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사 생태길에서
가뭄 기미가 보이던 대지를 적셔준 비가 내렸다가 그친 유월 둘째 일요일이다. 강수량이 넉넉하지 않아도 이번 비는 농사에서나 일상생활 여러 면에 도움이 되지 싶다. 나는 등기부상에 지번이 등재된 땅이 한 뼘도 없어도 길을 나서면 어디나 내가 관리하는 텃밭이고 꽃밭이다. 그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헤아릴 수 없기에 세상에서 가장 넓은 텃밭과 꽃밭을 가꾼다고 큰소리도 쳤다.
간밤 초등 교장으로 퇴직 후 귀촌한 친구가 농사지은 감자를 보내온다는 연락이 와 새벽에 아파트단지로 내려가 받아놓았다. 친구가 애써 짓는 농사에 한 방울 땀을 보태지 않고 덥석 받기만 해 마음 한 켠 미안한 구석이 있었다. 친구는 지난해 이어 올해도 자색 감자를 심었는데 수확량이 많아 일부는 원하는 이들에게 판매 후 이삭 감자에 해당해도 먹기에는 전혀 이상 없을 듯했다.
감자 상자를 집으로 들여놓고 산책을 나섰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난 집 근처 정류소에서 진해로 가는 151번 버스를 탔다. 일요일이고 아침 이른 시각이라 버스는 승객이 적어 시내를 곧장 관통해 안민터널을 빠져 경화동에 이르렀다. 거기서 동진해 용원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 웅천에서 내렸다. 마을 안길을 지나 백일마을로 드니 ‘주자영당’이 나왔는데 주자를 향사하는 사당이었다.
진해 천자봉 아래 우리 집안과 같은 본관을 쓰는 주가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사는데 일제 강점기 평양 감옥에서 순국한 주기철 목사를 배출했다. 그보다 더 이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연관된 설화가 재미있다. 천하 명당을 찾아 나선 이성계는 묫자리를 잘 써서 조선을 창업한 임금이 되었다. 설화에는 이성계를 수행한 하인이 더 좋은 터를 차지해 명나라 황제가 된 주원장이다.
백일마을 동구에는 뜰보리수 열매가 가득 달려 있었고 텃밭에는 빨갛게 익은 산딸기를 따는 손길이 분주했다. 천자봉에서 시루봉으로 이어지는 불모산은 안개에 가려 산등선이 보이질 않았다. 마을 뒤로 뚫린 ‘소사 생태길’로 명명된 숲으로 들었다. 그곳은 진해 드림 로드 마지막 구간으로 ‘백일 고요 아침길’에서 이어졌다. 비가 그친 뒤 녹음이 짙은 숲길을 걸으니 기분이 상쾌했다.
산허리를 오르니 두 여인이 따라와 걸음을 늦추어 그들을 앞세워 보냈다. 조금 오른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와 왼편으로 난 길로 드십사고 했다. 얼굴이 닮아 보여 자매인지 모녀간인지 궁금해 여쭸더니 후자였다. 아마 백일마을 전원주택에 귀촌했거나 남문지구 아파트에 사는 주민인 듯했다. 나는 소사로 가는 숲길을 여러 차례 다녀 주변 지형과 식생에 대해서도 훤하다.
차량도 다닐 수 있는 임도 구간이 나와 쉼터에서 간식으로 가져간 커피와 술빵을 먹었다. 거기서 내 뒤를 따라오는 한 사내는 무척 건장해 칠십대 초반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창원역 근처 아파트에 산다는데 안민고개에서 대발령까지 자전거를 타고 와 거기서 백일마을을 돌아 소사까지는 걸어간다고 했다. 나는 사내도 먼저 앞서 가게 두고 쉬엄쉬엄 걸으면서 쇤 산나물을 살폈다.
지나간 봄날에 여기저기 다닌 산나물 채집 산행에서 소사 생태길은 들릴 겨를이 나질 않았다. 우선순위에 밀려 계절이 바뀐 초여름에 찾으니 몇 가지 산나물은 억세져 나물로 삼을 수 없을 정도였다. 잎을 넓게 펼친 참반디는 꽃봉오리를 맺어 갔다. 바디나물도 다수 보였으나 나물로 삼기는 어려울 듯했다. 늦여름에 자주색 꽃을 피우는 등골나물은 잎줄기를 한창 불려 자라고 있었다.
휴일을 맞아 자전거를 타고 비탈을 올라오는 동호인들이 간간이 스쳐 지났다. 쉼터 정자를 지나자 길섶에는 벌개미취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래전 옮겨 심어 불어났는지 군락을 이루어 자랐다. 벌개미취는 한여름부터 연보라 꽃을 피우는 야생화이면서 여린 순은 산나물이다. 비록 쇠긴 해도 벌개미취 이파리를 주섬주섬 따 모았다. 억세었지만 삶아 데치면 찬거리로 삼아 볼까 싶었다. 24.06.09
첫댓글 소사생태길 ...숲속나들이를 재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