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도보 여행을 계획하게 된 대는 사연이 있다
몇 해 전 일간신문에서 공무원으로 퇴직하고 영주에서 서울을 도보로 걸으면서 지난 세월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일을 계획 했다는 기사를 읽고 무릎을 치며 좋은 생각이다, 나도 퇴직하면 한번 시도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으며, 최근 프랑스 정치부기자 출신으로 정년퇴임을 하고 61세에 터어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 까지 12000Km의 실크로드를 2000년부터 4년에 걸쳐 세계 최초로 혼자 걸어간 것을 책으로 쓴 "나는 걷는다"를 읽고서다.
마침 금년 2월 14일 명예퇴직 통고를 받았다.
국민은행에 입행한지 34년 1개월 만이다.
IMF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떠났으나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 인양 생각했으나, 그래 그 동안 잘 버티어 왔지 않느냐, 앞으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보자, 후배들의 길도 터주고 명예로운 용퇴기회를 줄 때 퇴직하고자 결심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돌이켜 보면 한 직장에서 강산이 3번 바뀔 때까지 열심히, 바쁘게 살아 왔다.
이번 도보여행을 통해서
첫째,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워 보고자 한다.
그 동안 직장의 보호막 안에서 살아왔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직장에서 일만 충실히 하면 모든 것을 직장이 해결해 주었다. 경제적인 문제는 물론, 개인적인 문제가 발생해도 사내 네트웍을 통해 해결했다. 또한 개인적인 성취욕도 이뤘다.
직장동료가 있어, 수많은 고객이 있어 외롭지도 않았다.
앞으로는 혼자 지내고 스스로 해결하는 익숙지 않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준비하고 훈련해 보고자 한다.
둘째, 느리게 사는 법을 배워 보고자 한다.
지난 삶을 돌이켜 보면 너무 바쁘게 살아 왔던 것 같다.
출근할 때도 남보다 늦으면 죽는 줄 알았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지각은 결근만 못하다는 등 선배들로부터 세뇌를 받아 왔고 또 그렇게 되려고 노력 했다.
목표가 주어지면 남들보다 먼저 달성 하고자 항상 조바심하고 직원들에게 관용을 보이지 도 못했다. 봄이 왔는지 갔는지, 시간이 흐르는 의식조차 못하고 어쩌다 자식들이 상급 학교 진학 할 때면 아 세월이 흘렀구나 하고 잠시 생각 했을 뿐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학교나 직장 생활을 하다 어느 듯 54년이 흘러갔다.
이제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머리엔 서리가 내리고 봄과 같은 20대도 한여름의 무성한 30, 40대도 지나가버렸다.
그러나 아름다운 노년을 위해 새로운 출발을 함에 있어 여태까지 제단하든 잣대를 버리고 새로운 잣대를 만들어 보고자 함이다.
출발
1일째 2005. 3. 1.(화요일)
오늘 출발 할 처지는 아니었으나 오늘이 3.1절로서 독립만세를 기리기 위한 날로, 이왕이면 나도 내 인생의 독립을 의미하는 뜻에서 오늘 시작이라도 해보고자 출발했다.
출발할 처지가 못 되는 이유는 이러했다.
-금년 구정 차례를 지낼 때 아버님의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특별한 병이 있어, 아프신 것은 아니지만 )
2월 25일 둘째딸 졸업식을 마치고, 그날로 아버님 건강이 염려 되어 부인과 시골 집으로 내려갔다. 부축을 받아 야 화장실을 갈수 있으시고, 밤으로는 숨 쉬시기가 힘들어 누워계시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부인과 내가 번갈아 돌보아야 했다.
오전 10시까지 망설였으나 아버님 상태가 좋아졌고 부인이 낮 동안은 돌볼 수 있어 11시에 출발했다.
준비 없이 맨몸으로 선산 시골집을 나섰다.
오늘의 목표는 상주까지로 잡았다. 막 나서니 912번 국도가 2차선인데 너무 좁아 사람이 지나 다닐 공간이 없다. 처음엔 진행방향 오른쪽으로 걸어갔으나 버스가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아 위험하여 진행방향 왼편으로 차가 오는 것을 보면서 걸었다.
3Km쯤 가니 사육신 중의 한 분인 하위지 선생 묘가 있다는 표시판이 나왔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선생의 묘가 있는 줄 몰랐다.
들리고 싶었으나 오늘 계획한 목표까지 갈수 없었을 것 같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참 이상하다 도보여행의 목표 중 하나가 느리게 살아보려는 것일 진데 행동은 그렇지 못했다.
봉곡 삼거리가 나와 상주 쪽으로 길을 잡았다.
산에는 나뭇잎이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다. 길옆 과수원에는 올해 농사를 위해 거름을 뿌려놓아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한참을 올라가니 덕촌 초등학교가 오전 햇살에 고즈넉이 졸고 있다.
지난겨울 친구 딸 결혼식장에서 중학교 졸업 후 처음으로 이 학교 출신 친구를 만났는데 너무 늙어 보였다. 사연을 알아보니 평소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중독이 되었단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천재소리를 들을 정도로 공부를 잘해 장래가 기대되는 친구이어서 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 학교를 지나니 그 생각이 난다.
조금 올라가니 옥성 저수지(내가 어릴 적엔 대원 저수지라고 했다.)가 나타났다.
