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삼성三性과 삼무성三無性
내가 유식唯識과 관련하여 글을 쓰면서 유아독존唯我獨尊과 함께 유불독존唯佛獨尊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썼다. 지금 인터넷을 검색하니, 여관如觀 스님의 금강반야바라밀경필기에도 나온다. “세존이란 천상천하에 유불독존이시다.”(世尊者 天上天下 唯佛獨尊) 소승 사과도 증득하지 못한 범부주제에 혼자만 안다는 아상은 절대 금물이다. 있을 수 없다.
삼성은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 원성실성이고, 삼무성은 상무성과 생무성 승의무성이다. 삼성 중에 변계소집성은 일체중생의 경계이고, 의타기성은 보리살타의 경계이며, 원성실성은 제불세존의 경계이다. 삼성과 삼무성 중에 추기는 의타기성과 생무성이다. 이 생무성의 생生은 생기生起이고, 연생緣生이며, 연기緣起이다. 생生과 기起는 뜻이 같아서 통용하며, 이를 의거하면 생무성의 뜻도 또한 명백해진다.
의타의 그 십이유지를 의거하여 염분을 생기하면 일체중생이 되는 것이고, 정분을 생기하면 제불세존이 된다. 생기生起 중에 십이유지는 능생能生이라 능연이 되고, 중생과 제불은 소기所起라 소연이 된다. 생기하는 능연과 소연이 모두 무성이라, 이 때문에 생무성生無性이라 칭명한다. 보리살타는 정각유정이라 염정이분染淨二分을 취한다.
삼계유심三界唯心이요, 만법유식萬法唯識이니라. 불가의 상용어이다. 또 유식을 공부한 이들은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 말하기도 한다. “삼계는 오직 일심뿐이고, 일심 밖에 별법이 없다.”(三界唯一心․心外無別法) 이는 표현의 양상이 유식무경과 같다. 유식삼십송의 종취는 유심이 아니고 유식이다. 그런데 어째서 삼성과 삼무성을 설하는가? 이 글의 소제목은 아래와 같다.
1. 서장序章
2. 해심밀경의 삼성
3. 유식삼십송의 삼성
4. 해심밀경의 삼무성
5. 유식삼십송의 삼무성
6. 결어
1. 서장序章
해심밀경을 준거하여 건립한 법상종과 반야경을 의거하여 성립한 법성종은 서로 자기 소의경이 더 수승하다고 주장한다. 유식종은 당연히 유심보다 유식을 상위에 놓는다. 성유식론도 또한 그러하다. 아래 글은 삼성과 삼무성의 도입부이다.
성유식론: 전중후 삼제의 생사윤회는 외연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내식을 인유하니, 정법淨法의 상속도 또한 이와 같은 줄을 응당 알라. 이른바 무시이래로 본식에 종속된 유루 무루의 종자는 전식 등으로 인하여 수시로 훈습을 발기하여 더욱더 승의를 드높이며, 더 나아가 구경에 성불할 수 있는 때에 이르러서는 오염된 본유식종本有識種을 전사轉捨하고, 청정한 시기종식始起種識을 전득轉得하며, 일체 공덕종자를 임지任持한다. 본원력으로 인하여 미래제가 다하도록 모든 묘용을 일으키고 상속하여 무궁하게 한다. 이로부터 당연히 알아야 하니, 오직 내식內識뿐이니라.(前中後際生死輪迴 不待外緣既由內識 淨法相續應知亦然 謂無始來依附本識有無漏種 由轉識等數數熏發漸漸增勝 乃至究竟得成佛時 轉捨本來雜染識種 轉得始起清淨種識 任持一切功德種子 由本願力盡未來際 起諸妙用相續無窮 由此應知唯有內識)
해설: 종자는 유식의 용어이다. 본유종자本有種子와 시기종자始起種子가 있다. 후자를 신훈종자新薰種子라 한다. 비로소 훈습을 생기한다고 하여 시기始起라는 명칭을 얻었을 것이다. 전사와 전득은 한꺼번에 몰록 취사하는 것이 아니고 전전하며 취사하는 것을 말한다. 본래잡염식종本來雜染識種과 시기청정종식始起清淨種識은 하나의 단어로 보면 문제가 전혀 없는데, 이를 이해하기 어렵고 보면 분단할 수밖에 없다. 잡염은 청정의 대어이니 오염으로 보고, 본래는 본유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둘째 단어를 끄집어내서 첫째 단어 앞으로 바꾸어 놓으면, ‘오염된 본유식종’과 ‘청정한 시기종식’이 된다. 이는 마치 종래나 이래 또는 유래의 중간에 무시를 넣으면 종무시래從無始來나 이무시래以無始來 또는 유무시래由無始來가 되는 것과 같다. 두 단어가 융합하여 한 단어가 된다. 시기청정종식始起清淨種識 등도 시기종식 가운데 청정을 넣어서 한 단어를 만든 것이다. 모든 현상을 생기할 수 있는 것을 유루종자라 일컫고, 보리의 정인을 생기할 수 있는 것을 무루종자라 일컫는다. 이 문단은 후자에 상당한다.
성유식론: 문: “만일 오직 식만 있다면 어째서 세존은 각처를 경행하시는 중에 삼성을 설하고 계셨을까?”
답: “마땅히 알라. 삼성도 또한 식을 떠나지 않느니라.”(若唯有識 何故世尊處處經中說有三性 應知三性亦不離識)
해설: 이 문답에 대하여 자은스님은 성유식론술기에서 간단히 서술했다. “이는 약답이다. 성만 셋이 있다고 설한 것이 아니고, 또 오직 식만 있다는 것도 아니니, 바로 식을 여의지 않고 삼성을 설하기 때문이다.(述曰 此略答也 非說性有三便非唯有識 即不離識而說三故) 약답略答은 하나의 명사이다. 대구로 광석廣釋이 많이 쓰이며, 광연廣演 또는 중상重詳이라 말하기도 한다.
2. 해심밀경의 삼성
나는 무성의 근원을 잘 알지 못한다. 부처님은 어떤 경에서 최초로 무성이란 용어를 썼을까? 이것도 또한 모른다.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이서 찾아보자. 나는 무성인가? 아니면 유성인가? 나는 자성이 있는가? 아니면 자성이 없는가? 이 자성과 관련한 삼성과 삼무성을 해심밀경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성유식론도 또한 그러하다.
해심밀경은 유식의 근본경전이다. 먼저 해심밀경의 삼성과 삼무성은 어떠한가? 삼성은 통상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 원성실성이라 하고, 삼무성은 상무성相無性과 생무성生無性 승의무성勝義無性이라 한다. 그런데 해심밀경은 용어가 조금 다르다. 해심밀경 제2품 승의제상품과 제4품 일체법상품 제5품 무자성상품 제6품 분별유가품에 나온다. 삼성과 삼무성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법상은 실상 진여 법성 등과 같은 말이다. 아래 인용문 중에 경은 해심밀경이고, 소는 원측법사의 해심밀경소이다.
경: 이른바 제법의 체상은 대략 세 가지가 있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 변계소집상이고, 둘째 의타기상이며, 셋째 원성실상이다.(謂諸法相略有三種 何等爲三 一者遍計所執相 二者依他起相 三者圓成實相)
소: 그런데 이 약언略言에 본래 양석이 있다. 하나는 광약의 약이니, 이른바 일체법은 광언하면 비록 백법이지만 약언하면 오직 삼성뿐이다. 지금 백법에 대비하기 때문에 약언이라 말한 것이다. 둘은 요약의 약이니, 이 때문에 섭대승론에서 이르기를, “소지상은 요약하면 세 가지가 있다.”라고 하고, 무성의 해석에 이르기를, “요약하면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니, 이른바 일체법은 마땅히 소응지와 소응단 소응증의 차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然此略言 自有兩釋 一者廣略略 謂一切法 廣雖百法 略唯三性 今對百法 故言略也 二者要略略 故攝大乘云 謂所知相略有三種 無性釋云 略有三種者 謂一切法 要有所應知所應斷所應證差別故)
섭대승론 4권에 이르기를, “어떻게 변계소집을 생성하는가? 어떤 인연 때문에 변계소집이라 칭명하는가? 한량없는 행상에서 의식이 변계하고 전도하여 경상境相을 생기하기 때문에 변계소집이라 칭명한다. 자상이 진실로 없지만 오직 변계소집이 있어서 얻을 수 있으며, 이 때문에 명칭을 변계소집이라 설한 것이다.”라고 한다. 지금 변계소집이라 말하는 것은 변계를 들어 의식으로 소집을 취하는 것이다. 만일 변계로 소집하는 것이면 의주석이고, 만일 소집으로 자성을 대하면 곧 지업석이다. 소집이 바로 자성이기 때문이다.(攝大乘論第四卷云 云何成遍計所執 何因緣故 名遍計所執 無量行相 意識遍計 顛倒生相 故名遍計所執 自相實無 唯有遍計所執可得 是故說名遍計所執也 今言遍計所執者 舉遍計意取所執 若遍計所執者 是依主釋 若以所執對性 即持業釋 所執即性故)
섭대승론에 이르기를, “만일 의타기자성이 진실로 오직 식만 있을 뿐이고 사의현현이 의지하는 것이면, 어떻게 의타기를 생성하는가? 어떤 인연 때문에 의타기라 칭명하는가? 훈습한 종자로부터 생기는 바, 타성의 소연을 의지하여 생기하니, 이 때문에 의타기라 칭명한다. 생기하는 찰나 이후에는 종자가 저절로 안주함이 없기 때문에 의타기라 칭명한다.”라고 한다. 유위 제법은 인연에 의탁하여 생기할 수 있으니 의타기라 칭명한다. 이 때문에 삼십유식송에 이르기를, “의타기자성은 중연을 분별하여 생기하는 것이다.”라고 하고, 호법보살은 해석에 이르기를, “타성의 중연을 의탁하여 생기할 수 있으니 의타기라 칭명한다.”라고 한다.(攝大乘云 若依他自性 實唯有識 似義顯現之所依止 云何成依他起 何因緣故 名依他起 從自薰習種子所生 依他緣起 故名依他起 生剎那後無有功能自然住故 名依他起 有爲諸法 依因託緣 而得生起 名依他起 故三十唯識云 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護法釋云 依他衆緣而得生起 名依他起)
섭대승론에 이르기를, “변이하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또 청정한 소연의 자성 때문에, 일체 선법의 최고 수승한 자성 때문에, 최고 수승한 경계 때문에 원성실이라 칭명한다.”라고 한다. 성유식론에 이르기를, “두 가지 공이 현현하는 바, 원만히 성취한 제법의 실성’을 원성실이라 칭명한다.(攝大乘云 由無變異性故 又由清淨所緣性故 一切善法最勝性故 由最勝義 名圓成實 成唯識云 二空所顯 圓滿成就 諸法實性 名圓成實)
경: 무엇을 제법의 변계소집상이라 하는가? 이른바 일체법의 명언名言을 빌려서 안립한 자성의 차별이고, 심지어 세간 중생으로 하여금 변계를 좇아서 소집을 일으키게 하는 언설言說이다.(云何諸法遍計所執相 謂一切法名假安立自性差別 乃至爲令隨起言說)
소: 이른바 일체법은 진실로 자성이 없다. 다만 망정의 명언을 따라서 나의 모든 자성을 가립한 것이다. 마치 나를 일러서 말하는 것과 같으니, 혹은 빛깔 등 아법의 자성을 말하고, 혹은 가아를 말하며, 혹은 실아를 말하고, 혹은 가견색이나 불가견색 등 아법의 차별을 말하며, 이와 같이 자성의 차별을 가립할 따름이다. 심지어 세간의 유정으로 하여금 변계를 좇아서 소집을 일으키게 하는 언설이다. 성유식론 제8권에 의하여 다시 이르기를, “이른바 망심으로 소집한 5온 12처 18계 등 이러한 아집과 이러한 법집의 자성 차별이니, 이와 같은 망심으로 소집한 자성의 차별을 모두 변계소집자성이라 칭명한다.”라고 하였다.(謂一切法 無實自性 但隨妄情名言 假立我諸自性 如說謂我 或說色等我法自性 或說假我 或說實我 或可見色不可見等我法差別 如是假立自性差別已 乃至爲令世間有情隨起言說 依成唯識第八復云 謂所妄執蘊處界等若我若法自性差別 此所妄執自性差別 總名遍計所執自性)
경: 무엇을 제법의 의타기상이라 하는가? 이른바 일체법의 인연으로 생기하는 자성이니, 바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하기 때문에 저것이 생기하는 것이다. 이른바 무명은 행지行支를 연기緣起하고, 더 나아가 행지의 순일하고 광대한 고온을 초집招集한다.(云何諸法依他起相 謂一切法緣生自性 則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謂無明緣行 乃至招集純大苦蘊)
소: 첫째 총상은 체성을 드러내니, 이른바 인연을 좇아서 일체 번뇌악업을 생기하고 잡염도 생기하니, 인연을 좇아서 생기하기 때문에 전체를 의타라 칭명한다. 의타를 범론하면 본래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잡염이고, 둘은 청정이다. 이 때문에 성유식론 제8권에 이르기를, “유루와 무루가 모두 타성을 의탁하여 생기하니, 타성의 중연을 의탁해야 생기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송에서 말하기를, ‘중연을 분별하여 생기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니, 응지應知도 또한 염분의 의타를 설한 것이다.”라고 한다. 이 경도 또한 그러하다. 염분을 설한 것이지 정분을 설한 것이 아니다.(初總相出體 謂從緣生一切煩惱業 生雜染 從緣生故 皆名依他 汎論依他 自有二種 一者雜染 二者清淨 故成唯識第八云 有漏無漏皆依他起 依他衆緣而得起 故頌言分別緣所生者 應知亦說染分依他 此經亦爾 說染非淨)(성유식론 원본은 應知亦說이 應知且說로 되어 있다. 대동소이하다.)
