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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8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예레 7,23-28
복 음 : 루카 11,14-23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15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16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1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18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19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0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1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22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주님과 관계의 깊이
-무지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회개뿐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 오랜만에 산전수전 온갖 고통을 다 겪은 자매가 온갖 잡다한 선물을 가득 안고 수도원을 찾았습니다.
말 그대로 부부가 죽을 고비의 지옥을 겪고 지금은 부활 천국의 삶을 살고 있는 분들입니다.
“지금은 우리 부부는 가장 행복하고 자유롭습니다. 그냥 함께 있어도 친구처럼 든든하고 편안합니다.
제가 살아나면서 건강을 찾음으로 집안 식구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아 건강해졌습니다.”
자매의 삶이 참 경탄스러웠습니다. 지금은 평생대학원에 등록하여 재활의학을 공부하고 있다 했습니다.
길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제대로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살기위해 관계는 필수입니다.
관계는 존재입니다. 관계를 떠나선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영원한 도반이신 살아계신 주님과의 관계가, 주님과의 우정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스치듯 언뜻 떠오른 강론 주제가
‘주님과 관계의 깊이-무지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회개뿐이다-'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관계의 깊이와 함께 가는 자유와 행복입니다.
이래야 세상 온갖 우상이나 환상의 유혹에 빠져 중심을 잃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늘 강조하다 시피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무지에서 파생되는 완고함이요 불순종입니다.
무지의 어둠에서, 완고함에서 벗어나는 길은 끊임없는 회개뿐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바로 사순시기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주님-예레미야-불순종의 완고한 백성들’,
그리고 복음의 주님-예수님-완고한 사람들’의 구조가 흡사합니다.
주님과 온전한 관계의 깊이로 제대로 된 사람은 예레미야와 예수님뿐입니다.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당대의 완고한 백성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예나 이제나 인간의 본질은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성공적 삶의 여정과 실패의 삶의 여정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이것이 무지한 사람들의 정체입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회개해야 제자리입니다.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의 우선순위가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으로 주님을 따라 그 길을 온전히 걸어갈 때
주님과 깊어가는 우정의 관계에 성공적 삶의 여정이 됩니다.
그러나 무지의 완고함으로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살 때 말 그대로 괴물이나 폐인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어제 면담성사 중 자매의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30여 년 간 살다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혼한 분입니다.
“지나고 보니 남편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나는 꼭 껍데기만 산 것 같아요.”
결혼생활이든 수도생활이든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관계, 너와 나의 관계가 아닌,
관계없는 무관한 껍데기의 삶이라면 너무나 허망하고 허전합니다.
예레미야서 마지막 말씀이 껍데기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진실은 생명입니다. 진실하고 겸손해야 비로소 구원이요 사람입니다.
진실은 모방이 불가능하고 거짓은 변형이 불가능합니다. 회개를 통한 진실의 회복이 바로 구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을 때의 반응에서도
무지한 사람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들어납니다.
무지의 왜곡된 시선으로 몇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하고,
다른 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들의 무지를 깨우치신 후 결론 같은 말씀을 던지십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진실과 겸손의 회복이요 하느님의 나라의 실현입니다.
주님과 한편일 때, 주님과 함께 모아들일 때 무적無敵의 삶에 내적일치의 삶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하나 될수록 내외적 분열에서 벗어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후렴과 복음 환호송이 오늘 말씀을 요약하며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나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니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새삼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며 회개의 우선적 순서는 경청임을 깨닫게 됩니다.
영성체 전 사제가 바치는 두 기도문 후반부를 나누고 싶습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이 좋아했던 기도문이고 저 또한 사랑하는 기도문입니다.
“이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로 모든 죄와 온갖 악에서 저를 구하소서.
그리고 언제나 계명을 지키며 주님을 결코 떠나지 말게 하소서.---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이 제게 심판과 책벌이 되지 않게 하시고,
제 영혼과 육신을 자비로이 낫게 하시고 지켜 주소서.”
미사 시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모실 때 바치면 참 은혜로울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에 내재한 온갖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우리 모두 ‘빛의 자녀’로 건강한 영육靈肉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방으로 강의를 많이 다니기 때문에, 숙소를 알아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숙소이기 때문에 숙박 사이트의 평가 리뷰를 꼼꼼하게 살펴봅니다.
그러고 나서 이 숙소를 결정할지 하지 않을지를 결정합니다.
