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인 김성곤 교수는 근래 유라가 주목하고 있는 분입니다. 글을 아주 잘 쓰시거든요. 글이란 짭게 쓰기가 더 힘들고 쉽게 쓰기가 더 어려우며 실감 있게 쓰기란 더욱 공력이 드는 법이란 말이 새삼 떠오르네요. 더구나 전남대 영문과와 동 대학원을 나와 플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도미, 뉴욕 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컬럼비아대에서 비교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공부를 많이 하신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얼마전에 지학사라는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출판사에서 나온 토머스 핀천의 역시나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소설인(소설 브이V의 작가이기도 한 핀천의 대표작은 아무래도 <중력의 무지개>이겠죠), <제49호 품목의 경매>를 구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래 기고문에서는 '명품'을 다루고 있지만 실상은 자신의 실력을 가꿔 그 가치를 높이기 보다, 겉치레와 외양 꾸미기를 중시하는 우리를 꼬집고 계십니다. 유라도 물론 그 지적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음이 안타깝고 면구스럽습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도 스스로에 대해 자신이 없는가. 사람만 떳떳하고 훌륭하면 그가 입는 옷이나 타는 차도 곧 명품이 되는 사회는 과연 언제쯤이나 도래할 것인가."
라는 말을 보면서, 마음으로는 예전부터 저러하고자 했으나, 아직도 현실의 제 모습을 돌아보면, 자신의 내실을 애써 더욱 가꾸려하기보다, 손쉽게 좋은 옷이나 좋은 물건 하나 걸치려는 양태를 일삼아 왔음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사회 분위기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할 것이 아니라, 풍토에 역행을 하면서라도 자기가 옳다는 바를 믿고 실천해가야 할 터인데, 심지가 곧지 못하게도,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뼈아프지만,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게 됩니다.
조선일보(12.6.자)에서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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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전] ‘名品’에 중독된 나라 ........ 金聖坤
한국인의 명품 선호의식이 단순한 취향을 넘어 거의 ‘중독’ 상태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외국공항의 면세점에서, 해외 쇼핑몰에서, 그리고 소위 명품거리에서 값비싼 유명 브랜드를 찾는 사람들은 언제나 한국인들이다. 500달러가 넘는 펜디나 페라가모나 발리 핸드백을, 그리고 1000달러가 넘는 롤렉스나 블로바 시계를 주저없이 집어드는 한국 여인들의 큰손 덕분에 세계의 명품 판매점들은 오늘도 떼돈을 벌고 있다. 그게 어디 여자들뿐이랴? 명품 술 좋아하는 한국남자들 덕택에 대한민국은 오늘날 최고급 위스키와 코냑의 최대 소비국 중 하나가 되어 유럽의 주류회사들은 한국 수출용 상품까지 별도로 제작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들이 탑승하는 국제선 비행기에서는 면세품 판매가 요란한 행사가 되고,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몰리는 해외 쇼핑센터에서는 유명 브랜드 제품이 불티나게 팔려 나간다. 우리에게 명품의식은 부자와 빈자를 가리지 않는다. 부자가 아니어도 우리는 양복과 코트, 와이셔츠와 넥타이, 그리고 티셔츠와 운동화를 거쳐 스카프와 양말에 이르기까지 온통 유명 메이커 제품을 걸치고 산다. 한국사회에서는 명품으로 치장해야 명품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고급 승용차를 선호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값싼 소형차를 타면 무시당하는데 그 누가 국민차를 타려 하겠는가.
한국사회에서는 외적 조건이 바로 그 사람의 신분과 인품을 결정한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자신을 치장해 줄 명품을 사는 데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벌어지는 입시 전쟁 역시 한국 특유의 명품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에서는 명품 대학 간판이 있어야 일류 직장과 일류 배우자를 가질 수 있고, 잘 나가는 일류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에 서열이 생기고, 출신 대학에 따라 인간의 가치와 품위와 신분까지 정해지는 희한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바로 한국인의 뿌리깊은 명품의식 때문이다.
명품의식은 필연적으로 간판문화를 초래한다. 간판문화에서는 내용보다 겉치장이, 그리고 실리보다 명분이 더 중요하다. 그런 사회에서는 내면을 바꿔주는 서점보다 외모를 바꿔주는 성형외과가 더 번창하게 된다. 취직이나 결혼 때, 능력이나 인품보다는 간판과 외모를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선인(先人)들은 형설(螢雪)의 희미한 빛 아래 ‘살과 뼈를 깎는’ 노력으로 학문을 연마하라 했거늘, 우리의 젊은 이들은 지금 학문연마 대신 성형외과의 눈부신 조명 아래에서 진짜 ‘살과 뼈를 깎고’ 있다.
우리가 즐겨 쓰는‘모양새가 좋다’라는 말 역시 내용보다는 겉모습을 중시하는 사회의 산물이다. 사실 내용만 좋으면 되지 그 까짓 모양새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외모와 간판과 ‘껍데기’에 연연한다. 명품의식은 문학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강은교 시인의 지적처럼 문학독자들 역시 명품작가를 선호해 작품의 질보다는 작가의 이름을 보고 책을 산다. 한국 특유의 인종차별과 지역차별 역시 궁극적으로는 명품의식과 무관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유색인종이면서도 보다 더 검은 피부를 차별하는 것이나 지방을 차별하는 것은 그것들이 ‘명품’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비롯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명품의식은 필연적으로 ‘가짜 명품’을 만들어낸다. 사회가 요구하고 소비자가 찾으니 가짜가 생겨날 수밖에 없고, 구매능력이 없는 계층조차 명품을 추구하다 보니 한국은 그만 ‘가짜 상품 천국’이 되어버렸다. 세계에 유례 없는 명문대 가짜 대학생들이 생겨나고, 그 가짜 명품에 수많은 여성들이 속아 농락당하는 것도 한국인의 명품의식이 만들어낸 기괴한 현상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명품의식은 고쳐져야 할 사회병리학적 현상이자, 바람직하지 못한 집단 콤플렉스인지도 모른다. 내면이 충실하고 정신이 건강하며 심리적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명품에 연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지나친 명품의식의 원인을 열등감과 보상심리에서 찾는다. 우리는 왜 그렇게도 스스로에 대해 자신이 없는가. 사람만 떳떳하고 훌륭하면 그가 입는 옷이나 타는 차도 곧 명품이 되는 사회는 과연 언제쯤이나 도래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