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마하반야 바라밀, 우리도 부처님 같이...
불자님,
이제 다섯 발의 대포 중에서 두 발 째 대포를 쏘아 올리려 합니다.
이 두 발 째 대포에서 지금까지 어느 스님네도, 불교 지도자들도 말해주지 않은 '견성, 깨달음'에 대한
놀라운 진실을 접하시게 될 것입니다.
깊은 성찰의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_()_
....
실로 놀라운 현실이다.
’깨달음 견성‘ 하면 홀로 토굴에 앉아 몇 년 몇 십년 수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법구
경주석서』(Dhammapada-Aṭṭhakathā)는 실로 충격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96,3%의 함께 깨닫는 사람들 –
’왜 불교가 「우리 함께 깨닫기」인가?‘, ’왜 불교가 대중견성운동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여기서 명쾌하게 제시되고 있다. ....(본 문 내용 중에서...)
(혹시 ★ 불자님들께 쏘아 올린 다섯 발의 대포 ▶ ① 자료를 보시지 않은 분은 본 게시판에서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
<집중강의 – 대중견성론>
희망의 출구 –「우리 함께 깨닫기」
– 우리도 부처님같이 –
김재영 (동방불교대 교수, 청보리회 법사)
[강의 2] 대중견성 – 「우리 함께 깨닫기」, 가능한가?
1. 대중견성 –「우리 함께 깨닫기」란?
1) 기원 전 544년 2월 보름, 생의 마지막 날, 피를 쏟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작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
는 부처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고 축복하는 팔순의 노(老)부처님, 죽어서 뼛조
각까지 작고 가난한 사람들 위하여 바치는 고따마 부처님 – 저 장엄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깨달
음’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견성성불’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대중견성이란 무엇인가?
「우리 함께 깨닫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우리도 부처님같이 사는 것이다.
저 고따마 부처님같이, 나누고 섬기면서 다함없는 사랑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다.
고따마 부처님의 그 절절한 삶과 사랑 ‧ 죽음을 보고 공감하고, 그 가르침을 듣고 잘 이해하고, 우리 스
스로 일상적인 삶의 現場에서 ‘나누고 섬기면서, 마음통찰하면서’ 살아가려고 다짐하고 진지하게 열심히
노력하는 것,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이 사회를 정의롭게 변화시키고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깨닫는 것, 많은 사람
들과 더불어 함께 이익과 행복을 나누는 것, 이것이 대중견성이다. 이것이 만인깨달음 만인행복의 「우
리 함께 깨닫기」이다.
2) 어떻게 대중견성인가? 어떻게 우리 함께 깨달을 수 있는가?
깨달음은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같이 살아가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깨달음 견성 해탈 열반은 신통한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같이 살아가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우
리들의 일상적인 삶 – 삶의 現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비록 끊임없이 흔들리는 별 볼일 없는 이 몸일지라도, 자기자신을 믿고 의지하고 부처님 삶과 가르침을
등불삼아, ‘나누고 섬기면서, 마음통찰하면서’ 진지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 이미 우리는 깨달아 있고 위
없는 행복은 눈앞에 현실로 드러난다.
기원 전 545년 죽음을 얼마 앞두고, 고따마 부처님께서 웨살리에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을 설
하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난다여, 만일 그대들이 자기자신을 등불 삼고 나의 가르침을 등불 삼고 다른 것을 등불 삼지 않고 살
아간다면, 내가 살아있을 때나 내가 입멸한 뒤일지라도, 이렇게 살아간다면, 이런 사람들은 [누구든지]
최고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디가니가야 16, 대반열반경 ; (D ⅱ 101)
자기자신을 등불 삼는다는 것(atta-dipa)은 나 자신을 믿고 의지처로 삼아 열심히 노력한다는 것이고, 가
르침을 등불 삼는다는 것(dhamma-dipa)은 부처님의 삶을 보고 공감하고 그 가르침을 듣고 잘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나누고 섬기면서 마음통찰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간다면’은 누구든지 이렇게 진지하게 열심히 살아가면, 그 삶 자체가 – 삶의 現場 그대로가
최고의 경지, 곧 깨달음 견성 해탈 열반 성불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면, 조금만 진지하게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든지 쉽게 깨닫고 해탈 열반한다는 뜻
이다.
그래서 「우리 함께 깨닫기」이다.
2. 초기불교의 수많은 「우리 함께 깨닫기」사건들
1) ‘여자종 뿐나의 견성 사건’
「고따마 부처님께서 마가다국의 서울 라자가하의 독수리봉에 계실 때이다.