이 저수지 둘레는 약 4Km로 근동에서는 제일 큰 저수지다.
야생 청둥오리들이 물위에서 한가롭게 놀고 있다.
어릴 적 미군부대 군인 등이 낚시대회 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또한 내가 애지중지해 모은 낚시 도구를 동생이 이곳에서 낚시하다 술에 취해
몽땅 잃어 버려 몹시 화가 났던 기억이 난다.
12:30분, 배가 고파서 식당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길 옆 쓰러져 가는 구멍가게가 보여 들어갔더니. 탁자 하나에 의자가 4개 있고 연통이 밖으로 연결되어 있는 연탄난로가 있으며, 난로 위에는 주전자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가게 안에는 잡다한 과자류가 있었다.
탁자와 붙어있는 벽에는 "칼국수, 묵 " 이라는 메뉴가 보여 우선 주인아주머니께 칼국수를 시켰다. 주인아주머니가 준비하는 사이 가게 안을 둘러보니 메뉴 판 옆에는 주류 회사 달력이 걸려 있었는데 선정적인 여자 사진이었다.
가게 안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젊은 여자의 반라 사진이라 호기심에 달력을 넘겨보니 9월과 10월에 들어있는 젊은 여자가 청바지를 입고 상체를 벗은 모습이 제일 눈길을 끌어 한참을 보았는데 주인아주머니가 국수를 갖고 나오자 얼른 보고 있던 달력에서 손을 내려 아무것도 보지 않은 척 했다.
걸어서 상주까지 간다고 운을 떼니 작년 여름 어떤 젊은이가 서울서 걸어서 부산
까지 가는 길에 이 집에 잠시 쉬어간 일이 있었노라고 아주머니가 전한다.
30분쯤 후 다시 길을 잡았다. 오르막이 계속 되었다. 차량은 많이 줄어 걷기는 편했다.
민가는 보이지 않고 온통 산들뿐이다. 한참을 올라 정상엘 가니 양쪽으로 큰 산이 나타나고 골짜기를 따라 용포라는 마을이 보인다.
내려가기는 수월했다. 인생도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쉬워야 할 텐대 라고 생각해 본다.
낙동분교 용포초교가 나오고 맞은편엔 구멍가게와 버스 정류장 표시가 보인다.
좌우엔 높은 산으로 둘러 쌓여있다. 한가한 시골풍경이다.
마을을 벗어나니 양지바른 산허리엔 조상님들의 묘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좋은 장소엔 죽은 자들이 차지하고 있어, 우리나라 국토와 인구를 생각하면 장례문화도 많이 바뀌어야 될 것 같다.
아무것도 없이 걸어서인지 속도를 낼 수가 있었다. 산머리를 돌아 언덕을 오르려는데 길옆 민가에서 송아지만한 세퍼트와 그보다 덩치가 좀 작은 개가 한꺼번에 짖어대며 덤벼들었다.
창졸간의 일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막대기도 보이지 않았고 집어들 돌멩이도 없었다. 개가 덤벼들 때 도망가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면 물러간다고 어느 책에서 읽었으나 이놈은 개의치 않고 나를 물려고 돌진해왔다. 위기의 순간이다. 작은놈이 먼저 덤벼들어 내 다리를 물려는 순간 등산화를 신은 발로 고함을 지르며 힘껏 차 버렸다. 발끝에는 묵직한 느낌이 오고 그 순간 한 놈이 도망을 치니 나머지 한 놈도 자기 집으로 도망갔다.
십년감수 했다.
옛날 도사님들이 지팡이를 갖고 다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오후 5시 드디어 오늘 목표한 상주 시내에 도착했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선산으로 왔다.
2일째:2005. 3. 25.(금요일)
첫 출발 후 2일째가 늦어진 이유는 선산에서 상주를 다녀와 보니 아버님의 상태가 좋아지지 않아 계속 할 수가 없었다.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3일 뒤, 가족들과 아침식사 후 손수 이를 닦으시고 오전 11시 가족들이 모인 안방에서 운명 하셨다. 올해로 89세의 생을 마감하셨다.
명퇴 후 시골 내려 간지 1주일만이다. 먼저 아버님께 제가 아버님의 임종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명퇴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삼오제를 지낸 후 제반 일을 수습하고 자택 산본으로 돌아왔다.
어제 저녁 뉴스에는 대관령에 30Cm의 눈이 내리고 영화의 날씨가 예보되어 조금은 긴장했다. 아내와 아들, 딸들의 배웅을 받으며 현관문을 나섰다.
오늘은 쉬고 난 첫날이라 무리하지 않고 20-30Km만 가리라 마음먹었다.
아파트를 돌아 금당터널을 지나려 하니 평소 자주 지나던 곳이나 차를 타고 다녀서 인지 아무생각 없이 지나쳤으나 오늘 보니 산본으로 처음 이사 올 당시가 생각났다.
그땐 터널이생기기 전이었고 현재의 터널 옆에 약수터가 있었으며, 일요일이면 가족들과 약수를 받으러 왔던 기억이 난다. 그때 초등학생이던 둘째 딸아이가 금년 대학을 졸업했다.
터널을 지나 초등학교 앞을 지나는데 학생들이 등교하느라 분주했다. 문득 나의 초등학교 2학년 시절이 생각났다.
