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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1 주일오전예배
‘자로 재어주신 기업을 사랑하라’
성경/ 룻 1:1-2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주 앞에 나온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함께 인사 나누시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축복합니다.
오늘부터 주일 오전 마다 룻기 말씀을 강해하고자 합니다. 룻기의 말씀을 우리에게 회복과 부흥을 소망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룻기를 보면 한 가정이 어떻게 몰락하게 되었고, 그 불행한 상황에서 어떻게 새롭게 회복하게 되고 놀라운 복과 부흥의 기회를 얻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기좌리교회와 우리 모든 성도들의 인생에 회복과 은혜가 충만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룻기의 말씀을 열고자 합니다.
가장 먼저 오늘 본문 룻기 1장 1절-2절을 통해 “자로 재어주신 기업을 사랑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주 간단합니다. 어느 시대에 살던 곳에 흉년이 들었고, 그래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갔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속에는 많은 영적인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그 내용을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약속의 땅에도 기근은 온다
오늘 본문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룻 1: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룻기는 사사들이 통치하던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사사기의 시대는 영적으로 참 어두웠던 시대입니다.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살았던 시대”라고 그 시대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제 멋대로, 제 좋은 대로 살았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을 왕삼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룻기는 시대적으로 안정하지 못하고 어려운 때에 벌어진 일입니다.
특별히 룻기의 사건이 펼쳐지게 되는 보다 구체적인 배경은 무엇입니까? 흉년이 들었던 때입니다.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을 징계하신다는 표시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에게 닥치는 모든 불행이 죄 때문은 아닙니다. 여기서도 구체적으로 무슨 문제로 그 땅에 기근이 임했는지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중 6절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아보셔서 양식을 주셨다는 말씀을 보아서는 하나님 앞에 어떤 불순종의 죄악을 지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간 새벽에 레위기 말씀 묵상했는데, 흉년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았을 때 내리는 징계 중 하나였습니다. “(레 26:18-20) [18] 또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19] 내가 너희의 세력으로 말미암은 교만을 꺾고 너희의 하늘을 철과 같게 하며 너희 땅을 놋과 같게 하리니 [20] 너희의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
우리의 삶에도 이런 어려움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어려움들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징계차원에서 오는 경우도 있고, 욥의 경우처럼 다른 목적으로 오기도 합니다. 또한 어려움들이 개인의 잘못으로 오기도 하고 또 전체 공동체의 잘못 때문에 오기도 합니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로 IMF 관리체제가 되었을 때 모든 국민이 고통을 받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많은 사람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코로나 사태로 교회들까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위기가 들이닥칠 수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약속의 땅을 저버리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좀 안 좋은 해결방법을 쓰고 있는 한 가족이 나옵니다. 어떤 가족이 모압으로 이사를 갔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어려운 상황을 모면해 보고자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각 지파와 가문별로 땅을 분할 해 주고 그 기업을 지키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시편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 16:5-6) [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자리는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분깃입니다. 조금 어렵다고 내팽개칠 것이 아닙니다. 그곳을 함부로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들이 ‘모압’으로 이사를 갔다는 데에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압 왕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저주한 발람사건이후로 모압 자손과는 절대 교류하지 말 것을 엄히 명령하셨습니다. “(신 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도무지 교제하지 말라고 한 모압 사람들의 땅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들에게 심각한 영적인 문제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저버리고 기근이 들자 약삭빠르게 가산을 다 정리해서 모압으로 이주해 버린 이 엘리멜렉 가정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상황 바라보고 인간의 지혜와 방법을 의지했던 사사기 시대의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 하나님이 주신 기업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답습니다. 함부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이런 사실을 알았던 한 사람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아합왕 시대에 나봇의 포도원 사건입니다. 서슬 퍼런 아합 왕의 위협과 회유 앞에서도 절대로 자기 포도원을 팔 수 없었던 것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조상 대대로 유업으로 물려준 땅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 곳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상황이 비록 어려워도 하나님이 주신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
우리는 이것은 족장들의 삶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서 본토 친척 아비의 땅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땅으로 갈 것을 명령받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의 약속만 의지하며 가나안 땅으로 갑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으로 도착한 순간 아브라함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창세기 12장 10절을 보십시다. “(창 12: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이때에는 특별히 누구의 범죄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하튼 약속의 땅 가나안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취했던 행동이 무엇입니까?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기근을 피해 보려고 잠시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은 거기서 큰 낭패를 당하고 맙니다.