즉, 좋은 평가가 많은 곳을 숙소로 결정합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평가를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이는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 사람 곁보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사람 곁에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따라서 긍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부정적인 리뷰 하나가 긍정적인 평가로 바뀌려면 긍정적인 리뷰 4개가 필요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리뷰 하나와 긍정적인 리뷰 하나가 있다면, 무조건 부정적인 평가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신앙 안에서 긍정적인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모습들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자체를 바라보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옳지 못한 모습만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마치 악행의 우두머리처럼 만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분이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비난하며
하늘의 표징을 보이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는 놀라운 표징을 보여도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는 영원하며 절대로 갈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께서 사탄과 한편이라면
사탄의 하수인들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생각들이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책 ‘햄릿’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세상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고, 다만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다.”
맞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주님을 좋은 분으로, 또 반대로 나쁜 분으로도 만들고 있습니다.
결국 이제는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면 어떨까요?
특히 긍정적인 생각,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중간은 없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어느 신부님께서 마음을 고쳐먹은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주교님께서 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름대로 혼자서 열심히 지냈답니다.
주교님의 사목방침에 구애 받지 않고 이런저런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이
독불장군으로 지내는 중에 성경을 열심히 읽었는데 한 말씀이 가슴깊이 다가왔답니다.
루카복음 7장32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너희는 말한다.”
신부님은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에 차있는 아이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마음을 바꾸었으며
비로소 자유와 해방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앞에서 어중간은 없습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세상에서 안전한 처세술이 될 수 있지만
주님의 자녀로서 자세는 아닙니다. 또한 주님은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묵시4,15-16)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마귀를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주님을 선택해야 하는가?
너무도 당연한 답이지만 삶의 모습은 여전히 이해타산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는, 그리고 모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루카11,17)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가정도, 공동체도 어떤 모임도 한마음 한 뜻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모아야 합니다.
나쁜 습관이 있다면 고쳐야 하고 내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열린 마음의 눈을 떠야 하고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다면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과 포용할 수 있는 큰 품을 키워야 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위로가 되고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실천이 없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주님의 편이 되어 주님의 눈에 들기를 바랍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행세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 안에는 예수님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가르침대로 살기는 싫다는 생각이 배어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상대를 험담하고 딱지를 붙이며 합리화 시키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오직 진리의 길을 가르치고 가르치는 대로 사셨습니다.
누가 흔들어도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해를 불러일으켜도 가야할 길을 가야 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부정적인 것을 쫓는다고 그릇된 수단을 쓰면 더 망가질 뿐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흩어버리는 자다.(루카 11, 23)
한상우 바오로 신부
모아들이는 마음이
구원의 마음입니다.
주님과 함께
모아들이는 삶이
참된 복음의 삶입니다.
복음의 삶이란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느님께 협력하는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어떤 세력보다도
모아들이시는 선하신
주님께서 더 크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흩어버리는 세력들은
언제나 우리를 믿음에서
떼어놓으려 합니다.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도록 흩어버립니다.
믿음은
주님과 협력하는
기도의 삶입니다.
영적 여정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악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모아들이시는
하느님을 통하여
우리자신이
하느님의 백성이며
하느님의 자녀임을
잊지 않는
신앙의 여정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신앙의 여정은
복음을 전하는 삶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깨어있는 삶이듯
영적식별은
말씀의 열매를 맺는
선한 삶입니다.
모아들이시는
하느님께 의지하십시오.
소통과 통합은 하느님 뜻 뒷자리에
전삼용 요셉 신부
1985년 전재용 선장이 1년간 참치 잡이를 하고 25명의 선원들과 부산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이때 베트남 공산화로 무작정 배를 타고 탈출한 보트피플 96명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상태였습니다.
회사는 그들을 구하지 말고 그냥 복귀하라는 명령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전재용 선장은 그들을 구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이때 배에 있던 25명의 선원들 중 전 선장의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전 선장은 부산항에 도착한 즉시 회사로부터 해고당했고 더 이상 어떤 선박회사에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전 선장은 그들을 구할 때 자신이 미래와 그런 경력까지 다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전 선장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면 선원들도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 것을 걱정했을 것입니다.
경청하지 않고 소통하지 않는 리더는 공동체를 올바로 통합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위대한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역사상 위대한 리더는 하나같이 어디로 가야할지 명확한 방향감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경청과 소통은 그 지향된 목적지를 위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비전 없이 통합만 강조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올바른 리더는 목적을 위해 공동체가 분열되는 것을 겁내서는 안 됩니다.
어차피 떨어져나갈 사람은 떨어져나가고 들어올 사람은 들어옵니다.