친구 중 한명이 몰래 밤기차를 타고 서울을 다녀왔다는 무용담을 들었을 당시 기차 구경도 하지 못한 나로서는 동경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명퇴를 하고 시골로 간다는 생각을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버스 주차장에는 출근을 하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쁜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의왕시청을 지나 지지대 고개에 올라서니 길 양쪽으로 수원성을 상징하는 장안문의 축소판을 돌로 만든 수원시라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길 오른쪽에는 지지대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있다. 정조 대왕이 친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에 다녀가면서 이 언덕에서 부친의 능을 돌아보다 발걸음이 지체된데 대해 붙여진 “지지대”고개의 사연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있다.
공무원 연수원을 지나 왼쪽은 월드컵 경기장이 나오고 오른쪽엔 수원성의 동문에 해당되는 창영문이 보인다.
수원성은 200여 년 전 정조 대왕이 다산 정약용으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고 행궁을 지어 정조대왕의 친어머니 해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여기 수원성에서 가졌으며,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여기서 가까운 화산에 옮겨와 생전에 행차를 하신 곳으로 수원성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수원엔 정조대왕의 숨결이 곳곳에 배어있는 효의 고장이기도 할 뿐더러, 내가 이곳 수원에서 마지막 근무를 하기도한 곳이라 오늘 이곳 창영문을 지나는 감회가 새롭다.
동수원 사거리를 지나 원천유원지에 이르니 문득 30년 전 부인과 연애시절 여기 유원지에서 보트를 타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부인의 나이가 지금 큰딸의 나이보다 적으니, 세월이 유수 같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이제야 알 것 같다.
연하장 입구를 지나 영통신도시가 나타났다. 배가 고파 왔다. 주위를 살피다 추어탕 집엘 들어갔다. 점심시간인데도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줄었단다.
신갈 오거리를 지날 즈음 500m 전방 상공에서 무슨 새인지는 알 수 없으나 10여 마리가 하늘을 자유자제로 비행 하고 있는 모양이 참으로 장관 이라,나도 새라면 저렇게 상공을 마음대로 날아 보련만 하는 생각으로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강남대학교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 많이 변했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었다.
용인 정신병원을 지나 용인대학교에 다다를 즈음 신축중인 최신형의 높은 빌딩이 있어 주위에 물어보니 용인시 청사란다. 용인시내에 도착하니 어느새 오후 4시가 되었다. 양지에서 여장을 풀까하고 망설이다, 무리를 하지 않기로 했다.
우선 싸우나 탕을 찾아 몸을 풀었다. 휴게실에서는 북한에서 월드컵 예선 축구 중계방송 중이었다. 옆자리에서 북한을 응원하는데,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람이 북한 말투라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용정에서 왔단다. 용정에 있을 때는 북한도 드나들었단다. 작년에 입국했고 여기 목욕탕에서 고향 후배와 일하고 있단다.
요즘처럼 경기가 어렵고 젊은이들이 취직을 못하면 중국으로 일자리를 찾아 가야하지 않나 하는 걱정을 해본다.
3일째:2005. 3. 26.(토요일)
7:30 숙소를 나와 양지쪽으로 길을 잡고 출발했다. 사거리 건널목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다. 김밥집을 발견했다. 양지에서 아침을 해결하려고 했으나 마음이 바뀌었다. 식당에 들어서니 중년의 남자 2명이 라면을 먹고 있고, 중동인 2명이 테이블에서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구에선 주인아주머니가 김밥을 열심히 말고 있었고 중동인 옆에는 40대로보이는 남자가 서있었다.
조금 후 내 자리와 중동인 자리에 김밥이 나왔는데, 서 있든 남자가 김밥을 요리조리 보더니 김밥에 햄이 들어있으니 다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아주머니는 말없이 되가져간다. 그때 중동인 2명은 자기네끼리 뭐라고 얘기하며 웃는다. 아마 다시 시켜 미안한 생각에서 웃는지 모르겠다.
나는 김밥을 먹다, 목이 막혀 서있는 남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니 못들은 척 한다. 그래서 큰소리로 다시 외치니 자기도 중동인과 같이 식사하러 왔단다. 내가 종업원으로 착각해 미안해서 얼른 먹고 나왔다.
몸 컨디션은 좋았다.
양지 스키장 입구에서 음료수를 구해 배낭에 넣었다. 자동차 전용도로를 따라 3시간쯤 걸어 원삼사거리 간이버스 주차장에서 잠시 쉬어 목을 축였다. 노인 한분이 “백암”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해 84세로 근동인 맹리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이 고장에서 사신단다. 자녀들은 전부 외지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외롭지 않으시냐고 물어보니 “요즘 시대가 다 그렇지 뭐” 하신다. 20여일 전 돌아가신 아버님생각이 난다.
출발한지 5시간째다. 길옆 휴게소가 보여 배도 고프고 소변도 볼 겸 들렀다.
식당 안에는 주변 영세공장 종업원으로 보이는 대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떡만둣국을 주문했는데 맛이 없다. 그래도 먹을 수밖에 도리가 없다.
