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제단과 천사의 순백, 그 사이를 걷다.
악마와 천사가 함께 있는 신비로운 공간,
검붉은 바위산과 순백의 빙하만으로도 모든 것이 채워졌다.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 동쪽 끝에 있는 코쿠이국립공원El Cocuy National Parque.
우리에게는 악마의 제단Pulpito del Diablo(5,100m)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25개 이상의 봉우리와 거대한 화강암 뾰족바위, 남아메리카 최대의 빙하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식이름은 시에라네바다 델 코쿠이국립공원.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시에라 네바다 데 쿠이칸, 엘 코쿠이, 그리고 치타는 안데스의 태양 아래 빛나는 하얀 진주처럼 보인다.
두 개의 산맥에 걸쳐 길이 25㎞, 너비 4㎞의 빙하군이 펼쳐져 있다.
빙하 줄기들은 판 데 아수카르Pan de Azúcar(5,120m), 풀피토 델 디아블로Púlpito del Diablo(5,100m),
토티Toti(5,010m), 콘카보스Cóncavos(5,200m), 리타쿠와스Ritakuwas(5,410m), 피코 구이칸Pico Güicán(5,057m)으로 이어진다.
코쿠이국립공원에 가려고 이런 저런 정보를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콜롬비아 사람들조차 너무 멀어서 가기가 어렵다는 곳.
별로 도움 될 만한 정보도 없이 달랑 코쿠이행 버스 티켓 한 장 쥐고 일단 출발한다.
툰하에서 오후 9시에 출발하기로 예정되어있는 버스는 밤 11시가 지나서야 도착했다.
타이어를 교체하고 차량을 점검한 후 밤 12시에 출발.
미니버스여서 좌석은 뒤로 젖혀지지도 않고 정원보다 훨씬 많은 승객이 타서 바닥에 앉거나 서서 간다.
마치 전쟁통의 피란민 버스 같다.
코쿠이 가는 길은 시작부터 험난했다.
그나마 코쿠이국립공원을 간다는 프랑스인 아우드레이와 그녀의 친구들 3명이 함께 있어서 위안이 된다.
아우드레이가 유창한 스페인어로 운전기사와 이야기를 나누더니 목적지를 코쿠이에서 구이칸으로 변경했다.
코쿠이보다는 구이칸이 숙소도 저렴하고 조금 더 가깝다고 한다.
운전기사의 도움으로 구이칸에 숙소를 구하고 아침식사를 하면서 식당의 아주머니에게서 가이드인 안토니오를 소개받았다.
캠핑을 하면서 트레킹을 즐기려 했지만 작년부터 모든 캠핑은 금지. 지금은 국립공원 내에 있던 모든 숙소들도 문을 닫았고 당일 트레일만 허용된다.
작년에는 트레킹조차 허용되지 않았다고 하니 그나마 위안으로 삼아야 했다.
1일차 고산적응, 코치야 로스 아이레스Cuchilla Los Aires
1년에 1㎝ 자라는 프라일레혼, 나의 생각도 지혜도 자랐으면
새벽 2시가 조금 넘은 시각.
다행히 수덕씨가 숙소까지 잘 찾아왔다.
1,000여 명이 속해 있는 남미 단톡방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녀가 코쿠이국립공원을 꼭!!
가고 싶어 한다는 것 외에 내가 아는 것은 그녀의 이름 석 자.
도봉산도 북한산도 아닌 해발고도 5,000m가 넘는 산을 왜 함께 가려고 승낙했던 걸까.
아마 간절히 바라는 그녀에게서 몇 년 전 처음 히말라야 트레킹에 겁도 없이 따라나선 나를 보았던 것은 아닌지?
새벽 5시 반.
모두들 비몽사몽 잠에서 덜 깬 눈을 비비며 아침 인사만 나누고 배낭꾸리기에 바쁘다.
오늘 숙소이자 들머리인 카바나 페냐 블랑카Cabaña Peña Blanca까지 한 시간가량 차를 타고 이동.
오늘은 고산적응을 위한 날이다. 해발고도 4,000m 전후를 걷는다.