“바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하기 때문에 저것이 생기한다.”라고 말한 것은 사상事相을 가리킨 것이니 따로 해석하겠다. 또 앞의 두 구절에 차별이 있는 이는 살바다종이다. 예를 들면 구사론 제9권에서 이른 바와 같다.
“어째서 세존께서는 앞의 두 구절을 설하셨는가?”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하기 때문에 저것이 생기한다.’라는 구절에 의거하여 십이연기에서 결정성決定性을 알려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설한 바와 같다. 무명이 있음을 의지하여 제행이 있을 수 있지만, 무명을 떠나서 제행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모든 유지有支의 전생傳生을 현시하기 위함이니, 이른바 이 유지가 있음에 의지하여 저 유지가 있을 수 있고, 저 유지가 생기하기 때문에 여타 유지가 생기할 수 있다. 또 삼제의 전생을 현시하기 위함이니, 이른바 전제가 있음에 의지하여 중제가 있을 수 있고, 중제가 생기할 수 있기 때문에 후제가 생기할 수 있다. 또 친전의 두 가지 인연을 현시하기 위함이니, 이른바 무명에 무간생행無間生行이 있으며, 혹은 전전력展轉力으로 제행이 비로소 생기한다. 여러 궤범사軌範師들이 해석하기를, “이 두 구절은 인과가 끊임없이 생기함을 현시하기 위함이니, 이른바 무명이 단절되지 않음에 의지하여 제행도 단절되지 않고, 바로 무명이 생기하기 때문에 제행도 생기할 수 있다.”라고 한다.(言則此有故等者 指事別釋 然前二句有差別者薩婆多宗 如俱舍論第九卷云 何故世尊說前二句 謂依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 爲於緣起知決定故 如餘處說 依無明有諸行得有 非離無明可有諸行 又爲顯示諸支傳生 謂依此支有彼支得有 由彼支生故餘支得生 又爲顯示三際傳生 謂依前際有中際得有 由中際生故後際得生 又爲顯示親傳二緣 謂有無明無間生行 或展轉力諸行方生 軌範諸師釋 此二句爲顯因果不斷及生 謂依無明不斷諸行不斷 即由無明生故諸行得生)
해설: 예를 들면 이하는 모두 구사론 제9권을 인용한 것이다. 다음은 원측법사의 주석이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무명지 이후에 바로 행지를 생기함을 무간생행이라 칭명하고, 무명을 생기하고 나서 차례로 무기심無記心을 생기하며, 이후에 행지를 생기함을 ‘전전력으로 제행이 바야흐로 생기한다.’라고 칭명한다.”라고 하며, 또 어떤 이는 이르기를, “무명이 행지를 마주 대하면 무간생이라 칭명하고, 무명이 식지 등을 마주 대하면 전전생이라 칭명한다.”라고 한다.(一云無明支後 即起行支 名無間生行 起無明已 次起無記心 後起行支 名展轉力諸行方生 一云無明望行 名無間生 無明望識等 名展轉生)
무간생행無間生行은 무명지와 행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니, 찰나의 사이도 없이 행지를 생기한다는 뜻이다.
“행지의 순일하고 광대한 고온을 초집招集한다.”라는 구절을 구사론에 의거하여 말한다. “이와 같은 순일하다는 말은 오직 행지만 있고 아아소我我所는 없음을 현시한 것이다. 광대한 고온이라는 말은 고의 적집은 처음도 없고 끝도 없음을 현시한 것이다. 초집한다는 말은 모든 고온이 생기함을 현시하는 것이다.”(招集純大苦薀者 依俱舍論 如是純言 顯唯有行無我我所 大苦薀言 顯苦積集無初無後 集言爲顯諸苦薀生)
소: 대비바사론 제24권에 의거하여 말한다. “다시 이 십이지 연기법은 뿌리가 있고 줄기가 있으며, 가지가 있고 잎이 있으며, 꽃이 있고 열매도 있으니, 마치 큰 나무와 같다. 이 중에 뿌리는 무명지와 행지를 말하고, 줄기는 식지와 명색지를 말하며, 가지는 육처를 말하고, 잎은 촉지와 수지를 말하며, 꽃은 애지와 취지 유지를 말하고, 열매는 생지와 노사지를 말한다. 이 십이지 연기법이라는 나무는 어떤 경우에는 꽃도 있고 열매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꽃도 없고 열매도 없다. 꽃도 있고 열매도 있다는 것은 이생과 유학有學을 말하고, 꽃도 열매도 없다는 것은 아라한을 말한다.”(依大毗婆沙第二十四云 復次此十二支緣起法 有根有莖 有枝有葉 有華有果 猶如大樹 此中根者謂無明行 莖者謂識名色 枝者謂六處 葉者謂觸受 華者謂愛取有 果者謂生老死 此十二支緣起法樹 或有華有果 或無華無果 有華有果者 謂異生及有學 無華果者 謂阿羅漢)
유가사지론 제10권에 의거하여 말한다.
문: “십이연기 중에서 어떤 것이 고통의 싹이고, 누가 고통의 싹을 지키고 기르며, 어떤 것이 고통의 나무인가?”
답: “무명지와 행지의 능연이 인발引發한 식지 내지 수지까지는 고통의 싹이고, 수지의 능연이 인발한 애지 내지 유지까지는 고통의 싹을 지키고 기르는 것이며, 생지와 노사지는 응당 고통의 나무인 줄을 알아야 한다.”(依瑜伽第十云 問 於緣起中 何等是苦牙 誰守養苦牙 何等爲苦樹 答 無明行緣所引識乃至受是苦牙 受緣所引愛乃至有是守養苦牙 生與老死 當知是苦樹)
또 섭대승론에 의하면 열한 가지 식을 준거하여 의타기를 설명한다. 논에 말한다.
“이 중에 어떤 것이 의타기상인가?”
“이른바 아뢰야식을 종자로 삼고 허망한 분별로 섭수하는 모든 식이다.”
“이것을 다시 무엇이라 이르는가?”
“이른바 신식과 신자식 수자식 피소수식 피능수식 세식 수식 처식 언설식 자타차별식 선취악취사생식이다. 이 중에 신식과 신자식 수자식 피소수식 피능수식 세식 수식 처식 언설식과 같은 이것은 명언의 훈습종자를 말미암은 것이고, 자타차별식과 같은 이것은 아견의 훈습종자를 말미암은 것이며, 선취악취사생식과 같은 이것은 십이유지의 훈습종자를 말미암은 것이다. 더 나아가 일러도 이와 같으니, 명칭을 의타기상이라 한다.”(若依攝論 約十一識 明依他起 論曰 此中何者依他起相 謂阿賴耶識爲種子 虛妄分別所攝諸識 此復云何 謂身身者受者識 彼所受識 彼能受識 世識 數識 處識 言說識 自他差別識 善趣惡趣死生識 此中若身身者受者識 彼所受識 彼能受識 世識 數識 處識 言說識 此由名言熏習種子 若自他差別識 此由我見熏習種子 若善趣惡趣死生識 此由有支熏習種子 乃至云如是 名爲依他起相)
경: 무엇을 제법의 원성실상이라 하는가? 이른바 일체법의 평등한 진여이다. 이 진여에서 모든 보살들은 용맹정진을 인연하기 때문에 이지에 칭합稱合하게 작의作意하며, 전도가 없는 사유를 인연하기 때문에 바로 통달할 수 있다. 이 통달에서 점점 일체 선근공덕을 수집修集하고, 마침내 무상정등보리에 이르러 비로소 각행원만을 증득한다.(云何諸法圓成實相 謂一切法平等眞如 於此眞如 諸菩薩衆勇猛精進爲因緣故 如理作意 無倒思惟爲因緣故 乃能通達 於此通達 漸漸修集 乃至無上正等菩提方證圓滿)
소: 이른바 일체법의 평등한 진여를 해석하여 말한다. 이는 바로 답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처음은 바로 체성을 드러냈고, 이후에 승용勝用을 드러냈다. 이는 곧 처음이니, 이른바 앞에서 설한 ‘일체법에 두루 있는 일미의 진여’를 체성으로 삼는다. 변중변론과 같이 원성실성은 본래 두 종류가 있다. 따라서 그 논의 제2권을 인용하여 말한다. “이 원성실성은 모두 두 종류가 있으니, 무위와 유위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무위는 진여와 열반을 총섭하여 변이가 없기 때문에 원성실이라 칭명하고, 유위는 일체 성도聖道를 총섭하여 경계에 전도됨이 없기 때문에 또한 원성실이라 칭명한다.
또 섭대승론에 의하면 원성실성은 본래 네 종류가 있다. 따라서 그 논을 인용하여 말한다.
“어떻게 원성실성을 응당 알아야 하는가?”
“응당 네 종류 청정한 법을 펼쳐서 설했음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자성 청정이니, 이른바 진여와 공 실제 무상無相 승의 법계이다. 둘째는 이구離垢 청정이니, 이른바 바로 이것이 일체 장구障垢를 여읜 것이다. 셋째는 이 도를 증득하는 청정이니, 이른바 일체 보리분법과 바라밀다 등이다. 넷째는 이 경계를 생기하는 청정이니, 이른바 모든 대승의 미묘한 정법의 교설이다. 이 법의 교설은 청정한 소연이기 때문에 변계소집자성이 아니고, 최상의 청정한 법계 등류等流의 자성이기 때문에 의타기자성도 아니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법이 일체 청정한 법을 남음 없이 총섭한다.” 이 중에 두 가지 게송이 있다.(謂一切法平等眞如 釋曰 此即答也 於中有二 初正出體 後顯勝用 此即初也 謂前所說 遍一切法一味眞如 以爲體性 若中邊 圓成實性 自有二種 故第二云 此圓成實 總有二種 無爲有爲有差別故 無爲總攝眞如涅槃 無變異故 名圓成實 有爲總攝一切聖道 於境無倒故 亦名圓成實 若依攝大乘 圓成實性 自有四種 故彼論云 云何應知圓成實性 應知宣說四清淨法 一者自性清淨 謂眞如空實際無相勝義法界 二離垢清淨 謂即此離一切障垢 三者得此道清淨 謂一切菩提分法波羅蜜多等 四者生此境清淨 謂諸大乘妙正法教 由此法教清淨緣故 非遍計所執自性 最淨法界等流性故 非依他自性 如是四法 總攝一切清淨法盡 此中有二頌)
환화 비유를 중생에게 설하니, 변계소집이 없음을 설하도다.만일 네 종류 청정함을 설하면, 이것이 원성실상이니라.자성과 이구 그리고 청정한 도의 소연,일체 청정한 법은 모두 네 가지 상이 섭수하는 바이다.
幻等說於生 說無計所執 若說四清淨 是謂圓成實
自性與離垢 清淨道所緣 一切清淨法 皆四相所攝
“이 진여에서 모든 보살들은 용맹정진을 인연하기 때문에 이지에 칭합稱合하게 작의作意한다.”(於此眞如 諸菩薩衆勇猛精進爲因緣故 如理作意)라는 구절을 원측법사는 해심밀경소에서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이는 수승한 작용을 드러낸 것이다. 이른바 진여에서 모든 보살들은 자량위 중에 용맹정진하고, 가행위에서 전도가 없는 사유를 한다. 이 인연을 인하여 견도위 중에 바로 통달하고, 수도위에 머물러 점점 공덕을 수집하며, 구경위에 이르러 비로소 각행원만을 증득한다.”(釋曰 此顯勝用 謂於眞如 諸菩薩衆 資糧位中 勇猛精進 於加行位 無倒思惟 由此因緣 見道位中 乃能通達 住修道位漸漸修集 至究竟位 方證圓滿)
또 유가사지론 제73권에 의하면 그 진여에 세 가지 작용이 있다. “첫째는 청정을 증득하는 작용이고, 둘째는 두 가지 속박에서 해탈하는 작용이며, 셋째는 공덕을 인발하는 작용이다. 따라서 그 논을 인용하여 말한다. “심지어 청정을 증득할 수 있게 하고, 일체 상박相縛과 추중박麤重縛을 벗어날 수 있게 하며, 또한 일체 공덕을 인발할 수 있게 한다.”(若依瑜伽第七十三 有其三用 一證得清淨用 二解脫二縛用 三引發功德用 故彼論云 乃至能令證得清淨 能令解脫一切相縛及麤重縛 亦令引發一切功德)
또 이 삼상 체성의 광협은 여러 설이 같지 않다. 잠시 진제삼장의 설을 의거하여 말하겠다. “제팔아뢰야식을 의타기라고 칭명하고, 안식 등 7식을 분별성이라 하며, 의타무생依他無生과 분별무상分別無相을 진실성이라 한다.”
다시 해석한다. “안식 등 8식을 의타기라고 하고, 소변상분所變相分을 분별성이라 하며, 의타무생과 분별무상을 진실성이라 한다.”
거듭 해석한다. “안식 등 8식의 견분과 상분을 의타기라고 칭명하고, 망심으로 소집한 경계를 분별성이라 하며, 의타무생과 분별무상을 진실성이라 한다.”