식사 후 자동차 전용도로를 따라 갔다. 자동차 전용도로라는 것이 사람 다니는 인도는 없다. 하기야 나 처럼 몇 안 되는 도보 여행자를 위해 인도를 만드는 것이 낭비겠지만. 차가 100Km이상씩 달리는지 차가 지나갈 때면 굉장한 소음과 바람이 일었다. 특히 화물차가 지나갈 때면 몸이 흔들린다. 이러다 객사나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등산복은 검은 색이라 잘 보이게끔 메고 있는 배낭위에 붉은 수건을 두르고 걸었다.
자동차 전용도로를 벗어나 백암 쪽으로 접어드니 다리가 아파왔다. 길옆 조그만 냇가 둑에 앉아 쉬었다. 뚝 잔디밭에 배낭을 베고 누워 있으니 봄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들에서는 새소리와 흘러가는 물소리가 들린다. 둑에는 어느새 새싹이 겨울의 모진 시련을 견디고 세상에 내민다.
저 길 위에서 달리고 있는 사람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과 무관한 세상에 온 기분이 든다. 이것이 자유인가 나도 모르겠다. 아무튼 마음은 편안하다.
잠시 쉬다 다시 걸으니 왼쪽 발바닥이 아파온다. 걸을 때마다 왼쪽 허벅지 부분에도 통증이 느껴진다. 선친께서 운명하시기 1주일 전 부터 숨 쉬시기가 힘들어 24시간 앉아 계셨든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백암 읍내에서 죽산가는 길을 물으니 50대의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가르쳐준 방향으로 걸어가니 버스 정류장은 반대편이란다. 걸어간다고 하니 아주머니가 놀란다. 요즈음은 4Km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도 걸어가는 사람이 없나 보다. 어릴 적 시골서 이정도 거리는 걸어서 등하교한 친구들도 많았는데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오후 4시 죽산 읍내에 도착했다. 오늘은 여기서 숙박할 생각으로 버스 정류장 주변 다방엘 들렀다. 다방에는 손님은 없고 마담과 여종업원 2명이 화투를 치고 있었다. 마담에게 상주로 가는 길을 물으니 일죽에서 삼성면 쪽으로 길을 잡아 음성과 괴산을 거쳐 연풍 문경으로 가는 길이 지름길 이란다.
죽산은 일제 때는 전국에서 몇째 안가는 큰 읍이었으나 그동안 발전하지 못 했단다. 생각보다 아주 조그마한 시골 읍이라 정이 간다.
숙소는 죽주산성 가까운 곳에 정하고 근처 “건강 나라”에서 목욕을 했다. 이런 시골에 고급스럽게 치장된 찜질방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양말부터 빨아 늘었다.
4일째: 2005. 3. 27. (일요일)
출발은 항상7:30이다.
전날 일기예보에서 중부지방에 안개 주의가 있어 일어나자마자 밖을 살펴보았다. 6시 이후부터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더니 출발할 때는 시야가 확보되어 걸을 만 했다. 30분쯤 걸어 일죽 인터체인지를 지날 무렵 다시 안개가 자욱해 10m 앞이 보이지 않았다. 헤드라이트를 켠 차들이 기어가고 있었다. 겁이 났다.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인도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아 맑은 날에도 위협을 느꼈는데 .
극도로 긴장하여 5분쯤 가니 다행히 휴게소가 나왔다. 우선 휴게소에서 아침도 해결하고 안개가 걷히길 기다리기로 했다.
식당 아저씨는 새벽녘엔 맑았으나 지금 안개가 끼었단다. 아침을 잔치국수 한 그릇으로 해결하고 커피를 한잔 마시니 안개가 그치기 시작했다. 국수는 불어 맛이 없다. 평소 부인이 주일이면 등산 후 해주던 비빔국수 생각이 간절하다. 평소 반찬투정이 사치였나 보다.
출발 전 충주 가는 길을 물으니 어제 다방에서 가르쳐준 길이 지름길이긴 하나 도로가 좁아 도보로는 위험하다고 식당 아저씨가 가르쳐 준다.
나는 장호원과 삼성면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택할 것인지 한참을 망설였다. 그래 조금 더 걷더라도 안전한 길로 가자고 마음을 굳혔다.
안개가 걷히고 맑은 하늘이 보였다. 왼발 발바닥도 걸을 만 했고 몸의 컨디션도 좋아 속도를 냈다. 38번 국도를 따라 가는데 어제보다 차량이 적고 인도가 많이 확보되어 있어 걷기가 한결 편했다. 물론 자동차의 소리가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는 탓도 있을 것이다.
수산리쪽 능곡 교차로를 지나는데 갑자기 소변이 마렵다. 주위를 살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가는 차량도 없다. 옜다, 모르겠다고 대로상에서 실례를 하는데 논두렁에서 노란 족제비 한 마리가 지나간다. 오랜만에 보는 놈이라 지나가는 것을 한참 보다 일을 마치고 바지춤을 올리는데 바로 앞에 감시카메라가 있지 않은가.
아이구 저놈이 내 그것을 찍어 집으로 벌금고지서와 보내면 어쩌나 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출발한지 2시간 우측 엄지발가락 아랫부분이 아파왔다. 동일죽 휴게소가 있어 잠시 쉬었다. 휴게소에는 3대의 여행사 버스에서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내리고 있었다. 차 한 잔을 마시고 일어섰다.