산 쪽을 바라보니 벌써 글라시아가 보인다.
이곳(3,050m)에서부터 약 1,300~1,400m 올라가야 하니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남미의 산에 오르면 시원스럽게 뻥 뚫려 있는 경관을 볼 수 있어서 정말 기분이 좋아진다.
이곳도 예외는 아니다.
시원한 계곡물도 마음대로 마실 수 있다.
끝없는 오르막길.
높은 하늘은 깊고 깊은 쪽빛이다.
고산식물 프라일레혼Frailejon이 이곳에도 많다.
1년에 1cm씩만 자란다니 키를 넘는 것은 가히 몇백 년은 됐으리라.
1년에 1cm쯤 나의 생각이나 지혜도 자란다면 좋겠다.
프라일레혼은 물이 풍부할 때 물을 머금고 있다가 건조한 시기가 되면 물을 내보내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마치 커피농장의 바나나 나무처럼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높이 오를수록 햇살이 너무 따갑다. 적도 바로 아래 에콰도르에서도 이렇게 덥지는 않았는데. 해발고도 4,000m 지점에서 잠시 휴식한다.
발걸음을 더해서 오르다보니 우측 저 멀리에 풀피토 델 디아블로와 판 데 아수카르가 장엄한 모습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숨을 몰아쉬며 조금 더 오르니 오늘의 최고점 해발고도 4,360m.
디비노 니뇨Divino niño의 글라시아가 한눈에 들어온다.
내일 걸어갈 길이다.
2일차 디비노 니뇨Divino Niño
남미 최대의 빙하지대, 어디에도 없었던 완전한 순백을 만나다
글라시아를 만나러 간다.
남미, 알프스, 네팔 그리고 뉴질랜드, 북유럽까지 수없이 보아온 것임에도 언제나 글라시아를 보러 가는 날이면 가슴이 더욱 쿵쾅거린다.
어두컴컴한 새벽, 헤드랜턴을 비추며 산으로 향한다.
오늘은 해발고도 4,925m까지 오른다.
5,000m에 가까우니 고소에 특히 신경을 써야 한다.
이른 새벽 햇빛을 머금은 자갈들은 투명한 물 속에서 보석처럼 반짝인다.
수정처럼 투명한 계곡물을 식수통에 담는다.
플라이타스강Rio Playtas 줄기를 따라 걷는 길은 수량이 풍부해서인지 프라일레혼이 보드라운 솜털에 아침이슬을 잔뜩 머금은 채 온 계곡을 덮고 있다.
크고 작은 호수들에 하늘이 몸을 담그고 있다.
피코 구이칸은 그 계곡 너머로 빠끔히 새하얀 봉우리를 내밀고 있다.
경쾌하게 터치한 수채화 느낌이다
세 시간쯤 걸으니 거대한 화강암 바위가 나오고 이어서 나타난 거대한 빙하군.
먼저 도착한 다른 이들이 빙하 언저리에서 아이들 마냥 즐겁게 놀고 있다.
그곳을 지나쳐 조금 더 오르니 엄청나게 큰 바위산이 있고 그 너머엔 상상을 초월하는 순백색의 거대한 빙하가 숨어 있었다. 아, 이래서 코쿠이가 남미 최대의 빙하산군이었구나.
이곳의 글라시아는 티끌 하나 없는 완전한 순백이다.
방금 갈아놓은 눈꽃빙수 같다.
내가 처음 글라시아를 만난 곳은 안나푸르나였다.
벌써 5년 전.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의 감격과 흥분은 글라시아를 만날 때마다 불씨처럼 남아 있다 타오르곤 한다.
글라시아와 아쉬운 이별을 하고 내리막길로 돌아선다.
고산의 하산길은 더욱 장엄하게 펼쳐진다.
짙푸른 하늘에 새하얀 구름.
하늘이라기보다 짙푸른 물결에 하얀 파도가 넘실대는 쪽빛 바다 같다.
내리막길에 뒹구는 크고 작은 돌들을 피해서 걷는 건 오르막보다 좀더 피곤하다.
살짝 미끄러지기만 해도 무척 위험한데 모두들 내리막길에서 속도를 내어 잘 걸어가고 있다.
