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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냐...밤새워 썼던 글을 이미 한번 날려버린 바보 씨바입니다..;;
그래도 충격을 딛고...'오기'로...리포트도 뒤로 미루고...쓰려고 했던 고구려 초기 왕권에 대해서 고찰해보려고 합니다...
일단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서...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한국 고대사는 사료가 정말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적은 덕분에...굳이 역사전공자가 아니어도...
어차피 보는 사료의 양이 같기 때문에...어느정도만 공부해도 웬만한 역사전공자 싸다구 날릴 레벨에 올라설 수 있고...
또 그런분들이 많습니다...이 분들을 역사전공자들을 '재야사학자'라고 칭하였고...이에 그분들은
역사전공 교수들을 '강단사학자'라고 대응해서 부르고 있습니다...
뭐..이말을 드리는 것은 둘 중 누가 옳고 그르고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들에게 논쟁이 되는 것은 바로 사료입니다...역사학에서 사료란 이렇게 중요하며 어쩌면 그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저같은 쌔까만 말단 후학 개초보 찌끄래기도 역사에 관해서 어떤 가설이나 주장을 하려면...
철저히 사료로 근거를 얻고 주장을 합니다...저같은 놈도 그럴진데...
선학先學 연구자들이 얼마나 단어하나 문장하나의 정의와 쓰임에 목숨을 거는지는 상상도 못합니다...
한예로...제가 존경하는 몇안되는 분 중 한분이신 김한규 교수님은...'요동'이라는 꼴랑 두음절의 단어
하나의 정의를 하고 스스로 쓰기 위해서 거의 평생을 바치신 분입니다...-_-
그 꼴랑 두음절의 정의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자문자답을 하고 관련서적을 뒤적이셨는지...가늠할 수조차 없습니다....
이것은 비단 역사학뿐만이 아니라...기본적으로 논설을 하고 토론을 하려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자신이 써먹을 단어의 의미와 개념의 경계를 지정하는 것입니다...
두명이 대화하는 데 같은 단어를 가지고 서로 다른 뜻으로 쓴다면 대화자체가 되지 않겠지요....
적어도 학자라면...자신이 쓰는 단어에 책임을 지는 것이고...단어하나하나에 목숨을 겁니다...
그래서 결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연구자가 무슨 말을 하면...그 연구가 심심할때 발로 끄적인 것이 아니고...
나름 치열한 지적격투와 고민끝에 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자신의 마음에 안드시더라도 일단 논리로 까셔야지
맘에 안든다고 자신에게 불이익이 된다고 무턱대고 반대하거나 매도하시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국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카페 분들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이종욱 교수님에 대한 비난을 보고 울컥해서 써봤습니다...
재미없는 얘기는 그만하고...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예전에 한번 수업때 발표로 써먹었던 주제이고...당시 교수님께서 나름 기뻐하시며 칭찬하셨던 발표입니다...
(물론 학부생에게 별 기대는 하지 않으셨겠지만...ㅋㅋ)
고구려 하면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것은 요동에 웅거하고 동북아를 호령하던 영광의 역사일 것입니다.....
그 고구려도 그만큼 강해지기 위해서 초기국가가 겪어야할 정쟁과 내부분쟁을 겪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대무신왕大武神王이라는 왕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대개 '무왕'이라는 칭호는 국토를 넓히거나 군사적 업적이 있는 왕에게 바치는 묘호입니다...
그런데 대무신왕은 그 무왕칭호뿐만 아니라 앞에 큰대자가 붙고 그사이에 신령신자가 붙습니다...
이쯤되면 대체 뭔짓을 한 왕이길래...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말도안되게 거창한,
어쩌면 부담스러운 칭호입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계승자, 후계자를 자처하고 심지어는 소유권자(--;;)라고 까지 주장하는 한국에서
이런 어마어마한 칭호를 가진 왕에 대해 정작 알려진것이 놀랄만큼 없습니다...
아무리 고대사가 사료가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광개토대왕비를 제외하면 어차피 삼국사기외에 사료가 부족한 고대사라...
한국인에게 잘알려진 광개토왕이나 장수왕, 태조왕, 동명왕, 연개소문 등에 비해서
딱히 사료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하기도 뭐합니다...
더더군다나 한국의 대표적인 로맨스 중 하나인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에서
호동왕자의 아버지이기도 한 할말도 많고 충분히 얘기거리도 많은 왕이지만 알려진 것이 거의 없죠...