위와 같은 두 가지 해석은 이치가 더욱 그렇지 않다. 안식 등 8식과 모든 상분 등은 인연을 좇아서 생기하는데, 어째서 외곬으로 제8아뢰야식을 설하여 의타기라 칭명하고, 안식 등 7식을 분별성이라고 하는가? 분별무상과 의타무생은 두 가지 자성과 다르지 않은데, 어떻게 그것을 설하여 진실성이라 칭명하는가? 이와 같은 등의 과오를 모두 진술할 수 없다. 그 이외의 여러 설들은 아마도 번거로울듯하여 서술하지 않겠다.(然此三相體性寬狹 諸說不同 且依眞諦三藏說云 第八賴耶 名依他起 眼等七識 爲分別性 依他無生 分別無相 爲眞實性 又解 眼等八識 爲依他起 所變相分 爲分別性 依他無生 分別無相 爲眞實性 又解 眼等八識見分相分 名依他起 妄所執境 爲分別性 依他無生 分別無相 爲眞實性 如上兩解 理且不然 眼等八識及諸相分等從緣生 云何偏說第八賴耶 名依他起 眼等七識爲分別性 分別無相依他無生 不異二性 如何說彼名眞實性 如此等過 不可具陳 已外諸說 恐繁不敘)
이제 여러 교에서 설한 삼성에 대해 진술하면 모두 두 가지 문이 있다. 첫째는 소집한 잡염이 전도되지 않는 문이다. 이른바 망심으로 소집한 실아와 실법은 전혀 있을 곳이 없다. 다만 망정妄情을 따라서 시설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있다고 설하니, 이와 같은 모두를 변계소집이라 칭명한다. 일체 잡염의 모든 유루법은 인연을 좇아서 생기하는 것이니, 의타기라고 칭명하며, 인연에 의탁하여 생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체 유위 무루의 도제와 모든 무위를 원성실이라 칭명하니, 두 종류는 모두 전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今述諸教所說三性 總有二門 一所執雜染不倒門 謂妄所執實我實法 都無所有 但隨妄情而施設故 說之爲有 如是皆名遍計所執 一切雜染諸有漏法 從緣生者 名依他起 依因託緣而得生故 一切有爲無漏道諦 及諸無爲 名圓成實 二種皆是不顛倒故)
둘째는 소집한 연생이 변이變異하지 않는 문이다. 이른바 망심으로 소집한 실아 실법 등은 망정을 따라서 있기 때문에 소집성이라 칭명한다. 유루와 무루의 일체 유위는 모두 의타기이다. 일체 제법의 평등한 진여는 변이하지 않기 때문에 원성실이라 칭명한다.(二所執緣生不變門 謂妄所執實我法等 隨情有故 名所執性 有漏無漏一切有爲 皆依他起 一切諸法 平等眞如 不變異故 名圓成實)
이상의 두 문에 여러 교설은 같지 않다. 본래 어떤 성교聖敎는 전자를 설하고 후자는 설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능가경 제4권에 설하기를, “대혜야, 정지正智와 여여라는 것은 파괴될 수 없기 때문에 성자성成自性이라 칭명한다.”라고 하였다. 변중변론도 또한 이 교설과 공유한다.(於上二門 諸教不同 自有聖教說前非後 如楞伽經第四卷說 大慧 正智如如者 不可壞故 名成自性 辨中邊論 亦同此說)
본래 어떤 성교는 후자를 설하고 전자를 설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유가사지론 제74권에서 이른 것과 같다.
문: “둘째 자성은 몇 째에 섭수되는가?”
답: “넷째에 섭수된다.”
문: “셋째 자성은 몇 째에 섭수되가?”
답: “첫째에 섭수된다.”(自有聖教說後非前 如瑜伽論七十四云 問 第二自性幾所攝 答四所攝 問 第三自性幾所攝 答一所攝)
본래 어떤 성교는 두 종류를 모두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성유식론 제8권에서 이른 것과 같다. “중연을 분별하여 생기하는 것이다.”라고 하니, 우선 염분의타를 설한 줄을 응당 알아야 하며, 정분의타도 또한 원성실이기 때문이다. 혹은 모든 염분 정분의 심 심소의 법은 모두 분별이라 칭명하니, 연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하면 일체 염분 정분의 의타는 모두 이 중에 의타기로 섭수한다.”(自有聖教二種俱有 如成唯識第八卷云 分別緣所生 應知 且說染分依他 淨分依他亦圓成故 或諸染淨心心所法皆名分別 能緣慮故 是則一切 染淨依他 皆是此中依他起攝)
섭대승론 제4권에 이르기를, “둘째는 그 잡염과 청정을 의탁하여 일성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세친의 해석에 이르기를, “곧 이와 같음으로 인하여 의타기성이다. 만일 변계할 때는 곧 잡염을 이루고, 분별이 없을 때는 바로 청정을 이루니, 둘로 나뉘기 때문에 일성을 이루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무성이 해석한 뜻도 또한 이 해설과 동일하다.(攝論第四云 二者依他雜染清淨性不成故 世親釋云 由即如是依他起性 若遍計時即成雜染 無分別時即成清淨 由二分故 一性不成 無性釋意 亦同此說)
지금 이 일부의 경은 후자를 설한 것이고 전자를 설한 것은 아니니, 오직 진여를 원성실성이라 설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전자를 설한 것이고 후자를 설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으니, 오직 염법만 연생緣生이 된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두 가지 의미를 통유할 수도 있으니, 앞에 두 가지를 설했기 때문이다. 만일 널리 분별하면 삼성장과 같다.(今此一部 說後非前 唯說眞如圓成實故 或可說前非後 唯說染法爲緣生故 或可通有二義 前二說故 若廣分別 如三性章)
3. 유식삼십송의 삼성
성유식론: 만일 오직 식만 있다면, 어째서 세존은 각처를 경행하시는 중에 삼성을 설하고 계셨을까? 삼성도 또한 식을 여의지 않은 줄을 응당 알아야 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한다.(若唯有識 何故世尊處處經中說有三性 應知三性亦不離識 所以者何 頌曰) 경經을 경행經行으로 해석했다.
갖가지 변계로 인하여 온갖 종류의 사물을 변계한다.
이 변계하는 소집은 그 자성이 있을 곳이 없다.
유식제20송 由彼彼遍計 遍計種種物 此遍計所執 自性無所有
의타기자성은 중연을 분별하여 생기하는 것이다.
원성실성은 그 의타에서 항상 앞 변계소집성을 멀리 여읜다.
유식제21송 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그러므로 이 원성과 의타는 다르거나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마치 무상 등의 자성과 같으니 이것이 저것을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유식제22송 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如無常等性 非不見此彼
해설: 제21송의 3구와 4구를 운문으로 바꾸어 해석하면, “원성실성은 그 의타의 타성 위에서 항상 이전의 변계소집성을 멀리 여읜다.”(圓成實於彼依他性上 常遠離前徧計所執性)라고 하며, 제22송의 3구 “마치 무상 등의 자성과 같으니”는 “마치 무상 등의 자성은 무상 등의 법과 같으니, 바로 다르거나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니고,”(如無常等性與無常等法 乃非異不異)라고 하며, 4구 “이것이 저것을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는 “이 원성실을 보지 못하고 저 의타기성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非不見此圓成實 而能了彼依他性也)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지욱스님의 해설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22송의 2구는 직역하면, “다르지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라고 해야 옳지만, 게송의 미관상 “다르거나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라고 줄였다.
유식제20송: 갖가지 변계로 인하여 온갖 종류의 사물을 변계한다. 이 변계하는 소집은 그 자성이 있을 곳이 없다.(由彼彼遍計 遍計種種物 此遍計所執 自性無所有)
성유식론: 상론한다. 두루 계탁하기 때문에 변계라 칭명하고, 계탁하는 마음의 품류가 매우 많으니 갖가지라 설한 것이니, 이는 이른바 능변계의 허망한 분별심이다. 곧 갖가지 허망한 분별로 인하여 갖가지 변계할 사물을 변계하니, 이는 이른바 망심으로 소집한 5온 12처 18계 등 이러한 법과 이러한 아의 자성 차별이며, 이와 같은 망심으로 소집한 자성의 차별을 모두 변계소집자성이라 칭명한다. 이와 같은 자성은 전혀 있을 곳이 없으니, 이교理敎로 추징해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論曰 周徧計度 故名徧計 (計度之心)品類衆多 說爲彼彼 (此)謂能徧計之虛妄分別(心也) 即由彼彼虛妄分別 徧計種種所徧計物 (此)謂所妄執蘊處界等若法若我自性差別(也) 此所妄執自性差別 總名徧計所執自性 如是自性都無所有 理教推徵不可得故)
해설: 이교理敎는 의리교설義理敎說 또는 의리교석依理敎釋으로 볼 수도 있다. 또 천태종은 장통별원藏通別圓 등 네 가지 교설을 건립하여 차별지사差別之事와 진제지리眞諦之理를 구분했다. 장교를 계내界內의 사교事敎라 하고, 통교를 계내의 이교理敎라 하며, 별교를 계외界外의 사교라 하고, 원교를 계외의 이교라 했다. 위에서 말한 이교는 네 가지 교설 전체 곧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성유식론: 초구 “갖가지 변계로 인하여”(由彼彼遍計)는 능변계의 식을 드러냈고, 제2구 “온갖 종류의 사물을 변계한다.”(遍計種種物)는 소변계의 경계를 보였으며, 후반 제3구 “이 변계하는 소집은”(此遍計所執)과 4구 “그 자성이 있을 곳이 없다.”(自性無所有)는 바야흐로 변계소집의 이러한 나와 이러한 법의 자성이 있지 않음을 펼쳐보였다. 이미 널리 현시했지만 그 자성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或初句顯能遍計識 第二句示所遍計境 後半方申遍計所執若我若法自性非有 已廣顯彼不可得故)
첫째 “능변계의 자성은 무엇인가?” 의리義理가 있다. “8식과 모든 심소의 유루로 섭수하는 것은 모두 능변계이니, 허망한 분별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고, 모두 소취와 능취가 나타난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며, 또 성교는 아뢰야식이 변계소집자성으로 허망하게 계집하는 종자를 소연으로 삼는다고 설하기 때문이다.”(初能遍計自性云何 有義 八識及諸心所有漏攝者 皆能徧計 虛妄分別爲自性故 皆似所取能取現故 (又聖教)說阿賴耶(識)以徧計所執自性妄執(之)種(子)爲所緣故) 이는 안혜논사의 뜻이다.(此是安慧論師義也)
지욱스님 해설: 소취와 능취는 곧 능연과 소연이다. 이는 8식이 모두 능변계임을 드러낸 것이다. 아뢰야를 설한 이하는 다시 제8식도 또한 능변계임을 드러냄으로써 인증한 것이다. 대체로 소연은 이미 허망하게 계집한 종자이지만, 능연도 또한 반드시 허망한 계집이다.(所取能取 即能緣所緣也 此顯八識皆能徧計 說阿賴下 更引證以顯第八亦能徧計 葢所緣既是妄執種子 則能緣亦必是妄執矣)
해설: 위 원문 중에 괄호 안의 글자는 모두 지욱스님이 읽기 편하도록 보완한 것이다. 삭제하면 원문과 같다. 번역은 괄호 안의 글자를 포함시켰다. 이상은 안혜논사의 주장이고, 아래는 호법보살의 견해이다. 현장스님 이후 호법보살의 견해를 취하고 있다.
성유식론: 의리가 있다. “제6식과 제7식의 심품心品으로 아법을 계집하는 것이 능변계이니, 경 가운데 오직 의식이 변계할 수 있다고 설했기 때문이고, 제7식 의意와 제6식 의식을 의식이라 칭명했기 때문이며, 계탁과 분별이 있으니 바로 능변계가 되기 때문이며,(전5식과 제8식은 능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법을 계집하는 것은 반드시 혜심소이기 때문이고, 이집二執은 반드시 무명심소와 함께하기 때문이며,(제8식은 혜심소와 치심소 둘과 상응함이 없기 때문에 능변계가 아니다.) 무명에 선성이 있다고 설하지 않기 때문이고, 우치와 무치 등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며,(모든 선심소는 능변계가 아니다.) 공지를 집도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비유하면 집유와 집무를 함께 생기하지 않음과 같기 때문이며,(선심소와 혜심소는 또한 능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찍이 이집이 없어서 능훈이 아니기 때문이다.(제8식은 단지 소훈일 뿐이라 결코 아법의 이집이 있는 것이 아니다.)(有義 第六第七心品(之)執我法者是能徧計 (經中)唯說意識能徧計故 (以)意及意識名(爲)意(與)識故 (有)計度(及)分別 (乃爲)能徧計故(前五及第八非能徧計也) 執我法者必是慧(心所)故 二執必與無明(心所)俱故(第八無慧癡二心所相應 非能徧計也) 不說無明有善性故 癡無癡等不相應故(諸善心所非能徧計也) 不見有執導空智故 (喻如)執有執無不俱起故(善慧心所亦非能徧計也) 曾無有執非能熏故(第八但是所熏 決非有我法二執也)
무릇 유루의 모든 심왕과 심소 등은 실리實理를 증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체가 모두 허망한 분별이라 칭명하고,(그렇지만 모든 명칭이 능변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으로 비록 소취와 능취가 서로 나타나는 것 같지만 일체가 모두 능변계로 섭수되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능소취와 유사하지만 문득 능변계라 칭명하는 것이니,) 무루심도 또한 계집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래의 후득지 무루지심도 또한 능취와 소취가 서로 나타나는 것 같은데, 어찌 또한 명의상 계집이 있게 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경에 부처님의 후득지는 신토 등 갖가지 영상을 나타낸다고 설했으니, 마치 거울 등과 같기 때문이다. 만일 능소연을 쓸 수 없다면 응당 후득지 등이 아니다.((夫)有漏(諸)心(心所)等 不證實(理)故 一切皆名虛妄分別(然不皆名爲能徧計 以其)雖似所取能取相現 而非一切(皆是)能徧計攝(尚以似能所取 便名能徧計者) 勿無漏心亦有執故 (且)如來後得(無漏智心 亦似能取所取相現 豈亦)應(名爲)有執 故經說佛(後得)智 現身土等種種影像 如鏡等故 若無(能所)緣用 應非智等)
비록 성교는 장식이 변계를 갖가지로 반연하지 않는다고 설하지만, 오직 변계를 반연하기 때문에 성증誠證이 아니라고 설하지는 않는다. 이 이취로 인하여 오직 제6 제7 심품에 능변계가 있을 뿐이다. 식품은 비록 단지 두 종류만 있지만, 둘과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가지 법 등이 있어서 생기하는 변계는 동일하지 않다. 이 때문에 갖가지라 말한 것이다.(雖(聖教)說藏識緣徧計種 而不說唯(緣徧計)故非誠證 由斯理趣 唯於第六第七心品有能徧計 識品雖(只有)二 而有二三四五六七八九十(法)等(上所起)徧計不同 故言彼彼)
지욱스님 해설: 이는 호법보살의 정의이다. 첫째 제6식 이하는 전5식과 제8식 그리고 모든 선심소 등이 능변계가 아니라고 바로 간별하고, 다음 유루심 등 이하는 첫째 뜻을 파척破斥하며, 다음은 “비록 성교는 장식이 변계를 갖가지로 반연하지 않는다고 설하지만,” 이하는 모두 앞에서 인용한 성교이고, 끝에 “이 이취로 인하여” 이하는 능변계를 끝맺은 것이니, 오직 6식과 7식 두 가지 식뿐이다. 다만 소변계로 인하여 같지 않음이 있기 때문에 게송에서 갖가지라 말한 것이다.(此護法正義也 初第六下 正簡前五第八及諸善心所等非能徧計 次有漏心等下 破斥初義 次雖說藏識下 通前所引聖教 後由斯理趣下 結成能徧計者 唯是六七二識 但由所徧計有不同 故頌言彼彼耳)
종경록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유변비계有徧非計(두루함은 있지만 계집은 없음)이니. 예컨대 무루의 제심과 유루의 선식은 두루 소연을 넓힐 수 있지만 계집은 없다. 무루의 제심은 곧 모든 성인의 무루 지혜이고, 모든 법공에 명백하니 바로 일체법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고, 전혀 계집이 없으니 명칭을 비계非計라 하며, 오직 후득지뿐이다. 유루의 선식은 곧 지전보살이니, 비록 유루심 중에 있지만 무아관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일체법에 모두 아집이 없는 줄을 관할 수 있으니, 또한 두루하지만 계집은 없다. 둘째는 유계비변有計非徧(계집은 있지만 두루하지는 않음)이니, 예컨대 유루의 제7식은 항상 제8식의 견분을 반연하여 아집과 법집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제6식을 좇아서 생공관으로 들어갈 때에 제7식 중에서도 여전히 제8식의 견분을 반연하여 법집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계집하지만 두루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셋째는 역변역계亦徧亦計(또한 두루하고 또한 계집함)이니, 곧 중생의 염심이다.(이른바 오염과 상응하는 제6식이다.) 넷째는 비변비계非徧非計(계집도 없고 두루함도 없음)이니, 곧 유루의 전5식과 유루의 제8아뢰야식이다. 각기 자상분의 경계가 두루하지 않음을 알지만, 계탁하여 상념을 따르는 분별은 없기 때문에 비계라 한 것이다.” 첫째 능변계를 해석하고 끝마친다.(宗鏡錄云 一有徧非計 如無漏諸心 及有漏善識 能徧廣緣 而非計執 無漏諸心 即諸聖人無漏智慧 了諸法空 即無法不徧 都無計執 名爲非計 唯後得智 有漏善識 即地前菩薩 雖有漏心中 能作無我觀故 亦能觀一切法皆無有我 亦是徧而非計 二有計非徧 如有漏第七識 恒緣第八見分 起我法二執 從第六識入生空觀時 第七識中猶尚緣第八見分起於法執 故知計而非徧 三亦徧亦計 即衆生染心(謂染汙相應之第六識也) 四非徧非計 即有漏前五識 及有漏第八識 各了自相分境界不徧 無計度隨念分別 故非計也 初釋能徧計竟)
성유식론: 문: “다음 소변계의 자성은 무엇인가?”
