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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6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 : 다니 3,25.34-43
복 음 : 마태 18,21-35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끊임없는 기도가 회개가 용서가 자비가 답이다
-주님과 함께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강론 제목이 참 깁니다.
마침 오늘 말씀과도 연관되는 느낌이라 어제 썼던 장시長詩를 인용함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참 오랜만에 저절로 흘러나온 장시입니다. 시제목과 강론제목이 일치합니다.
-어둡고 흐리고 춥다
미세먼지로 공기도 상당히 나쁘단다
요즘 세상같다
사람도 날로 사악해져 가는 것 같다
많이 거칠고 사납다
어려서부터 보고 배울 인성이지 가르쳐서 되는 인성이 아니다
모두가 가엾고 불쌍타
너나 할 것 없이 참 힘겹고 고단하고 고달프게 살아간다
참 중요한 일이 자기를 지키는 일이다
존엄한 품위의 사람으로 사는 거다
사제서품 후 만 30년
오로지 하느님 사랑에
날마다 참 치열하게 목숨 걸고 쓴 강론이다
아마 이런 이도 드물거다
예나 이제나 늘 하느님 사랑에 목마르고 배고팠다
초등학교 교사시절은 아이들이
수도사제 된 이후엔 하느님이
내 사랑 전부였다
내 방 책장은
30년 동안 써온 강론집들로 가득하다
마리아의 집 피정집에는
30년 전 새사제 되어 미사봉헌 했던 앉은뱅이 제대가 그대로 있다
노력해야 제자리다
때로 진보가 아닌 퇴보처럼 느껴진다
청력도 예전 같지 않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평생 살았어도
일정한 범위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서 거기같다
큰 감옥 같다 할까\
어디가도
어디 있어도
불편하고 공허空虛했다
예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것도 병인가
인생놀이터에서
노는 모습도
떠나는 모습도 제각각이다
잘 놀다가 제때에 잘 떠나 아버지 집에 귀가하는 이들은 몇이나 될까
세월 흘러 나이 들어 좋은 이들 다 떠났는데도
인생 놀이터에서 혼자 남아 있으면 참 외롭고 쓸쓸하겠다
몸도 마음도 약하고 아프면 더 그러하겠지
짐이 되는 신세에 대부분 떠나기를 바라지만 그 어디 쉬운 일인가
기도하라
회개하라
용서하라
자비로워라
끊임없는 기도가 회개가 용서가 자비가 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뻐하라
늘 기도하라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라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
오, 주님
당신 함께 하는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이옵니다.
당신 함께 계시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다시 일어나 시작하는 인생 일터에 놀이터에 배움터에 쉼터입니다.
주님 축복 하소서
저희 가련한 나그네 인생들을
당신만이 저희의 행복, 저희의 기쁨, 저희의 평화, 저희의 구원, 저희의 모두이옵니다.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오늘 복음을 요약하면 끝없이 용서하라, 끝없이 자비로워라이며
제1독서 다니엘서를 요약하면 끝없이 기도하라, 끝없이 회개하라입니다.
사순시기에 아주 적절한 내용들입니다. 참 무지의 무자비의 사람들입니다.
복음에 대한 답을 독서가 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끝없이 형제를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밥 먹듯이 숨 쉬듯이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용서해야 서로 치유되고 자유로워집니다.
우리가 저마다 우리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우리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입니다.
하여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주님의 기도 내용이 절실합니다.
무지와 무자비의 사람들입니다.
하여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란 속담도 있고, 배은망덕이란 말도 있습니다.
잊어선 안될 일이 은혜요 감사입니다.
복음의 만 탈렌트 빚졌다 탕감 받은 이가 상징하는바 하느님께 무한한 사랑의 빚진 우리 인생입니다.
만 탈렌트 탕감 받은 자의 행위는 얼마나 매정하고 잔혹하고 인색하고 무자비한지요.
