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옷이 뜯어지면 엄마 손을 빌리지 않고 재봉틀로 기워 입었어요. 아버지의 헌 바지와 털실로 인형을 만들기도 했지요.”
그러나 어머니와 할머니는 “여자가 손재주가 많으면 팔자가 사납다”며 안정적인 전문직이란 이유로 약사가 될 것을 권했다. 그러나 그는 손을 쉬지 않았다. 결혼하고 처음 산 물건이 재봉틀. 그것으로 식탁보니 의자 커버를 만들고, 남편 양복바지와 아이들 옷도 만들어 입혔다. 대학 때 미팅에서 만난 남편에게 제일 먼저 선물한 게 인형. 손에 쥐고 다닐 수도, 걸어 놓고 볼 수도 있는 마스코트 고양이 인형이었다. 그러다 진도에서 생활할 때 본격적으로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고, 인터넷을 통해 인형작가가 되었다.
“진도에 갔을 때 처음에는 좋았지만 바다 구경도 하루 이틀이지 단조로운 생활이 점점 답답해졌어요. 병원 사택에 살았는데, 여름이면 벌레들이 방충망에 잔뜩 달라붙고 태풍이 불면 전기가 나가 무척 불편했죠. 큰딸이 세 살, 둘째 딸을 낳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아이들 주려고 토끼 인형을 만들다 새로운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2000년 3월 14일 화이트데이 때 남편이 홈페이지를 선물했어요. 기록한다는 의미로 내가 만든 인형들의 사진과 만드는 법을 홈페이지에 올렸는데, 의외로 인기를 끌더군요. 인터넷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인형 만들 재료가 필요한데 어디에서 구해야 하느냐고 도움을 요청했더니 진도까지 거저 재료를 보내 주시는 분도 계셨어요.”
그는 스승 없이 혼자 연구하며 인형작가로 성장했다. 처음에는 코에 구슬을 집어넣고, 입은 바느질로 눌러 입체감을 표현하다 점차 인형들의 표정이 세밀해지며 사실적이 되어 갔다. 솜을 집어넣은 천을 바늘땀으로 조각하듯 입체감을 준 다음 천을 덧씌웠다. 피부 표현을 위해 저지 원단에서 트리코트, 스판덱스, 펠트를 거쳐 스타킹 원단에 이르기까지 재료 실험을 계속해 주름살과 표정까지 생생하게 담아내는 재료를 찾았다. 빳빳한 닥종이로 손톱과 치아도 재현했다. 인형의 옷은 직접 천을 염색한 후 만들어 입혔다. 팔과 다리는 단추를 이용해 관절이 움직이게 했다. 인형을 처음 만들기 시작한 1999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는 실험 정신으로 계속 진화하고 있는 게 그의 인형의 특징. 이 인형에 자신이 처음 인터넷을 할 때 사용했던 ID ‘초록’이란 이름을 줬다.
혼자 인형을 만들던 그가 인형작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인터넷을 통해서였다. 새로 인형을 만들 때마다 인터넷을 통해 발표해 바로 사람들의 반응을 살필 수 있었고, 그게 그대로 ‘작품 포트폴리오’가 되어 작가로서 경력을 인정받은 것. 그 덕분에 처음부터 기성작가로 인형 전시회에 참가하고, 인형 제작법에 관한 책도 냈다.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사람의 주선으로 세계대회에도 참가했다. 2004년 세계적인 인형 콘테스트인 독일의 ‘막스 오스카 아놀드 예술상’에 출품해 그는 두 개 부문에서 최고상을 받았고, 2005년에는 이탈리아 ‘테디 베어와 아티스트 인형 콘테스트’에서 1등상을 수상, 2006년에는 다시 독일 ‘막스 오스카 아놀드 예술상 ’중 수상 작가들만 출품하는 부문에서 최고 작품상을 받았다.