리더의 첫 번째 덕목은 명확한 목적지를 알고 그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비전을 위해 공동체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그 다음 덕목입니다.
전 선장은 어떻게 25명의 선원들에게 믿음을 얻었을까요?
그들은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는 전 선장의 말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은 적어도 1년 이상 그들과 함께 참치를 잡으며 그들에게 보여준 전 선장의 인품의 결과일 것입니다.
그가 믿는 대로 따랐을 때 항상 이득이 온다는 오래도록 축적된 경험이 그를 믿게 만든 것입니다.
이는 전 선장이 평소에도 올바른 선택을 해왔음을 말해줍니다.
이렇듯 축적된 경험은 더 큰 신뢰심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수많은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 힘이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마귀 두목에게서 온다고 말하며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통합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당신 뜻에 따르지 않을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상처받더라도 그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같은 나라도 서로 싸우면 망하게 되는데 어떻게 마귀가 마귀를 쫓아내느냐고 설명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예수님은 당신 노선이 있으셨고 최대한 설득하시지만
당신 노선에 끝까지 반대하는 사람들까지 통합하려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이나 소통과 통합이라는 둘 째 목표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무엇을 하셔야 하는지 명확히 아셨습니다.
그 뜻이 하느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어떤 것과도 타협하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흔들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으나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소통이나 통합보다 아버지의 뜻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이렇게 성장해왔습니다. 항상 하느님의 뜻을 물으며 문제를 해결해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가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뜻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바오로 사도가 왜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는데
유다인들이 하는 할례를 받아야하느냐며 반기를 들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구약의 할례 전통을 폐지하기로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얼마나 많은 유다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떨어져나갔겠습니까?
그래도 교회는 그 전통을 고수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동방교회와도 분열되고 개신교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좋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교회는 2천 년 동안 같은 교리로 가장 큰 종교를 유지해오며 점점 좋은 열매를 맺으며 순항하고 있습니다.
한 때 한국 대통령과 교황님이 며칠 상관으로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다는 기사는 뒷면에 작게 실렸지만
교황님이 방문한다는 기사는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렸습니다.
이것이 여전히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항상 하느님의 뜻을 알면 그 뜻을 위해 두려워하는 것이 없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알았다면 예수님처럼 이렇게도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난주에는 대구와 경주를 다녀왔습니다.
대구에서는 범어동 성당, 계산 성당, 성모당, 성직자 묘지, 다사 성당, 유스티노 신학교, 대구가톨릭 대학을 보았습니다.
경주에서는 진목정 성지와 산내 성당을 보았습니다.
작년 제주 엠마오 연수를 함께 했던 신부님들이 계신 곳이어서 방문했습니다.
교구는 다르지만 같은 길을 가는 동료이기에 같이 기도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종교적인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문화, 예술, 문명을 이룩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지구별에 잠시 머물다가는 나그네인데 왜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시기심, 이기심, 욕심, 교만이 만들어낸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입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인간이 가지는 ‘아픈 상처’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지만 마치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입니다.
더 채우려고 하는 욕심이며, 남의 성공을 부러워하는 시기와 질투입니다.
카인은 사랑하는 동생을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동생의 제물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왜 하느님께서 동생의 제물을 좋아했는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동생만 없어지면 하느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아 줄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인간이 범한 최초의 살인은 ‘시기와 질투’가 원인이었습니다.
사울은 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다윗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졌다면 다윗은 더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을 것입니다.
사울의 시기는 본인은 물론 본인의 가족들까지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았습니다. 자신은 한 나라의 왕이었고, 많은 포도밭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욕심 때문에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결국 아합 왕은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겉모습을 아는 것이 예수님의 전부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권위를 알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그동안 누렸던 권위를 빼앗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이 역시 시기와 질투가 초래한 비극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늘나라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서 불평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섬기는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떡고물’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괴로웠던 그러나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내려놓으라고 하셨던 분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셨던 분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던 분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리하고 하였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자연, 신화, 이성’의 옷을 굳이 입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면 ‘진리’는 언제나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전했던 ‘하느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했던 말씀과 표징
그리고 죽었지만 다시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습관은 습관을 통해서만 고쳐집니다.
좋은 습관을 몸에 익히면, 나쁜 습관은 ‘저절로’ 물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좋은 습관을 통해서 악의 세력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O.F.M :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예수님의 치유로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됩니다.