12시 장호원 읍내에 도착했다. 우선 갖고 있는 현금이 부족하여 금융기관을 찾았다. 읍내에는 농협밖에 없단다. 카드로 현금을 찾고 시내를 돌아보니 일요일이라서인지 한산하다. 시장 입구에서 식당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니 중국 음식을 배달하는 은색 통을 든 50대 남자가 무었을 찾느냐고 묻는다. 식당을 찾는다고 하니 따라 오란다. 중국 음식은 싫다고 정중하게 거절하고 옆을 보니 김밥집이 보인다.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읍내를 가로질러 나오니 장호원교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니 경기도에서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이란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도가 달라 옛 통행금지가 있을 때, 충청북도만 통금이 없어 에피소드가 많았다고 한다.
면소재지를 벗어나니 넓은 들이 나온다. 장호원에서 충주로 가는 길은 38번 자동차 전용도로와 구 국도가 같이 있어 차량은 대부분 전용도로로 다니는지 구도로가 한산하여, 모처럼 도보여행 하는 기분이 나고, 걸으면서 나 자신만의 생각에 빠질 수 있었다. 사람은 왜 사는가. 진실이란 무엇인가, 오직 모를 뿐이다.
예일대를 나와 숭산스님의 법문을 듣고 불교에 귀이 하신 무량스님- 지금은 10년 동안 미국의 모하비 사막에서 절을 짓고 있는 - 이 쓰신 책을 읽어보니 만행이라는 부분이 나온다. 만행이란 만 가지 행동을 말하는 것으로 여름과 겨울의 악천후 때 선방에서 3개월씩 결제를 하면서 자신의 중심을 잡는 공부를 한 후 세상에 나가 실제로 행동을 하고 고생을 해보는 것이란다. 만행은 내 자신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외부의 세계를 빌려 보는 것이란다. 매일 몸을 움직여 걸으면서 하늘과 산과 강을 가까이 마주하는 느낌 자체가 즐거움을 주며, 힘을 쓰고 걷다 보면 생각이 사라지고 그때 행복감을 느끼며, 몸을 움직이는 노동을 할 땐 머리도 아프지 않고 소화도 잘 되며, 정신과 육체가 하나가 된다는 느낌이란다.
그래 나도 왜 사느냐는 물음은 모를 뿐이다. 오직 나는 앞을 보고 걸을 뿐이다.
오갑 초등학교 앞 간이 버스 정류장이 있어 잠시 쉬고 있었다. 그때 시내버스가 빵빵 울려댄다. 타지 않겠느냐는 것인 모양이다. 고맙지만 지나가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다리가 서서히 아파오기 시작했다.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오후 2시 30분 용포라는 곳에 도착했다. 농부들이 봄철 밭갈이를 하고 있다. 노부부는 길옆 마늘밭에서 김을 매고 있다. 무척 한가하고 행복해 보인다.
갑자기 내 옆에 코란도 승용차가 멈춰 서더니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는다. 중년의 신사가 친절하게도 태워 주신단다. 나는 걸어서 여행하는 중이라고 정중하게 거절 했다. 세상엔 좋은 사람이 많다. 고마운 분이다. 기분이 좋았다. 나라면 혼자 가는 사람을 태워 줄 수 있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길옆 복숭아가 애기 머리만큼 크게 만들어 나무에 매단 간이 공원이 나타났다. 지나가다 차를 세우고 가족단위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도 공원 길옆에 주저앉아 목을 축였다. 힘을 얻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후 들어 양발 근육이 당겨지고 발바닥이 아프며, 피곤하다. 지도를 보고 오늘 묵을 장소로 앙상면 탄산온천지로 정했다. 피곤해서인지 30분마다 탄산 온천이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 보았다.
드디어 온천장이 나타났다. 몸이 피곤하여, 제일 첫 번째 온천장으로 들어갔다. 프론트에서 식당과 숙소를 물어보니 식사는 이 건물 이층에서 하고 숙소는 충주 쪽으로 300m쯤 가면 있단다. 탕 속에 들어가니 시원하다. 탄산온천 물은 흙탕물 처럼 탁하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손님이 별로 없다. 왜 손님이 없느냐고 물어보니 이 온천이 개발 된지 8년 되었는데 처음에는 인기가 좋았으나 요즘은 힘든 단다.
오늘은 정말 피곤했다. 목욕을 마치고 이층에서 청국장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
식사 후 다리를 절며, 300m을 내려가니 여관은 없고 온천장이 나온다. 주위에 사람도 없고 해서 온천장에서 숙소를 여쭤보니 이 건물 이층이 가족실이 있고 혼자면 찜질방에서도 24시간 영업하니 잘 수 있단다. 피곤하여 조용한곳에서 쉬고 싶어 온천장을 나왔다. 내가 처음 온천장에 닫기 300m전쯤 모텔을 본 것이 생각나 아픈 다리를 이끌고 되짚어 600m을 올라갔다. 이 동네 사람이면 제대로 가르쳐 줄 일이지 왜 헛걸음을 하게 하나 하고 프론트 아저씨를 야속하게 생각했다, 주위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모텔에 도착했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불이 켜져 있지 않고 인기척이 없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영업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단다. 나는 다시 내려 갈 일이 까마득했다. 하는 수 없었다. 다시 그 내려 갈수밖에 없었다. 그 아저씨 말을 믿을걸.
