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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의”
-‘행복의 정의는 사람마다 행복의 의미가 다르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우리 일상에서 얼마나 많이 사용되는지
너무 많이 다양하게 사용되는 용어이지만 사건이나 감정을 묘사할 때도 이 단어를 흔히 쓰는 것이 일종의 사회적 문화처럼 널리 사용된다.
특별한 날을 축하할 때도 그렇다. 생일을 축하할 때(Happy Birthday!)도, 신년 인사를 할 때(Happy New Year!)도, 행복해라(Happy!)는 인사말로 자주 쓴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가볍게 쓰는 표현이나 짧은 문장에도 행복은 빠지지 않고 일상적인 단어로 사용된다.
‘해피엔딩(Happy ending)', '해피아워(Happy hour)', '해피 파트너(Happy parter)'라고 하던지 ‘무한한 행복’, ‘영원한 행복’, ‘지상의 행복’, ‘신혼의 행복’, ‘결혼의 행복’ 등의 표현도 자연스레 자주 대한다.
전반적으로 우리 언어에서 이 단어가 가진 의미와 중요성은 잊혀지고 있다. 미국이나 우리나라의 대중가요에서만 보아도 하나같이 행복 타령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Don't Worry, Be Happy(걱정 버리고 행복하세요>부터 시작해서 <Oh, Happy Days(행복한 날들이여)>, 터틀스(Turtles)의 <Happy Together(함께라면 행복해요)>까지 행복이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비틀스의 초기 히트곡 중에서 <I'm Happy Just to Dance with you(그녀는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네)>, <this boy would be happy(소년은 행복하다네)>라는 문구가 자주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 한대수 작곡, 작사와 양희은 가수가 불러서 유명한 <행복의 나라로>, 송민도 가수의 히트곡 <행복한 일요일>, 박재란과 이양일 가수의 <행복의 샘터>, 한세일 가수의 <슬픔과 행복>과 <우리들이 행복한 세상>, 박보람 가수의 <행복한 나를>, 김재필 가수의 <행복한 나>, 양승만 가수의 <나는 행복한 사람>, 영재 가수의 <행복한 남자>, 김유경 가수의 <나는 행복한 여자랍니다>, 견미리 가수의 <행복한 여자> 등의 미국의 가수들이나 한국의 대중가요 속에는 유독 ‘행복(Happy)’이란 주제를 따라 간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이 ‘용어의 혼란’에 빠지기 쉽다.
또한 행복이라는 단어를 상품이나 서비스 판매에 사용하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행복백화점, 행복마켓, 행복드림00, 행복한병원, 행복한치과, 행복한소아과, 행복양잠점, 행복미용실, 행복드레스, 행복한경상북도, 행복상회, 행복아파트, 행복주택, 행복한농장, 행복예식장, 행복사진관, 행복시티, 영화 ‘행복’, 행복어린이집, 행복한참약국, 행복한이마트, 행복가득요양원, 행복한안경점, 행복공인중개사, 행복 데이케어센타, 행복정육점, 행복포차,
행복수산, 행복한 빌라, 행복 SK충전소, 행복 작은도서관, 행복 생협, 행복한 빵, 행복한 피아노, 행복 전자, 행복 결혼상담소 등 수없이 많은 일상생활에 유독이 ‘행복’, ‘행복한’ 상호로 간판을 걸고 소비 고객들에게 마치 ‘행복’을 원 없이 제공하는 듯이 수많은 행복의 이름으로, 상점의 간판이나 마케팅 캠페인들이 ‘행복’을 21세에 사는 우리들에게 ‘행복’은 이미 광고와 마케팅의 특효약처럼 둔갑해 부지불식 중에 소비자들을 ‘행복’에 포로가 되어가고 있고, 각양각색의 팜프렛과 잡지에는 미남 미녀의 표지모델들도 하나같이 행복을 운운하고 마치 행복한 천사들처럼 표정을 짖고서 최신 유행 패션을 화려하게 입고 전면에 앞세워 소비자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이 넘쳐나는 광고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행복한 사람으로 연출해 낸다.
이 같은 광고주와 광고 편집자들은 ‘행복 기만’이라는 도구를 활용해 자신들의 상품을 파는 아주 간단한 마케팅기법의 공식을 찾아낸 것이다.
첫째로는 바로 성적(sexy)한 소재가 그 무엇보다도 매출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는 소비자의 심리를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전이 아니었다. 이젠 행복이 그 두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 본대로 광고와 마케팅에 기만당한 행복의 양과 질이 우리의 태도나 감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는가?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모두 무너져 내린 행복을 주어 담기위해 광고에 현옥된 구매를 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정당한 소유주에게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행복의 정당한 소유주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소설가, 영국 철학박사)은 '행복은 상점 진열대에 놓인 상품처럼 당신이 선택하고 구매해 집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행복은 당신이 직접 경험할 때에야 비로소 당신의 것이 된다.