또 김진 만화작가분이 그리신 '바람의 나라'라는 걸작과...그것을 원작 만화로한 온라인 게임이
한때 인기를 끌면서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그래도 정작 대무신왕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런데 이인물에 대해서 파고들다보면...초기왕조국가가 겪는 파란만장한 정쟁들을 많이 접하게됩니다...
고구려는 시조 주몽부터 8대 신대왕조 까지 계속 왕위 찬탈,선양과 왕자의 살해등 순탄하게 왕위교체가 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동명왕(1대왕)과 유리왕 교체시기에는 교체방법이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으며...
유리왕(2대왕)은 해명태자를 죽이고(어쩌면 도절도) 대무신왕(3대왕)은 호동을 죽였으며
민중왕(4대왕 유리왕의 아들 대무신왕의 아우)은 왕의 아우로 왕위에 올랐으며
모본왕(5대왕 대무신왕의 아들)은 신하들에 의해 살해 당하고
태조왕(6대왕)은 선양의 형식으로 왕위에서 쫓겨났으며 차대왕(7대왕) 역시 신하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초기고구려왕실의 비극은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강력하여서 발생한 일이라는 전제하에 고찰해보겠습니다...
일단 그래서 고찰사항으로 크게 두가지를 설정하였습니다...
첫째, 유리왕과 동명왕의 이야기와...
둘째, 대무신왕과 호동왕자의 이야기입니다...
일단 유리왕은 주몽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둘 다 왕자로 자라난 것이 아니었고(드라마 주몽에서는 다른 말을 합니다만..ㅡㅡ)
둘 다 부여에서 탈출해서 나라를 얻었고
주몽은 오이, 마리, 협부 3인의 도움을 받았고
유리는 옥지, 구추, 도조 3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주몽은 졸본의 토착세력가의 딸과
유리는 역시 토착세력인 다물국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둘 다 나라는 세운 사람들의 특징이 아닌가 라고 생각됩니다...
즉, 유리왕은 동명왕의 아들이라서 왕위 계승을 한 것이 아니라 부여에서 내려온 신흥세력으로
실력으로 동명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이에 대한 또다른 의문점으로 동명왕은 유리가 고구려에 당도할때까지 토착세력의 딸(소서노라 불리는)과 결혼하여
온조와 비류(불류라고도 합니다)라는 왕자를 멀쩡히 얻었음에도 그 둘을 태자로 책봉하지 않았습니다...
삼국사기
十九年 夏四月 王子類利 自扶餘與其母逃歸 王喜之 立爲太子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歲 葬龍山 號東明聖王
'19년(서기전 19) 여름 4월에 왕자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오니, 왕은 기뻐하고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승하하였다. 그 때 나이가 40세였다. 용산에 장사지내고 호는 동명성왕이다 '
삼국사기에 의하면 22세에 나라를 세우고 40세에 붕어할때까지 18년간 태자를 책봉하지 않았다는거죠
역시 삼국사기에 의하면 온조는 기원전18년에 백제를 건국하고 유리는 기원전19년에 태자책봉및 왕위계승을 합니다...
삼국사기에도 나와있듯 일단 유리의 등장과 함께 남하하여 바로 나라를 건국한것인데...
대체로 고구려의 태자 책봉의 평균 연령대는 11~13세입니다...
특히 초기고구려는 거의 이나이때 딱히 이상이 없는 한 책봉이 됩니다...
주몽이 결혼한 연도는 사료상 알 수 없지만 주몽이 졸본에서 세력을 얻는 과정에서 아내를 얻었을 것이라 생각되고...
처가세력을 기반으로 권력기반을 닦았을 것이라고 본다면 졸본 이주 초기에 아내를 얻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 건국 뿐이 아니라 그 전에 얻었을 가능성도 있으나...당장 건국후 얻었다고 치고 임신기간 등을 고려해도...
그래도 11~13세는 되지 않았을까...추측할 수 있습니다...더더군다나 '형'인 비류는 더 나이가 많았겠지요...
또한 주몽은 외국에서 온 세력이었으며 토착민의 협조를 얻기위해서 결혼을 하고
그 결혼으로 하여금 비류와 온조를 낳았는데 지역세력들의 뻔히 예상되는 반대를 물리치며
올지 안올지도 막막한, 생사조차 불분명한 부여에 버리고온 권력기반도 없는 아내의,
아들인지 딸인지 조차 알수없는 자식을 기다렸다는 것은 정황상 매끄럽지 못합니다...
지방세력들이 주몽과 결혼을 한것은 당연히 후계자를 자기 세력권의 인물로 두기위해서일테고...