5일째: 2005. 3. 28.(월요일)
옥돌 매트에서 잠을 자서인지 눈을 뜨니 몸이 개운하다. 어제 저녁 같았으면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다행이다. 휴식이 필요하긴 하다.
오늘의 목적지는 충주를 지나 수안보로 정했다.
7;30분에 출발했다.
어제 자기 전 발바닥 물집 부위를 가위로 자르고 약을 발랐는데, 왼쪽 발바닥이 여전히 아프다. 오른쪽 발목도 근육이 뭉쳤는지 시큰 거려 속도가 나지 않는다. 조금 가니 길이 양쪽으로 갈린다. 아침이라 다니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는 차를 세워 물어 보려 했으나 차를 태워 달라는 줄 아는지 손을 흔들고 서지 않는다. 야속한 생각이 든다. 할 수 없어 큰길 쪽을 택해 걸어 가다보니 충주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평촌이라는 곳을 지나니 도로 옆에 수석과 나무공예 가게가 1Km 쯤 들어서 있다. 심이지상이나 부처상 등 다양한 석물과 남한강에서 채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자연석이 즐비하게 진열 되어있다.
가흥에서 여태까지 같이 걷든 38번 국도를 벗어나 충주 쪽으로 길을 잡았다.
이 길로 접어들자마자 교통량이 많아 졌다. 특히 화물 차량이 많아졌다. 그러나 갓길은 좁아 걷기가 위험했다.
10시가 지나자 양쪽다리가 아파왔다. 이 길로 접어들면서 부터는 오로지 차량에 신경을 써야만 했다. 휴게소가 나타나 차를 한잔하면서 충주를 가려면 저기 보이는 댐을 건너야 하느냐고 물으니 곧장 가란다.
충주 조정지 댐에 도착 했다. 여기서부터 댐의 상류 쪽으로 가야한다. 댐 주위가 그렇듯 여기도 도로가 오른쪽은 산이고 왼쪽은 절벽으로 아래는 물이 가득 담겨있다. 또한 도로는 꼬불꼬불하고 갓길은 없다. 차량은 특히 대형 화물차가 많이 다닌다.
이때부터 죽음과의 사투가 벌어 졌다. 돌아 갈수도 없다. 오로지 이 길을 통과 해야만 했다. 급커브 길이 오른쪽으로 나 있으면 왼쪽으로 건너가 사야를 확보하고 걷고 왼쪽이면 오른쪽으로 건너 걷되 도로옆 반사경을 보고 화물차가 오는지를 보고 걸어야 한다. 발바닥과 발목의 통증은 간곳이 없고 오로지 살아 이 길을 통과할 생각 밖에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가금면 사무소가 나오고 큰 바위에 탄금 호라고 새겨진 중원 체육공원이 보였다.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충주호의 푸른 물과 주변 경관이 눈에 들어왔다. 탄금호 철새조망대 2층으로 올라가니 망원경이 5대 설치되어 있다. 망원경으로 주변을 살피니 강 건너엔 골프장으로 한가로이 운동을 하고 있고 강위에는 새들과 조정 경기 훈련을 하는 일련의 선수들과 핸드 마이크로 훈련 상황을 지적하며 따라가는 배가 보인다. 한가롭고 아름다운 전경이다. 공원에는 나 혼자만 이 경관을 보고 있다. 출발하고 처음으로 사진기를 꺼내 주변 경관을 담았다.
30분쯤 강을 거슬러 올라가니 충주 박물관과 중앙탑이 나왔다.
이 탑은 신라시대 유일한 7층 석탑으로 우리나라 중앙에 세워졌다고 해서 중앙탑이란다. 주변은 강을 따라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관광차10대가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다. 초등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잔디밭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아마 봄 소풍을 온 모양이다.
점심 식사 후 탄금대교에 도착했다.
이 교량은 건설한지 오래 되어서 인지 차도는 좁고 인도는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다. 또한 양쪽 난간은 낮다. 일기예보에도 바람이 분다고는 했지만 오후이고 땜 상류로 바다처럼 넓어 바람이 유난히 세게 불어 다리위에 올라서니 서있기가 힘들었다. 다리 중간쯤 가니 덩치 큰 화물 차량이 양쪽으로 빠르게 달리고 바람이 불며, 밑은 삼킬 것 같은 푸른 강물이 어른거려 어지러웠다. 곡예사가 높은 외줄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아 난간을 붙잡고 한참을 서 있었다. 앞을 보니 아직도 2km는 남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난간을 붙잡고 조심조심 한발씩 내 디뎠다. 왜 다리가 이렇게 긴지 모르겠다. 오직 이 위험을 벗어나고 싶다.
다리를 간신히 건너고 나니 교량 난간 끝에 길이 넓이 신축연도 등이 적혀 있어나 쳐다보기도 싫었다. 교량을 지나 900m을 가니 유명한 탄금대가 나왔다.
탄금대를 지나 충주 시내에서 곧장 수안보 쪽으로 길을 잡았다.
오후 6시 수안보에 도착했다.
평일이긴 하지만 관광지 임에도 동네가 텅 비어 있었다. “객실 평일 3만원 ”이란 플랜카드가 호텔입구에 붙어 있어 이곳에서 여장을 풀었다.
