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넌 도대체 누구냐?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게 만드는 번드르르한 포장술인가.
행복한 삶과 기업 성공의 핵심인가.
이제 디자인에 철학이 필요한 시간!
“디자인은 끊임없이 사유하지만,
그 자신에 대해서는 사유하지 못한다.”
오늘날 디자인을 잘 하는 기업(애플)과 디자인이 발달한 나라(스칸디나비아 국가들)가 앞서가는 모습이 두드러진다. 기업의 경쟁력과 국가의 공공성에 디자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디자인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만큼 고민거리이기도 하다. 이 책은 놀랍게도, 오늘날 가장 중요하고 논쟁적인 분야에 대한 이론적인, 철학적인 고찰을 시도한 첫 번째 체계적인 시도이다.
“디자인은 이제 역사가 정립되고, 직업상의 실무가 확실히 파악되었으며, 전 세계 교육기관의 목록이 작성된 데다, 작업 방법 및 도구의 수준도 높아지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주요 인물들이 만인에게 알려진 분야다. 그렇기에 이런 분야가 오늘날 이토록 막연한 개념 속에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히 놀랍고도 상상이 가지 않는다.” (제1장 디자인의 역설)
물론 디자인에 대한 고찰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제2장 ‘무질서의 역사’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성립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주는데, 주요한 디자인 선각자들의 실천과 생각이 오늘날 디자인의 개념을 만들어왔음을 보여준다.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1849년 영국 잡지 『디자인과 제조 저널』에 처음 등장한 이래 시대상에 따라 그 의미는 부단히 변모해왔다. 이 책은 그 과정을 통해 디자인 자체의 역사를 간결하고 알기 쉽게 드러낸다. “나는 내 삶의 물질적인 틀이 쾌적하고 아름다우며 너그럽기를 요구한다”고 한 19세기의 선각자 윌리엄 모리스, 역사상 최초의 산업디자이너 페터 베렌스(AEG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현대 디자인의 실험실 바우하우스, 이윽고 『추한 것은 잘 팔리지 않는다』고 한 레이먼드 로위의 1950년대에 이른다. 1950년대가 되자 ‘산업 디자인’은 『타임스』에 의해 ‘미국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산업 현상 중 하나’로 명명된다.
“이제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광고 문구에서뿐만 아니라 통신판매 카탈로그에서도 종종 눈에 띈다. 디자인은 잘 팔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제2장 무질서의 역사)
디자인 거장들도 풀지 못한 숙제,
애플, 삼성을 도약하게 한 방법론
저자는 일본의 하라 켄야, 필리프 스타르크 같은 유명 디자이너들의 직관적 단상부터 사회학자와 철학자들의 디자인에 대한 연구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수렴하여 디자인의 주요 문제를 폭로하고 해답에 접근한다. 그리하여 대안노벨상 후보로도 거명된 저명한 빅터 파파넥(“산업 디자인보다 더 유해한 직업은 거의 없다.”)도 고뇌하게 만들었고, 이탈리아의 거장 에토레 소트사스(“지금 사람들은 다들 나를 아주 나쁜 놈이라고 하고, 다들 내가 디자이너라서 정말 나쁜 놈이라고 하며 … 다들 누군가 이 일을 해도 잘해봤자 꿈속을 헤매기만 할 뿐이라고 한다.”)도 혼란스러워 한 문제가 결코 해결 불가능한 난제가 아님을 증명한다. 저자가 요약한 ‘디자인의 본질 세 가지’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첫째 ‘형태조화’ 효과, 둘째 ‘사회조형’ 효과, 셋째 ‘경험’ 효과이다. 디자인은 조화로운 형태를 추구하여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고 이를 사용 경험케 하는 활동으로서 책임과 가능성을 겸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 효과의 경험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욕실을 이용하면서 감각적 즐거움을 맛본다면, 몇 시인지 확인하면서 깜짝 놀란다면, 또는 전화를 사용하면서 재미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나는 가장 평범한 행위 속에서도 쾌락의 발현을 경험하고, 이는 내 삶의 경험에 더 나은 존재의 질을 부여하게 된다.” (제5장 디자인 효과)
이 책은 고찰을 하느라 독자의 긴 인내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럴듯한 디자인 사례를 나열하느라 카탈로그처럼 된 디자인 책들과 다른 길을 선택했다. 짧은 분량 속에 디자인의 개념과 윤리 같은 기본적 문제부터 디지털 디자인, 그리고 미래 혁신과 같은 쟁점까지 속시원히 다루고 있다. ‘디자인의 본질’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예시하고 있으며(프랑스의 자전거 대여 시스템 벨리브Velib), 삼성전자의 디자인 혁신에 일조한 바 있는 세계적인 디자인 컨설팅 기업 IDEO의 철학과 프로세스가 생생히 드러나 있다.(제9장 생각하는 사물 ? ‘디자인적 사고’라는 개념에 대하여)
디자인은 이미 삶의 구체적인 조건으로서 우리와 함께한다. 여전히 유행에 민감하거나 마케팅 담당자들만이 관심을 가지는 분야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편견일 뿐이다. “우리가 건물을 만들지만, 그 건물이 다시 우리를 만든다”는 통찰은 이미 윈스턴 처칠 시대에 나왔다. 이처럼 중요한 디자인은, 게다가 아름답기까지 하다.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디자인한 런던의 거킨(오이피클) 빌딩,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유려한 곡선의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의 아름다운 자태는 이 책에 소개된 사진에서도 빛난다. 이런 아름다움이 지역사회에 일으킨 영향력은 그보다 더 아름다웠다.