고산 첫 경험자인 수덕씨가 많이 힘들어 한다.
대신 걸어줄 수는 없지만 함께 걸어줄 수는 있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해지도록.
나 홀로 산을 오를 땐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쉬고 싶을 땐 쉬고, 걷고 싶을 땐 걸었다.
그런데 누구와 함께 그것도 정말로 아주 천천히 보조를 맞춰 걸어야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게 함께 걷는 것도 살아가면서 배우고 익혀야 할 일 중의 하나.
거리는 그리 길지 않지만 고도가 높아져서인지 모두들 많이 힘들어한다.
너덜길이 끝나고 프라일레혼이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곳을 지난다.
그다지 예쁜 모습도 아닌데 프라일레혼을 자꾸 바라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들이 없었더라면 이 트레일은 얼마나 황량했을까 생각해 보니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들의 의미도 알 것 같다.
프라일레혼이 끝나면 깊은 계곡 평원이 시작될 터이고 햇살로 빛나는 그곳을 지나면 오늘의 트레킹도 종료될 것이다.
하늘 한 번 바라보고 구름 한 번 눈에 넣고 잠시 눈을 감고 바람소리도 느낀다.
오늘 숙소는 일반 카사(가정집). 묵기로 했던 숙소는 예약이 꽉 찼다고 한다.
화장실 변기의 물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푸세식으로 뒷정리를 해도 모두들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모두 행복한 모습이다. 산이 좋다.
사람이 좋다.
3일차 라구나 그란데Laguna Grande
해발 5,000m에서의 낮잠, 빙하와 호수, 바람의 자장가를 들으며
칠흑 같은 어둠.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이 찬란하게 쏟아지고 있다.
이 모습인데…,
이곳이었는데! 내가 보고 싶어 하던 별밤. 캠핑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어쩌랴. 캠핑은 금지되었는걸! 아쉬워서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하늘만 바라보다가는 사고 나기 십상이다.
그래. 언젠가는 다른 곳에서 만날거야.
안녕~ 아디오스~.
작별을 하고 나니 걷는 게 조금 편하다.
지난 이틀 동안 잘 걸었던 프랑스 친구 한 명이 두통을 호소한다.
모두들 바짝 긴장을 한다.
걷는 속도도 줄이고 그녀의 배낭 무게도 나눈다.
고소증세는 오를 때 뿐만 아니라 내려올 때도 많이 나타나므로 3,000m 이상의 고산에서는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 된다.
판 데 아수카르와 풀피토 델 디아블로를 바라보고 걷는 길. 완만하게 계속되는 오름길은 끝날 기미가 전혀 없다.
이틀 동안 트레킹으로 체력이 방전되었는지 모두들 힘들어한다.
매일 고산을 걷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해발고도 4,000m가 넘으니 프라일레혼은 사라지고 온통 바위와 비바람에 부서진 바위조각들만 뒹구는 길이다.
험하고 건조한 그 길의 끝에 새하얀 글라시아가 장엄한 모습으로 날 압도했다.
해발 4,500m가 넘는 곳에 새파란 호수가 숨어 있다. 글라시아 앞에는 꼭 호수가 있었다.
페루의 69호수도, 뉴질랜드 통가리로 알파인 크로싱의 에메랄드 호수도 그러했다.
고산을 뒤덮고 있는 빙하가 녹아서 만들어진 호수는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시릴 정도로 맑고 투명하다.
그 호수에 하늘이 잠겨 있다. 호수도 하늘도 온통 파란 세상.
호수를 바라보며 점심을 먹는 시간.
한 폭의 유화처럼 펼쳐진 글라시아와 호수, 투명한 햇살을 맞으며 얼굴을 스치는 바람을 느낀다.
식사 후의 달콤한 디저트, 오수를 즐기기 위해 바람은 피하고 볕이 잘 드는 곳을 찾아 눕는다.
잠시 세상이 멈춘 듯,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빙하를 먹어보고 싶다. 호수를 지나 콘카보스를 향해 오른다.
30여 분 올랐을까?
경고판이 보인다.
