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과 마님
박래여
그가 모종을 사왔다. 고추, 방울토마토, 오이, 등이다. 텃밭의 골을 짓고 두둑 위에 비닐멀칭을 한 지 며칠 지났다. 땅 심 가두어 놨다가 모종을 옮기면 그만큼 활착이 빠르다. 텃밭 가 울타리 곁에 심어놨던 더덕이 겨울 가뭄 탓인지 여러 포기가 죽었다. 싹이 오른 것은 줄을 내 울타리를 감아 오른다. 워낙 박한 땅이라 가뭄에 견디지 못했나보다. 더덕 향이 참 좋다.
나는 더덕을 좋아한다. 친정집 대밭에는 더덕이 많았다. 손님이라도 오는 날이면 호미와 소쿠리 챙겨 대밭에 들었다. 더덕 줄기 굵은 것을 찾아 뿌리를 판다. 더덕은 다년생이라 항상 나는 자리에 난다. 씨앗이 저절로 벌어져 떨어진 자리에서 발아한 어린 싹들이 소복소복 솟아 있으면 마음까지 환해졌다. 그 어린 더덕 순을 파다가 삽짝 옆 울타리 가에 심어놓기도 했었다. 삽짝 들어서기 전에 더덕 향이 먼저 반겼다.
친정에서 더덕 씨를 가져다 울타리 가에 심었었다. 그것도 여러 번인데 매번 잘 키우지 못했다. 부지런한 농부가 울타리를 다듬고 풀을 칠 때면 더덕인 줄 모르고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모종을 부어놨더니 풀이라고 괭이로 제거해버렸다. 도라지 밭도 그랬다. 더덕을 화분에 담아 창가에서 키우기도 했었다. 둥근 등을 닮은 꽃이 예뻤다. 우리 집에서 사라진 야생화가 참 많다. 한 때는 마당가 잔디밭에 하고초라는 꿀풀이 번성했었다. 보랏빛 꽃이 무더기로 피면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하고초는 친정엄마 때문에 일부러 산에 가서 캐다 심어 키웠었다. 엄마가 아플 때다. 간에 좋다는 하고초였다. 보랏빛 꽃이 피면 그 꽃을 따서 튀김을 해 드리기도 했다. 칠팔월에 꽃을 베어 말렸다가 끓여 그 물을 마시게 했었다. 엄마 돌아가시고 우리 집 마당의 꿀풀도 시나브로 씨를 말렸다. 여름철 풀과의 전쟁에서 매번 잔디 깎기에 희생당한 야생화 중 하나다. 조개나물 군락도 있었다. 아직 씨가 마르지 않아 신기하다. 몇 포기가 남아 보랏빛 꽃대를 올렸다. 어성초 군락도 명맥만 유지하는 중이다.
지금 마당은 꿀풀이 무성하던 자리에 비비추가 무성하다. 마당도 세월따라 변화를 거듭하는데 사람은 왜 변하지 않을까. 풀을 칠 때면 간절히 부탁한다. 비비추 무더기는 베지 말라고. 비비추는 건채로 이용된다. 봄철에 거두어서 삶아 말리면 맛있는 묵나물이 된다. 장아찌로 담그기도 한다. 나는 음식보다 꽃을 보고 싶은 욕심에 키운다. 그 외에도 장구채, 유홍초, 나팔꽃, 솔잎 채송화, 사랑초 등등. 야생화가 많았지만 어떤 것은 씨를 말렸고, 어떤 것은 명맥만 유지하여 안쓰러울 따름이다.
읍내는 의병제 행사기간이다. 수영장에도 못 가니 온종일 집안에서 맴돈다. 우연히 손에 들어온 책 한 권이 나를 매료시켰다. 길거리에 버려둔 헌책 무더기에서 주워 온 것이다. 1996년에 나온 책이다. 『땅과 사람의 역사』황광수 엮음이다. 조정래 작가의 소설 『태백산맥』과 『아리랑』, 그 외 단편에서 뽑아낸 명문장을 엮은 책이다. 글자가 자잘해서 집중하지 않으면 읽기가 힘들다. 내 시력이 글자에 맞추어지긴 했지만 책에서 눈을 떼면 사물이 안개 속처럼 뿌옇게 보인다. 땅과 사람의 역사에 대해 쓴 부분만 발취한 것이라 그럴까.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태백산맥』은 내 역사의식을 바꾸게 한 계기가 된 책이다. 지리산 자락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빨갱이란 말은 뼛속까지 깃든 부정적인 의미였다. 빨갱이는 나쁘다. 국군은 좋다. 이분법 적인 사고방식을 180도로 바꾸게 한 책이다. 『태백산맥』을 읽고 너무 좋아서 『아리랑』 한 질을 샀었다. 아리랑을 읽고 한겨레신문에 연재 중이던 『한강』을 읽기 위해 신문 오는 날만 기다렸었다. 한겨레신문이 창간될 때부터 구독을 했었기에 가능했었다. 몇 년 전에 『정글 만리』를 읽은 후 최근작은 읽지 못했다.
조정래 작가의 거침없는 표현에 감동한다. 장편이 아니면 소화할 수 없는 문장력에 빠져든다. 일제 강점기의 농민들 수난사, 빨치산 사람들 이야기는 내게도 익숙한 구전인데도 대 작가의 필력에 주눅 든다. 소설을 읽었지만 줄거리조차 일목요연하게 새길 수 없었던 나는 『땅과 사람의 역사』에서 다시 새기게 된다.
마당을 걸었다. 파랗게 돋을새김 한 잔디밭은 풀밭이다. 지칭개도 보리뱅이도 쑥쑥 꽃대를 올렸다. 민들레는 바람이 불 때면 잔털을 잔뜩 단 씨앗주머니가 바람을 따라 날아다닌다. 푸른 봄이 깊어지는 나날, 자연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눈이 맑아진다. 물 조리개를 찾아 텃밭 가에 둔 모종에 물을 준다. 내일 아침에는 이식을 해야 하리라. 싱싱하게 넝쿨을 뻗는 더덕에게도 물을 준다.
더덕은 몇 년 전 홍 작가가 선물한 어린 뿌리였다. 잘 키우고 싶었는데 몇 뿌리는 가뭄을 이기지 못하고 삭은 것 같다. 애달프다. 다행히 그가 정성을 들인다. 그가 심었기에 애정이 생겼나보다. 『태백산맥』에서 작가는 남자는 들일을 하고 여자는 텃밭을 가꾼다는데 그는 텃밭도 자신이 관리하고자 한다. 그는 머슴을 자처하는데 나는 마님일까. 만약 내가 마님이라면 머슴이 마님 말을 들어야 하지 않는가. 머슴이 잔소리하면 마님은 주눅 든다. 머슴이 마님을 가르치고 닦달하니 얄궂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