고작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처사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한 탈렌트는 6000데나리온 노동자가 안식일을 빼고 20년 일해야 벌 수 있는 거액이니
1만 탈렌트는 상상을 초월한 금액입니다. 이토록 하느님께 무한한 사랑의 빚을 진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참 무지와 무자비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알면 알수록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복음의 무자비한 사람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동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미사 시 부끄럼 없이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송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하여 끝없는 기도와 회개입니다.
제1독서 다니엘서 중 불가마 속에서 우뚝 서서 건재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아자르야가 기도와 회개의 모범입니다.
불가마가 상징하는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현세입니다.
불가마속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도와 회개입니다.
기도와 회개를 통해 주님을 닮아 무지로부터, 또 공격성, 폭력성, 잔인성으로부터 해방될 때
지혜와 자비, 온유와 겸손입니다.
“주님, 저희의 죄 때문에 온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이 희생 제물이 되어 당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을 얼굴을 찾으렵니다.
당신의 놀라운 업적에 따라, 저희를 구원하시어, 주님,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참 간절하고 절실한, 진정성 넘치는 기도의 모범 아자르야입니다.
참으로 기도도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간절히 기도하고 또 회개해야 주님의 은총으로 주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끊임없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정화하시고 성화하시어
날로 주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십니다.”(시편25,4-5ㄱㄴ)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양은 지독한 근시라서 바로 제 눈앞의 것도 잘 보지 못한다고 하지요.
그래서 앞서가는 동료 양만을 따라만 다닙니다.
심지어 한 마리 양이 절벽에서 떨어지면 줄줄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고 하더군요.
이 양의 또 한 가지 특징은 무척 게으르다는 것입니다.
양은 자기 우리 안에서도 거의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게으릅니다.
그래서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양 무리 사이에 염소 몇 마리를 섞어 두는 것이 주인의 지혜입니다.
우리도 이 양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돈이나 명예만을 쫓으면서 죄의 굴레에 계속 빠집니다.
또한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는 엄청나게 게으릅니다.
나중에 기도하고, 나중에 사랑하고, 나중에 용서하고...
이런 식으로 ‘나중에’만 외치는 엄청 게으른 우리입니다.
이제 주님을 보지 못하고 세상 것들만을 쫓아 사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게을러서도 안 됩니다.
선천적으로 시력 나쁜 것을 고칠 수는 없겠지만 주님만을 따라가면 안전한 길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뜻을 떠올리면서 실천하는데 성실한 우리가 될 때 착한 양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큰 사랑을 주셨지요.
십자가 안에서 주어진 하느님의 용서라는 충만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큰 선물로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선물들을 기억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를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현대의 대표적인 영적 스승인 칠층산의 저자인 토마스 머튼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형제자매는 될 수 있으나 관리자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들도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소유이지 나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곧 그들의 관리자가 되려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관리자의 모습으로 이웃들에게 다가선다면
사랑이 아닌 똑같이 관리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웃들에게 사랑으로 다가서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사랑을 한껏 받으면서 기쁨 안에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용서받아야 할 죄인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능한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어느 한 순간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넘어지는 이유를 보면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야고보사도는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야고4,1-2)하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도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이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독이라고 가르칩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화를 내고 다투는 일이 없을 텐데
욕심 때문에 남과는 물론 심지어 형제와도 등지게 되기도 합니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서로를 힘들게 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담을 높이 쌓게 됩니다.
얼마 전 한 어르신이 자녀들에게 유언으로 유산을 분배하고 세상을 뜨셨는데
자녀들에게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자녀들은 모두 내로라할 만큼 큰 재산을 가진, 그야말로 살만한 사람들이었는데
서로 서운함을 가지고 등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재산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재산은 분명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데 재산이 사람을 죽입니다.
그 담을 허물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담을 허문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라는 것이 말같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듯이
하느님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성찰해 볼 때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을 살아온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음을 다잡으려 하지만 인간의 연약함에 넘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왔고
앞으로도 분명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는 더욱 크게 필요합니다.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나의 의지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어야 합니다.