여자종 뿐나(Punna)는 밤늦도록 등불을 켜놓고 벼를 찧고 있었다. 너무 지친 뿐나는 잠시 쉬기 위하여
밖으로 나와 땀으로 흠뼉 젖은 몸으로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때 말라인 두바(Dubba)는 비구들의 숙박관
리인이었는데, 등불을 밝혀들고 비구들을 안내하며 산길을 가고 있었다. 뿐나 여인은 생각했다.
‘나는 일 때문에 지쳐서 여태까지 잠을 못 이루고 있지만, 저 스님들은 무엇 때문에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까?’
그렇게 새벽이 되었을 때, 뿐나는 일을 마치고 붉은 쌀겨를 모아서 손에 쥐고 물로 반죽을 해서 빵을 만
들어 숯불로 구웠다. 그리고 여인은 중얼거렸다.
‘강으로 가서 목욕하고 이 빵을 먹어야지 – ’
뿐나는 빵을 치마 속에 넣고 물병을 들고 강가 목욕하는 곳으로 나아갔다. 그때 세존께서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라자가하로 탁발하러 들어가기 위해서 길을 가고 있었다. 뿐나는 저만큼 다가오는 부처님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세존께 공양 올리고 싶다. 세존께서 이 빵을 거칠다고 물리치지 않으신다면 – ’
뿐나는 물병을 내려놓고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 인사드리고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거친 빵을 받으시고 제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부처님은 잠잠히 미소하며 발우를 내밀어 여인의 빵을 받았다. 그리고 여인에게 감사의 말을 했다.
“여인이여, 부디 행복하십시오.”
뿐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세존께서 내 빵을 받으셨지만, 실제로 드시지는 않을 것이다. 틀림없이 개나 소에게 던져주고 말 것이
다. 그리고는 왕이나 귀족들의 공양을 받으실 것이다.’
부처님은 여인의 마음을 짐작하고 길옆에 가사를 깔아 자리를 마련하고 앉았다. 그리고 여인의 거친 빵
을 맛있게 드셨다. 공양이 끝나자 부처님은 지난 밤 여인이 밤 세우며 일한 것을 생각하고 게송으로 담
마를 설하셨다.
‘항상 깨어있어 살펴보는 사람들
밤낮으로 정진하는 사람들
열반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
그들은 번뇌를 여의느니라.“ (법구경 226 게송)
이 가르침을 듣고 뿐나 여인은 거 자리에서 깨달음의 길(豫流)로 들어섰다. 주변에 있던 많은 시민들도
깨달음의 길로 들어섰다.」(법구경 주석서)
2) 밤늦도록 쌀 방아를 찧고 있는 여자종 뿐나
땀으로 몸을 적시며 잠 못 이루는 뿐나 여인
거친 빵으로 주린 배를 채우려는 뿐나 여인
그 빵을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뿐나 여인
거친 붉은 쌀겨빵을 드시고 법을 설하시는 부처님
법을 듣고 그 자리서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는 뿐나와 라자가하 시민들 –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깨달음’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삶의 現場에서, 진지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 나누고 섬길 때, 실로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한순간에 함께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
게 발견하고 있다.
「우리 함께 깨닫기」가 한갓 이론이거나 이상(理想)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
하고 있다.
3) 한 연구에 의하면(김재영, 『붓다의 대중견성운동』), 초기불교 시대에는 이렇게 뿐나 여인같이, 일상
적인 삶의 現場에서, 일상적인 삶을 통하여 생명의 빛을 보고 새 인생을 개척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우리 함께 깨닫기」사건들이 보고되고 있다.
불교경전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법구경』(Dhammapada)을 해설한 『법구경주석서』
(Dhammapada-Aṭṭhakathā)를 분석한 결과, 등장인물 가운데 신분구분이 가능한 7,628명 중 5,787명이 견
성하고 있다. 75,9%가 함께 깨닫고 있다.
5,787명의 견성대중 가운데 남성이 2,243명 - 38,8%, 여성 3,544명 - 61,2%이다.
출가가 3,186명 - 55,1%, 재가 2,601명 - 44,9%이다.
상류층 2,121명 - 36,7%, 중류층 1,526명 - 26,4%, 천민층 2,138명 - 36,9%이다.
여성 출가 천민출신이 함께 깨닫기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 등장인물은 밝혀내기가 불가능하지만, 신분을 알 수 없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법구경 대중 가운데
총 12,975 + α 명이 함께 깨닫고 있다.