빙하를 오르기 위한 장비가 없는 사람은 이곳부턴 입산금지!
뒤돌아서는 발길은 떨어지지 않고 마음은 빙하 위를 오른다.
내려오니 아직도 따사로운 햇살 속에 오수 시간은 계속되고 있다.
호수 아래로 내려가 본다.
무념무상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하산은 오를 때보다 비교적 쉽다.
오를 때 고산증세를 호소하던 그녀도 정상 컨디션으로 회복했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친구들은 더욱 잘 걷는다.
조금씩 벌어진 간격이 이젠 앞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졌다.
천천히 걷기는 하지만 수덕씨가 생각보다 잘 걷는다.
왜 이렇게 힘든 산으로 올라가는지 그 치명적인 매력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는 그녀.
한국으로 돌아가면 트레킹을 좋아하는 엄마와 함께 산을 올라야겠다고 한다.
어제는 예약이 다 차서 우리가 묵지 못했던 라 에스페란사La Esperanza에 도착했다.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는 수덕씨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표정을 지었다.
숙소는 어제와 같은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카사.
샤워기에서는 등짝이 서늘할 정도의 냉수가 나오고 화장실 변기의 물이 제대로 내려지지 않아도 어느 한사람 불만이 없다.
항상 웃으면서 맞아주는 안주인과 이곳의 척박한 상황조차도 즐길 수 있는 여유로움이 우리에게 있었다.
어둠이 몰려드는 시간. 장작을 때는 아궁이에서 만든 파스타로 차려진 저녁식사는 오늘 하루의 수고를 위로하기에 충분했다.
4일차 판 데 아수카르(5,120m)와 풀피토 델 디아블로(5,100m)
하늘로 향하는 악마의 제단, 땅 위로 내려온 천사의 순백
코쿠이 트레킹 마지막 날. 오늘도 변함없이 새벽 5시 출발. 4시 30분에 일어나 수덕씨를 깨운다.
그런데 그녀는 오늘은 산에 가지 않겠다고 한다.
지난 3일의 피로가 쌓이고 감기기운이 있어서 오늘 산으로 가는 것은 무리라고 한다.
세상에나~.
코쿠이 트레킹의 진수인 판 데 아수카르와 풀피토 델 디아블로를 만나기 위해 지난 3일을 걸었던 것인데.
그녀의 생각은 이미 굳어진 상태.
더 이상 설득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특히 오늘은 거리도 길지만 돌길의 경사도가 너무 심해서 가장 어려운 길이다.
수덕씨를 숙소에 남겨둔 채 출발했다.
자동차로 40여 분 달려 도착한 곳은 코쿠이국립공원 사무소.
사무소를 통과해서 올라갈 줄 알았던 길은 한참이나 내리막길.
해가 떠오르면서 여명의 붉은빛이 세상을 물들이지만 여전히 랜턴 없이 걷기는 어렵다.
핀타다 호수Laguna La Pintada를 지나 쉼터에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뒤를 바라보니 화산 폭발로 떨어져 나온 바위들이 제멋대로 엉겨 있다.
저 길을 오른다고 하니 모두들 한숨을 쉰다.
그러나 바위길조차도 즐기며 가뿐하게 오를 것이다.
인적이 거의 없는 곳이라 바위들의 모서리가 무척 날카롭다.
살짝만 부딪쳐도 작지 않은 부상을 입을 것이다.
몇 걸음만 떼었을 뿐인데 목 뒤에선 비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저만큼이 끝이려니 오르고 또 오르고, 바위가 뒤엉긴 너덜길의 끝은 어디일까?
그 험한 너덜길의 마지막 바위구간을 헤치고 올라서니 판 데 아수카르와 풀피토 델 디아블로가 정면으로 반겨준다.
잡힐 듯 가까운 거리로 보였음에도 한 시간 이상을 걸어서야 그 앞에 섰다.
빙하의 순백이 놀라웠다.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모든 빙하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선명하다.
미동조차 없이 순백에 취해서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프랑스 친구들은 그 빙하 앞 바위에 배낭을 던진 채 그대로 누웠다.
