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좋은 번역본을 추천하자는 소박한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결과가 너무 심각해 공개 여부를 고민할 정도였다.” 김영희 교수(46·과학기술원)는 사뭇 조심스러워했다. 그녀는 소장 영문학자들의 모임인 영미문학연구회(공동대표 전수용·윤지관) 산하 번역평가위원회의 책임연구자이다. 최근 번역평가위원회는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7개월 남짓 연구해온 영미 고전 문학 번역 평가 사업의 ‘샘플 평가’ 결과물을 공개했다.
샘플 평가 대상이 된 작품은 19세기 영국 여류 작가인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다. 영국 근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남녀 주인공의 심리적 갈등을 섬세하게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만과 편견>은 국내에 30종 이상이 번역 출판되었는데, 평가위원회는 이 중 현재 유통되는 21종을 대상으로 했다. 평가위원회는 ‘번역서를 상세히 검토한 결과, 원작의 작품성을 살려낸, 믿고 추천할 만한 번역서는 한 편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라고 총평했다. 더구나 번역본 21종 중 스스로 번역한 것은 7종에 불과하며, 3분의 2에 해당하는 14종은 표절 혐의가 짙은 번역본이다.
평가위원회는, 그중 낫다는 오화섭 번역본조차 ‘줄거리를 전달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지만, 상당한 오역과 부정확한 부분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오화섭 번역본은 정음사(1958·1973년)에서 국내 처음으로 출판된 이후 삼중당(1975년), 범우사(1989·2001년) 등으로 출판사를 옮겼다. 그 과정에서 일부 잘못이 바로잡히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오역은 여전했다. 오화섭본은 많은 번역자들에게 표절 텍스트 구실도 했다.
오화섭 번역본과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받은 박진석 번역본(을유문화사, 1978·1997년) 역시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지만, 한국어 번역이 세련되지 못해 독자가 소설 속으로 빠져들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두 번역본을 뺀 나머지는 아예 ‘신뢰성이 떨어지는 번역이거나 표절 번역본이어서 읽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이 평가위원회의 총평이다.
고석구 번역본(휘문출판사, 1983년)을 놓고는 위원들이 상당한 논란을 벌였다. 이 책은 제목부터 <교만과 편견>으로 달랐고, 모든 문장을 경어체로 처리했다. 그래서 ‘독특한 실험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더구나 번역자는 국내 영문학계의 1세대로, 김교수를 비롯한 여러 회원들의 은사였다. 그러나 평가위원회는 ‘문장 구조를 자의로 변경하거나 원문에 없는 말을 첨가하거나 누락했을 뿐더러, 오역도 적지 않다’라고 평가했다.
많이 알려진 작품일수록 문제 심각
이번에 샘플 평가를 공개한 번역평가위원회는 오는 7월 말까지 영미 고전 문학 작품 38종에 대한 최종 번역 평가 보고서를 낼 예정이다. 이들이 검토 대상으로 삼은 작품은 이번에 샘플 평가의 대상이 된 <오만과 편견> 이외에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하디의 <테스>,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 엘리어트의 <황무지> 등 영국 문학의 고전들과 호손의 <주홍글자>, 멜빌의 <모비딕>,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 미국 문학 대표작들이 망라되어 있다.
김영희 교수는 “지금까지 작업을 보면 셰익스피어 작품처럼 아무나 번역하기 힘든 시나 희곡 작품은 상대적으로 낫지만, <오만과 편견> <제인 에어>처럼 대중에게 많이 읽히는 소설들은 번역본 종류도 많고 문제도 심각하다”라고 말했다. 서양의 고전 문학 작품들이 우리 사회의 주요 교양 목록을 차지하는 현실에서 오역의 폐해는 크다. “부실한 번역은 왜곡된 정보를 낳고, 결국 학문과 문화의 부실로 이어진다”라고 김교수는 말했다. 김교수는 그러나 “번역자의 윤리나 자질을 논하기에 앞서 번역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를 반성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번역을 학술 업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포함해 번역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릴 다양한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그 골목길을 두세 번 걷고 나자, 상쾌한 아침 기분에 이끌려, 그는 공원 문 앞에 서서 공원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오화섭 역, 범우사판)
→오솔길(lane)과 장원(park)을 ‘골목길’과 ‘공원’으로 번역하여 마치 도시의 풍경을 연상케 함. town을 무조건 ‘시내’로 번역한 것도 같은 오류임.