굳이 외부에서 이를 찾으려고 한다면 결코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낭만주의 철학자 (M.H. 에이브럼스(Abrams)의 유명한 표현을 인용해보자. 왜 ‘거울과 등불’의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하려 하지 않는가? 거울 앞에서 서서 자신을 바라보면 누구의 행복이 보이는가요? 당신의 행복인가, 아니면 다른 이의 행복인가?
내 것이 아닌 답은 받아들일 필요도 없고 적용시킬 필요도 없다. 행복의 거울이 되기보다는 스스로 행복의 등불로 되어 세상을 비추어 보자!
지금까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행복이란 단어가 얼마나 경박하고 부적절한 피상적으로 사용되는 지를 살펴보았다.
긍정심리학의 선구자요 명실상부 1998년 미국심리학회 회장 마틴 셀리그만(Martin E.P. Seligman)은 그 통찰력이 빛나는 저서 [긍정심리학 Authentic Happiness]에서 심리학의 영역이 종전 질병이론을 넘어서 건강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연구를 장려하는 것이 그 희망이라고 강조하고,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강점을 찾아내고 발전시켜 이를 일상에서 일하고, 사랑하고, 놀고, 자녀를 양육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긍정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누구나 자기 인생의 주된 영역에 있는 대표적인 강점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면 좀 더 의미 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금전적인 행복과 지속적인 행복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진정한 행복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높일 때 파생된다.’
마틴 셀리그만은
-행복은 단순히 행운이나 좋은 유전자 또는 자질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노력으로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
-가족을 포함한 사회적 관계성은 행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운동, 요가, 명상과 같은 활동으로 행복을 증가시킬 수 있다.
긍정심리학을 대표하는 또 다른 사상은 ‘몰입(flow)’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entmihalyi)’는
몰입이란 만족과 행복을 진정으로 느끼는 의식적인 상태라고 규명했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주 몰입의 경지에 접어드는 사람이라 한다. 즉 ‘몰입’이란 시간의 흐름을 잊고 자기 기술을 최대한 발휘해 의미있고 건설적인 활동에 몰두하는 것을 말했다. 보통 직장에서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몰입 상태를 빠질 가능성이 크지만, 정원 가꾸기나 자전거 타기, 그림 그리기 같은 취미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도 대표적인 몰입 활동이다.
몰입은 매우 건설적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몰입 상태를 유발하는 일에서 활력과 행복을 느낀다. 우리를 이런 상태에 빠뜨리는 목표는 달성하기 쉽고 그 과정에서 얻는 보람도 크다.
당신은 언제 몰입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가장 큰가?
몰입 현상을 자주 느끼는 활동이 상황, 사람을 아래에 적은 뒤
그것이 의미하는 목표나 가치관도 함께 사례를 적어 보며 실천해 본다.
우리는 어린 시절 때부터 들어왔던 ‘맹장과 코끼리’ 우화를
떠올려보자. 앞을 전혀 못 보는 맹인 세 사람에게 코끼리를 만져 본 뒤에 각자에게 어떻게 생겼는지를 말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코끼리 다리를 문질러본 맹인과 옆구리를 만져본 맹인, 그리고 꼬리를 잡아본 맹인이 보인 반응은 서로 너무나 다른 느낌으로 말했다. 각자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자기 나름의 답을 내린 것이다. 그 답이란 제각각 느낌으로 크게 다른 것이라고 한 것이다.
‘행복’을 정의하는 사람은 자기가 처한 시대나 나라, 그리고 연령, 성격, 문화, 역사, 종교적 경험에 따라, 다양한 다른 방식으로 행복을 이해하였고, 이에 대한 해석 그리고 접근법이 제각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관점에 보아서 그래도 일찍이 고대 철학자 아리스텔레스의 견해가 여러 학자들은 적합한 것으로 평가했다. 그의 “행복은 우리 자신에 노력에 달렸다.”거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1817-1862,미 작가, 철학자)가 지적한 “인간은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내는 기능공에 불가하다”라는 신념에 공감한다.
이 행복의 실제적인 정의를 찾아서 이 단어의 의미를 밝혀봅시다.
1755년에 출간된 새뮤얼 존슨의 최초의 영어사전에서는 '행복(Happy)'을 두 가지 의미로 정의하고 있다.
첫 번째는 ‘지복(지복)’,즉 욕구가 충족되어 만족스런 상태이며,
온전한 행복을 뜻한다.
