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07 화요일
(2093 회)
- 강금복 여사를 회고(回顧) -
(학부모의 옛전 모습)
강금복(姜今福 :1911~2001) 여사는 서울대 총장ㆍ국무총리를 지낸 이수성(李壽成 :1939~)씨의 모친이다.
강 여사는 울산 갑부집의 1남2녀 중 맏딸로 태어나 경북고녀와 일본여대를 나왔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엘리트 여성이었다.
24세 때 경기여고에서 교생실습을 하던 중 오빠(강정택 전 농림부 차관, 납북)의 중매로 동경제대 법학과를 나온 이충영(李忠榮)변호사와 결혼한다.
이 변호사는 일제 치하에서 판사로 재직하면서도 법정에서 꼭 한복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은 채 재판을 했고, 1943년엔 창씨 개명을 거부하고 법복을 벗었을 정도로 강직했다.
강금복 여사의 일생에는 이 땅 보통 어머니들의 인고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강 여사는 신교육을 받은 엘리트임에도 불구하고 결혼과 함께 교사의 꿈을 접고 남편 뒷바라지에 전념했다.
화장은 커녕 파마 한 번 하지 않았고 늘 쪽진 머리에 한복차림이었다.
그러던 중 발발한 6ㆍ25전쟁은 그녀의 삶을 바꿔놓았다.
남편인 이 변호사가 납북된 것이다.
이 변호사는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끌려가면서 당시 중학생이던 큰아들 이수성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시골에 가서 살라.”는 한마디를 남겼다.
졸지에 남편과 생이별한 강 여사는 4남4녀의 생계를 떠맡아야 했다.
53년 보건사회부 산하 여성문제 상담소장직에 촉탁으로 근무했으나 이내 그만두고 물려받은 재산을 하나씩 처분하며서 자녀들을 키워나갔다.
강 여사의 네 아들은 서울대 네 딸은 이화 여대를 졸업했다.
둘째 이수인(李壽仁, 작고)은 생전 인터뷰에서
“어머님은 신여성 이셨지만 한국적인 전통과 따뜻함과 헌신으로 우리 형제와 가족들을 가르치신 분”이라며 “우리 가족의 모든 생활은 어머님께서 가르치고 보여주신 모습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수성씨는 저서 『신뢰와 희망』에서 "고생을 하면서도 어머니에게 배운 것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옳지 않은 일에는 머리를 숙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적었다.
셋째 수윤(壽允, 전 교원대 교수)씨는 고교 시절 '싸움은 1등 공부는 꼴찌' 였던 문제아였다.
강 여사는 그런 아들을 한 번도 나무라지 않았다.
하루는 어머니(강 여사)가 학교에 불려가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봤고 그때부터 마음을 다잡아 전교 1등으로 졸업했다.
공부하라는 질책 대신 선생님 앞에서 흘린 어머니의 눈물이 그 어느 가르침보다 컸던 것이다.
/강금복 여사 일생은 중앙일보(2001년 5월28일자 ‘삶과 추억’ 참조)
여기서 눈 여겨 볼 부분이 강금복 여사가 선생님을 대하는 태도다.
당시 강 여사는 여자 로서는 최고의 학력을 지녔으나 아들의 선생님 앞에서는 한없이 낮은 자세로 임했다.
만약 그 자리에서 아들이 어머니와 선생님이 다투는 것을 봤다면 감복(感服)은 커녕 오히려 반항심만 키웠을 것이다.
자신 때문에 머리를 숙이는 어머니의 태도와 자세에서 인생의 전환이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