또 설법 총 299회 가운데 189회 - 63,2%에서 함께 깨닫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4) ‘알라위 지방 한 직조공의 딸과 아버지가 함께 깨닫는 사건’을 비롯하여(법구경 174게송),
수많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 - 보통 시민들이 함께 깨닫고 있다. ‘해상(海商) 바히야가 아라한 되는
사건“(법구경 101게송)을 비롯하여, 수많은 세속의 재가 대중들이 함께 깨닫고 있다.
’곡예사 욱가세나의 즉시 깨달음 사건‘(법구경 348게송)을 비릇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전문적 수행
이나 선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함께 깨닫고 있다. ’상깃짜와 500 도둑 함께 깨닫는 사건‘(법구경 110
게송)을 비릇하여, 수많은 대중들이 집단적으로 함께 깨닫고 있다.
전체 함께 깨닫는 대중 12,975명 가운데 500명 이상이 함께 깨닫는 사건이 26회12,500명으로
96,3%이다. 거의 대부분이 함께 깨닫고 있다.
실로 놀라운 현실이다.
’깨달음 견성‘ 하면 홀로 토굴에 앉아 몇 년 몇 십년 수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법구
경주석서』(Dhammapada-Aṭṭhakathā)는 실로 충격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96,3%의 함께 깨닫는 사람들 –
’왜 불교가 「우리 함께 깨닫기」인가?‘, ’왜 불교가 대중견성운동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여기서 명쾌하게 제시되고 있다.
5) 왕 왕족들 귀족들 관리들 자산가들 은행가들 브라만들 상인들 농부들 어부들 목동들 금은세공
들 무용수들 마부들 나무꾼들 곡예사들 머슴들 노동자들 난쟁이들 시각장애자들 나병환자들 전염
병환자들정신병자들 도둑들 걸인들 깡패들 창녀들 하녀들 노비들 어린이들 청년들 처녀들 주부들
노인들 –
불교는 본래 이렇게 수많은 대중들이 함께 깨닫는 만인의 길, 보통 시민의 길로 활작 열린 「우리
함께 깨닫기」다. 「우리 함께 깨닫기운동」이다.
이렇게 해서 깨달음 견성 해탈 열반 성불은 ‘수백 수천 수만 사람들의 길’로, ‘보편 보통의 길’로 현
실화되어 갔다.
누구든지 삶의 現場에서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 따라 진지하고 열심히 살아가면, 그 삶에 의해서,
오로지 그 삶의 행위에 의하여 함께 깨닫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전제도 없고 유보사항도 없다. 오로지 삶으로, 행위로 함께 깨닫는 것이다.
깨달음 견성은 철두철미 삶이고 행위이다. 머리 굴리는 것 아니다.
출가라야 되는 것 아니다. 참선해야 되는 것 아니다.
착각에서 깨어나라.
부처님께서 새삼 이렇게 설하고 있다.
‘나는 재가자들이거나 출가자들이거나 그들의 올바른 행위를 칭찬한다. 왜냐하면, 재가자나 출가자들이
거나 올바른 행위를 하면, 그 올바른 행위에 의하여, 그들은 진리의 길, 청정한 담마를 성취하기 때문이
다.’ (마찌마니까야, MN ⅱ197)
3. 문제는 깨달음이 아니라 삶이다
1) 문제는 ‘깨닫는가? 못 깨닫는가?’가 아니라,
‘이렇게 살아가는가? 살아가지 못하는가?’ 하는 것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다.
‘견성 해탈 열반 성불의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삶의 길’이다.
불교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 그 자체이다. 삶의 現場 그 자체이다.
따라서 삶의 현장을 떠나서 깨달음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觀念놀이이다.
이 시끄럽고 골치 아픈 삶의 現場을 떠나서 견성 해탈 열반 성불을 논하는 것은 착각이며 환상이다.
고요한 곳에 앉아서, 적정한 삼매 속에서, 인생을 논하고 자성(自性) 마음을 찾는 것은 자신과 남을 속이
는 거짓이다.
2) 그런 속에서 ‘깨달았다’ ‘한소식 했다’ 해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이 세상으로 나오면, 이 급박한 삶의 現場으로 한발자국 나서면, 십년 이십년 앉아서 수행한 것이 거의
아무 쓸모가 없다.
동포끼리 전쟁을 하고 독재자들이 시민을 살상하고 가난이 대물림 되는 이 세상의 고통과 모순 앞에,
이 땅의 도인들 선지식들은 무엇을 하였는가?