피로를 풀 겸 지하 대중탕에 내려가니 손님이 나를 제하고 한사람 있었다. 시설은 낡았고 옷장은 삐걱 거린다. 손님이 없어서인지 탕에 물은 깨끗하고 뜨거웠다. 여기 물이 온천수인지 의심서럽다고 한사람 밖에 없는 손님에게 말을 건네니 여기 물은 원래 온천수란다. 어떻게 아느냐고 하니 자기는 여기 수안보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토박이인데 이물은 진짜란다. 묻지도 않았는데 요즈음 경기가 말이 아니란다. 오늘도 19000원 벌었는데 손님이 없어 목욕하고 있다며, 정부에 대한 불만이 많다.
따뜻한 탕 속에 있는데도 오른쪽 발목이 풀어지지 않고 부어올랐다. 오늘은 무리를 했나보다.
6일째: 2005. 3. 29. (화요일)
7:30 수안보를 출발했다.
호텔 밖을 나서니 오른쪽 발목의 부기가 빠지지 않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심한 통증이 느껴진다. 상처가 심하면 집으로 와서, 치료하여 완쾌 후 다시 출발해도 되지 않느냐는 어제 저녁 부인의 전화소리가 귀전을 때린다.
잠시 마음이 흔들렸으나 해보자는 오기가 발동하여 걸었다.
수안보는 15년 전 초임차장 발령을 점촌지점으로 받아 근무할 당시 토, 일요일 서울 자택을 오고 갈 때 지나든 곳이다.
토요일 오후 2시면 점촌 지금의 문경시에서 출발하여 이곳을 지날 즈음엔 잠이 몰려 왔다. 손수 운전하였으므로 잠을 깨우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곤 했던 생각이 난다.
수안보를 벗어나 언덕을 넘어서니 산허리엔 안개가 걸려 있고 산들이 겹겹이 겹쳐있어 한 폭의 동양화다.
동네에선 닭 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길가엔 아침식사를 하려는지 청설모가 반긴다. 넷 가의 맑은 물은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소리 내어 흐른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학생 몇 명이 학교 가기 위해 논둑길을 걷고 있다. 목가적인 풍경이다. 평화로워 보인다. 내 마음이 어느새 시계를 40년 전으로 돌린 것 같다
3번 국도를 올라서니 차량이 뜸하고 인도가 확보되어 있어 나 자신과 주변을 돌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달라이라마는 공의 개념과 자비란다. 세상은 상호 의존관계에 있고 남을 돕는 것이 자기를 돕는 것이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 곧 자기를 사랑 것이란다.
잘 모르 갰다. 우선 내가 건강하고,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어 행복한 것이 아닌가.
주변 산세가 험하고 아침 바람이 차다. 아침을 먹지 않고 출발한 탓인지 배가 고파 온다. 새로 낸 국도는 민가가 없는 산길이라 요기 할 곳이 없다. 신풍을 지나 연풍에 도착하니 민가가 보이고 삼거리에 식당이 딱 한집 있다. 식당에 들어가 식사 주문을 하고 기다리는데 옆 좌석에서 40대 초반의 두 남자가 소주를 먹고 있다.
그중 한 남자가 수안보 쪽에서 걸어오지 않았느냐고 말을 걸어온다. 어떻게 아느냐고 하니 차를 타고 오다 보았다며, 친구라도 만난 것 처름 반가운 기색이다.
식사를 하니 한결 걸음이 가볍다.
이제 이화령을 넘어야 한다. 이화령은 충청도와 경상도를 갈라놓았고 이조시대 경상도 선비들의 과거길 이기도 하며, 산세가 험하고 길목이라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새로운 길은 터널을 뚫어 만들었다.
소조령 터널을 지날 때는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이 심하다. 다행히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인도는 확보되어 있으나 전선케이블을 묻고 그 위에 콘크리트로 텔레비전 크기의 덮개를 만들어 덮어 놓아 걸을 때마다 덜커덩 거린다. 빨리 터널을 빠져 나가고 싶어나 터널이 길기만 하다.
이화령 터널이 나타났다.
이 터널을 빠저 나오자 좌우에는 산으로 쌓여 있고 도로가 산중턱에 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주변 경관을 보았다. 절경이었다.
절룩거리며 이화령휴게소로 내려왔다. 국도에 설치한 터널이지만 유료다. 해서 터널 을 통과한 다음 매표소를 지날 때 사람도 돈을 받는지 궁금 했어나 검표 아가씨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문경새제 입구엔 “영남대로”라는 현판이 새겨진 관문이 도로 중앙에 세워져 있다.
문경읍을 지나 지금은 폐광되어 없어진 문경탄광 자리가 나왔다. 연탄을 난방의 주원료로 하던 시절엔 문전성시를 이루던 곳이, 이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5년 전 점촌지점 근무할 당시 월말이면 예금이 부족하여 이곳 문경 탄광사장님께 부탁하곤 하던 일들이 떠오른다.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문경시에 도착했다. 근무하던 지점이며, 주변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나 그때 같이 근무하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옛 시조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산천은 의구한대 인걸은 간대 없네”
7일째: 2005. 3. 30. (수요일)
7;30 숙소를 출발했다.
