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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9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제1독서 : 호세 14,2-10
복 음 : 마르 12,28ㄱㄷ-34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28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큰 사람, 큰 계명, 큰 사랑으로 살기
-사랑의 축제인생-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 일간지에서 독특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말마디도 새롭고 흥미로웠습니다. 자칫하면 지나칠 뻔 했습니다.
'우아한 노년' 주제에 '멋지게 나이 들기'였습니다.
마침 옆에 있는 알면 쓸데 있는 신조어 사전을 읽으며 문득 분홍색 옷을 입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형형색색의 꽃이 피어나는 계절, 봄이다. 그중에서 유독 분홍색을 찾는 이들이 늘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분홍색의 ‘분홍’을 발음대로 적은 ‘부농부농’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공원에 산책하러 나가보자. 진달래, 복사꽃 등 자연에도 ‘부농부농’ 잔치가 열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봄에는 샛노란 색들의 꽃과 분홍색 꽃이 주류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문득 예전 써놓은 “임 오시면” 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임 오시면/수선화꽃/청초한/샛노란 저고리에
진달래꽃/소박한/분홍색 치마
제비꽃/영롱한/보랏빛 고무신
해드리고 싶네/임 오시면-2000년 봄
보랏빛 색깔의 꽃도 종종 눈에 띕니다.
샛노란 저고리, 분홍색 치마, 보랏빛 고무신, 참 환상적인 사랑 색깔의 조화처럼 느껴집니다.
사람 누구나 이런 임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대상이 하느님이든 사람이든 참 우아하고 고귀한 사랑입니다.
우리 수도자는 하느님에 대해 이런 애틋한 사랑을 고백하곤 합니다. 이어지는 기사 내용입니다.
“2015년 유엔이 발표한 새로운 ‘생애주기별 연령지표’에 따르면 18-65살까지는 청년,
66-79살까지는 중년, 80-99살까지는 노년, 100살 이상은 장수노인으로 나누고 있다.
결국 청년, 중년, 노년을 구분 짓는 건 앞자리 숫자의 차이일 뿐이다.
몸은 늙되 낡지 않게 사는 비결, 근사하게, 멋지게 나이 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이에 대해 오늘의 복음과 독서가 답을 줍니다. 사랑입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랑하며 사느냐'로 초점을 바꿔야 합니다.
사랑을 배워 실천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생애,
이런저런 걱정들과 부수적인 일들로 인생 낭비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고 억울합니다.
인생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부활의 봄꽃들은 그대로 사랑의 인생축제를 상징합니다.
사랑이 충만할 때 고해인생은 축제인생으로 바뀝니다.
한 번 사랑 맘껏 해보라고 주신 사랑의 선물 같은 인생입니다.
이어지는 “우리는 늙었지만 낡지는 않았다”라는 일본의 하야시 부부의 권고입니다.
“검버섯, 주름, 백발 등은 세월을 나타내는 기록과 같다.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도 멋이 될 수 있다.
세월을 받아들이는 어른스러운 태도가 여유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결국 ‘멋이란 그 사람의 됨됨이’다.
매일 즐겁게 살면 ‘좋은 기분’이라는 옷을 입는 것과 같다. 늙더라도 낡지 않고 즐겁게 사시라.”
참 멋지게, 근사하게, 즐겁게, 늙되 낡지 않게 사는 방법은 사랑뿐입니다. 바로 큰 계명인 사랑의 실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큰 사람, 큰 사랑이 되어 살 수 있는 길도 사랑의 큰 계명뿐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제가 큰 수도승이, 큰 신부가 되어 살 수 있는 길도 큰 계명이, 큰 사랑이 되어 사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참으로 진짜 축제인생을 살기 위해 필히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고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게 합니다.
일상의 모든 수행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정신을 다해, 힘을 다해 실행하라 하십니다.
하여 제1독서의 호세아서처럼 하느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회개에로 부르십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이어 회개한 영혼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 사랑의 응답이 참 눈부시고 풍성합니다.
사랑하면 누구나 시인이자 신비가가 됩니다.