용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용서 덕분에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당신을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60) 하고 애원하였던
스테파노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용서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담고 있게 되면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고립되게 되고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건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용서는 결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선행도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만큼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설령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도!
어느 날, 내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깊이 느낄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3,9).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
봄꽃도
겨울을 내려놓으며
봄꽃으로 피어납니다.
하느님의 끝없는
용서 안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용서이며
서로를 살게 하는
용서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는 오늘로
이끄십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는
용서하시는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용서이십니다.
용서의 여정에는
실패와 좌절도
뒤따릅니다.
용서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용서로
단절된 사람과
사람을 다시 이어줍니다.
용서는
서로를 살리는 힘입니다.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용서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삶이
다시
길을 찾은 삶입니다.
용서하는 삶이
하느님 자녀의 삶입니다.
용서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한 사람을
이해하는 폭도
깊고 넓을 것입니다.
용서는
하느님께 내려놓는
가장 아름다운 체험입니다.
구원의
또 다른 이름은
용서입니다.
능력이 주는 선물은 자비다
전삼용 요셉 신부
유태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바로 전에 천사들의 의견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먼저 정의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을 만들면 그가 동료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사악을 자행할 것이고,
또 사람은 강퍅하고 잔인하고 부정직하여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진리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거짓되고, 그의 형제들을 속일 것이며 심지어 하느님 당신도 속일 것입니다.”
거룩함의 천사도 거들었습니다.
“사람을 절대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의 이름을 더럽힐 것입니다.”
그러자 가장 마지막으로 자비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사람을 만드십시오.
다른 천사들의 말대로 사람은 죄를 짓고 정의와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거룩함을 잃게 될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사람을 만들지 않으신다면 다른 천사들이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오히려 그들의 나약함을 알면서도 그들을 천사들보다 높게 끌어올리실 수 있다면
그것이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길일 것입니다.”
자비는 내가 힘이 없어서 상대의 잘못을 묵인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는 참아낼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힘이 없으면 오히려 자비롭지 못하게 됩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용서는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라고 여쭈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매정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임금에게 만 탈렌트를 탕감 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감옥에 가둡니다.
이에 임금도 화가 나 그 종도 만 탈렌트를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백 데나리온은 약 천만 원 정도 되고 만 탈렌트는 6조 원정도 됩니다.
6조 원을 가진 사람에게 천만 원은 돈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가 자신이 가지게 된 6조 원의 가치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죄를 용서받았다면 그리스도의 피는 6조 원의 가치를 지닙니다.
그런데도 천만 원정도 되는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떤 자비를 받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닌 무한한 능력을 모를 때엔 가지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1조 원을 가진지 모를 때 3천만 원을 꿔 간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주님께로부터 무엇을 받았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1조 원이 있어도 있는 줄 모르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은총도 용서로 드러나지 않으면 받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상 하느님께서 가장 무능하게 보였던 순간이
바로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이 무능하심은 가장 큰 전능으로 드러났습니다.
참아낼 수 있는 것이 곧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강하셔서 약해지심을 감당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날 능력이 없으셨다면 죽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실 수 있으셨기에 당신 안에 생명이 충만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께서 전능하시다는 증거입니다.
그 전능하신 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은 우리들 또한 당연히 자비로워야 합니다.
용서 때문에 죽어야한다는 것을 알아도 용서할 수 있다면 그 안엔 영원한 생명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자비롭지 못합니다. 약한 사람이 강요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은 용서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서양의 역사에서 ‘알렉산더 대왕’은 커다란 제국을 건설한 왕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이 점령한 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하였고, 도서관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젊은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세계의 역사는 다르게 변했을 거라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웠던 그는 문과 무를 겸비한 왕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과 관련된 일화는 아직도 전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하루는 알렉산더 대왕이 당대의 철학자이며 사상가인 디오게네스를 찾아갔습니다.