병들어 잃어버렸던 것, 훼손되었던 것을 치유하고 되돌려 주는 일은 새 창조,
곧 하느님의 일인데, 어떤 이들은 마귀 짓으로 간주하고 어떤 이들은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들의 태도는 믿기 위함이 아니라 어떻게든 믿지 않으려는 안간힘에 가깝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말 못해 고생하던 사랑하는 형제가 놀랍게도 말을 하게 되었을 때,
함께 축하하고 기뻐한다면 이미 하느님 나라를 누리는 것이고,
마귀 짓으로 치부해 모두를 불안과 죄의식으로 몰아넣는다면 여전히 깊은 구렁 어두움 속입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일을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지금 여기"는 하느님 나라도 될 수도 있고 지옥도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혹자는 예수님의 선한 기적을 차라리 마귀 짓으로 덮어버리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투명하게 바로잡히는 공평한 세상, 모두가 사랑으로 나누는 풍요로운 세상은
오히려 기득권이 제한될 뿐이라서, 세상의 부와 쾌락과 부정을 적당히 즐기면서
겉으로는 아직 하느님의 나라가 오지 않았다고 한숨을 쉬고 앉아 있는 편이 더 이롭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두려울 겁니다.
이미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아니 우리 인간의 심보를 너무도 잘 아십니다.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하시는 하느님 말씀을 들어보면
불순종과 오만, 고집, 사악, 고약함 등 어찌나 적나라한지 민망하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예레 7,24)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나, 예수님께 마귀 짓이라는 유다인이나,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번번이 곡해하는 우리에게 이보다 더 알맞는 표현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씀을 전하더라도 그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부르더라도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예레 7,27)
이렇게 우리를 잘 아시는 분이 왜 박해받을 줄 뻔히 알면서 예언자들을 보내고,
사랑하는 외아드님까지 또 보내셨을까요.
과연 하느님께서는 무얼 보시고 그렇게 무모한 사랑을 계속 하셨을까요.
친히 만드신 당신의 피조물, 당신의 백성을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베푸실 때에
우리 됨됨이를 재거나 달거나 계량하지 않으시고, 하느님 당신 안에 있는 사랑만 보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안 들을 줄 알면서 계속 말씀하시고, 대답하지 않을 줄 알면서 계속 부르십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그러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처럼 허공으로 흩어진 외롭고 공허한 하느님의 메아리는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매우 포용적이고 허용적인 모습을 보여주셨던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23)
이 단호함 안에 깃든 사랑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우리를 둘러싼 사람, 사물, 사건, 역사의 방향성과 굴곡들을 하느님의 손길로 받아들일지 아닐지,
"앞을 보고 달려갈지"(필리 3,13 참조) "뒤를 향할지"(예레 7,24 참조),
예수님 편에 설지 반대할지, 예수님과 함께 모아들일지 흩어버릴지 이제는 응답해야 할 때입니다.
더 이상 모호한 중간지대는 이제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이 기적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냐 아니면 마귀로부터 온 것이냐 논쟁을 시작하지요.
사실 식별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도 능력의 측면에서는 하느님 못지않으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이 하신 일이라면 사랑 때문에 한 일이 분명할 것이고,
치유자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한 일이라면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가 들어가 있을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할 겁니다.
말 못하는 벙어리를 치유시킨 예수님은 사랑과 연민 때문이었고
'하느님의 손가락'(루카 11,20)이 하신 일임을 천명하고 있기에
이는 분명 하느님이 하신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많은 일도 하느님의 일이 될 수도 있고 마귀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식별이 필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편 가르기를 좋아합니다.
정치적으로도 보수냐 진보냐를 따지고, 경상도냐 전라도냐, 남자냐 여자냐,
부자냐 가난한 자냐, 사용자냐 노동자냐, 어느 학교 출신이냐, 종교가 뭐냐...
이렇게 니편 내편으로 갈라 어디에 속해야만 마음이 안정되나 봅니다.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는 사람을 회개자냐 아니냐로만 구분하였었지요.
우리는 하느님 편이냐 마귀 편이냐를 선택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네요.
사도 바오로도 제발 아폴로파니 바오로파니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지요.
벗님 여러분은 누구 편입니까? 더불어당 편입니까, 자한당 편입니까?
우리는 오로지 하느님 편이고 복음 편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편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요?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면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그를 도우려고 힘쓰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작은 노력과 정성이 좋은 결실을 맺었다면 그 영광을 우리 것으로 삼으며 자랑하지 말고
크신 일을 이루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감사를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함께 모아들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루카 11,23)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