당시가 강력한 왕권국가도 아니고 권력기반 조차 약했던 주몽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굴러온 돌인 유리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상당히 어려워보이며...비류-온조가 주몽이 멀쩡히 살아있는 가운데
왕비인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남하한 것이나...많은 사람이 그들을 따랐다는 기록은 결국 토착세력이
유리의 세력에 패배해서 대거 도망내지 이동을 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또한 유리가 부여에서 건너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태자를 세우고 5개월만에 붕어한것도 의문점입니다......
마치 주몽이 유리가 올때까지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었던 양 시기적으로 너무 딱 맞아 떨어지는 데다가
또한 광개토대왕비문에 의하면 동명왕의 죽음에 대한 재미있는 기사를 전하는데
광개토대왕릉비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不迎王. 王于忽本東岡, 黃龍負升天
'세속의 위(位)가 즐겁지 않아서 이에 하늘이 황룡을 보내 왕을 영접함에 왕은 졸본 동쪽 절벽에서 황룡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였다'
동명왕은 죽은것이 아니라 왕위에 있는 것을 싫어하여 왕위를 물려주고
용산으로 가서 황룡을 타고 하늘로 '승천'했다는 기사를 전합니다...
이것은 유리가 주몽을 교체함에 있어 토착세력이나 기득권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서 권력투쟁 과정에서
패배한 주몽의 죽음을 백성들에게 미화시킨 프로파간다가 아닌가...라고 생각해봤습니다
(뭐 광개토 대왕비 자체가 프로파간다의 성향이 짙습니다만...)
이런 사망에 대한 얼버무리는 기사가 어쩌면
동명왕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던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죠...
또 다른 눈여겨볼 점은 유리왕과 대무신왕의 아들들의 이름에 대해섭니다.....
유리왕의 아들들중에 해명解明태자와 후에 민중왕이 되는 해解색주가 있으며
대무신왕의 아들중에는 후에 모본왕이 되는 해解우라는 아들이있었습니다.....
대무신왕에 대해서도 삼국사기의 기사에 '혹은 대해주류왕이라고도 했다-或云大解朱留王'는 기사가 나옵니다...
고구려본기 왕족들은 대체로 성을 제외하고 이름만으로 표기 했다고는 합니다...(머언 훗날 안승이라던가)
그러나 이름에 이상하리 만치 부여의 왕성王姓인 해解가
이렇게 계속 이름의 첫머리에 오게 하는 것이 우연으로만 보이지는 않습니다...이것또한 유리가
부여에서 온 해씨성을 가진 일종의 귀족세력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가능하게 합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왕이 된 유리왕은 치세기간 내내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유리왕은 치세기간 동안 유력한 신하인 협보를 내쫓고 아들인 해명을 죽였습니다...
뭐 이렇게 유력한 신하와 아들까지 죽일 수 있던 것은 왕권이 강했던 것이 아닌가...라고도 볼 수 있지만
계속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이 있고...왕의 위치자체가 안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항상 자리 유지를
위해서 이런 식의 숙청을 해야했던 것이 아닌가 싶네요...
十二月 王田于質山陰 五日不返
大輔陜父諫曰
王新移都邑...(중략)...先王之業墜地
王聞之震怒 罷陜父職 司官園 陜父憤去之南韓
'12월에 왕이 질산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5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대보 협보가 간하였다.
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으므로...(중략)...선왕의 위업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
왕은 듣고 크게 노하여 협보의 관직을 빼앗고 관원(官園)을 맡아보게 하였다. 협보는 분하여 남쪽 한으로 가버렸다.'
二十八年 春三月 王遣人謂解明曰 “吾遷都 欲安民以固邦業 汝不我隨 而恃剛16)力 結怨於國 爲子之道 其若是乎” 乃賜劒使自裁...(중략)...乃往礪津東原 以槍揷地 走馬觸之而死 ...(중략)...解明在於別都 以好勇聞 其於得罪也宜矣
'28년(서기 9) 봄 3월에 왕은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말하였다. “내가 천도한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려는 것이다. 너는 나를 따르지 않고 힘 센 것을 믿고 이웃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된 도리가 이럴 수 있느냐?” 그리고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중략)...마침내 여진의 동쪽 벌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꼽고 말을 타고 달려 찔려 죽었다...(중략)...해명이 따로 떨어진 도읍에 있으면서 무용을 좋아한 것으로 이름났으니 죄를 얻게 된 것은 당연하다'
협보는 앞서도 나왔지만 주몽이 부여에서 떠나올때 함께한 3인중 한명입니다...
고구려 조정으로 보면 건국공신이고 어마어마한 원훈대신이지요...