통속에서 한가롭게 햇빛을 받고 있던 디오게네스에게 알렉산더 대왕이 물었습니다.
“나는 세상을 정복한 왕이다. 나에게 원하면 무엇이든지 주겠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제게는 따뜻한 햇볕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자리를 좀 비켜 주십시오.”
세상을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도 디오게네스에게 줄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엉킨 실타래 때문에 고심하였습니다.
실타래를 풀려고 하면 할수록 실타래는 더욱 엉켰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엉킨 실타래를 보면서 가위를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가위로 엉킨 실타래를 잘라버렸습니다.
엉킨 실타래가 없어졌으니 문제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컴퓨터에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이것저것 해 보지만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컴퓨터를 꺼볼 때가 있습니다. 컴퓨터를 다시 켜면 문제가 해결되는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문제를 떠나는 것이 문제 해결의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물속에서 살아야 하는 장구벌레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많은 선배가 어느 날 허물을 벗어버리고 물 밖으로 나가는 것을 부러워하던 장구벌레들의 이야기입니다.
물속에서 보는 세상은 너무도 아름답고, 영롱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물속에 있는 장구벌레들은 물 밖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잠자리가 되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선배들은 물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 밖의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알려 줄 수 없었습니다.
잠자리가 되면 반드시 물속으로 돌아와서 알려주리라고 결심한 장구벌레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자리가 되어서 물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물속의 장구벌레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말고, 반드시 허물을 벗어버리고 하늘을 높이 나는 잠자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하늘의 세상을 알려주시는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용서’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형제가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처벌과 제재는 법과 규칙의 문제입니다.
사회는 이와 같은 법과 규칙이 있어야지 질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양심과 내적인 자유의 문제입니다.
처벌과 제재는 질서를 유지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마음의 평화를 주거나, 상처를 치유해 주지는 못합니다.
용서는 마음의 평화를 주기 때문에, 내적인 상처를 치유해 주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宗敎란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한자입니다.
Religion은 엉킨 실타래를 푸는 의미가 있는 영어라고 합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으로 세상사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이 종교라면
그리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그리하여 참된 구원의 문에 도달하려면
꼭 是非를 가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법과 규정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도 용서와 사랑으로 해결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갈등과 아픔이 있다면 그것까지도 놓아버리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따라서 용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용서(容恕)는 상대방과 같은(如) 마음(心)을 품는 것
오상선 바오로 신부(O.F.M :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살다보면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내가 베푼 사랑이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 올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 형제 같은 사람에게서 받게 될 때 정말 용서가 안되지요.
벗님 여러분에게도 아직 용서할 준비가 안 된 상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정말 힘들겠지만 그래도 용서가 하느님의 일이라 믿고, 스스로를 억지로 다그치고 밀어 붙이기보다,
나와 그를 하느님 자비에 맡겨드린 채 삶이 흘러가는 대로 가다보면 조금씩 조금씩 아픔과 미움이 옅어지고,
어느새 언제 그랬나 싶게 희미한 기억으로 남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될 겁니다.
베드로도 오늘 정말 견디기 힘들었나 봅니다.
형제들 중에 누가 자꾸만 깐죽거리고 자신을 무시하고 자신을 갖고 논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나 봅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참아주었겠지요. 그런데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모욕감에
예수님의 재가를 받아 오늘은 한대 멋지게 쥐어박아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습니다.
벗님도 그런 경험을 할 때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어떻게 하지요!? 예수님은 허허 웃으시네요.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구요?!
이 말씀은 지금까지 일곱 번을 참았다면 그게 아까워서라도 끝까지 참아주라는 말씀이겠지요.
무조건 참아라는 말씀은 아닐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참을 수 없는 일이라면 애시 당초 혼 줄을 내주고,
이미 몇 번이나 참았다면 끝까지 참고 용서하라는 뜻이 아닐른지요?