사랑의 예언자, 사랑의 시인, 사랑의 신비가 호세아를 통해 계시되는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을 그 길을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너무 아름답고 감미로운 시같은 말씀이라 그대로 인용합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을 체험할 때 지혜로운 사람이, 분별 있는 사람이,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이중계명의 실천에 마르지 않는 원천源泉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의 체험에서 샘솟는 우리의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실천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실천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끝으로 요즘 곳곳에서 만개하기 시작한 청초한 봄꽃들을 보며 쓴 글을 나눕니다.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아무도/알아주지 않아도/상관없다
하늘만/봐주면/알아주면 된다
하늘 사랑만으로/행복한/부활의 봄꽃들이다
하늘 사랑만으로/행복하기에/저리도 청초하고 아름다운가보다-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무슨 일이든 두뇌를 자주 쓰게 되면 두뇌는 그 일에 아주 능통해집니다.
이 사실을 이용해서 우리의 감정을 훈련시킬 수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를 긍정적인 생각에 능통해질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자주 감사해하면 긍정적인 기분이 형성되고 그러면서 뇌 경로가 강화됩니다.
그리고 다시 더 긍정적인 기분이 생깁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은 긍정적인 상태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정신 훈련입니다.
이렇게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실제로 뇌 과학자들이 직접 피아노를 치는 것과 생각으로 피아노 치는 것을 비교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활동에 관여하는 두뇌피질 부위가 똑같이 확장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생각만으로도 뇌 회로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훈련을 해 보면 어떨까요?
1) 하루에 적어도 한 번은 고맙다고 말할 이유를 찾습니다.
2) 문제보다는 긍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춥니다.
3) 나의 이웃에게 왜 고마운지를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조건 없이 감사하게 여기고 인정해주는 사람과 본능적으로 같이 있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 역시 그렇게 감사할 수 있고 남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요.
이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계명과 일맥상통합니다.
바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감사함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첫째가는 계명을 묻는 율법학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 사랑의 계명이 내 삶의 중심에 굳게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 역시 사랑받는 존재가 될 것이고,
이로써 하느님과 이웃들과 함께 하는 행복함을 누릴 수가 있게 됩니다.
언젠가 어느 피정에서 강사가 하나의 작업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 작업은 종이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써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 있게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그런데 강사는 곧바로 그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 옆에 ‘내일 죽는다.’라고 써 보라는 것입니다.
이 피정에 참석하고 있었던 그 누구도 ‘내일 죽는다.’라고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차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선고를 이 종이에 남길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사랑한다면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실천은 어떤 것인지가 분명해집니다.
하느님께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나의 이웃에게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부로 하지 않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않지 않게 되어,
모두가 함께 하는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실천함으로써 완성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으뜸가는 계명이 무엇인가를 논하는 일은 예수님시대 전후에 종종 있었던 일입니다.
유다교에는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48조항은 명령, 365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많은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으로 요약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시키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 참조 : 신명6,4-5)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1. 참조: 레위19,18)는
사랑의 이중계명은 십계명의 핵심정신이고,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의 근본정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됩니다.(손희송)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하여 동의를 표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12,34)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하였지 아직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계명에 대하여 슬기롭게 말하고 동의한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천상의 나라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완성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 나라요, 알고만 있다면 멀리 있지 않은 밖이라는 사실입니다.
운동경기에서 골인을 한 것과 골인할 번한 것은 분명 다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캐오 이야기(루카19,1-10)를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나무에 오른 자캐오에게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선언하셨고
율법학자에게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는 학자답게 이론으로 알고 있었고, ‘훌륭하십니다.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며
감히 예수님을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캐오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하며 즉시 변화된 행동을 보였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그러므로 사랑에 목말라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 3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참으로
중요한 것을
너무나 자주
우리는 잊고 삽니다.
욕망에 묶인
우리를 풀어주어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놀라우신
하느님 사랑을
계명 안에서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 사랑은
가장 중요한
사랑의 관계를
일깨워줍니다.
사랑의 관계회복이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의 힘으로
일상의 본뜻과
가치를 찾게 됩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강력한 초대입니다.
사랑으로
새로워지고
사랑으로
성장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우리 모두를 살립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정체성이 됩니다.
하느님 모상대로
빚어진 우리는
사랑으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모든 계명의 완성은
분명 사랑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하느님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생명의 시간
삶의 자리
이 모두는
이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할
사랑의 관계임을 가르쳐줍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방향이며 목적이며
모든 것의 전부입니다.
사랑으로
나아갑시다.
결승점을 보지 말고 한 발 앞만 보라.
전삼용 요셉 신부
아라비아에 세헤라제드란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임금의 호출을 받게 됩니다. 이 호출은 죽음의 부르심입니다.
왜냐하면 그 못된 임금은 누구든 하룻밤을 지낸 뒤에는 반드시 죽이기 때문입니다.