답: “섭대승론에 ‘이 의타기는 심왕 등의 소연연을 변계하기 때문이다.’라고 설했다.”
문: “원성실성은 어찌 그 두루 소연을 계집한 경계가 아니겠는가?”
답: “진성은 소연을 허망하게 계집한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전전하는 말을 의거해도 또한 소변계이기는 하다. 그러나 변계소집이 비록 그 능변계심의 경계이지만 실아실법實我實法이 없으며, 소연연이 아니기 때문에 소변계가 아니다.”((問曰)次所徧計自性云何 (答曰)攝大乘說 是依他起 徧計心等(之)所緣緣故 (問曰)圓成實性寧非彼(徧計執所緣之)境 (答曰)眞非妄執所緣境故 (若)依展轉(而)說亦(可是)所徧計 (然)徧計所執雖是彼(能徧計心之)境 而(無實我法) 非所緣緣故非所徧計)
지욱스님 해설: “전전하는 말을 의거해도 또한 소변계이다.”라는 것은 가령 노끈을 뱀이라 계집하면 바로 삼을 뱀이라 계집하는 것과 같다. “비록 그 경계이지만 소연연은 아니다.”라는 것은 가령 뱀이라 계집할 때 또한 일찍이 뱀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노끈은 있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뱀은 소연연이 아니고, 또한 소변계도 아니다. 마땅히 알라. 변계의 소연연은 오직 의타기성일 따름이다. 비유컨대 뱀이라 허망하게 계집할 때 오히려 노끈에서 계탁을 일으키는 것과 같으니, 여전히 본질인 노끈을 소소연연으로 삼으며, 안식 상분의 노끈을 친소연연으로 삼는다. 의식은 그 가운데서 허망하게 뱀이란 공포를 일으키니, 명칭을 비량이라 하고, 명칭을 변계집이라 한다.(依展轉說亦所徧計者 如計繩爲蛇 即是計麻爲蛇也 雖是彼境而非所緣緣者 如計蛇時 亦未甞有蛇 仍惟有繩 故蛇非所緣緣 亦復非所徧計 當知徧計之所緣緣 惟是依他起性 譬如妄計蛇時 仍即於繩起計 仍以本質繩爲疎所緣緣 眼識相分繩爲親所緣緣 意識於中妄起蛇怖 名爲非量 名爲徧計執也)
성유식론: 문: “변계소집의 그 상은 무엇인가? 의타기와 더불어 다시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의리가 있다. “삼계가 섭수한 유루의 심왕과 심소는 시작이 없는 그 이전부터 허망하게 훈습하니, 비록 각기 체성은 하나이지만 두 종류가 생기하는 듯하다. 이른바 견분과 상분이니, 곧 능취와 소취이다. 이와 같은 견분과 상분 이분二分은 정의情意로 보면 있는 것이지만 이지理智로 보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능취와 소취 이상二相을 변계소집이라 한다. 이 상견相見의 이분은 자증自證의 체성을 의지하는 바이니, 실로 소연을 의탁하여 생기한다. 이 체성은 없는 것이 아니니 의타기라 일컬으며, 이로써 허망하게 소연을 분별하여 생기하는 까닭이다.”
“어떻게 그러한 줄을 아는가?”
“모든 성교聖教는 허망한 분별이 의타기라 설하고, 성교는 칭명하여 변계소집이라 한다.”(徧計所執 其相云何 與依他起 復有何別 有義 三界(所攝有漏)心及心所 由無始來虛妄熏習 雖各體一 而似二生 謂見(分及)相分 即(是)能(取)所取 如是二分 情(之所)有理(之所)無(故) 此(能所二)相說爲徧計所執 (此相見)二(分)所依(自證之)體 實託緣生 此性非無 名依他起 (以是)虛妄分別緣所生故 云何知然 諸聖教說虛妄分別是依他起 聖教名爲徧計所執)
지욱스님 해설: 이는 망심으로 자증분을 의타기성이라 하고, 견상이분을 변계소집이라 한다.(此妄以自證分爲依他起性 見相二分爲徧計所執也)
성유식론: 의리가 있다. “일체 유루 무루와 잡염 청정, 세간 출세간의 모든 심왕과 심소는 훈습력으로 인하여 이분二分을 변화시키는 바, 인연을 좇아서 생기하기 때문에 또한 의타기이다. 변계는 이 상분 견분의 이분을 의탁하고 허망하게 계집하여 실아실법이라 단정하고, 그리고 ‘있는 것과 없는 것’과 ‘동일한 것과 다른 것’ ‘함께하는 것과 함께하지 않는 것’ 등을 계집한다. 이 유무의 이분二分 또는 일이의 이분 등을 바야흐로 변계소집이라 칭명한다. 모든 성교는 유량唯量 유이唯二와 유종종唯種種을 설하니, 모두 의타기라 칭명하기 때문이며, 또 상분 등 네 가지 법과 열한 가지 식 등을 논에서 모두 의타기에 섭수된다고 설하기 때문이다.(有義 一切(有漏無漏染與不染世出世間所有)心及心所 由熏習力所變二分 從緣生故 亦依他起 徧計依斯(相見二分)妄執定實(我法 及執)有無一異俱不俱等 此(有無之二 或一異之)二(等)方名徧計所執 諸聖教說唯量唯二種種 皆名依他起故 又相(分)等四法 十一識等 論皆說爲依他起攝故)
지욱스님 해설: 이는 호법보살의 정의이다. 함께하는 것은 ‘또한 있고 또한 없는 것’ 또는 ‘또한 동일하고 또한 다른 것’이고, 함께하지 않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 또는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이다. 이러한 등류를 실아실법이라 계탁하고 희론하니, 바야흐로 변계소집이라 일컫는다. 상견 이분과 같은 것은 본래 인연을 좇아서 생기하니, 어찌 의타성이 아니겠는가. 유량과 유이 등은 섭대승론에 이르기를, “첫째 유량은 그 뜻이 무소유이기 때문이고, 둘째 유이는 이른바 상분과 견분의 식이 있기 때문이며, 셋째 유종종은 이른바 갖가지 상분이 생기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천친보살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 이르기를, “유량이란 오직 식량識量이기 때문이니, 일체 모든 제식이 다 오직 식량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알고 있는 뜻이 무소유이기 때문이다. 유이란 성립하여 상분과 견분이 있기 때문이며, 곧 이 일식一識의 일분一分은 상분을 이루고 제2분은 견분을 이루니, 이것이 안식 등 식의 제2분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유종종이란 곧 이 일식의 생기하는 6진은 상분이 되고, 의식은 견분이 되며, 의식의 경계는 일정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유종종이라 설한다. 상분 등 네 가지 법은 곧 모든 심왕과 심소이니, 각기 네 가지 분이 있다. 이른바 하나는 상분이고, 둘은 견분이며, 셋은 자증분이고, 넷은 증자증분이다.”라고 한다. 열한 가지 식이란 하나는 신식이니 이른바 안식 등 5계이고, 둘은 신자식이니 이른바 염오의이며, 셋은 수자식이니 이른바 의계이고, 넷은 응수식이니 이른바 색계 등 6외계이며, 다섯은 정수식이니 이른바 6식계이고, 여섯은 세식이니 이른바 생기하고 생기하여 상속 부단하며, 일곱은 수식이니 이른바 하나부터 계산하여 바로 무량에 이르고, 여덟은 처식이니 이른바 기세간이며, 아홉은 언설식이니 이른바 견문각지하는 네 가지 언설이다. 이 아홉 가지는 명언을 좇아서 종자를 훈습하여 생기한다. 열은 자타차별식이니 이른바 의신의 차별이고, 이는 아견을 좇아서 종자를 훈습하여 생기한다. 열하나는 선악양도생사식이니 이른바 생사취는 종자가 무량하며, 이는 유지를 좇아서 종자를 생기한다. 이와 같은 모든 식은 논문에서 모두 허망한 분별로 섭수한 것이라 설하니, 의타기라 일컫는다.(此護法正義也 俱者 亦有亦無 或亦一亦異也 不俱者 非有非無 或非一非異也 此等執實戲論 方名徧計所執 若夫相見二分 本是從緣生起 豈非依他性哉 唯量唯二等者 攝論云 一者唯量 義無所有故 二者唯二 謂有相及見識故 三者唯種種 謂種種相生起故 天親釋云 唯量者 唯是識量故 一切所有諸識皆唯識量 何以故 由所識義無所有故 唯二者 成立有相及見故 即此一識一分成相 第二分成見 此是眼等識二分故 唯種種者 即此一識 所起六塵爲相 意識爲見 意識境不定 故說唯種種也 相等四法 即諸心心所 各有四分 所謂一相分 二見分 三自證分 四證自證分也 十一識者 一身識 謂眼等五界 二身者識 謂染汙意 三受者識 謂意界 四應受識 謂色等六外界 五正受識 謂六識界 六世識 謂生生相續不斷 七數識 謂算計一乃至無量 八處識 謂器世間 九言說識 謂見聞覺知四種言說 此九從名言熏習種子生 十自他差別識 謂依身差別 此從我見熏習種子生 十一善惡兩道生死識 謂生死趣無量種 此從有支習氣種子生 如是諸識 論皆說爲虛妄分別所攝 名依他起)
성유식론: 그러하지 않다. 무루 후득지품은 상분 견분이 있는 바, 또한 응당 명칭이 변계소집이다. 네가 만일 받아들이는 것이면 응당 성지는 그 상분 견분을 반연하여 생기하지 않는다. 혹은 다시 그 상분 견분을 반연하는 후득지품이면 응당 집제이고 도제는 아니다. 만일 네가 무루의 상분 견분이 변계인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응당 유루의 상분 견분도 또한 그러한 줄을 알 것이니, 단지 의타기성일 따름이다. 또 만일 상분 견분이 변계소집이면 응당 토끼뿔 등과 같은 것이라 소연연이 아니니, 모든 변계소집은 체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응당 상분 견분이 이미 체성이 있는 것이 아니면 곧 훈습하여 종자를 이루지 못한다. 이미 종자를 훈습하지 못하면 이 이후의 식 등이 다시 생기해도 응당 상분 견분은 없을 것이다. 또 모든 습기는 곧 제8식의 상분이 섭수한 바이니, 어찌 있지 않는 법으로 현행하는 모든 식의 친인연을 지을 수 있으랴. 또 만일 생기하는 심내상心內相의 견분을 반연하면 의타기가 아니고, 곧 상분 견분이 의지하는 자증의 체성이다. 사례도 또한 응당 그러하니, 함께 변계에 속한다. 모두 소연을 분별하여 생기하니, 정이인定異因이 없기 때문이다.(不爾 無漏後得智品(所有相見)二分 (亦)應名(爲)徧計所執 (汝若)許(者則)應聖智不緣彼(二分)生 (或復)緣彼(二分之)智品 應(是集諦而)非道諦 (汝若)不許(無漏二分是徧計者) 應知有漏(二分)亦爾 (但是依他起性) 又若二分是徧計所執 應如兔角等 非所緣緣 (以凡)徧計所執 體非有故 又應二分(既非有體 則便)不熏成種 (既不熏種 則此)後識等(復)生 應無二分 又諸習氣 (即)是(第八識之)相分(所)攝 豈(以)非有(之)法(而)能作(現行諸識之親)因緣 (又)若緣所生(之)內相見分非依他起 (則相見)二(分)所依(自證之)體 例亦應然(同屬徧計 以均是分別緣所生) 無異因故)
지욱스님 해설: 이는 첫째 의리를 파척한 것이다. 글을 또한 쉽게 알 수 있다. 첫째 변계소집성을 해석하여 마친다.(此破斥初義也 文並易知 初釋徧計所執性竟)
해설: 심상心相은 두 가지가 있으니, 심내상心內相과 심외상心外相이다. 심내상은 마음의 본성이 청정하여 평등한 상이고, 심외상은 마음이 모든 인연을 따라 갖가지 대경對境을 생기하는 상이다.