사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 수없이 하느님 사랑을 배신하여도
끝까지 참아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를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 그 아버지의 자녀인 우리도 그럴 수밖에요.
오늘 나에게 잘못한 이, 그래서 용서가 잘 안 되는 이,
그를 위해 주모경 한번 바쳐주고 하루 시작하면 어떨까요?
내가 용서하기 힘들지만 용서의 대가이신 우리 아버지께 맡겨봅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 18,35)
벗님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많지요?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는 더 많구요.
만약에 하느님께서 이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많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하느님마저도 마음대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없나 봅니다.
우리의 주도적인 노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먼저 내 죄를 아파하고 용서받으려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용서받고 싶지 않은 사람을 용서할 이유는 없지 않겠어요?
그리고 자기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백성사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보통 기도와 희생, 돈으로 보속하려고 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효험이 있는 보속은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내가 용서하면 할수록 하느님께서는 몇 십배, 몇 백배로 내 죄를 사해 주십니다.
그러니 남을 용서하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 형제가 나에게 잘못하면 몇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즉 끊임없이 용서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가장 용서하기 힘든 상대는 누구일까요? 자기 자신이 아닐까요?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듣고 자란 이는 마음의 미움과 분노를 외부로 돌리기보다
먼저 자신의 문제를 성찰하게 되지요.
그런데 "제 탓이오!"가 지나치면, 모든 잘못되고 어긋난 일의 원인을 자기 탓으로 돌리고,
무지와 욕망과 잘못된 식별로 스스로를 망쳐버렸다는 죄의식에 갇혀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 칠 수도 있습니다.
독서인 다니엘 예언서에서는 네브카드네자르 임금이 명한 우상 경배를 거부한 유다청년 세 명이
불가마에 던져졌을 때, 그 중 한 명인 아자르야가 불가마 안에서 바친 기도가 나옵니다.
"저희의 죄 때문에 저희는 오늘 온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다니 3,37)
여기서 그의 기도가 그쳤다면 불가마 안에서 올린 그의 기도는 자기비하와 신세 한탄으로 끝났겠지요.
그러나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 자비에 무한한 신뢰를 드러냅니다.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 얼굴을 찾으렵니다."(다니 3,41)
올바른 자기 인식은 이렇게 스스로를 구렁으로 몰아넣지 않고 가장 비참하고 처참한 상황에서도
눈을 들어 하느님을 바라보게 해줍니다.
이미 내 모든 허물을 탕감하신 하느님 자비에 대한 신뢰와 의탁이야말로
진정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용서하신 자신에게 내가 또 다시 탓을 돌리는 것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임금과 빚진 종, 종의 동료 안에서 벌어진 일과 다를 바 없습니다.
혹 그러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그러실리야 없겠지만,) 임금이 나중에 했던 것처럼
내게 베푸셨던 어마어마한 자비를 거두시기 전에 어서 스스로를 용서하도록 애써야겠지요.
허물과 부족함과 실수와 실패까지 포함해 자기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그다지 쉽고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만,
하느님께서 먼저 그리 하셨으니 이제 우리에게는 꼭 해야 할 의무가 되어버린 겁니다.
내 못난 탓에 이제 다 끝났다고, 다 망쳐버렸다고,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울고 있다면,
"그래서 내가 너 대신 죽었으니 너는 내 생명으로 힘내어 살아라." 하시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을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화답송)
그분은 절망의 끝에서도 살 길을 열어 주시고 바른 길을 가르치시고, 또 친히 길이 되어 주는 분이십니다.
그 길로 다시 한 걸음만 꼭 한 걸음만이라도 시작하면 됩니다.
그 다음은 그분께서, 그분 자비가 하실 겁니다. 아멘.
오늘 용서야말로 가장 큰 은혜요 축복임을 가득히 체험하는 날 되시길 빕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