결국 이런 '기득권'을 대표할 수 있는 신하를 내쫒은 것은 당시 신권이 결코 왕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국내성에 대해서는 뒤에 더 언급하겠지만..해명이 죽은 이유는 부여에서 자신의 군사력을 자랑하려고
고구려에 강궁强弓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이에 해명이 부여사신이 보는 앞에서 그 강궁을 꺾어버립니다....
이에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까 걱정한 유리왕이 사신에게 사과를 하고 해명을 졸본으로 보냅니다...
그러나 이 해명이 졸본에서 군사를 기르고 백성과 친하게 지내니...왕으로서 불안했던 것이지요...
뭐...왕이란 자리가 아들을 아들로 보지 못하고 또하나의 경쟁자로 보게 만드는 경우야...
동서고금 어디에나 등장하지만(한국만 해도 영조-사도세자, 인조-소현세자, 선조-광해군, 고종-대원군 등ㅡㅡ
어머? 다 조선이네?고려와 신라에서도 그런경우 몇 있습니다...)
결국 왕권에 도전세력이 있다는 것이 왕권이 안정되지 않고 신권이 강하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지요...
뭐..해명 전의 태자였던 도절 또한..석연찮게 죽습니다만...
이것은 뭐...딱히 유리가 죽였다는 말은 없으니 넘어가지용...
또 유리왕의 왕권이 미약했다는 다른 근거는 유명한 황조가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冬十月 王妃松氏薨 王更娶二女以繼室 一曰禾姬 골川人之女也 一曰雉姬 漢人之女也
...(중략)...
雉姬慙恨亡歸 王聞之 策馬追之 雉姬怒不還 王嘗息樹下 見黃鳥飛集 乃感而歌曰
'겨울 10월에 왕비 송씨가 죽자, 왕은 다시 두 여자를 계실로 삼았다. 하나는 화희인데 골천인의 딸이고, 또 하나는 치희인데 한나라 사람의 딸이다
...(중략)...
치희가 부끄럽고 한스러워 도망쳐 돌아갔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좇아갔으나 치희는 성을 내며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어느날 나무 밑에서 쉬다가 꾀꼬리가 모여드는 것을 보고 느껴 노래하였다'
송씨는 앞서 언급한 다물국의 딸이며...골천도 고구려 토착지역으로...화희는 고구려 토착귀족의 딸로 보입니다...
치희는 한인의 딸이라는 것으로 보아 한나라의 왕이나 제후의 딸이라기보다 그냥 고구려지역에 온
한나라 유이민의 딸로 보입니다...그만큼 권력배경도 없고...결국 기세등등한 토착세력을 등에 업은
화희의 등쌀에 기반이 약한 치희가 이름그대로 치여서 도망간것으로 보이고...이에 유리왕의 반응은...
자신의 애첩임에도 불구하고 화희를 어떻게 해줄 수 없으니 포기하고 돌아오며 한탄이나 하는 것이 다입니다....
외롭네...나 누구랑 돌아갈까...이러면서 말이죠...
이런 기세등등한 토착세력에게서 벗어나고픈 유리왕의 고뇌는 국내성 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요...
二十一年 春三月 郊豕逸 王命掌牲薛支逐之 至國內尉那巖得之 拘於國內人家養之
返見王曰
臣逐豕至國內尉那巖...(중략)...王若移都 則不唯民利之無窮 又可免兵革之患也
...(전략)...二十二年 冬十月 王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
'21년 봄 3월에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나서, 왕은 장생 설지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다. 국내 위나암에 이르러 찾아내어 국내 지방 사람의 집에 가두어 기르게 하고는
돌아와 왕을 뵙고 아뢰었다.
신이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는데...(중략)...왕께서 만약 수도를 옮기시면 백성의 이익이 끝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걱정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략)...22년 겨울 10월에 왕은 국내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국가의 제가에 쓸 제물인 돼지가 도망갔다는 것은 당시 시대에서 아주 큰 사건입니다...
실제로 유리왕 19년에는 돼지가 도망가고...또 두사람이 그 돼지를 쫓다가 돼지 힘줄을 끊어서 잡아오자
'어찌 하늘에 쓸 제물을 상하게했는가?'라고 하며 두사람을 생매장시켜 죽여버립니다...;;;
그 돼지를 어떻게 알아서 국내지방까지 가서 찾았는가..라는 문제는 차치하고...
죽일 수도 있는 죄를 지은 일개 장생의 말에 의해서 천도가 결정되었습니다....