두 번째는 ‘행운( )’이다. 행복과의 특수한 사전적 의미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영어의 ‘요행(good hap)'이라는 말은 본래 행운을 의미했다. 이와같이 초기 중세 영어에서 사용하던 ‘Happ(햅)’이라는 단어도 기회 또는 행운을 가르키는 말이다.
1928년에 초판으로 만든 ‘옥스퍼드 영어사전 제6권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그 의미만으로 두 페이지가 넘어간다. 그 주에서도 주된 정의를 뽑아 보면 다음과 같다.
1).인생에서 누리는 행운 또는 성공, 번영
2).선하다고 여겨지는 것의 달성,
- 성공으로 생겨난 즐거운 마음 상태.
3).지복, 적당함, 적합함으로 보았다.
세 번째로 1998년 출간 한국의 학원세계백과사전에서는
‘행복(행복,Happiness)는 몸과 마음이 희망으로 넘치고
기쁨에 젖어 있는 정신상태’라고 간단 명료하게 말했다.
새뮤얼 존슨의 사전에서와 같이 옥스퍼드사전에서도
‘행운’과 ‘지복’이라는 정의가 등장하나, ‘선하다고 여겨지는 것의 달성’과 ‘성공으로 생겨난 즐거운 마음 상태’라는 정의가 추가되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새로 추가된 이 두 가지 정의가 행복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다.
행복의 근본적이며 엄격한 정의를 알았으니, 이제 역사적 유명인사들의 행복에 관해 주요 학파를 대표하는 인물들로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 월리암 워스워즈, 프로이트, 버트런드 러셀을 비롯해 수많은 학자가 포함된다.
서구 문명사회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유명한 ‘아리스토델레스(BC384-322)’가 맨 처음 이 행복을 정의하고 규명했다.
그는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딴 ‘니코마스 윤리학(Ethica Nicomachea)’에서 인생의 목적은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또는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해 ’좋은 삶‘이라는 이상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여기에 ‘에우다이모니아’는 일반적으로 행복이라고 번역한다.
어원학적으로 그리스어 ‘선 또는 안녕’을 뜻하는 ‘에우(eu)'와 영혼을 뜻하는 ’다이몬(daimon)'이 합쳐진 단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가장 중심이 되는 목적이자 최종 목표로 행복을 꼽았다. 또한 행복이야말로 인간이 자신을 위해 갈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특히 '에우마이모니아'는 온전한 덕과 관조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능력과 덕을 기르고 단련해 그에 따라 살아간다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에무다이모니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다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가장
고결하며, 가장 즐거운 것‘ 중 중요한 부분을 소개한 것이다.
나는 이를 네 가지로 하나, 행복의 주요 조건은 이성적인 삶이다. 이성은 그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답게 하므로 이성에 따르는 삶이 가장 좋고 즐거운 삶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삶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삶이다. 둘은 건강, 명성, 친구, 육욕이 그러하듯 세속적인 재물도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이런 외적인 요소도 유용하다. 이를 두고 ‘행복의 도구’라 일컬었다. 그리고 우리는 행복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기에 행운 또한 필요하다.
셋은 행복은 ‘온전한 삶’을 포함한다. 하루 또는 짧은 시간은 사람을 복되고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잠깐의 행복과 행복한 일생을 혼돈하지 말라는 애기다.
넷은 행복은 단순히 성향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행복한 삶은 도덕적 삶으로 여겨진다. 도덕적 삶은 노력이 요구되며 이는 쾌락에 있지 않다. 이와는 반대로 행복은 완전히 덕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다. 따라서 선한 인간이 되고자 함은 곧 행복한 인간이 되려는 것이다. 행복이야말로 최고의 선이라고 가르쳤다. 여기에 플라톤(Platon,BC427-347)은 이를
'행복한 여적 안녕'이라고 규명했다.(니코마스 윤리학)
영향력 있는 기독교사상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AD354-430)도 아리토텔레스와 같이 행복의 갈망을 인간 존재의 필수 요건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자서전에서 젊은 시절 자신이 세속적 쾌락 속에서 비참 해졌다고 고백하고 ‘나는 불행했다. 없어질 것을 사랑하는 영혼은 모두 불행하다’ 그는 이 땅에서 행복하고자 하며 스스로 노력해 천국의 복을 얻으려는 자들은 ‘놀랄 만한 어리석음’으로 고통받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선하고 순종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이 땅에서 생명이 다하는 순간 ‘영원한 행복’을 맛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바랄 수 있는 최고의 배당금이라는 것이다.
새뮤얼 존슨도 몇 세기 전에 그의 저서 ‘설교집(Semons)’에서
‘불멸의 행복’을 확보하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표이다.
-(‘행복은 나에게’ASK Me If I'm Happy-Nicholas Gaitan(오타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