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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그곳 사람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하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보랴,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66,10-14ㄷ
10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기뻐하고 그를 두고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 때문에 애도하던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크게 기뻐하여라.
11 너희가 그 위로의 품에서 젖을 빨아 배부르리라.
너희가 그 영광스러운 가슴에서 젖을 먹어 흡족해지리라.
12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13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14 이를 보고 너희 마음은 기뻐하고 너희 뼈마디들은 새 풀처럼 싱싱해지리라.
그리고 주님의 종들에게는 그분의 손길이 드러나리라.
제2독서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6,14-18
형제 여러분, 14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15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16 이 법칙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내리기를 빕니다.
17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18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의 영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1-12.17-20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7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20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평화를 줄 수 없으면 길들일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도록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느 집을 들어가든지 먼저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것은 엄청 중요한 말씀입니다. 선교의 본질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개들에게 평화를 주지 않습니다. 거의 학대 수준입니다. 실제로 동물 보호단체에서 강 훈련사가 심한 학대를 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행복과 평화를 주어야 하는데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개는 훌륭하다'에 어미로부터 애정을 한 달밖에 받지 못하고 데려온 천둥이가 나왔습니다. 집에 오는 손님은 물론 주인까지 자주 무는 개입니다. 교만이 하늘까지 이른 상태입니다. 이런 개에게 어떻게 평화를 줄까요? 아무리 잘해주려고 해도 주인은 개가 무서워 두려움에 떱니다.
이런 개에게는 평화를 줄 수 없습니다. 평화는 주인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당신이 파견하시는 제자들이 남의 집에 들어가 주인처럼 먹고 마시고 잠을 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발에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오라고 하십니다. 누가 갑인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평화는 생존욕구에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생명이 보장되면 평화가 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며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합니다. 그것이 평화입니다. 부모가 평화입니다. 이 평화를 주는 부모에게 자녀들은 순종합니다. 길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부모가 사는 세상에 살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합니다. 이렇게 참 평화를 주어야만 누군가를 길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평화를 주는 존재가 두려운 존재입니다. 아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부모를 잃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를 싫어할까 봐 가장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힘이 강하면 자기가 부모에게 무언가 해 주는 것처럼 여기고 부모가 평화를 주는 존재가 아니라 귀찮은 존재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부모는 자녀를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은 두려운 것을 섬기는 법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보다 돈을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금송아지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지배당하고 그것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에 내가 속하고 그것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주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고 영향을 미치고 싶으면 내가 먼저 그것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를 주는 생명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디팩 초프라가 자녀에게 한 일이 이것입니다. 그는 먼저 이렇게 말했습니다.
“먹고살 것은 내가 다 책임질 테니….”
먼저 평화를 주지 못하면 “너희는 이웃을 어떻게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아라!”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평화가 집입니다. 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주인입니다. 주인만이 그 집에 사는 이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진 것만을 줄 수 있습니다. 평화가 없는 사람이 평화를 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풍랑에 죽기 직전이었던 사도들을 배 위에서 안심시키시며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세상 것들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면 누구에게도 평화를 줄 수 없습니다.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읍시다. 그러면 평화가 옵니다. 그 평화는 세상 어떤 것도 빼앗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차인표 씨는 모태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음성을 한 번만이라도 듣기를 원했습니다. 평화를 갈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돈 한 푼 안 받고 ‘지저스, 지저스’란 뮤지컬에서 예수님 역할을 무려 4년이나 했어도 그분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컴패션이란 단체에서 인도 콜카타에 봉사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함께 가는 사람들에게 시달릴까 봐 차인표 씨는 1등석을 타고 갔습니다. 왕처럼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것 자체가 이미 자기 평화는 자기가 책임져 하느님을 평화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도에 도착해서 목사님이 아이들을 안아주면서 “너희는 소중한 존재다. 너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라는 말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것이 없었습니다. 한 지저분한 아이가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런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소중한 존재다. 너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
그분이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그분이 주시는 평화가 필요 없는 사람이었음을 그때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평화를 돈이나 명예, 사람들에게서 얻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 평화를 주시는 당신께 길들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구에게도 평화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못 됩니다.
평화를 줄 수 없으면 길들일 수 없습니다. 먼저 평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주님의 집에 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 곧 죽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군가에게 평화를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평화이신 분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평화가 필요한 사람이 되고 이웃을 평화가 필요한 사람으로 만듭시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유튜브 묵상 동영상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토마스 길로비치라는 심리학자가 한 가지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한 실험 참가자에게 오래전에 큰 인기를 가지고 있던 가수의 얼굴이 크게 들어가 있는 티셔츠를 입게 한 뒤, 다수의 다른 참가자들이 모여 있는 방 안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티셔츠 입은 참가자에게 다른 참가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지 예측해 보라고 했지요.
그는 사람들이 옛날 가수의 얼굴이 크게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자신을 이상하게 볼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그의 티셔츠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기억하고 있었던 사람은 실험자 중에 10%도 되지 않았습니다.
타인이 나에 대해 관심을 두고 바라볼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 머리 스타일이 어떤지, 피부가 어떤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신경 쓰는 사람은 높이 잡아도 1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운 말과 행동을 했었어도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내게 그렇게 큰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다른 사람의 기준과 잣대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약한 ‘나’가 늘 문제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세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지, 남들의 시선 때문에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아닌,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지금보다 훨씬 위험과 고난이 따르는 길입니다. 그런데 주의 사항이 조금 이상합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편안한 여행을 생각해서는 안 되고, 입고 먹는 것 모두 하느님께 맡기고 오로지 하느님 나라 전파에만 마음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것도 인사하느라 긴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교 사명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고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 말씀을 철저하게 따랐던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집 떠나면 고생이라면서, 너무 힘들다고 불평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마귀들까지 복종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으며, 동시에 큰 기쁨을 갖게 됩니다.
남들의 시선, 세상의 관점에 신경 쓰고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자신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면 할수록 죽음으로 인한 슬픔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인생의 목적과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은 자기 삶에서 깨닫는 것이 바로 지혜이다. 진정한 사랑은 말에 있지 않고 행동에 있으며, 그런 사랑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지혜를 준다(톨스토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