뭐...중세 유럽에서 steward(집사)나 marshal(마굿간지기)등이 본래 뜻과 다르게 고위직이름으로 쓰이기도 한 것처럼
장생이라는 것이 제법 높은 관직일 수도 있지요...하지만 후의 고구려사에서
사자, 대사자, 주부, 대로, 막리지 등은 고위직 이름으로 자주 등장하지만
고위직으로 '장생'이란 벼슬이 나와서 뭔가 하는 모습은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장생은 한자 그대로 '짐승을 관리하는 직' 정도로 보고...그닥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물론 장생 설지의 말을 듣고 나름 조사도 했겠지만...죽을죄를 지은 하찮은 벼슬이 낮도 두껍게 돌아와서
하는 말을 곰곰히 생각해서 천도라는 국가대사를 결정했다는 것은 석연치 않습니다...
협보가 쫓겨난 것도 바로 이 천도 직후에 있는 일인데요...이 두가지 사건은 지긋지긋한
구신들과 졸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유리왕의 일면이 담겨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어쩌면 지금까지의 논의는 '음모론' 수준의 담론일 수도 있겠지만...
한가지도 아니고 이런 여러가지의 의문점은 적어도 고구려 초기 왕권이 안정되지 못하고
계속 도전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입니다...사료가 없는 상황의 고대사라...추측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쉬운데...
적어도 있는 사료상으로 제가 낸 결론은 그렇습니다...다음 글에서 대무신왕과 호동의 얘기가 계속됩니다...
글이 길어져서 전이만..;;
여담: 여기까지 쓰고나니...괜히 시작했다...라는 생각이 물씬물씬..;;;
정작 쓰려던 호동왕자 얘기는 안나오고...유리왕 이야기만 잔뜩..;;
또...개강해도 낮에 안들어올뿐 별로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 라는 생각이 드는 씨바입니다...
하아...자야지...ㅡㅡ 자야지 핵교를 가지...
첫댓글 헉!! 여태 키바로 읽고 있었는데.....
아.... 상당히 타당성 있는이야기 인 듯 합니다. 주몽이 계루부의 졸본세력을 등에 업고 건국을 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부족의 개념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할 것으로 추정되는데, 유리는 다물국, 즉 소노부를 등에 업고 cciba님의 의견대로 권력을 찬탈하였다고 본다면, 이는 기존에 남아있을 건국세력 혹은 기타 다른 부족의 반발을 피할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소노부의 '해'씨 고구려왕통은 언제나 '찬탈자'로써 그 입지가 미흡할 수 밖에 없다고 볼 수 있겠네요. 주몽이 성을 高씨로 삼았는데 2대왕 부터 解씨로 기록된다는 점은 유리가 정통한 계승자가 아닌 찬탈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뭐..그렇게 '당연한겁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게하기 위해서 많은 사학자분들이 피똥싸는 것이겠죠...당연한 것 같은데...당연하지 않은 경우가 있고...그 당연한 것의 근거를 찾으려고 하는데 사료가 없고...뭐 그런거죠...
유리왕 하면 생각나는거라곤 기껏해야 황조가 정도인데 나름대로 재미있군요 ^^;; 단지 현재 잔존한 사료가 부족하여 논리가 일정범위 이상으로 뻗어나가 결정적인 결론은 낼 수가 없는 듯... 그래도 여전히 상상과 비약의 나래를 펼친 소설같은 재야역사보다는 좀더 그럴싸하게 느껴집니다. 바닐라 음모론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일종의 '절제의 미학' 이랄까요 ㅋㅋ
삭제된 댓글 입니다.
어? 그런 사료가 있었나요? 어떤 사료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지 가르쳐주시겠어요? 나름 사료를 훓어봤다고 생각하는데...소서노의 나이나 '왕의 성씨가 해씨였다' 라고 단정해주는 사료는 못봤는데...사실 소서노라는 이름이 명확히 나온 사료도 없습니다...
저로서도 가히 획기적인 내용인데... 사료 출처를 좀;;;
--으윽..여기도 상당한고찰이!!한수배워야겟다는..
삭제된 댓글 입니다.
7차 교과서에선 동명성왕이라고 나옵니다만;;
수험한국사를 하다보니 100% 개정교과서 위주의 내용을 배우게 되는데 그쪽에서 추모왕이라는 이름은 아예 나오지 않습니다;;; 특히 고구려는 사실상 1세기 정복전쟁 태조왕 이전의 왕은 알 필요가 없다는..
실제로 태조왕 이전의 고구려 역사는 학자들도 잘 모르니까.. 그런걸 시험에 내면 논란의 여지가 생기니, 그런걸 낼수 없으므로.. 태조왕 이후부터 공부해야죠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