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초대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가 아모스를 비난하자, 아모스는 자신이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던 사람으로 주님께 붙잡혀 예언자가 되었다며 이스라엘의 멸망을 거듭 예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치시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 주신다(복음).
제1독서
<가서 내 백성에게 예언하여라.>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7,10-17
그 무렵 10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가 이스라엘 임금 예로보암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아모스가 이스라엘 집안 한가운데에서
임금님을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더 이상 참아 낼 수가 없습니다.
11 아모스는 이런 말을 해 댑니다.
‘예로보암은 칼에 맞아 죽고 이스라엘은 제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갈 것이다.’”
12 그런 뒤에 아마츠야가 아모스에게 말하였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13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다.”
14 그러자 아모스가 아마츠야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15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16 그러니 이제 너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너는 ‘이스라엘을 거슬러 예언하지 말고
이사악의 집안을 거슬러 설교하지 마라.’ 하고 말하였다.
17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아내는 이 성읍에서 창녀가 되고 네 아들딸들은 칼에 맞아 쓰러지며
네 땅은 측량줄로 재어 나누어지고 너 자신은 부정한 땅에서 죽으리라.
그리고 이스라엘은 제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가리라.’”
복음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3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5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6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7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8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고해성사를 부정하는 것이 어째서 “악한 생각”일까?
오늘 복음은 죄의 용서에 대한 논쟁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시며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라고 말씀하십니다.
병을 고치는 힘도 성령이시고 죄를 용서하는 힘도 성령께서 하십니다. 그러니 병에 대한 치유가 일어난다면 또한 죄 용서의 권한도 주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교회에 부어주실 때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만 싹 빼고 주셨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모든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다면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자기를 용서할 권한이 없다고 믿으면 엄마는 아이를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실수하며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 74회에 약한 엄마에게는 화를 내고 싫어하며 강한 아빠에게는 순종하는 금쪽이가 나왔습니다. 아빠는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당연히 아빠 편이기 때문에 금쪽이는 가족에서 왕따인 엄마 편에 설 수 없습니다. 생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존 욕구보다 더 컸던 것은 엄마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아이는 어릴 때 할머니와 아빠가 너무 무서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때 엄마는 금쪽이와 함께 있어 주지 못했습니다. 엄마는 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쪽이는 원망스러운 엄마를 뒤로하고 살기 위해 두려운 아빠와 할머니 편에 서야 했던 것입니다.
어쨌건 아빠가 엄마에게 자기 권한을 다 주지 않으면 아이는 비뚤어지게 됩니다. 순종할 수 없고 질서도 모르는 아이로 자라는 것입니다. 아빠에게 순종한다고 엄마를 막 대하는 이 아이가 커서 사회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일단 자녀를 낳았으면 아내에게 모든 권한을 주고 남편은 빠져주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는 엄마를 무시하고 계속 아빠에게만 갈 것입니다. 그러면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이것 자체가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고해성사의 목적은 ‘순종’을 배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순종할 줄 알면 성장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교회의 신랑인 그리스도는 신부인 교회에 당신 모든 권한을 맡기셨습니다. 그 권한을 ‘성령’을 통해 내어주셨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충만함을 누립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만 싹 빼고 성령을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런 생각 자체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것이고 또한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악한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엄마는 아빠의 파견자입니다. 파견할 때는 자신의 권한도 함께 줍니다. 엄마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없어서 아빠에게 직접 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엄마만이 아니라 아빠에 대한 모독이기도 합니다.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아 자녀에 대한 자신의 모든 권한을 다 내어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그리스도께서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을 주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심하는 ‘악한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아버지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음을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마태 9,4)라고 말씀하십니다.
‘개는 훌륭하다’에서 주인에게 입질하고 현관문까지 물어뜯는 영구가 나왔습니다. 영구는 보호자보다 자신이 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이제 와서 보호자가 영구를 길들이려 해도 잘되지 않습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먼저 자신이 영구를 제압합니다. 그리고 주인 옆에서 영구를 제압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렇게 되자 영구도 조금씩 주인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누군가를 순종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권한’입니다. 이 권한은 강 훈련사에게 있습니다. 강 훈련사는 자신의 이 권한을 주인들에게 줍니다. 주인들은 그 권한으로 개를 훈련시킵니다. 그렇게 영구는 순종하는 개로 새로 태어납니다.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당신의 피로 우리 죄가 용서받습니다. 그러나 그 용서하는 권한을 교회에 이양해 주셨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이시기에 당신께 순종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것으로는 순종을 배우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에 순종할 때 진정으로 순종을 배운 것입니다. 고해성사도 이를 위한 하나의 권한입니다.
가르칠 때 한 번 정도 물렸을 때 그 개를 몰아붙일 수 있겠지만 또 용서하며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개가 성장합니다. 강 훈련사의 권위를 등에 업어야 순종을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교회도 그리스도의 권위를 등에 업고 신자들에게 죄를 용서해 주며 순종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교회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것이 ‘악한 생각’입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에게 자녀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신부인 교회에게 다 내어주지 않는 비정한 남편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녀가 진정한 순종을 배울 수 없게 됩니다. 권한이 이양된 이에게 순종할 수 있을 때 진정 순종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순종할 수 있을 때 아빠에게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부정하는 우리 안의 나쁜 생각을 빼어버립시다.
https://youtu.be/933YFOkuqcQ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 심리학자가 다음과 같이 실험했습니다. 두 그룹으로 나눠서 첫 번째 그룹은 ‘일을 좋아한다.’, ‘자신감이 넘친다.’ 등의 긍정적인 말을 외우게 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허풍이 심하다.’, ‘거만하다’ 등의 부정적인 말을 외우게 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문장들을 다 외웠다는 생각이 들 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지만 들어오지 않는다.’라는 글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제시하는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지 않는 사람’을 평가하게 했습니다.
긍정적인 말을 외운 사람은 긍정적인 평가를 했습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말을 외운 사람은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가 긍정적인 사람, 부정적인 사람으로 나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이를 손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는 신부 중에 어떤 일이 있어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신부가 있습니다. 아마 늘 긍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신부를 대부분 사람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단순히 ‘병을 고쳐 달라고 중풍 병자를 데리고 왔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도 주님께서는 다른 것을 보십니다. 바로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십니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의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그 누구도 고치지 못하는 중풍 병자이지만, 예수님만은 고쳐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단순히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뿐인데도 이를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긍정적으로 보시고는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병을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과 정반대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이 자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율법 학자 몇 사람이지요. 그들은 ‘죄를 용서받았다’라는 말을 가지고서,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확대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부정적인 생각이 가져왔던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믿음 없는 자로 만들 뿐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으로 삼았지요. 그래서 이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심으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확실한 사실을 보고도 믿지 않습니다.
믿음은 무조건 주님 곁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계속하면, 주님 곁으로 갈 수 없습니다. 계속된 의심과 불평불만만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안녕하십니까?
관심이란 곧, 나 아닌 타인에게 마음 한 자리를 내어주는 일입니다. 나 아닌 타인에게 내 시간을 내어 주고, 내 삶을 조금 나눠주는 일입니다(송정림).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