세헤라제드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첫날 밤 임금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시작하고는 끝을 맺지 않습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임금은 세헤라제드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천 일을 넘겼습니다.
그렇게 ‘천일야화’ 혹은 ‘아라비안나이트’가 탄생한 것입니다.
세헤라제드의 이야기는 천 하루 만에 끝났지만 임금은 그녀를 여전히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임금의 왕후가 되었습니다.
임금은 더 이상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처음부터 그녀 머릿속에 천 일 동안 할 이야기가 다 담겨있었을까?’
아닐 것입니다. 하루 이야기하고 나면 그 다음 날 것을 또 생각해내야 했을 것입니다.
줄거리는 있었을 지언 정 자세한 내용은 그때그때 생각해내야 했을 것입니다.
며칠 만에 천일동안 할 이야기를 자세하게 지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늘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벨상을 수상할 때도 그렇게 말하셨습니다.
그녀의 하루하루는 그녀에게는 별거 아닌 날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들이 모여 마데 데레사 성녀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에 대해 말씀하시며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주님께 모든 마음을 다 쓰고 항상 주님생각만을 하지는 못합니다.
또한 나의 힘도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 쓰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참 행복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연옥에 가지 않기 위해 ‘비르짓다의 7기도’를 매일 바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자들에게도 하루의 15분만 할애하여 이 기도를 바치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그런 식으로 연옥에 안 가려고 하는 것은 너무 비겁한 거 같아요.”라고 말하고,
어떤 분은 “그거 바친다고 연옥에 안 가겠어요?”라고 말하며,
또 어떤 분은 “저는 의지가 약해서요.”라고 말합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 이 기도를 바치기 전에는 이런 생각들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작을 해보니 ‘끝까지 할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20년 넘게 매일 바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반신반의하던 연옥에 가지 않게 해주시겠다는 약속,
혹은 치명자의 지위에 올려주신다는 약속 등은 바치면서 더 믿게 되었습니다.
‘이 기도도 좋지만 주님은 이 기도를 바칠 수 있는 나의 의지를 보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걸음부터 매일 하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좀 그렇기는 합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자랑스럽게 꾸준히 하는 것 중의 하나는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매일 읽는다는 것입니다.
잠들기 전에 항상 이 책을 조금이라도 읽고 잡니다. 거의 30년을 그렇게 해 왔습니다.
10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이었고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책을 제일 싫어하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펴 놓고 잠들기 전에 한 줄이라도 읽으려고 하였습니다.
처음 책들은 본래 두께보다 두 배는 두꺼워졌습니다.
한 줄 읽고 얼굴을 책에 파묻고 잔 적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침 때문에 책이 엄청나게 부풀어 오른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 하다 보니 5년이 걸려 10권을 달 읽게 되었고 그 사이에 사제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정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단거리도 뛰어보지 않은 사람이 마라톤을 생각하면 숨이 막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다만 1초라도 매일 무언가를 하기로 결심을 한다면
이미 마음과 생각과 힘을 다하게 되는 완전함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먼 거리도 한 걸음부터 시작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완전하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며
망설이고만 있다면 영원히 시작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운동도 처음부터 너무 무리해서 하면 며칠 버티지 못합니다.
누워서 식은 죽 먹기만큼만 시작해야합니다.
팔 굽혀펴기도 두 개를 목표로, 달리기도 5분을 목표로 하면 됩니다.
그렇게 매일 해도 1년 후면 상당히 달라져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과 생각과 힘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출발점입니다.
시작도 하지 않았다면 관심도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매일 하지 않고는 못 배길 양 만큼만 정하여 무엇이든 오늘부터 시작해봅시다.
그 별거 아닌 것이 매일 되풀이되면 내가 바뀌고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안식년을 지내면서 신부님들의 강론을 듣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대구 범어동 성당에서 신부님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신부님은 도와주는 것과 섬기는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도와주는 것도, 신앙인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강도를 맞아 피를 흘리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도와주는 것은 힘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약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섬기는 것은 도와주는 것과는 또 다른 덕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삶을 이야기하셨고, 제자들에게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기 위해서 왔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도와주는 신앙, 도와주는 삶도 충분히 가치가 있고, 의미 있는 삶입니다.
그렇게만 살아도 존경받을 수 있고, 그렇게만 살아도 세상은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으려면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친분이 깊었다고 합니다.