창세기 20장에도 아브라함이 또 가나안을 떠났다가 다시 한번 큰 어려움을 당합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불순종은 자칫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하나님의 큰 나라를 이루어 가시겠다는 계획을 송두리째 망가트릴 뻔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막으시고 다시 한번 아브라함이 큰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 아들 이삭은 어떻습니까? 창세기 26장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26장 1절, “(창 26: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기근이 일자 또 가나안을 떠납니다. 그래서 이삭도 아버지 아브라함과 동일한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런 사건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큰 능력을 보게 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하시는 특별한 배후의 역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여 이방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 잘 믿으라는 권면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야곱과 요셉의 경우
야곱은 어떠합니까? 형 에서의 위협으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갔던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큰 부자가 되어 다시 가나안지경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로 서원한 벧엘로 안 들어가고 자기를 군사적으로 든든하게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한 세겜 사람들 속에 섞여 살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가정에 큰 불행을 만나고 맙니다. 그제서야 회개하며 하나님을 만나러 벧엘로 올라갑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기보다 인간의 머리와 지혜와 방법을 의지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크게 혼난 야곱은 다시는 가나안을 떠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43장을 보시겠습니다. 1절에 “(창 43:1)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라고 말씀합니다. 또 기근이 옵니다. 삶에는 다양하고 많은 어려움들이 옵니다. 하나가 지나가면 또 다른 어려움이 옵니다. 야곱은 약속의 땅에는 지금 기근이 있는데 애굽에는 양식이 풍부하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애굽에 내려가지 않습니다. 다만 양식을 사러 사람을 보냈을 뿐입니다. 나중에 아들 요셉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셉은 당장 아버지를 모셔오라고 수레를 보냅니다. 야곱은 기뻐하며 죽기 전에 요셉을 보러 가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차마 애굽으로 가지 못합니다. 모든 소유를 이끌고 사는 곳을 떠나 왔지만 브엘세바에 도착하고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한마디로 국경을 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46장 3절 말씀, “(창 46:3)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이 약속을 믿고 비로소 야곱은 가나안을 떠납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있고 나서야, 더구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여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있고서야 가나안을 떠나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살다가 야곱이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무엇이라고 예언합니까? 창세기 47장 29절-30절을 보면, “(창 47:29-30) [29]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30]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신신당부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고향 땅에 묻히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그 기업의 땅에 묻히겠다는 열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약속의 땅 가나안이었지만 아직은 단 한 평도 족장들의 소유가 아니어서 매장지를 돈을 주고 샀다고 말씀합니다. 남의 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에 그 땅에 묻히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공통된 소망
족장들을 평생을 남의 소유인 가나안땅을 밟으면서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로 한 땅이야” 그것 하나 믿고 의지하며 살아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약속만 있고 그 약속의 현실은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 땅을 밟고 다닌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에 대해 말하기를, 11장 9-10절을 보면, “(히 11:9-10)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13절을 보면, 이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는데, 약속을 좀더 정확히 말하면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그 땅을 밟고 다니면서 단순히 물리적인 이 땅이 아닌 하나님과 영원토록 동행할 땅을 소망했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담은 땅이 바로 가나안땅이기에 소중했던 것입니다.
요셉도 죽으면서 아버지를 따라 동일한 고백을 합니다. 창세기 50장 24절 말씀 한번 보겠습니다. “(창 50: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우리에게 주신 기업
여러분 그러면 우리가 반드시 포기하지 않고 지켜야만 할 하나님이 주신 기업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 천국이요 영생입니다. “(벧전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기업입니다. 천국을 우리에게 상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거할 천국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천국에 이르기까지, 그 천국을 바라보며 사는 우리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천국소망 바라보며 모든 것을 그 천국을 위해 준비하고 투자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저 천국에 이르기까지 그 천국의 맛을 보도록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또 여러 가지 신앙유산을 소중히 여기고 간직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그 신앙유산만큼은 고이 간직해야 합니다. 조금 환경이 어려워졌다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사람의 방법과 세상의 방법을 의지하는 것은 불신앙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소중히 하고, 나에게 주님이 맡기신 직분과 할 일이 있다면 열심히 감당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생활이 어려워 졌다고, 위기가 왔다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는 것은 진정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인천에 살 때 잘 가는 안경점이 있었습니다. 그 매장 앞에 큼지막하게 ‘주일은 쉽니다.’라는 문구를 써놓았었습니다. 안경집에도, 안경수건에도 다른 글씨보다 크게 써놓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믿음이 가고 그곳을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가서 보니 예전에 보앗던 ‘주일은 쉽니다’보다 훨씬 더 더 큼지막하게 현수막을 붙여놓았는데, “주일에도 영업합니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주일에 영업을 안하니까 매출에 큰 어려움이 있었는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도 포기하지 않던 주일성수를 포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저는 주일성수를 율법적으로 적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주일성수 안 하면 구원을 못 받는다든지 하는 주장은 우리를 은혜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무서운 율법주의입니다. 오히려 주일성수는 성도의 특권이요 자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고백입니다. “나는 주일날 일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의 생명과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일 일하지 않아도 주님으로 충분합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모세시대 광야를 살던 사람들은 만나와 매추라기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 전날에는 두 배가 내리고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말씀대로 산다고 굶어죽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적으로 열심히 사는 사람보다 못살 수 있지만 괜찮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주신 자리를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집사, 권사의 직분을 주셨습니까? 남들 다하는 집사, 권사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축복의 수단입니다. 여러분이 기좌리교회 성도라는 것이 자랑스러우십니까? 자랑스러워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기업입니다. 여러분 적당히 교회 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우리교회가 자기 신앙이 성장하기에 도저히 맞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자기에게 맞는 교회로 떠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그 사람에게 맞는 교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우리교회에서 내가 신앙생활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신다면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결코 방관자로 서있지 마세요. 냉랭한 가슴을 가진 채 그렇게 있지 마세요. 여러분의 신앙에 손해입니다. 저는 기좌리교회 와서 그런 분이 안보여서 참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리를 사랑하십시오. 교회에서 내가 조그만한 일이라도 감당하는 것이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떠돌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자로 재어준 구역을 사랑하시고 소중히 가꾸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몸된 교회를 위해 살게 하옵소서. 나에게 주신 지경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지키게 하옵소서. 있는 자리에서 충성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자로 재어주신 구역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교회의 일거리가 아니라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