● 추천사
디자인은 삶의 질을 높이고 기업의 이윤을 창출하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들 하지만, 한편에선 산업의 지속을 위해 필요 없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범죄라고까지 비난하기도 한다. 그 간격은 너무나 크다. 『철학자의 디자인 공부』는 디자인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디자인은 마케팅의 시녀인가?” “디자인은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게 만드는 번드르르한 포장술인가?” “디자인이 이 세상에 주는 효과는 무엇인가?” “디자인은 예술과 어떻게 다른가?” “디자인의 창조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디자인 혁신이란 무엇인가?” 등의 의문에 대해 짧지만 명쾌하게 해석하며 답한다. 디자인에 따르는 고민과 고통은 숙명과도 같다. 그만큼 디자인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책이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김신 (대림미술관 부관장, 전 『월간 디자인』 편집주간)
내가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이를테면 이케아IKEA 브랜드 웹사이트의 영국 페이지에서는 ‘아름다운 디자이너 부엌Beautiful Designer Kitchens’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이 문구에는 두 가지 전제가 담겨 있다. 첫째, 디자이너들이 멋진 부엌을 만들 줄 알거나, 디자이너의 부엌은 반드시 아름답다는 전제로, 다시 말해 디자인은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과 역할을 지닌다는 뜻이다. 둘째, 디자이너 이름이 서명된 부엌을 장만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하거나, 디자인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가치를 이룬다는 전제로, 다시 말해 디자인은 그것만으로도 소비의 ‘기표記票/signifiant’가 된다는 뜻이다. 이를 통해 ‘아름다운 디자이너 부엌’을 구입하면서 우리가 소비하는 것은 제품으로서의 주방 설비가 아니라 ‘기표’로서의 부엌, 즉 ‘디자이너 부엌’이라는 추상적인 아이디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제2장 무질서의 역사)
디자인은 구조적, 역사적 모순에 토대를 두고 있다. 우선 디자인은 사회주의의 고안물이다. 영국에서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 산업화에 맞서 저항는 과정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자인은 자본주의의 고안물이기도 하다. 독일에서 공업 생산을 받아들이면서 태어나 미국에서 ‘산업 디자인’이라는 형태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조적으로 모순된 개념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일무이한 것이다. 또한 그 어떤 활동을 정의할 때도 정치적 양면성이 이 정도까지 구체화되지는 않는다. 사회주의적인 동시에 자본주의적인 것, 이것이야말로 디자이너에게 주어지는 요구다. (제4장 자본을 넘어)
1943년에 태어난 빌 모그리지는 영국의 산업 디자이너로, 1979년에 최초의 노트북 ‘그리드 컴퍼스Grid Compass’의 디자이너로 선정되었다. 1982년에 시판되어 1985년, 디스커버리 우주선에 탑재된 이 노트북을 위해 모그리지는 특히 모니터?덮개를 닫으면 컴퓨터가 꺼지는 원리를 고안했다. 그는 한 동영상 대담에서 “이토록 혁신적인 무엇인가를 제작하던 팀의 구성원이 되었을 때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고 밝히기도 했다. 기능성을 갖춘 최초의 시제품을 제작한 1981년, 모니터 앞에 앉아 인터페이스를 조작하기 시작하던 그는 프로그램에 쏙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그는 만약 사용자를 위한 디자인을 성공적으로 하고 싶다면, 인터랙티브 기술 그 자체를 디자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이 때, 새로운 디자인 분야가 태어난 것이다. (제7장 디지털 디자인)
첫댓글 스텐판 비알 지음 / 역자 이소영 옮김 / 역자평점 10.0 / 출판사 홍시 | 2012.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