2004년 ‘막스 오스카 아놀드 예술상’ 중 ‘최고 청소년 모습 표현 부문’에서 수상한 인형은 개량한복 윗도리에 실크 원단의 2단 겹치마를 입고 챙 넓은 모자를 쓴 소녀로 동서양이 적절히 섞인 모습이다. ‘최고 미니어처 부문’ 상을 받은 ‘졸고 있는 아기 꽃 요정’은 머리를 맞대고 자는 아기들의 오동통 귀여운 모습과 홍화를 이용해 분홍과 보라로 천연염색을 한 옷이 조화를 이룬다. 2006년 최고 작품상을 받은 ‘탈춤을 마치고’는 현재 독일의 박물관이 영구 소장-전시 중이다.
“영화 <왕의 남자>를 보고 주인공 장생을 모델로 만든 작품이에요. 장생이보다는 나이 든 남자의 얼굴이지만요.”
인형의 사실적 표현 위해 해부학까지 공부
탈춤을 마친 남자의 허허로움이 느껴지는 인형으로, “얼굴과 손의 주름까지 잘 살렸다”는 평을 얻었다. 이번 ‘세계 인형 대축제’에는 신윤복의 풍속화를 보듯 옛 풍습과 복장을 고스란히 되살린 작품들을 많이 전시했다. 그의 인형은 천편일률적인 표정을 하고 있지 않다.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울고 있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장난스럽거나 샐쭉한 표정을 짓는 등 가지각색이다. 그러면서도 모두 아기천사들처럼 사랑스럽다. 인형에는 3남매의 엄마인 그와 아이들의 모습이 언뜻언뜻 드러난다. 엄마가 만들고 있는 인형을 보고 아이들이 “저건 나야”라고 꼭 집어서 말한다고. 어떻게 바느질하느냐에 따라 표정이 이리저리 달라지는 인형. 그는 “한땀 한땀 바늘을 놀리는 데 따라 표정이 살아나는 게 인형이 하나의 생명체 같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인형작가가 된 것은 남편과 아이들 덕분이라고 했다.
“작은애가 언니하고 놀면서 제게 시간을 줬기에 이 일을 시작할 수 있었죠. 이제 세 살인 셋째는 그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내내 인형을 만들어서인지 특히 집중을 잘하는 것 같아요. 남자 아이인데도 조용히 책 읽는 것을 좋아해요. 세 아이 모두 엄마 인형을 ‘작품’으로 인정하고 함부로 만지지 않습니다. 도와주겠다고 나서기는 하지만.”
거실에 책상을 내놓아 아이들이 그곳에 앉아 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동안 그는 인형을 만든다. 정형외과 의사인 남편은 그의 가장 날카로운 조언자. 해부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두개골 구조가 이상하다” “팔다리가 너무 길다”고 지적한다. “인형은 보통 사람보다 날씬하게 만든다”고 항변했지만, 결국 그도 해부학을 공부해 인체와 흡사한 사실적인 인형을 만들게 됐다.
여러 가지 재료 중 헝겊으로 인형을 만드는 것에 대해 “헝겊은 따뜻하잖아요?”라고 말한다. 어머니가 하시던 양장점에서 쉽게 자투리 천을 구할 수 있었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 녹아 있기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느질하거나 인형을 만드는 사람 중 악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는 그는 세계 곳곳의 인형작가와 교류하는 것도 이 일의 즐거움 중 하나라고 말한다. 독일의 할머니 인형작가와 친해져 이번 ‘세계 인형 대축제’에 초청했고, 미국의 인형작가 협회에도 가입해 전시회에 참가할 예정. 세계 작가들과 교류하다 보니 ‘우리 것’에 더욱 천착하게 되고, 사극을 볼 때도 그냥 봐 넘기지 않고 자신의 인형에 응용한다고 말한다. 그는 오랜 실험 끝에 찾아낸 자신의 인형 만드는 법을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그걸 보고 연구해 자신만의 인형을 만드는 사람이 많아지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다. 그의 인형은 한 점에 수 백만 원을 호가하지만 잘 팔지는 않는다. 지금은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면서 작가로서의 이력을 만들어 가는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제 인형은 하나하나 세부 표현에 치중해 좀 산만한 느낌이에요. 얼굴 표정에 집중시키려면 다른 부분은 과감히 추상화할 필요도 있을 것 같아요.”
그의 인형은 지금도 진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