 인터넷 신청도 도전할 수 있습니다.
황열병 예방 주사를 맞았고, 볼리비아 비자 신청을 하였고, 또 다른 세상을 보려는 열정이 있다면
남미여행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현장 접수하신 분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며 멋진 추억이 함께하는 여행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대사관 창문을 통해서 시청을 볼 수 있었고,
시청의 벽에는 ‘이름 없는 날에도 봄은 옵니다. 이름 없는 꽃에도 향기는 있습니다.’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봄은 아주 특별한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아주 특별한 날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 없는 날들이 모여서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작은 들풀에도 향기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향기를 전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시간은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승리한 사람의 관점에서 기록하면 시간은 역사가 되지만
승리하지 못한 사람의 관점에서 기록하면 시간은 신화가 될 수 있습니다.
태양만 비추어서는 온전한 하루가 될 수 없습니다.
온전한 하루는 태양도 있어야 하고, 달도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궁궐에 살던 헤로데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율법과 지식에 정통한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세계를 제패했던 로마의 힘과 권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100살에 이르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났습니다.
시골의 목동인 다윗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났습니다.
나이 많아서 아이를 가지지 못했던 엘리사벳이 하느님의 자비를 얻었습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던 나자렛의 마리아에게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이름 없는 날에 봄이 오듯이,
이름 없는 꽃에 향기가 나듯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내면서 최민순 신부님의 ‘두메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 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 숨어서 피고 싶어라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 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 숨어서 피고 싶어라”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래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O.F.M :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주님의 대축일이기도 하고 성모님의 대축일입니다.
그리고 인류 구원의 수혜자인 우리 모두의 대축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벗님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냅니다.
어제 우리는 하느님 친히 당신의 이름, '야훼'(나는 있는 나다)를 모세에게 가르쳐 주신 것에 대해 묵상하였습니다.
구약의 하느님 야훼라는 이름이 이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좀 더 구체화됩니다.
그냥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나)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이 되십니다.
그 예고를 오늘 듣습니다.
예고편을 보고나면, 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싶게 하지요. 때론 예고편만 보아도 재미있지요.
오늘 우리는 인류역사상 가장 드라마틱 하고 감동적이고 충격적인 영화의 예고편을 봅니다.
제목을 어떻게 달면 될까요? <임마누엘>. 예고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약혼한 어느 시골 처녀가 어느 날 갑자기 천사로부터 아기를 잉태하리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접하지요.
그것도 정상적인 남녀의 관계를 통하지도 않고 성령의 힘으로 아기를 갖게 되리라는 말도 안 되는 설정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가 절망에 빠져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가의 핵심 포인트지요.
결론은 그 처녀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인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터미네이터의 원작(?)이 이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어때요? 같이 이 영화 보시지 않을래요? 사실 전 영화보러 잘 안가요?
원작소설을 더 즐기지요. 영화 보고나서 후회하는 경우가 많아서 거의 안 가지요.
성경의 이야기들이 그 어떤 영화보다 흥미진진하고, 세상 사람들 살아가는 현장 삶이
한편의 영화와 다름없고, 자연의 변화들이 그 어떤 영화 장면보다 더 아름다우니 말이예요.
그러나 이 영화만은 꼭 벗님에게 보여드리고 싶어요.
사랑하는 벗님과 함께 감상하고파요. 그렇게 하실 꺼죠!?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인간은 생물학적 물리적 논리적 질서에서 살짝 벗어나기만 해도 긴장합니다.
살다보니 세상을 다 가질 것 같았던 어린 시절 꿈이 차차 쪼그라들면서
인간에게는 가능한 것보다 불가능한 것이 더 많다는 걸 알아가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 없어서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완전함, 온전함, 전체성에 모두, 전부를 담고 계시기에 예외의 시공간이 없습니다.
그처럼 불가능을 모르시는 완전하신 분께서 작고 여린 소녀에게 미리 당신의 뜻을 알리시고 동의를 구하십니다.