같은 감동, 다른 모습. 순백의 황홀함과 고요함 속에 우뚝 선 풀피토 델 디아블로. 검붉고 거대한 암석덩어리,
그것을 처음 보는 순간 그것이 왜 악마의 제단으로 불리는지 직감했다.
악마의 제단, 그 주위를 천사의 순백이 에워싸고 있다.
악마와 천사가 함께 있는 신비로운 공간. 인간은 천사와 악마, 그 사이 어디쯤 있을까.
그들 옆에 나도 누웠다.
눈을 감고 지난 4일 동안 걸었던 길을 떠올린다.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바라보다가 언제인지 모르게 잠이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은 깼지만 일어나기 싫었다.
마치 학교가기 싫은 아이처럼.
눈을 떠 보니 모두들 점심식사를 하려고 배낭에서 주섬주섬 또띠아, 삶은 달걀, 참치캔 등을 꺼내고 있다.
또띠아에 참치와 삶은 달걀을 넣고 둘둘 말았다.
2개를 먹으니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았다.
산을 걷는 4일 동안 삶은 달걀을 도대체 몇 개를 먹었는지?
그래도 산에 오르고 산을 걷는 것 나에겐 삶이며 희망이다.
식사 후 다시 빙하 가까이 갔다.
순백의 백설을 내 손으로 만져보고 느끼고 싶었다.
빙하에 손을 넣어서 한줌 잡으려는 순간 저만치 있던 가이드가 뛰어왔다.
빙하는 만져도 안 되고 빙하 5m 전은 접근 금지라고 하면서 저 멀리 빨간 재킷을 입고 홀로 앉아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국립공원 사무소 직원.
보호는 좋지만 너무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생각도 잠시.
철저한 보호 아래 이곳에 오는 모든 이들이 순백의 빙하를 함께 즐길 수 있구나.
1시간 가까이 판 데 아수카르와 풀피토 델 디아블로를 즐기고 내려오는 하산길에도 자꾸 뒤를 바라본다.
아직 아쉬움이 남았나보다.
오후가 되니 안개가 밀려왔다 나갔다를 반복하면서 풀피토 델 디아블로와 숨바꼭질한다.
이리 저리 보아도 멋진 모습이다.
바윗덩어리가 나뒹구는 너덜구간도 끝나고 평탄한 하산길. 길이 편하니 발걸음도 더욱 가볍다.
컴컴한 새벽에 걸을 때는 몰랐는데 국립공원관리소까지 길이 너무나 멀다.
모두들 지친 표정이 역력하다.
잠시 쉬면서 배낭털이를 하고 수다를 나누니 에너지가 충전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공원관리소에 도착.
이로써 4일간의 트레일은 끝이 났다. 가장 커다란 숙제를 끝낸 학생 같다.
함께 오지 못한 수덕씨가 생각났다.
이 자리에 같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숙소로 돌아오니 환한 웃음으로 그녀가 맞아주었다.
내 마음에 남아 있었던 마지막 짐 하나가 내려졌다.
오늘 하루 쉬면서 행복했을 그녀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로서 함께 걸었던 모든 이들의 마음이 행복으로 가득 찼다.
버스터미널에서 우연히 만나 4일간 함께 걸은 프랑스 친구들이 고맙다.
온통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빙하세계를 기대했지만 뜨거운 태양에 빙하들은 이미 많이 녹아 있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지구의 온난화로 2030년이 되면 코쿠이빙하는 사라질 것이라 한다.
빙하를 소중하게 보호하려는 콜롬비아 정부의 정책이 이해가 된다.
코쿠이빙하는 눈꽃빙수를 막 갈아 놓은 듯 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일까? 눈이 시리도록 모든 색이 선명했다.
키 큰 나무도 울창한 숲도 아름다운 꽃도 없는 황량함.
그러나 아무 것도 없지만 순백의 빙하와 검붉은 바위산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채워진 신비로운 경험.
남미 최대 빙하와 거대한 화강암 바위산으로 뒤덮인 시에라네바다 델 코쿠이국립공원을 걸어보자.
콜롬비아가 왜 트레킹의 천국이라고 불리는지 이해할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