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감찬장군 단소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 강감찬장군 묘역 입구에 위치한 사당과 사적비 모습 |
강감찬 장군의 묘는 잠시 실전되었다가 1963년 후손들이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玉山面) 국사리(國仕里)에서 묘소의 지석(誌石)을 발견한 후, 1964년 분묘를 만들고 1967년 비를 건립한 것입니다. 여기서 실전(失傳)한 이유는 강빈옥사(姜嬪獄事)를 들 수 있습니다. 강빈은 강감찬장군의 17대 손이 되는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입니다. |
|
|
▲ 홍살문을 지나면 정면에는 사당이, 우측에는 강감찬장군 묘역이 보입니다. |
1645년 인조 23년에 소현세자와 세자빈인 강빈이 청나라에서 풀려나 귀국한 후, 인조의 후궁 조소용(趙昭容)과 반목하던 중 소현세자가 죽었습니다. 이것을 기화로 강빈이 세자를 죽이고, 또한 왕실을 저주한다고 무고하여 후원에 유폐되었다가 1646년 3월에 왕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
|
|
▲ 인헌공 강감찬 장군의 사당인 충현사(忠顯祠) 전경 |
|
|
▲ 사당 좌우에 위치한 숭모비와 사적비 모습 |
옥사가 일어나자 삼족을 멸하는 화가 두려운 강감찬 장군의 후손들이 변성도 하고, 조상의 묘소에도 성묘를 안 하게 되니까, 이로부터 점점 잊혀져 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잠시'가 아니라, '300여 년' 이나 흐른 것입니다. |
|
▲ 강감찬장군 묘역 전경 |
그 후 국사리 주민들에 따르면 마을에는 이전부터 '유명 장수의 무덤이 동네 산자락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전설이 구전되어 왔습니다. 또 마을 이름도 '나라의 큰 벼슬을 한 인물이 났다'는 뜻에서 '국사리'(國仕里)입니다. |
|
|
▲ 사적비를 지나면 바로 묘역이 있습니다. |
▲ 강감찬장군 묘역 뒷편에는 오래되지 않은 후손의 묘역(?) |
금주 강씨 후손들은 이같은 구전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난 1963년 일대 묘지를 수소문 하던 끝에 '姜邯贊'(강감찬) 이름이 쓰여진 지석(誌石)을 발견해서 강감찬 묘로 삼았던 것입니다. |
|
▲ 강감찬장군 묘역이 실전되었다가 지석이 발견되어 이 곳에 단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
또한, 당시 문화재 위원들도 이를 인정했기 때문에 청원군은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충북도에 건의했으나,세월이 흐르면서 새로 구성된 문화재위원들은 강감찬 묘역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에 대해 반대를 했습니다. |
|
|
▲ 강감찬장군 단소 |
▲ 강감찬장군 추모비 |
|
|
▲ 묘역 내 석물 모습 |
▲ 묘역 전방 우측면에서 바라 본 모습 |
위원들은 '지석 글씨가 너무 망실돼, 글자 판독이 어렵다' 는 점을 주된 이유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현재는 여기까지 진행된 채 더 이상의 진전은 없습니다. 다만, 청원군이 제사 비용을 대주는 등 관리를 대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
|
▲ 강감찬장군 단소 뒷편에서 내려다 본 모습 |
강감찬장군 단소 위치도 |
|
화살표 ↑ 부분의 봉분이 강감찬장군 단소입니다. 소재지 : 충북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 산26-2 |
|
지도 중앙의 화살표 위치에 강감찬장군 단소가 있습니다. 오창IC나 서청주IC를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