표현이나 맥락, 문장의 뜻이 틀리게 전달된 경우
‘They had all been very ill-used since she last saw her sister’를 ‘전번 헤어진 이래 가족들에게서 갖은 학대를 다 받았다’로(권영희 역, 문화광장판)
→가족들이 무척 심한 일을 당했다는 뜻을 반대 뜻으로 오역.
대충 요지만 전달하고 생략해버린 경우
‘the self-conceit of a weak head, living in retirement’을 ‘자만심’으로(이수원 역, 일신서적판)
→‘머리가 나쁜 데다 세상을 등지고 살아 온 사람의 자만심’이라는 뜻인데, ‘of a weak head~’ 이하를 생략해버림.
번역자가 추가하거나 변용하여 원문 이해를 방해하는 경우
‘In such cases, a woman has not often much beauty to think of’를 ‘아니, 그 사람이 이사올 때쯤 돼서 다듬고 모양을 내면 십상으로 잘 될 건데 뭘. 당신은 아직 내가 보기엔 천하일색이요’로(고석구 역, 휘문출판사판)
→창작 수준의 첨가인 데다가, 원문의 취지와 정반대 의미를 담고 있음.
불충분하거나 왜곡하는 경우
‘the north of England’를 ‘북쪽’으로(오화섭 역, 범우사판)
→잉글랜드 북부지방이라는 뜻인데, 그냥 북쪽으로 애매하게 처리. ‘영국 북부’라고 명백하게 오역한 사례도 있었음.
시대 착오 등 적합성에 문제가 있는 경우
‘My dear, you flatter me’를 ‘비행기 그만 태워요’로(오화섭 역, 범우사판)
→뜻은 정확하게 전달되나, 당시에는 비행기가 없었으므로 적절치 못한 번역.
우리말 문장 자체가 비문인 경우를 포함해 문장 구조가 이상한 경우
아마도 그가 조지아나를 빙리에게 출가시키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빙리의 행복에 대해서 일층 적극적인 관심을 지닌 탓이었을 것이다.(오화섭 역, 범우사판)
→의미도 파악하기 힘든, 미숙한 직역투 문장임.
“차라리 읽지 않는 편이 낫다” (번역자, 출판사 순이며 ( )안은 출판 연도임)
■ 오화섭 역 정음사(1958, 1973), 삼중당(1975), 범우사(1989, 2001), 박진석 역 을유문화사(1978, 1997)
국내 번역본 중에서는 나은 편이지만, 부정확한 번역이 많아 안심하고 추천하기는 어렵다.
■ 고석구 역 휘문출판사(1974, 1983)
문장 구조를 자의로 변경하거나 첨가, 누락한 곳이 많아 읽지 않는 것이 낫다.
■ 권영희 역 문화광장(1990), 이수원 역 일신서적(1993), 정성환 역 금성출판사(1992), 중앙문화사(1987), 정은경 역 청목(1996)
오역이 많고 번역본만으로는 작품 뉘앙스를 파악하기가 어려워 읽지 않는 편이 낫다.
■ 남순우 역 혜원출판사(2002), 김광훈 역 풀잎문학(1996), 김기실 역 길한문화사(1983), 배재서관(1994), 김문하 역 홍신문화사(2002), 김병걸 역 지성출판사(1982), 성기조 역 신원문화사(2000), 신현철 역 지원북클럽(1997), 움직이는 책(1999), 오정환 역 삼성출판사(1976), 이상조 역 정암(1992), 이효상·이승재 역 동서문화사(1987), 학원출판공사(1993), 정홍택 역 소담출판사(2002), 호암출판사 편집부 역 호암출판사(1991), 홍건식 역 삼성기획(1989), 육문사(2000), 황종호 역 하서(2001)
완전 표절본이거나 표절 혐의가 짙다.
첫댓글 절망적이죠.. 하지만 범우사 판으로 읽으시면 소담보단 나으실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