말 한 마디 못하고 저항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민중들 앞에 한
줄기 희망의 등불도 밝히지 못하고 – 도대체 생사를 자재하는 그 반야지혜는 다 어디로 갔는가?
사랑 자비는 오직 구두선(口頭禪)인가?. 말로만 ‘중생제도’ 하는가?
피를 나누고 장기를 나누는 몸 나눔이 없다면, ‘생사해탈’은 무엇에 쓰자는 것인가? 죽을 때 혼자 편안하
게 가자는 것인가?
생사해탈 안 해도 다 잘들 죽던데, 미소하며 잘들 가던데 –
3) 오래된 불자들, 나 자신부터, 남 섬길 생각은 엄두도 못 낸다.
적정처(寂靜處)에 습관되어 일어설 줄을 모른다. 그러면서도 유아독존(唯我獨尊)이다.
자기들만 잘 낫다. 합리적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 세상살이 - 세간살이를 우습게 알고, 살아보려고 허덕이는 속인들을 ‘불쌍하다’고 여기며 우
월감을 즐긴다.
말이막히면, ‘오로지 마음을 깨달아라, 자성을 보아라’ 하고 마음타령이다. 출가도 재가도 마찬가지다.
생각해보면,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분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수천년 풍토가 그래왔고, 제도가 그래왔고, 배운 것이 그래온 것인데 – 이것은 원망도 비난도 아니다.
동업중생의 자기비판 자기성찰이다.
4) 그러다가 역사의 흐름에서 밀려났다. 사회적 역할을 다 잃고 말았다. 세력을 잃고 주변적 집단으로 몰
락하였다. 무섭게 번지는 종교전쟁의 불길 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불교의 생존자체
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실크로드의 중심 아프간의 바미안 대불(大佛)이 이슬람의 대포를 맞고 뭉그
러지듯, 석굴암 대불이 언제 어떻게 될지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만해 스님이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말한다. ‘세력을 잃으면 도태된다. 진리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대포(大砲)가 승리한다.’
4. 삶의 現場으로 나오시오.
1) ‘아난다여, 나는 이제 여든 살 늙고 쇠하였구나.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끈에 묶여 간신히 굴러가듯
나 또한 가죽끈에 묶여 간신히 굴러가고 있느니라. – ‘ (대반열반경, D ⅱ 101)
삶의 現場에서, 많은 사람들의 고통의 現場에서, 그 고통을 문제 삼고 치유하기 위하여 몸이 부서지도록
헌신하고 있는 노(老)부처님, 낡은 수레처럼 삐거덕거리며 굴러가면서도 사회적 헌신의 길을 멈추지 않
은 팔순의 노(老)부처님 –
2) 친구들,
저 부처님의 몰골을 보고 깨어나시오.
어리석은 觀念놀이에서 깨어나시오.
앉아서 깨닫겠다고 용쓰고,
한소식 하면 만사가 다 해결될 것 같은 이 허망한 착각 환상에서 그만 깨어나시오.
이 뿌리 깊은 허위의식(虛僞意識)에서 깨어나시오.
나누고 섬기는 사회적 헌신이 없는 불교는 이미 불교가 아니오.
그것은 깨달음도 아니고 견성도 아니오.
부처님도 마지막 순간까지 몸이 무너지도록 애쓰고 애쓰시는데,
그러면서 이 세상을 바꿔가지 위하여 노심초사하시는데,
우리가 뭐가 잘낫다고 도인인척 하겠소.
애쓰고 또 애쓰지 않겠소.
3) 친구들, 선우(善友)들,
이제 이 치열한 삶으로, 행위로 나오시오. 일상의 삶 속에서 피땀 흘리며 추구하는 대중견성의 現場으로
나오시오.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깨닫는 「우리 함께 깨닫기」의 現場으로 나서시오.
그래야 대승입니다. 그래야 보살입니다. 그래야 직지견성(直指見性)입니다.
이제 희망의 출구가 보입니다. 우리 생명이 광명찬란 빛을 발합니다.
이 땅에 증오가 사라지고 철조망이 사라집니다. 우리 아이들이 맘놓고 거리를 내달립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내일을 기약하며 환 - 하게 미소합니다. *
※ 관련 동영상 보기
- Dr.K▶ 대중견성 가능한가? - 법구경 속의 대중견성 사건들 (정각원)
http://cafe.daum.net/bmcbori/4VNM/16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