문경시내를 관통해 걸었다. 아침 먹을 곳을 찾다 김밥집을 발견하고 들어가 김밥을 주문했으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며 만두를 권했다. 장사가 잘 되느냐고 운을 띄우니 보다시피 길에 사람의 왕래가 전혀 없어 힘들다며 주인아저씨가 울상이다.
금방 찐 만두라 맛이 좋았다. 양을 많아주어 일부를 남기니 길가다 드시라며 남은 만무와 간장, 단무지까지 싸주신다. 나는 만두보다 많은 인심은 듬뿍 받았다.
시내를 벗어나니 개나리꽃이 노랗게 피고 있다. 자택에서 출발전날 대관령에 30Cm눈이 왔다는 뉴스를 보았는데 꽃이 피다니, 봄이 오긴 온 모양이다.
오늘은 목적지인 상주까지는 20여Km로 그리 멀지 않아 부담은 적으나 오른발의 통증이 심하다. 어제저녁 소염 진통제로 발목주위를 마사지 했으나 소용이 없나보다. 상주의 넓은 들판이 보인다.
마지막 힘을 내서 걸어본다.
자동차 전용 도로를 2시간 정도 걷고 있는데 경찰차가 옆에 선다. 이 도로는 위험하니 일반 국도로 여행하란다. 나로서는 우선 내 생명을 걱정해주어 고맙게 생각 하고 일반국도로 가겠다고 대답은 하고 경찰차가 간 후 계속 가던 길을 갔다.
드디어 상주시내에 들어섰다.
오른쪽 발목 통증이 심해 병원을 찾아 응급 치료를 했다.
도보여행 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혼자라 외롭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으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 그럴까. 헨드폰이 늘 손안에 있어 가족이나 외부와의 끈이 항상 옆에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숙소에서 TV를 통해 세상과 접해서인지 모르겠다.
이 여행을 시작할 때는 언제가나 하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으나 앞만 보고 한발 한발 내 딛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도착했다.
우리의 인생도 너무 조급하지 않게 한발 한발 걸어가다 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 여행을 통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 인생에 중요한 것이 어떤 것인가
많아 갖이는 것 보다 우선 내가 살아 존재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또한 느리게 산다는 것, 홀로 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물음도
뚜렷한 결론은 얻지 못했으나
이번 여행이 내겐 앞으로 살아가는데 있어 보약이 될 것이다.
이번 여행이 짧아 섭섭하긴 하나,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가정이 있고 가족이 있다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끝.
오라버님의 7일간의 도보여행에 저도 함께 한 기분으로 잘 읽어보았습니다 이 한편의 기행문에서 평소에 성실하고 단정하게 살아오셨던 오라버님의 철학이 한눈에 보이는 듯 그 끝도 의미롭게 정말 자알 하셨습니다 이제 또 다른 삶이 오라버님의 앞날에 축복으로 남아있을듯~ 영원히 행복하소서......()
첫댓글 장하다 김영진 ... 나는 언제한번 해보나 ...
잘햇다 영진아 축하한다 우리언제 만나서 소주한잔하자```````````````````
영진이 겪어 본 사람은 알리라...이번 기회에 아버님 여의시고 걸어서 구만리 아니 수백리 걸어본 사람은 알리라 .그리고 역시 독서광 책을 많이 읽고 인생공부도 너무 많이 했을줄 믿네...
그리고 일목요연하게 정리의 기술 또한 책을 한권 쓰던가 수필집을 한권 써도 되겠구만, 역시 知天命을 넘은 나이 답구만...그리고 우리 남은生 퇴직후의 人生 재미있게 살아보세...
생각을 實踐과 行動으로 보여줄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感動 이구려! 一 體 有 心 造 ! 몸과 마음이 하나 라는것을 우리 친구가 보여 주었구나! 대단하구나! 진심으로 축하하오며 날마다 조은날 되소서-()-
나룻배는 도보여행 몬한대이. 낙동강 발원지에서 부산 앞 바다까지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세월도 인생도 .....그래서 강물을 인생에 비유한 시들이 많다우 강물이 깊어가듯 우리 인생도 깊어가고 마침내 고요의 바다에 이르면 고요한 죽음(깊이를 알 수 없음)
상류---청소년기: 산골물처럼 맑고 경쾌하고 명랑하다. 중류---세상을 알기 시작하고 꿈틀대기도 하고 힘도 제법쓴다. 과신은 금물 하류---모든 희로애락을 쓸어담고 간다. 깊고 깊고 넓고넓고 고요하다. 말이 없으나 모든 것이 내면 깊이 담겨있다. 바다로 간다.
김영진! 넘 감동적이다.이리 대단한 사나이인줄은 미처 몰랐는데...멋진사람은 늘 그대로 멋지게 살더라.
내도 이율이 선상님 말씀처람 ... 자신없데이 ... 영진이가 부럽당 ...
오라버님의 7일간의 도보여행에 저도 함께 한 기분으로 잘 읽어보았습니다 이 한편의 기행문에서 평소에 성실하고 단정하게 살아오셨던 오라버님의 철학이 한눈에 보이는 듯 그 끝도 의미롭게 정말 자알 하셨습니다 이제 또 다른 삶이 오라버님의 앞날에 축복으로 남아있을듯~ 영원히 행복하소서......()
나룻배 그대는 자신은 있지만 이름 땜시로 도보여행 몬한다카이, 달구지로 바꾸거라. 덕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