스님으로서는 처음으로 명동 성당에 오셔서 ‘대림 특강’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법정 스님이 주지 스님으로 있었던 ‘길상사’에 가셔서 말씀하시고,
길상사의 발전을 위해 기도를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종교를 넘어서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볼 수 있었나 봅니다.
불교의 계율과 가톨릭의 율법에 따르면 서로 다른 종교의 예식에 참여하는 것이 쉬운 선택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계율과 율법을 넘어서 ‘자비와 사랑’은 서로 통하기 때문에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법과 계율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하느님의 뜻이 아니고, 부처님의 가르침도 아닐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밤새 울어도 짜증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아파서 병원엘 가야 할 때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 먼 길을 바래다주면서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몇 시간씩 공항 대합실에서 출장 갔다 오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는
비행기가 연착되었다고 해서 지루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다림은 설레임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중요한 것을 선택하기 위해 우리는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놓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건강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기러기 엄마, 아빠가 되는 것도 기꺼이 감수하기도 합니다.
좋은 일들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도, 건강도, 사랑스러운 자녀들도 온전히 나를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나를 온전히 채우는 것은 나를 만드신 분에게서 오는 것이며, 나를 만드신 분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힘입니다.
오늘 성서는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립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온 마음과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가 전해 주는 가장 큰 가르침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마르 12:34)
오상선 바오로 신부(O.F.M :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두 표독스럽고 나쁜 놈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간혹 괜찮은 사람도 있네요.
하긴 사울 같은 사람도 회개하고 나니 그 누구보다 훌륭한 하느님 나라의 사도가 되었지요.
그러니 정치가들이나 공무원들도 함부로 싸잡아 비난해서는 안 되겠어요.
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겠어요.
그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오늘 회개한 율법학자처럼 예수님께로부터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주님께로부터 이런 칭찬을 받은 그가 부럽네요.
벗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고 느끼시는지요?
아님 천국은 요원하고 지옥과 연옥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나요?
언젠가 아주 열심한 교우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가훈(家訓)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첫째는 하느님, 둘째는 이웃, 셋째는 나.>
이 부부가 언제나 기쁨에 넘쳐 살아가시는 원동력이 바로 이것이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이 1번이고 이웃 사랑이 2번이고 나 자신 사랑이 3번이면,
분명 하느님 나라가 벗님 가까이에 있을 겁니다.
그 순서가 역전되면 하느님 나라는 그만큼 더 멀어져 보이겠지요.
오늘 그 율법학자는 이것을 깨달았을 뿐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3)
벗님도 참으로 이 진리를 깨닫고 이미 이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의 축복을 맛보시길 축원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늘 벗님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감축드립니다. ~^^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인생여정도 그렇지만 영적여정도 '함께'와 '따로'(홀로)를 통해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함께 해야 할 때가 있고 또 따로 홀로서기를 해야 할 때도 있답니다.
함께 할 때는 축복도 있지만 서로 참아주어야 하는 스트레스도 많습니다.
'따로' 떨어져 봐야 그때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홀로서기는 함께할 때보다 편한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힘들고 외로운 투쟁의 길입니다.
그러나 결국 사람은 하느님 앞에 홀로서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 누구도 대신 서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홀로서기의 길을 꿋꿋이 갈 수 있는 것은 함께한 체험들이 밑바탕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중에서야 서로에게 진정으로 깊이 감사할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우리 벗님 여러분에게
주님께서는 호세아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격려와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이제 내가 ...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내가 그들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그들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뿌리를 뻗으리라.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호세 14,5-8)
주님께서 벗님들의 앞날을 그리되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아야"(호세 14,4)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벗어나 죄악으로 비틀거리던 이스라엘에게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하면서
용서를 청하고 돌아오라고 호세아 예언자를 통해 일러 주십니다.
주님은 다른 민족의 신을 섬기며 불륜을 저지르던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다른 신은 없다'고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너에게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 내가 주님 너의 하느님이다."(화답송)
유일하신 오직 한 분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고 무딘 우리에게
그분 편에서 이토록 간절히 당신 존재를 알리십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는 오직 한 하느님이 계시다는 진리에
모든 피조물의 눈이 열리고 영혼이 깨어나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이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면서 이것만은 명심합시다.
사람이나 능력이나 재산에 의지하지 말고, 하느님만 의지하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함께 한 우리의 인연이 홀로서기를 통해 더욱 성장하고 성숙하여
아름드리 큰 나무가 되어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되길 서로를 위해 축복합시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