유식제21송 전반: 의타기자성은 중연을 분별하여 생기하는 것이다.(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성유식론: 첫째 앞 구절을 이어받아 의타기 체성을 드러내니, 곧 게송 제5구 “의타기자성”을 해석한다. 이 이취理趣를 인하여 중연이 생기하는 심왕과 심소의 체성과 상분견분 유루무루는 모두 의타기이니, 그 중연을 의탁하여 생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간석이니, 곧 게송 제6구를 해석하는 것이다. 게송에서 “중연을 분별하여 생기하는 것이다.”(分別緣所生)라는 것은 염분 의타를 다시금 설했음을 응당 알아야 한다. 정분 의타와 같은 것은 또한 원성실이라 일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모든 염정의 심왕과 심소법은 모두 분별이라 일컫고, 후득지도 또한 분별이 있으니, 연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일체 염정 의타이니, 모두 이 중에 의타기가 섭수한다.(初承前出依他體 即釋頌第五句也 由斯理趣 衆緣所生心心所體及相見分 有漏無漏 皆依他起 依他衆緣而得起故 二簡釋 即釋頌第六句也 頌言分別緣所生者 應知且說染分依他 (若夫)淨分依他 亦(可名)圓成故 或諸染淨心心所法 皆名分別(以後得智亦有分別) 能緣慮故 是則一切染淨依他 皆是此中依他起攝)
지욱스님 해설: 정분 의타도 또한 원성실인 것은 가령 사지보리와 십력무외 등과 같다. 이로써 수덕하니 정분 의타라 일컫고, 이로써 칭성하니 다시 원성실이라 일컬을 수 있다. 둘째 의타기성을 해석하여 마친다.(淨分依他亦圓成者 如四智菩提 十力無畏等 以是修德 名淨依他 以其稱性 復可名圓成實 二釋依他起性竟)
유식제21송 후반: 원성실성은 그 의타에서 항상 전 변계소집성을 멀리 여읜다.(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성유식론: 첫째 원성실의 체성을 바로 해석하고, 둘째 의타와 대비하여 ‘같은 것과 다른 것’을 밝히며, 셋째 이를 명증하면 의타를 명백히 알 수 있다. 첫째 원성실의 체성을 바로 해석한다는 것은 곧 게송 제7구와 8구 양구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공이 현현한 바, 원만히 성취한 제법의 실성을 원성실성이라 일컫고, 이 실성이 두루 상주함을 현현하니 체성이 황당무계하지 않으며, 자상과 공상이나 허공 자아 등을 간명한 것이다.(初正釋圓成實體性 二對依他明非一異 三明證此能了依他 初正釋圓成實體性 即釋頌七八兩句也 二空所顯圓滿成就諸法實性 名圓成實 顯此徧常 體非虛謬 簡自共相虛空我等)
지욱스님 해설: 이는 원성실 세 글자의 뜻을 먼저 해석한 것이다. 두루하기 때문에 원만이라 하고, 상주하기 때문에 성취라 하며, 황당무계하지 않기 때문에 실성이라 일컫는다. 제법의 자상은 이른바 현량으로 얻은 속제의 법체이니, 명상의 종류 등 모든 분별을 여읜다. 예컨대 색깔이나 소리 향기 맛 감촉 등이 그 각각으로 인하여 차별이 있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두루 원만하지 않다. 제법의 공상은 이른바 비량으로 얻은 속제의 도리이니, 명언 등을 말미암아 현시하므로 황당무계하지 않다. 예컨대 무상이나 무아 등이 그 약의約義로 전표詮表하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상주하여 원성하는 것은 아니다. 허공은 색상으로 인하여 현발하니, 어떤 질애에 대응하여 그 명칭을 얻은 것이다. 나는 실로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니, 오취온을 의거하여 가명을 시설하며, 이 때문에 모두 황당무계한 것이다.(此先釋圓成實三字之義也 徧故圓滿 常故成就 非虛謬故名實性 諸法自相 謂現量所得俗諦法體 離名種等所有分別 如色香味觸等 以其各各差別 故非徧圓 諸法共相 謂比量所得俗諦道理由名言等顯示不謬 如無常無我等 以其約義詮表 故非常成 虛空因色顯發 對有質礙而得其名 我非實有自性 依五取蘊施設假名 故皆虛謬)
해설: 허류虛謬는 허가虛假와 荒謬의 합성어인데 모두 낯익지 않은 용어인지라 황당무계라 번역했다. 명종名種은 명사는 아니니, 명의 종류라 말할 수 있다. 이를 명名 명신名身 다명신多名身이라 한다. ‘색’이나 ‘향’ 등 한 글자만 쓰면 명이라 호칭하고, ‘색향’ 또는 ‘미촉’ 등으로 두 글자를 함께 쓰면 명신이라 호칭하며, ‘색향미’ 또는 ‘색향미촉’ 등 세 글자 이상을 합하여 쓰면 다명신이라 호칭한다. 약의전표約義詮表를 약의로 전표한다고 번역했다. 약의는 ‘그 뜻을 준거하여’가 되고, 전표는 차전 표전의 표전과 같다. 이 전詮자는 설명하다 또는 사리를 밝히어 말한다는 뜻이 있다. 부정하며 반면反面을 표현表現하면 차전이 되고, 긍정하며 정면을 표현하면 표전이라 한다.
고인의 글을 읽는 법 중에 하나가 대구이다. 특히 명문이 그러하다. 처음 속제법체俗諦法體를 속제법의 체성이라 번역했지만, 다음 속제도리俗諦道理이 이르러 잘못을 깨달았다. ‘속제법의 체성’이나 ‘속제의 법체’의 뜻에 큰 차이는 없다. 그렇지만 후자의 번역이 옳다. 제법의 체성이나 실체 또는 본질을 법체라 한다.
“허공은 색상으로 인하여 현발한다.”(虛空因色顯發)라고 했을까? 이는 내가 다루고 싶은 주제이기도 하다. 이 구절의 출처는 아마도 능엄경이 아닌가 한다. “아란아, 공성은 형태가 없는데 색상을 인하여 현발하느니라.”(阿難 空性無形因色顯發)
계환스님은 “흙을 파면 허공을 얻으니, 색상으로 인하여 현발한다고 말한 것이다.”(鑿土得空 所謂因色顯發也)라고 주석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가령 우물을 팔 때 한 삽을 뜨면 그만큼 허공이 생기고, 열 삽을 뜨면 또 그만큼 허공이 생긴다. 제3구는 제3구로 해석하는 것이 옳고, 제1구는 제1구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제1구를 제3구로 해석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제3구를 제1구로 해석하는 것도 또한 옳지 않다.
그런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허공현발이다. “변제邊際가 없는 허공은 원각이 현발한 바이다.”(無邊虛空 覺所顯發) 원각경의 명구이다. “선남자야, 마땅히 알라. 허공은 잠깐이라도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잠깐이라도 없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다시 여래의 원각묘심은 허공의 평등한 본성이 되는데 말할 것이 있으랴.”(善男子 當知虛空非是暫有亦非暫無 況復如來圓覺隨順[隨順圓覺][圓覺妙心] 而爲虛空平等本性) 원문의 이 원각수순은 수순원각이 옳다고 하지만, 원각묘심처럼 그 뜻이 명백하지는 않다. 이에 함허스님의 주석을 의거하여 원각묘심이라 한다.
다음은 함허스님의 해설이다. “하물며 다시 여래의 원각묘심은 허공의 평등한 본성이 됨이랴. 중생이 본래 부처이고, 본래 무명이 없다. 이미 결정된 뜻이면 곧 중생과 부처도 본래 원각묘성이 있는데 유무를 갖고 의심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러한가? 허공은 원각이 현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릇 허공은 잠깐이라도 있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면, 하물며 허공의 본인은 원각묘성인데, 어찌 유무를 갖고 논란할 수 있으랴.”(況復如來圓覺妙心 而爲虛空平等本性 生本是佛 本無無明 旣決定義 則生佛本有圓覺妙性 不可以有無疑也 何則 虛空是覺所顯發者也 但是虛空非暫有無 況虛空本因圓覺妙性 豈可以有無論也)
감산스님의 원각경직해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이는 상주하는 묘원진심이 생사열반에 속하지 않음을 특시한 것이며, 부처가 되어도 번뇌를 일으키는가 하는 의심을 거듭 없애준 것이다. 의견은 이러하다. 허공도 오히려 환화의 기멸을 수순하지 않는데 하물며 묘각명심은 허공의 본성이 됨이랴. 또 어찌 생사열반의 기멸을 수순하겠느냐?”(此特示妙圓常住眞心 不屬生死涅槃 以重釋佛起煩惱之疑也 意謂 虗空尚不隨於幻華起滅 何況妙覺明心 而爲虗空本性 又豈隨於生死涅槃起滅耶)
각설하고, “허공은 색상으로 인하여 현발한다.”(虛空因色顯發) 밖에서 고개를 쳐들면 보이는 하늘 곧 허공은 색상色相이 없으면 현발하지 않을까?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까? 그러하다. 중생의 육안으로 보이는 허공은 색상으로 인하여 현발한 허공이지, 정각이 현발한 허공은 아니다. 진실허공은 보지 못한다. 보이는 것은 환화허공이다. 허공은 잠깐이라도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잠깐이라도 없는 것도 아니다. 원각이 현발하는 변제가 없는 허공은 중생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청정한 마니보주를 누가 볼 수 있는가? 우리 몸과 마음에 나타나는 청정한 원각을 또 누가 볼 수 있는가? 볼 수 있다고 하여 반드시 있는 것이 아니고, 볼 수 없다고 하여 또한 꼭 없는 것도 아니다.
누가 바람을 보았을까? 크리스티나 로제티
누가 그 바람을 보았을까?
나도 아니고 당신도 아니라네.
하지만 나뭇잎이 매달려 떨고 있을 때,
그 바람은 사이를 지나가고 있다네.
누가 그 바람을 보았을까?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라네.
하지만 나무가 머리가지로 절할 때,
그 바람은 옆을 지나가고 있다네. 삼산노주三山鷺洲 번역
Who has seen the wind? Christina Rossetti
Who has seen the wind?
Neither I nor you.
But when the leaves hang trembling,
The wind is passing through.
Who has seen the wind?
Neither you nor I.
But when the trees bow down their heads,
The wind is passing by.
해설: 바람이나 나뭇잎 그리고 잔가지는 일체법 중에 하나라 각기 법성이 있다. 법성과 불성이 또한 다르지 않으니 성불할 수도 있다. 어떤 때는 나뭇잎이 잔가지에 매달려 애처롭게 떨고 있을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나뭇가지가 머리를 깊이 숙이고 공경히 절할 수도 있다. “어떤 때는 술에 취하여 사람들을 꾸짖다가, 홀연히 향을 사루고 예배를 올리더라.”(有時醉酒罵人 忽爾燒香作禮) 그 경계가 이와 같다. “국화와 청죽은 미묘한 법을 선양하고, 바람에 나뭇가지와 물가에 달은 진심을 드러내도다.”(黃花翠竹宣明妙法 風柯月渚顯露眞心) 바람과 나뭇가지의 조합이 또한 이와 같다.
“누가 그 바람을 보았을까? 나도 아니고 당신도 아니라네.” 이 세간은 모두 대대로 이루어져 있다. 나와 당신은 설령 바람을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도 또한 바람을 보지 못할까? “한 불찰미진수의 심념을 세어서 알 수 있고, 대해 중에 물을 남음이 없이 마실 수 있으며, 허공의 양도 헤아리고 바람도 잡아맬 수 있지만, 부처님의 공덕은 다 설할 수 없느니라.” 귀신을 보면 바로 천도할 수 있다. 만일 바람을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바람을 잡아맬 수 있을까?
