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8월 1일 미국의 MTV가 개국하면서 처음으로 쏘아 올린 노래가 영국 출신 그룹 [더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였다. 시각적 영향력이 청각적 수단을 압도하는 현대 대중문화의 향방을 예언적으로 노래한 이 곡이 뮤직비디오 전문 채널인 MTV의 첫 곡으로 선정된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렇다면, 이제 라디오는 죽었는가? 우리나라에서는 70년대 후반 이후 1가구 1TV가 보급되면서 대중문화에서의 TV 지배현상이 가속화되었다.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비디오, 케이블 TV, 위성 TV, 인터넷 등 뉴미디어가 등장했고, 이제 청각적 전달매체인 라디오는 추억의 골동품이 되어 박물관 속에 전시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라디오는 살아남았다. 라디오의 생명력은, 오히려 단점이라고 생각되었던 청각적 수단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발휘되었다. 예를들면, 밤낮으로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시선을 업무와 관련된 곳에 고정해야 되지만, 귀는 항상 라디오를 향해 열어 놓으며 업무의 중압감과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했다.
[라디오 스타]는, 비디오 시대의 핵심 권력인 영화가 추억의 라디오 매체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소재의 신선함이 발견된다. 영화 속에서 라디오가 중심이 되는 작품은, 콧대 높은 인기 성우의 요청으로 드라마를 라이브로 방송하면서 벌어지는 일본 코미디 [웰컴 투 맥도날드]와 우디 앨런의 [라디오 데이즈] 등이 있다.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는 매체의 차이에 대한 문화적 접근보다는, 라디오로 상징되는 복고성을 부각시킨다. 그는 감각적이고 세련된 현대적 분위기 대신 투박하지만 땀 냄새와 정이 물씬 배어 있는 휴먼 드라마를 만들었다. 주연을 맡은 영화들은 개봉하는 족족 흥행에 실패하고 이제는 조연급으로나 캐스팅 되는 왕년의 스타 안성기 박중훈 컴비를, 이준익 감독이 [라디오 스타]로 다시 부활시킨 것이이다.
한때 충무로에는 [한국 영화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박중훈이 나오는 영화와 나오지 않는 영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던 배우 박중훈, 1986년 이황림 감독의 [깜보]로 데뷔했으니까 올해 데뷔한지 30년째다. 극중 최곤은 1988년 [비와 당신]이라는 노래로 가수왕을 받았는데, 실제 박중훈과 데뷔 등이 거의 흡사하게 설정되어 있다. 최곤의 매니저로 나오는 국민배우 안성기 역시 이제는 과거의 영광 대신 조연급으로 젊은 후배 배우들을 받쳐주는 역할을 더 많이 한다. 즉 [라디오 스타]는 추억의 스타들이 한물간 스타와 매니저 역을 연기하고 있다. 실제 배우와 허구 속 역할이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최곤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그가 전성기 때 20대였던, 지금은 나이 지긋한 중년층 뿐이다. 젊은 층에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락 음악을 하고 있는 무명의 후배 가수들뿐이다. 그런데도 최곤은 여전히 과거의 인기에 연연하는 철없는 가수다. 그는 한때 폭행 혐의로 경찰서에 간 전력도 있고 사생활의 불협화음으로 스포츠 신문 1면을 장식한 적도 여러차례다. 그런 최곤을 매니저 박민수는 손가방을 들고 데뷔 때부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돌봐준다. 자장면을 먹을 때도 매니저가 먼저 젓가락으로 면과 자장을 잘 섞어 주어야 식사를 하는 등, 연예게 일상의 섬세한 묘사가 [라디오 스타]에 사실성을 부여하고 있다.
[라디오 스타]는 매우 소박한 작품이다. 한물간 왕년의 스타가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 지방으로 내려가 라디오 방송 DJ를 하다가 진솔한 방송으로 의외의 인기를 얻고 다시 부활한다는 내용은, 전형적인 루저의 성공담이다. 그 내용이 너무 소박하고 유치하기까지 해서 과연 이런 소재가 영화로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다.
그런데 이준익 감독은 [왕의 남자]의 대박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잘 짜여진 연출력으로 별 것 아닌 소재를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물론 여기에는 안성기 박중훈 두 컴비의 좋은 연기가 밑받침이 되고 있지만, 섬세하고 힘 있는 연출력이 두드러지게 느껴진다. [키드]와 [황산벌] 시절의 이준익 감독을 생각하면 정말 괄목할만한 발전이다. 영웅의 부활이라는 전형적인 신화적 원형구조를 모방하고 있는 [라디오 스타]는, 소박하면서도 우리의 가슴을 움직이는 진정성이 살아 있다.
왕년의 스타 최곤이 낙향하기까지, 그리고 강원도 영월 방송국의 라디오 방송 DJ를 통해 재기하는 과정, 재기 후 매니지먼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의 구조로 영화는 짜여져 있다. 영월 지역 밴드로 등장하는 노브레인의 연기가 과장되어 있고 아마추어리즘을 지나치게 드러내긴 하지만, 그것 조차도 오히려 이 영화의 진정성과 순박성을 돋보이는 구실을 한다.
아직도 왕년의 인기를 믿고 거만하기만 한 최곤이 지방 방송국 DJ를 처음부터 흡족하게 생각했을리 없다. 시간 때우듯이 귀찮은 표정으로 성의없게 방송을 진행하던 그는, 그러나 커피를 배달하러 온 다방 여종업원, 자장면을 들고 온 중국집 철가방 등을 스튜디오 안으로 불러서 마이크를 통해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한다. 꾸미지 않은 대중들의 진솔한 목소리가 방송을 타기 시작하면서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은 소도시 영월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다. 가식적인 수사학이 넘쳐 나는 시대에 사람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진정성이다. 이것이 이준익 감독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다.
영월 방송국 국장은 하루 빨리 인근 원주 방송국과 통합되기를 기다리고 있고, [최곤의 오후의 신청곡] 담당 여성 피디는, 생방송 사고를 일으켜 원주에서 영월로 좌천되어 왔다. 영월 방송국은 오랫동안 자체 방송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라디오 조정실 기기에는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고, 엔지니어는 않아서 어떻게 기기를 만지는지 잊어버렸을 정도다. 거기에다 프로그램 진행자는 이제는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 왕년의 스타다.
마치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주류 문화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다시 주류로 복귀한다는 부활 스토리는, 항상 대중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준다. [라디오 스타]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 소박함의 미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첫댓글 1986년 데뷔한 박중훈, 20년이 되었네요. 숫자 계산 착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