먼저 행하시고 통보하시는 것이 아니라서 이를 전하는 천사의 말 동사는 '~일(할) 것이다'로 끝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응답의 순간에 마리아는 앞으로 자신에게 펼쳐질 미래를 조금이라도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큰 인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 다윗의 왕좌, 영원히 다스리심, 그분의 나라..."(루카 1,31-33)를 전하는
천사의 말에는 사실 어떤 고통과 고난의 흔적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구원자 메시아를 기다리는 역사적 시점에서 이스라엘의 딸이라면
율법과 예언서를 통해 이사야 예언자의 이 선포를 마음에 담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구체적 실현 과정에 대해서야 세세히 알 수는 없었겠지만,
메시아의 운명 역시 예언서 갈피마다 드러나 있으니
뭔가 평범치 않은 길임은 감지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엄청난 영광과 축복으로 보이는 운명의 당사자가 본인일 수 있는 이 알림의 순간에 마리아는 알면서도,
또 모르면서도 하느님께 온전한 신뢰를 실어 응답한 것입니다.
표현만 좀 다를 뿐, 히브리서 저자가 밝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응답,
"보십시오, 저는 당신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9)와 같은 마음, 같은 내용일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어떻습니까? 정말 벗님들의 생각에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혹 스스로 하느님의 가능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 적은 없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시라"고 믿음과 겸손을 다해 용기 있게 응답해 놓고서는,
무지와 욕망, 잘못된 식별로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망쳐버린 뒤 두고두고 후회하며 아파한 적은 없습니까?
단 한 번의 믿음의 고백을 그 이후로도 쭈욱 영원까지 유효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나약한 우리에게는 참 힘든 일입니다.
어쩌면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것을 빼고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던 마리아도
저 응답을 평생 되풀이하며 갱신하시지 않았을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특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아드님의 수난, 죽음을 맞닥뜨리셨을 때,
하느님께 "당신이 뜻하신 대로 이루시라"고 아득해지는 머리와 무너지는 억장을 부여잡고
온 힘을 다해 피 토하듯 믿음을 고백하시지 않으셨을까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불가능하게 망쳐버린 순간과 지점은 있을 수 있을 수 있습니다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지점 그 순간에 주저앉아 울고 있다면 거기서부터 다시 가능함을 열어주시는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그분의 "불가능 없음" 역시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무지와 욕망과 잘못된 식별이 낳은 실패의 순간, 그 지점에서마다 새롭게 갱신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지만 나약한 우리는 또 넘어질 수 있고 그분께 불가능의 흠짐을 낼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때마다 마리아의 저 고백을 다시 외치며 무너진 자리에서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우리의 이 처절한 믿음을 보신 하느님께서 그때마다 우리를 일으키시며
당신의 "불가능 없음"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그렇게 앞을 향해 나아갑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천사가 오늘 벗님 여러분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무슨 좋은 일이 있을려나?" "이게 무슨 말일까?" "에이, 개꿈이겠지, 뭐?"
2천 년 전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나에게 일어난다면 어떨까요?
천사는 나에게 기뻐하라고 하네요. 왜 기뻐해야 하느냐구요?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네요.
여러분은 기쁘게 살고 계시나요? 기쁘다면 왜 기쁘고 기쁘지 않다면 왜 그런가요?
사실 우리 삶이 늘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좋을 때 기쁘고 안 좋을 때 슬프고 괴로울 테지요.
그러나 이런 기쁨은 조건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우리가 조절하고 획득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천사는 우리가 늘 어떠한 상황에도 기쁠 수 있는 이유를 말해주네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만 확실히 알고 그렇게 믿기만 하면 가능한 일이라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 있고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성모님처럼 기쁨의 사람이 됩시다.
어떤 상황에도 기쁨을 잃지 않는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어렵다구요? 아닙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제가 천사로서 오늘 여러분에게 이 메시지를 전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