성유식론: 무루유위는 전도를 여읜 구경이니, 승용勝用이 두루 이르고, 또한 이 원성실이란 명칭을 얻는다. 이에 지금 게송 중에서 앞만 설하고, 뒤는 설하지 않은 것이다.(無漏有爲 離倒究竟 勝用周徧 亦得此(圓成實)名 然今頌中 說初非後)
지욱스님 해설: 이는 송의頌意를 요간料簡한 것이다. 무루유위는 곧 정분의타이니, 이른바 사지보리 등이다. 전도를 여의기 때문에 또한 진실이라 일컬을 만하고, 구경이기 때문에 또한 성취라 일컬을 만하며, 승용이 두루 이르기 때문에 또한 원만이라 일컬을 만하다. 이에 게송 중에서 원성실성이라 설한 것이다. 단지 이공이 현현한 것만 지시하고, 유위무루는 지시하지 않은 것이다.(此料簡頌意也 無漏有爲 即淨分依他 所謂四智菩提等 離倒故亦可名爲實 究竟故亦可名爲成 勝用周徧故亦可名爲圓 然頌中所說圓成實性 但指二空所顯 不指有爲無漏也)
유식제21송: 원성실성은 그 의타에서 항상 앞 변계소집성을 멀리 여읜다.(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성유식론: 이 원성실성은 곧 저 의타기 위에서 항상 앞 변계소집을 멀리 여의고, 이공이 현시하는 진여를 체성으로 삼는다. 게송 중에 ‘그에서’(於彼)라는 두 마디는 바로 원성실과 의타기가 부즉불리함을 현시한 것이다. 게송 중에 ‘항상 멀리 여읜다.’(常遠離)라는 세 마디는 바로 능취와 소취의 성리를 허망하게 소집하여 항상 있는 것이 아님을 현시한 것이다. 게송 중에 ‘앞’(前)이라는 한 마디는 그 뜻이 단지 공변계와 불공의타를 현시한 것이다. 게송 중에 ‘성’(性)이라는 한 마디는 바로 이공이 이와 같은 원성실이 아님을 현시한 것이다. 이공이 현시한 것은 바로 명칭이 원성실인 것이니, 진여는 유무를 모두 여의는 체성이기 때문이다.(此(圓成實性)即於彼依他起上 常遠離前徧計所執 (以)二空所顯(之)眞如爲性 (頌中所)說於彼(二)言 (乃是)顯圓成實與依他起不即不離 (頌中)常遠離(三)言 (乃是)顯妄所執能所取性理恒非有 (頌中)前(之一)言 義顯(但空徧計)不空依他 (頌中)性(之一言 乃)顯二空非(即是)圓成實 (二空所顯乃名爲圓成實 以)眞如離有離無性故)
지욱스님 해설: 이는 게송 중에 “그 의타에서 항상 앞 변계소집성을 멀리 여읜다.”(於彼常遠離前性)라는 일곱 글자의 뜻을 바로 해석한 것이다.(此正釋頌中於彼常遠離前性七字之義也)
유식제22송: 그러므로 이 원성과 의타는 다르거나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故此與依他 非異非不異)
성유식론: 이전의 의리를 말미암기 때문에 이 원성실과 저 의타기는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만일 다른 것이라 말한다면 응당 진여는 저 의타의 실성이 아니고, 만일 다르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면 이 원성실성은 응당 무상한 것이다. 또 저 의타기와 이 원성실이 모두 응당 ‘청정하거나 청정하지 않는’ 경계라면 곧 근본지와 후득지 이지二智의 작용도 또한 응당 차별이 없을 것이다.(由前理故 此圓成實與彼依他起 非異非不異 (若言)異(者則)應眞如非彼(依他之)實性 (若言)不異(則)此(圓成實)性應是無常 (又)彼此俱應淨非淨境 則(根)本後(得二)智(之)用(亦)應無別)
지욱스님 해설: 이는 제9구 “그러므로 이 원성과 의타는”(故此與依他)과 제10구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非異非不異)라는 양구를 먼저 해석한 것이다. 저 의타성은 염정에 상통하니 바로 후득지의 경계이고, 이 원성실은 오직 정분뿐이고 염분은 없으니 바로 근본지의 경계이다. 이 때문에 다르지 않다고 단정하여 말할 수 없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마명보살이 “무명이 훈습할 때 곧 진여도 훈습한다.”라고 이른 것은 바로 ‘다른 것과 다르지 않는 것’을 준거한 것이다. 예컨대 파도에 부딪힐 때 온통 물에 부딪히는 것이지만 꼭 동일한 것은 아니다. 호법보살이 “아뢰야식이 훈습을 받는 것은 진여와 관련이 없다.”라고 이른 것은 바로 ‘다르지 않는 것과 다른 것’을 준거한 것이다. 예컨대 파도가 움직일 때 습성은 움직임이 없지만 반드시 다른 것은 아니다. 만일 진여가 꼭 실제로 훈습을 받는다고 계집하면 응당 변하여 달라질 것이고, 만일 진여가 반드시 훈습을 받지 않는다고 계집하면 응당 진여는 일체에 두루하지 못할 것이다. 법성을 여읜 밖에 따로 제법이 있다면, 일분은 무상하고 일분은 상주한다는 외도와 무엇이 다른가? 이종二宗을 학습하는 학자는 어찌 심사숙고하지 않겠는가.(此先釋第九第十兩句也 彼依他性 通於染淨 乃是後得智境 此圓成實 唯淨非染 乃是根本智境 故不得定言不異 由此觀之 馬鳴謂無明熏時即眞如熏 乃約異而不異 如觸波時 全觸于水 非定一也 護法謂賴耶受熏 非關眞如 乃約不異而異 如波動時 濕性無動 非定異也 若執眞如定實受熏 則應變異 何名眞如 若執眞如定不受熏 則應眞如不徧一切 離法性外別有諸法 何異一分無常一分常之外道 習二宗者 曷深思之)
해설: 이종은 종파마다 다르다. 여기서는 법성종과 법상종을 말하는 것 같다.
유식제22송 후반: 마치 무상 등의 자성과 같으니 이것이 저것을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如無常等性 非不見此彼)
성유식론: 문: “어째서 원성실과 의타기 이성二性은 다르지도 않고 동일하지도 않는가?”
답: “예컨대 저 무상이나 무아 등의 법과 같으니, 무상 등의 성과 제행 등 생멸하는 법이 만일 다른 것이라 말한다면 곧 응당 저 제행 등의 법은 무상 등이 아니어야 하고, 만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면 곧 이 무상 등은 응당 저 제행 등 법의 공상共相이 아니어야 한다. 마치 이 비유로 현시한 바와 같으니, 이 원성실과 저 의타기는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대체로 의타기법과 원성실법은 성리가 반드시 상응한다. 그러나 승의와 세속으로 인하여 반드시 대대하고 있기 때문이다.”((問曰)云何二性非異非一 (答曰)如彼無常無我等性[法] 無常等性 與(諸)行等(生滅之)法 (若言)異(者 則)應彼(行等)法 非無常等 (若言)不異 (則)此(無常等)應非彼(行等法之)共相 由斯喻顯 此圓成實與彼依他非一非異 (葢依他起)法與(圓成實)法 性理必應 然(以)勝義世俗 (必)相待(而)有故)
지욱스님 해설: 이는 제11구 “마치 무상 등의 자성과 같다.”(如無常等性)를 해석하는 것이다. 무상이나 무아 등의 법은 이른바 제행무상이고, 또한 제법무아이다. 예컨대 색이 무상하면 수상행식도 무상하고, 안근이 무상하면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도 무상하며, 색진이 무상하면 성진 향진 미진 촉진 법진도 무상하고, 안식이 무상하면 내지 의식까지도 무상한 것과 같다. 이미 무상하면 곧 무아이고, 무아이기 때문에 공이며, 청정하지 못한 고뇌이다. 이 때문에 온처계蘊處界 등이 각기 법체가 있으니, 이름을 자상이라 한다. 무상 무아 고와 공이 청정하지 못하고 제법에 두루하니, 이름을 공상이 한다. 이 자상과 공상이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만일 반드시 다르다고 말하면 곧 온처계는 무상과 무아 등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반드시 동일하다고 말하면 바로 색과 무상이 이미 동일하면 곧 수상 등과 색도 다른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응당 무상은 아니다. 나머지도 전례를 따라 알 수 있으니, 이 때문에 반드시 동일하거나 반드시 다른 것은 아니다. 지금 의타법과 원성성도 또한 이와 같다. 원성실성은 승의제이고, 의타기성은 세속제이며, 이제二諦가 대대하고 있으니, 이 때문에 또한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파도와 물 그리고 노끈과 마 등의 비유는 모두 견주어 생각할 수 있다.(此釋第十一句也 無常無我等法 謂諸行無常 亦復無我 如色無常 受想行識無常 眼無常 耳鼻舌身意無常 色無常 聲香味觸法無常 眼識無常 乃至意識無常 既無常 則無我 無我故空 不淨苦惱 是故蘊處界等各有法體 名爲自相 無常無我苦空不淨 徧于諸法 名爲共相 此自共相 不一不異 若言定異 則蘊處界不應無常及無我等 若言定一 且如色與無常既一 則受想等與色異故 應非無常 餘可例知 故非定一定異也 今依他法與圓成性 亦復如是 圓成實性 是勝義諦 依他起性 是世俗諦 二諦相待而有 故亦不一不異 波水繩麻等喻 皆可准思)
해설: 고苦와 공空 무상 무아는 유루 과보의 사상四相이니, 곧 사제나 십육행상十六行相 중에 고제의 네 가지 행상이다.
유식제22송 제4구: “이것이 저것을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非不見此彼)
성유식론: 이 원성실을 증견하지 않고 저 의타기성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변계소집성의 공을 통달하지 못하고 여실히 의타가 있는 줄을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무분별지로 진여를 증득하여 마치고, 후득지 중에 비로소 의타기성이 환사 등과 같은 줄을 요달할 수 있다. 비록 무시이래로 심왕과 심소법은 이미 자상의 견분 등을 반연하여 아집과 법집이 항상 함께 행할 수 있지만, 이 때문에 중연이 인발한 것이 자기 심왕과 심소가 허망하게 변현한 것임을 여실히 알지 못한다. 또한 환사나 아지랑이 꿈속의 경계, 거울의 영상, 빛의 그림자, 골자기의 메아리, 수중월과 같이 변화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있지 않지만 있는 듯하다. 이와 같은 뜻을 의거하며, 이 때문에 어떤 경의 게송에 말하기를, “진여를 보지 않고 제행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환사 등과 같아서 비록 있지만 진실하지 않다.”라고 하였다.(非不證見此圓成實 而能見彼依他起性 未達徧計所執性空 不如實知依他有 故無分別智證眞如已 後得智中方能了達依他起性如幻事等 雖無始來心心所法 已能緣自相見分等 而我法執恒俱行 故不如實知衆緣所引自心心所虛妄變現 猶如幻事 陽燄 夢境 鏡像 光影 谷響 水月 變化所成 非有似有 依如是義 故有頌言 非不見眞如 而能了諸行 皆如幻事等 雖有而非眞)
지욱스님 해설: 문: “만일 반드시 진여를 증견해야 비로소 의타기성을 알 수 있다면 곧 초심의 수관에 바로 수응하여 문득 진여를 관해야 한다. 무슨 까닭으로 대승지관에서 ‘바로 처음에는 변계를 관하게 하고, 다음 의타를 관하게 하며, 마지막에 원성실을 관하게 한다.’라고 했느냐?”
답: “진여는 의타성 밖에 있지 않다. 초심으로 만일 진여를 관하면 반드시 일개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을 ‘광대함이 허공과 같은 것’이라 허망하게 계탁하고 진여로 삼으며, 곧 변계소집을 이룰 것이다. 이 병은 모조리 고쳐줄 수 없다. 제법의 당체가 무성인 줄을 체달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악취공惡取空에 떨어지고, 관하는 공리를 알지 못하니, 바로 제6식의 상분이다. 가령 일체시중一切時中에 공의 경계가 현전하지만, 또 계율을 파괴하지 않고 만행도 펼치지 않는다면, 또한 다만 무색천 중에 태어날 수 있다. 만일 이 공을 보기 때문에 파계하고 파견破見하면 곧바로 아비대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일체 대승법문은 모두 중생으로 하여금 바로 현전하는 모든 법에서 방편으로 실체가 없음을 관하게 한다. 이미 실체가 없음을 알면 문득 허깨비와 같은 줄 알고, 이미 허깨비와 같은 줄 알면 곧 실성을 깨달으며, 이미 실성을 깨달으면 비로소 체성을 좇아서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대저 방편으로 실체가 없음을 관하게 한다는 것은 변계를 관하는 것이고, 허깨비와 같은 줄 안다는 것은 의타를 관하는 것이며, 실성을 깨닫는다는 것은 근본지이고, 체성을 좇아서 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은 후득지이다. 비유하면 삼으로 노끈을 만드는 것과 같지만, 우인이나 소아는 바로 알지 못하고 허망하게 계탁하며 뱀이라 한다. 만일 바로 계탁한 뱀을 좇아서 여실히 관찰하지 않는다면, 어찌 뱀이 본래 있지 않은 줄을 알 수 있으랴. 이 때문에 반드시 뱀이란 계탁이 이미 그치고난 이후에 노끈이 곧 삼인 줄을 안다. 바로 삼인 줄을 아는 것은 근본지에 비유하고, 삼으로 갖기지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노끈을 만들 수 있음을 알고, 낱낱 여러 가지 노끈이 모두 실성이 없고 뜻을 따라 조작된 것인 줄을 아는 것은 후득지에 비유한 것이다. 이 때문에 대승지관과 성유식론의 관심묘결을 알아야 한다. 일찍이 두 갈레 길이 없다.” 첫째 송문을 별석하여 마쳤다.(問曰 若必證見眞如 方了依他起性 則初心修觀即應 便觀眞如 何故大乘止觀 乃令先觀徧計 次觀依他 後觀圓成實耶 答曰 眞如不在依他性外 初心若觀眞如 必將妄計一个無名無相曠若虛空者以爲眞如 便成徧計所執 此病最不可救 以不達諸法當體無性 墮惡取空 不知所觀空理 正是第六識之相分 假使一切時中空境現前 而又不破戒律 不撥萬行 亦秪可生無色天中 若因見此空故 破戒破見 直墮阿鼻大地獄矣 所以一切大乘法門 皆令衆生 即於現前諸法強觀無實 既知無實 便解如幻 既解如幻 便悟實性 既悟實性 方能從體起用 夫強觀無實者 觀徧計也 解如幻者 觀依他也 悟實性者 根本智也 從體起用者 後得智也 譬如以麻作繩 愚小無知 妄計爲蛇 若不即從所計之蛇如實觀察 何由得知蛇本非有 故須蛇計既息 然後知繩即麻 知即麻者 喻根本智 知麻可作種種大小諸繩 一一諸繩皆無實性 隨意所作 喻後得智 故知大乘止觀 成唯識論 觀心妙訣 曾無兩途 初別釋頌文竟)
해설: 파견破見은 이른바 사견邪見으로 정견正見을 파괴하는 것이다. 외도는 62종의 사견이 있다. 사견은 정견과 고하를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사견이 정견을 파괴할 수도 있다. 말법시대에 특히 그러하다. 중생의 허물일 뿐이고, 정견의 허물은 아니다. 별석別釋과 통석通釋은 별론別論 총론總論과 같다. 일부경을 해설하는데, 그 대강을 말하면 통석이고, 각 품이나 자구를 설명하면 별석이라 한다.
성유식론: “진여를 보지 않고 제행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환사 등과 같아서 비록 있지만 진실하지 않다.”(非不見眞如 而能了諸行 皆如幻事等 雖有而非眞)
이 게송 중에 뜻을 설한다. 세 가지 자성은 모두 심왕과 심소법을 멀리 여의지 않으니, 이른바 심왕 심소가 변현한 바에 이른 것은 중연이 생기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환사 등과 같으니, 있지 않지만 있는 것 같게 하여 우부를 광혹하니, 일체를 모두 의타기성이라 일컫는다. 우부는 이 의타에서 아법이 ‘있다 없다’ ‘동일하다 다르다’ ‘함께한다 함께하지 않는다’라는 등 종횡으로 계집하니, 마치 공화 등이 성상이 전혀 없는 것과 같으며, 일체를 모두 변계소집이라 일컫는다. 의타기 위에 저 변계가 아법이 모두 공하다고 망집하며, 이 공이 현현한 식은 진성과 동등하니, 원성실이라 일컫는다. 이 때문에 이 삼성은 심왕 등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此中意說 三種自性 皆不遠離心心所法 謂心心所及所變現 衆緣生故 如幻事等 非有似有 誑惑愚夫 一切皆名依他起性 愚夫於此橫執我法有無一異俱不俱等 如空華等 性相都無 一切皆名徧計所執 依他起上 彼所妄執我法俱空 此空所顯識等眞性 名圓成實 是故此三不離心等)
지욱스님 해설: 이는 소위 하나가 의타이면 일체가 의타이고, 하나가 변계이면 일체가 변계이며, 하나가 진실이면 일체가 진실이다. 첫째 송문을 바로 해석하여 마친다.(此正所謂一依他一切依他 一徧計一切徧計 一眞實一切眞實也 初正釋頌文竟)
4. 해심밀경의 삼무성
경: “승의생이여, 마땅히 알라. 나는 세 가지 무자성성의 밀의를 의지하여 일체 제법이 모두 자성이 없다고 말한다. 이른바 상무자성성과 생무자성성 승의무자성성이다. 선남자여, 무엇을 제법의 상무자성성이라 하는가? 이른바 제법의 변계소집상이다. 무엇 때문인가? 이는 가명으로 안립하여 소집상을 삼았고, 자상을 안립하여 소집상을 삼은 것이 아니니, 이 때문에 명칭을 상무자성성이라 설한 것이다. 무엇을 제법의 생무자성성이라 하는가? 이른바 제법의 의타기상이다. 무엇 때문인가? 이는 다른 인연의 힘을 의지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고, 저절로 있는 것이 아니니, 이 때문에 명칭을 생무자성성이라 설한 것이다. 무엇을 제법의 승의무자성성이라 하는가? 이른바 제법이 생무자성성을 말미암기 때문에 명칭을 무자성성이라 설한 것이니, 바로 인연으로 생기하는 법도 또한 승의무자성성이라 일컫는다. 무엇 때문인가? 제법 가운데서 만일 소연경계를 청정하게 한다면, 나는 그것을 드러내고 승의무자성성이라 할 것이다. 의타기상이 청정한 소연경계가 아니니, 이 때문에 또한 명칭을 승의무자성성이라 설한다. 다시 제법의 원성실상이 있으니, 또한 승의무자성성이라 일컫는다. 무엇 때문인가? 일체 제법의 법무아성法無我性을 승의라 명칭하고, 또한 무자성성이라 호명할 수 있다. 이는 일체법의 승의제이기 때문이고, 무자성성이 현현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을 인하여 명칭을 승의무자성성이라 한다.(勝義生當知 我依三種無自性性密意 說言一切諸法皆無自性 所謂相無自性性 生無自性性 勝義無自性性 善男子 云何諸法相無自性性 謂諸法遍計所執相 何以故 此由假名安立爲相 非由自相安立爲相 是故說名相無自性性 云何諸法生無自性性 謂諸法依他起相 何以故 此由依他緣力故有 非自然有 是故說名生無自性性 云何諸法勝義無自性性 謂諸法由生無自性性故 說名無自性性 卽緣生法 亦名勝義無自性性 何以故 於諸法中 若是淸淨所緣境界 我顯示彼以爲勝義無自性性 依他起相非是淸淨所緣境界 是故亦說名爲勝義無自性性 復有諸法圓成實相 亦名勝義無自性性 何以故 一切諸法法無我性名爲勝義 亦得名爲無自性性 是一切法勝義諦故 無自性性之所顯故 由此因緣 名爲勝義無自性性)
해설: 법무아성은 하나의 용어로 보는 것이 좋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말이 있고, 손에 쥐어주어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진실로 나의 독해력이 그러하다. 원측법사의 해심밀경소 주석은 이러하다. “이른바 법무아성은 거기에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승의라 일컫고, 둘은 무자성성이라 일컫는다. 이 제법 중에 승의제이기 때문이고, 제법의 무성이 이지를 드러내는 바이기 때문이다.”(謂法無我性 有其二義 一名勝義 二名無自性性 是諸法中 勝義諦故 諸法無性所顯理故)
미륵보살이 설했다는 유가사지론의 해석은 아래와 같다. “제법 중에 법무아성이란 이른바 일체 언설사 중에 일체 언설의 자성이니, 제법에 전혀 있는 것이 없다. 이와 같이 보살은 일체 제법에 모두 아성이 없는 줄을 여실하게 안다.”(於諸法中法無我性者 謂於一切言說事中 一切言說自性 諸法都無所有 如是菩薩如實了知一切諸法皆無有我)
경: “또 승의생이여, 유정세계 중에 모든 유정의 부류는 변계소집자성을 따로따로 관찰하고 자성을 삼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그 부류는 의타기자성과 원성실자성을 따로따로 관찰하고 자성을 삼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세 가지 무자성성을 건립한 것이다. 그 위에 유정이 의타기자성과 원성실자성에서 변계소집자성을 증익하기 때문에 나는 세 가지 무자성성을 건립한 것이다.”(復次勝義生 非由有情界中諸有情類 別觀遍計所執自性爲自性故 亦非由彼別觀依他起自性及圓成實自性爲自性故 我立三種無自性性 然由有情於依他起自性及圓成實自性上 增益遍計所執自性故 我立三種無自性性)
이 해심밀경의 삼종무자성성에 대한 원측법사의 해설은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에 있는 바, 아래와 같다.
원측법사의 해설: “이른바 모든 유정은 세 가지 자성을 그 차제와 같이 따로따로 관찰하여 삼성을 차견遮遣하려고 하기 때문에 삼무성을 건립한 것이 아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단지 상무자성성이 변계소집을 차견할 뿐만 아니라 나머지 둘도 또한 변계소집성을 차견하기 때문이다.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을 차견하지 못하므로 뒤에 두 가지 무자성성을 건립하니,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차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해석한다. “이 가운데 세 가지 뜻을 건립한 것은 유정이 계집한 후환을 제거하기 위하여 삼무성을 건립한 것이고, 저 유정이 삼성 가운데 낱낱이 세 가지 자성이 있다고 따로 계집하여 그 계집을 제거하려고 하기 때문에 삼무성을 건립한 것이 아니다. 다만 모든 유정이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두 자성 상에서 더욱더 계집을 일으키니 이로 인하여 세 가지 삼무성을 건립한 것이다.” 두 가지 설명 중에 후설이 더 수승하다.(釋曰 謂諸有情 非由別觀三種自性如其次第 遣三性故立三無性 所以者何 非唯相無自性性遣遍計所執 餘二亦遣所執性故 不遣依他及圓成實 立後二種無自性性 依他圓成不可遣故 又解 此中立三意者 爲除有情所執過患 立三無性 非彼有情於三性中 一一別執有三自性 爲除彼故立三無性 但諸有情不了依他及圓成實 於二性上起增益執 由此建立三種三無性 於二說中 後說爲勝)
해설: 위 글을 번역하며 운하云何를 어떻게 처리할까 매우 고심했다. 결론은 운하를 부사로 해석하지 않고, 가장 원초적인 방법 곧 동사와 명사로 분리하는 것이다. “무엇을 제법의 승의무자성성이라 이르는가?”(云何諸法勝義無自性性) 무엇이든 쉬운 일은 없다.
해심밀경의 삼종무자성성을 성유식론 등 여타 서적은 삼무성이라 호칭한다. 무자성성無自性性에서 가운데 자성 두 글자를 빼버렸다. 상무자성성과 생무자성성 승의무자성성도 또한 그와 같이 상무성과 생무성 승의무성이라 한다. 삼성도 그러하다. 변계소집자성 의타기자성 원성실자성을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이라 한다. 이상을 의거하면, 해심밀경의 용어는 조금 복잡하고, 성유식론 등은 깔끔하다. 해심밀경은 삼성을 변계소집상 의타기상 원성실상이라 하는데, 이 상相은 체성體性의 뜻이 있기 때문에 크게 다를 것은 없다.
경: “그 위에 유정이 의타기자성과 원성실자성에서 변계소집자성을 증익하기 때문에 나는 세 가지 무자성성을 건립한 것이다.”(然由有情於依他起自性及圓成實自性上 增益遍計所執自性故 我立三種無自性性)
원측법사 해설: 두 가지 성 위에 변계소집상은 자상을 안립함으로 인하여 상을 삼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무자성성을 건립한 것이고, 의타기성 위에 자연히 증익을 생기함이 없기 때문에 생무자성성을 건립한 것이며, 원성실성 위에 이 소집성이 없기 때문에 생무자성성을 건립한 것이다. 이른바 세 가지 자성을 따로따로 관찰하여 자성을 삼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때문에 세 가지 무자성성을 설하신 것이다.(釋曰 於二性上 遍計所執相 非由自相安立爲相故 立相無自性性 於依他起上 無自然生增益故 立生無自性性 於圓成實上 無此所執性故 立勝義無自性性 非謂別觀三種自性爲自性故 故說三種無自性性)
5. 유식삼십송의 삼무성
다음 세친보살의 유식삼십송을 살펴보겠다. “만일 삼성이 있다면 어째서 세존은 일체법이 모두 자성이 없다고 설하셨을까? 게송으로 답한다.”(若有三性 如何世尊說一切法皆無自性 頌曰)
바로 이 삼성을 의거하여 저 삼무성을 건립하며,
짐짓 부처님은 밀의를 일체법이 무성이라 설하셨다.
유식제23송 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
첫째는 곧 상무성이고 다음은 무자연성이며,
끝은 앞에 나와 법을 집착한 성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다.
유식제24송 初卽相無性 次無自然性 後由遠離前 所執我法性
이는 제법의 승의이고 또한 바로 진여이다.
상여가 그 본성이기 때문에 곧 유식의 실성이다.
유식제25송 此諸法勝義 亦卽是眞如 常如其性故 卽唯識實性
아래는 위 3송에 대한 해석이다. 호법보살과 원측스님 자은스님 지욱스님 등의 해설을 번역하고 나의 견해를 덧붙였다.
성유식론: 상론한다. 곧 이전에 설한 삼성을 의거하여 그 후에 설하는 세 가지 무성을 건립하니, 이른바 바로 하나는 상무성이고, 둘은 생무성이며, 셋은 승의무성이다. 짐짓 부처님은 밀의를 일체법이 모두 자성이 없다고 설하신 것이니, 자성이 전혀 없다고 이른 것은 아니다. 게송 중에 밀의를 설하여 말씀하시니 현언顯言은 구경의 요의가 아니다. 이른바 차후의 의타기와 원성실의 두 가지 자성은 비록 체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우부들은 저 증익에서 나와 법의 자성이 실재 있다고 망집한다. 이 의타기와 원성실을 의탁하여 나와 법의 두 가지 계집을 일으키는 바, 바로 이름이 변계소집이 되며, 이 계집을 제거하려고 하기 때문에 불세존이 의타기 원성실의 유성有性과 변계소집의 무성無性을 모두 무성이라 설하시니, 계집을 차견遮遣함에 지나지 않는다.
묻는다. “어떻게 이 삼성을 의거하여 저 삼무성을 건립하는가?”
답한다. “이른바 이 첫째 변계소집을 의거하여 상무성을 건립하니, 이 변계소집의 체상이 필경 있지 않는 것이 마치 공화空華와 같기 때문이다. 다음 의타기를 의거하여 생무성을 건립하니, 이 의타기는 단지 환사幻事와 같아서 중연衆緣을 의탁하여 생긴다. 그렇지만 자연성自然性을 망집하기 때문에 방편으로 무성이라 설하지만 의타기의 체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원성실을 의거하여 승의무성을 건립하니, 이른바 곧 승의는 앞에 변계로 나와 법을 계집한 자성을 멀리 여의어야 하기 때문에 방편으로 무성이라 설하지만 승의의 체성이 전혀 없다고 이른 것은 아니다. 예컨대 태허공에 비록 중색衆色이 두루하지만 이 중색이 자성이 없이 나타나는 바와 같다. 비록 의타기성은 단지 세속이라 승의는 아니기 때문에 또한 승의무성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셋째가 둘째를 탐내서 함께할까 하니, 이 때문에 여기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論曰 即依此前所說三性 立彼後說三種無性 謂即(是一)相(無性 二)生(無性 三)勝義無性 故佛密意說一切法皆無自性(者) 非(謂)性全無(也 頌中)說密意(之)言 顯非(究竟)了義 謂後(依圓)二性 雖體非無 而有愚夫於彼增益妄執實有我法自性 此(托依圓所起我法二執) 即名爲徧計所執 爲除此執故 佛世尊於(依圓之)有及(徧計之)無 總說無性 (不過爲遣執耳 問曰) 云何依此(三性) 而立彼三(無性 答曰) 謂依此初徧計所執 立相無性 由此(徧計所執)體相 畢竟非有 如空華故 依次依他 立生無性 此(依他起 但)如幻事 託衆緣生 無如妄執自然性故 (所以)假說無性 非(依他起體)性全無 依後圓成實 立勝義無性 謂即勝義 由遠離前徧計所執我法性故 假說無性 非(謂勝義體)性全無 如虛太空 雖遍衆色 而是衆色無性所顯 雖依他起(性 但是世俗)非勝義故 亦得說爲勝義無性 而(恐第三)濫(同)第二 故此不說)
해설: 호법보살의 해설 중에, “둘째를 탐내기 때문에 여기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而濫第二 故此不說)라는 구절은 매우 어렵다. 고인의 친절한 주석이 없다면 범부의 정견은 미칠 곳이 못된다. 이를 자은규기慈恩窺基 법사도 성유식론술기에서 아래와 같이 해설했다.
“비록 의타기성은 승의는 아니지만, 이 때문에 또한 승의무성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를 탐내기 때문에 여기서 설하지 않은 것이다.”(雖依他起非勝義 故亦得說爲勝義無性 而濫第二 故此不說)
자은스님 해설: 논술한다. 의타기를 해석하여 또한 승의무성이라 일컬으니, 이 글은 그 까닭을 말하지 않지만 그 말에 허물은 없다. 의타기는 비록 체법이 있어서 승의는 아니어도 승의무성이라 일컬을 수 있다. 소집이 없기 때문에 사례로 삼을 수는 없다. 또 해심밀경 76쪽에 이르기를, “이른바 제법의 생무자성성이기 때문에 명칭을 무자성이라 설한 것이니, 이 때문에 바로 연생법緣生法이다.”라고 하며, 현양론에 이르기를, “인연으로 생기하는 것을 차견하지 않고, 저절로 생기하는 것을 차견했기 때문이다.”라고 하니, 곧 연생법도 또한 승의무자성성이라 일컫는다. 제법 가운데서 만일 소연경계를 청정하게 한다면, 나는 그것을 드러내고 승의무자성성이라 할 것이다. 의타기상도 또한 청정한 소연경계이기 때문에 또한 승의무성이라 설한 것이다. 무루의 후득진지後得眞智를 승의라 명명하고, 또한 이 의타기를 인연하여 경계로 삼기 때문에 이 의타기도 또한 청정한 소연이라 일컬으니, 수승한 경계이기 때문이다. 소집이 이미 없지만 성인의 경계가 되는 것은 아니니 이 명칭을 얻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 변계소집이 없기 때문에 짐짓 승의무성이라 설한 것이다. 마침내 광설에 이르렀다. 만일 의타기를 승의무성이라 설하면, 이 원성실이 바로 둘째 승의무성이 되는 것이니, 지금 의타승의무성이 둘째 원성승의무성을 탐낸다고 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 게송 중에서는 단지 원성승의무성만 설하고, 의타기가 승의무성이라고는 설하지 않은 것이다. 응당 저 경에서 널리 비유로 설한 바와 같다.(述曰 釋依他起亦名勝義無性 此文不說之所由 無之言非 依他雖有體法 而非勝義名勝義無性 所執無故不可爲例 又七十六云謂諸法生無自性性故說名無自性 故即緣生法 顯揚云 不遮緣生 遮自然生故 即緣生法亦名勝義無自性性 於諸法中若是清淨所緣境 我顯彼爲勝義無性 依他起相亦是清淨所緣境界故 亦說爲勝義無性 無漏後得眞智名勝 亦緣此依他爲境故 此依他亦名清淨所緣 勝之義故 所執既無非爲聖境 不得此名 然無彼計所執故 故說勝義無性 乃至廣說 若說依他爲勝義無性 此圓成實即爲第二勝義無性 今恐依他勝義無性濫第二圓成勝義無性故 此頌中但說圓成勝義無性 不說依他爲勝義無性 應如彼經廣說譬喻)
지욱스님 해설: 예컨대 태허공은 승의를 비유하고, 중색은 의타기를 비유한 것이다. 중색이 있는 곳에 일찍이 허공이 없는 적이 없으니, 진여가 일체법에 두루하여 있지 않는 곳이 없음에 비유할 만하고, 중색이 없는 곳에 태허공이 바로 나타나니, 진여가 변계하여 계집한 나와 법의 두 가지 자성을 멀리 여의었음에 비유할 만하다. 그러나 승의무성이라는 명칭은 또한 둘째 의타기성이라 일컬을 수도 있지만, 의타기는 단지 세간의 속기가 있어서 수승한 경계는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만일 이 뜻을 취하여 설했다면 아마도 셋째가 오히려 둘째를 탐냈을 것이다. 이러한 연고로 둘째는 단지 명칭을 생무생이라 하고, 셋째는 바로 승의무성이라 일컬으며 이 원성실성을 드러낸 것이다. 단지 변계로 계집한 나와 법의 두 가지 자성을 멀리 여의기만 하면 방편으로 승의무성이라 설할 수 있다. 기실 진여는 의타기가 있는 곳에 두루하니 의타기성의 자성이 바로 진여이다. 비유하면 중색의 체성이 없는 그 자성이 바로 태허공인 것과 같으니, 중색이 태허공을 없애는 것이 아니고, 태허공이 중색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때문에 반야심경에 이르기를,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라고 한 것이니, 바로 원성실과 의타기는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중생이 일향으로 다르다고 계집하니, 이 때문에 단지 다르지 않다고 말하여 정계情計를 차단할 따름이고, 또한 결정코 다르지 않다고 다시 계집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허공을 빌려서 승의를 비유하고 중색을 차용하여 의타기를 비유한 것이다. 짐짓 이러한 방편설을 지었지만, 만일 법을 준거하여 직설하는 것이라면, 곧 중색을 마주 대하자마자 허공이 드러나고, 허공을 마주 대하자마자 중색이 드러나는 것이니, 중색과 허공이 모두 의타기의 관할에 붙여진다. 중색과 허공에 체성이 없으니, 허망하면 모두가 허망하고, 진실하면 모두가 진실하다. 이는 곧 색이 아니고 공도 아니지만 바로 공이고 바로 색이라 원성실이라 일컫고, 또한 승의무성이라 일컫는다. 이 때문에 이르기를,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고, 공이 바로 색이다.”라고 한 것이고, 또 이르기를, “성색이 진공이고 성공이 진색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학자는 모름지기 대승지관으로 삼성과 삼무성의 뜻을 참구하면, 반드시 황연히 대오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如太虛空 喻勝義也 衆色 喻依他也 有衆色處 未嘗無空 可喻眞如徧一切法 無所不在 衆色無處 太虛乃顯 可喻眞如 遠離徧計所執我法 然勝義無性之名 亦可以名第二依他起性 以依他起 但世俗有 非勝義故然 若說此義 則恐第三反濫第二 是故第二但名爲生無性 第三乃名勝義無性 顯此圓成實性 但是遠離徧計所執我法二性 假說勝義無性 其實眞如徧在依他起處 而依他無性 性即眞如 譬如衆色無性 性即太空 非色滅空 空非色外 故般若心經云 色不異空 空不異色 乃圓成與依他非異非不異之義 只爲衆生一向執異 故但言不異以遮情計 亦非更執定不異也 此借虛空以喻勝義 借衆色以喻依他 故作此說 若約法直說者 則對色顯空 對空顯色 色空皆屬依他起攝 色空無性 妄則俱妄 眞則俱眞 是則非色非空 而空而色 名圓成實 亦名勝義無性 故云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即是空 空即是色 又云 性色眞空 性空眞色等也 學者須以大乘止觀三性三無性義參之 必有恍然得悟者矣)
해설: 무성無性은 무자성無自性과 같다. 자성이 없다. 인명론에 의하면, 일체 제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생긴 것이라 인연이 흩어지면 바로 소멸하여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성이라 호칭한다. 무체성 곧 체성이 없다. 또 무성유정 무성천제를 무성이라 일컫기도 한다.
“짐짓 부처님은 밀의를 일체법이 무성이라 설하셨다.”(卽依此三性 立彼三無性 故佛密意說 一切法無性) 유식제23송 중에 3구와 4구를 위와 같이 해석했다. “짐짓 부처님은 밀의로 일체법이 무성이라 설하셨다.” 또는 “짐짓 부처님은 밀의를 설하시니 일체법이 무성이니라.”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고故에는 짐짓 또는 일부러 등 부사의 용법도 있다. “속마음이나 본뜻은 그렇지 않으나 일부러 그렇게” 한다는 뜻이다. 좀 사정이 복잡하다.
호법보살의 해석을 보자. “짐짓 부처님은 밀의를 일체법이 모두 자성이 없다고 설하신 것이니, 자성이 전혀 없다고 이른 것은 아니다.”(故佛密意說一切法皆無自性者 非謂性全無也) 이 글은 자위야者謂也 삼자를 지욱선사가 보완한 것이다. 뜻은 동일하다. 내가 짐짓이라 해석한 이유는 후구 비성전무(非性全無) 때문이다.
몽산화상의 무자십절목에, “다못 이 무자가 전혀 끝코가 없으되 조금 끝코가 있나니라.”(只這開無字 全無巴鼻 有些巴鼻)라는 구절이 있다. 이 전무파비 유사파비는 법무자성法無自性 비성전무非性全無와 상통점이 있다. 파비는 파비把鼻로 쓰기도 하고, 파우비把牛鼻로 보기도 하니, 쇠코뚜레를 말한다. 십우도에 견우見牛를 견도 또는 견성으로 본다. 소를 길들이려면 반드시 소의 코청을 꿰뚫고 거기에 코뚜레를 끼어야 한다. 이 무자에는 전혀 쇠코뚜레가 없다. 그러나 조금은 있다. 알쏭달쏭하다. 법에는 자성이 없다. 그러나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난감하다. 손으로 잡을 만한 곳이 전혀 없는 것을 몰파비沒巴鼻라 한다.
“이 의타기와 원성실을 의탁하여 나와 법의 두 가지 계집計執을 일으키는 바, 바로 이름이 변계소집이 되며, 이 계집을 제거하려고 하기 때문에 불세존이 의타기 원성실의 유성과 변계소집의 무성을 모두 무성이라 설하시니, 계집을 차견함에 지나지 않는다.”(此托依圓所起我法二執 即名爲徧計所執 爲除此執故 佛世尊於依圓之有及徧計之無 總說無性 不過爲遣執耳)
병이 없으면 약이 필요 없고, 병이 있어야 약이 필요하다. 비상은 건강한 사람한테 독약이 되지만, 어떤 병에는 신약이 되기도 한다. 중생의 사견을 제거하고자 하는 부처님의 처방전이다.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자성이 있고 변계소집성은 자성이 없는데, 셋이 모두 무성이라 설한 것은 바로 부처님의 밀의이다. 범부의 계집을 차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차견遮遣은 제거해버리다, 부정하다, 논파論破하다는 등의 뜻이 있다.
“어떤 우부들은 저 증익에서 나와 법의 자성이 실재 있다고 망집한다.”(而有愚夫於彼增益妄執實有我法自性) 발단이 여기서 시작한다. 증익增益은 무엇인가? 증익방과 손감방의 증익을 말한다. 지욱스님은 성유식론관심법요에서, “경계를 집착하여 있다고 하는 것이 증익방이다.”(執境爲有 是增益謗) “증익이란 의식이 변하여 나타난 영상이다.”(增益者 意識變現之影像也)라고 증익을 정의했다.
이 증익의 출처는 어디인가? “그 위에 유정이 의타기자성과 원성실자성에서 변계소집자성을 증익하기 때문에 나는 세 가지 무자성성을 건립한 것이다.”(然由有情於依他起自性及圓成實自性上 增益遍計所執自性故 我立三種無自性性) 이 변계소집자성과 연관된 증익이다. 이를 의거하면, 이 증익은 변계소집을 증익한 것으로서의 증익이니, 증익이 곧 변계소집이다.
6. 결어
나는 지금 74세에 이를 때까지 어떤 방면의 공부에도 정통하지는 못했다. 유식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 글을 구안학자가 보면 허물투성이일 것이다. 엄정한 질정을 바란다.
수행자는 중생과 부처 사이에 있다. 변계소집성과 원성실성 중간에 의타기성이 있다. 보리살타는 정각유정이고, 의타기성은 변계소집과 원성실 양성을 겸유하고 있다. 의타기성과 생무성이 삼성과 삼무성의 기축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무성과 요연 그리고 진지”라는 제명의 글에서 “이 글은 원래 해심밀경의 삼성과 삼무성을 기저에 깔고, 그 위에 이 제명의 글을 쓰려고 했다.”라고 언급했다. 달리 말하면 이 글도 또한 유식의 삼성과 삼무성을 선양하기 위하여 쓴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방편이 자재하여 한 중생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 법문도 일체중생의 염원만큼 많다. 지금은 민주주의와 개방경제라는 양대 기축체제가 보편화된 세상이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불교교리는 이 흐름을 타지는 못한 것 같다. 현전일념 또는 무량겁을 보관하는 일념 그리고 평등을 관통하는 일념 등의 일념은 지고지상하여 이와 더불어 짝할 것이 없다. 그래서 이를 수용할 이도 또한 없다. 수정한다. 드물다. 희유하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이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 세계인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부족하지 않게 사는 것이다. 풍족하게 살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다. 나는 “부처님의 부자 수업”이란 책을 읽어보지 못했다. 서명도 오늘 처음 알았다. 부자는 복덕의 산물이다. 부자가 되는 길은 지혜에 있다. 지혜 중에는 근본지가 있고, 일체종일체지지도 있다. 이 차별지에 무엇인들 없으랴. 나의 새 과제이다.
2022년 3월 16일 74세 길상묘덕 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