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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신부다
이사야 61:10-62:5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탄 후 첫째 주일’이며, 송년주일이다. 52주일의 마지막 주일이다. 한 해를 돌아보면 항상 아쉽고 서운하다. 좋은 일이 많았어도 서운하고, 궂은 일이 많았어도 서운하다. 그래서 한 해를 보내는 사람의 마음은 예외 없이 ‘다사다난’을 말하게 되는 모양이다.
우리는 시간을 셈하여 나이를 먹고, 날을 따져 해를 바꾸지만, 헬라어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시간은 ‘크로노스’다. 그리스 신화에서 ‘크로노스’는 시간의 신 이름이기도 하다. 큰 복을 받으려면 크로노스를 붙잡으라는 말이 있다. 누구든지 시간의 신을 붙잡기만 하면 행운을 얻는다.
어떻게 그 신을 붙잡을까? 비결이 있다. 머리카락을 움켜잡는 것이다. 주의할 것은 크로노스는 앞에만 머리카락이 있고, 뒤에는 머리카락이 없다. 그러니 크로노스가 앞에서 다가올 때 재 빨리 움켜쥐어야지, 이미 지나가고 난 다음에 쫓아가면 결코 붙잡을 수가 없다. 즉 시간은 미리미리 대비하며 살면 복이 있고, 흘러가고 나면 별 볼 일이 없다는 교훈이다.
그래서 시간을 관리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미카엘 엔데 <모모>이야기가 비결을 가르쳐준다. 어른을 위한 동화 <모모>는 회색 사나이라는 시간 도둑들과 그들이 훔친 시간을 인간들에게 찾아주는 꼬마 소녀 모모에 관한 이야기이다. 회색 사나이들은 평소 낭비되는 시간을 절약해 시간저축은행에 적립해 두었다가, 노년에 찾아 쓰라고 사람들을 유혹한다.
이발사 푸시에게는 이렇게 시간을 절약하도록 권한다. 고객 한 사람당 시간을 30분에서 15분으로 줄일 것, 가는귀를 먹은 노모와 함께 하는 시간을 한 시간에서 15분으로 줄일 것, 날마다 15분씩 보살피던 앵무새를 버릴 것, 잠들기 전 15분 동안 할 일을 돌아보는 것도 그만둘 것... 이런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은 촌분의 시간을 아껴 돈을 벌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러나 점점 시간의 노예가 되고 만다.
시간을 경제성과 실용성으로만 따진다면 얼마나 삭막한가? 여유를 잃은 채 쫓겨 사는 인생은 참으로 각박하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달력을 잃어버리고 산다면 그 사람의 삶의 자리에 하나님이 서실 자리가 없다.
터키 격언이다.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이 세상을 위해 살고, 내일 죽을 것처럼 저 세상을 위해 살아라”. 현실의 삶에 지극히 충실한 것은 인간다움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모두 내려놓게 될 그 때, 미련 없이 자신을 비울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신앙이다. 지금 내게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아름답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
이 말의 또 다른 번역은 ‘기회를 사라’는 의미다. 기회가 왔을 때 최선을 다하라. 영어로는 “making the best use of the time”이다. 네게 주어진 시간을 최상의 것으로 만들라. 시간은 살아있는 사람만이 지닌 소중한 선물이다.
1)
오늘 설교 제목은 ‘네가 신부다’이다. 일찍이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고 나서, 유사 프로그램이 많이 나왔다. ‘나’를 앞세운 그 이름이 주는 의미는 자부심과 당당함일 것이다. 그런데 ‘너는 무엇이다’라는 프로그램은 안 나오더라. 만약 ‘너는 가수다’라고 했다면, 서로 인정하고, 격려하고 프로그램이 되지 않았을까?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후 최초의 사람에게 붙여주신 짝은 ‘돕는 배필’ 곧 신부였다. 아담은 그를 하와라고 불렀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결혼식에서 인용된다. 하와란 이름은 모든 신부의 대명사가 되었다.
첫 장면이 아담과 하와의 부부 맺기라면, 마지막 장면 역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이다.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성경은 끝없이 하나님의 상대자로서 인간을 향해 끊임없이 ‘네가 신부다’라고 말씀하신다.
‘네가 신부다’란 의미를 생각해보라. 이번 12월에 우리 색동교회에서 두 번 결혼식이 열렸다. 요즘 신부들은 얼마나 잘 웃던지, 자신의 기쁨에 충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부가 된다는 즐거움을 새삼 일깨워준 기회였다.
본문은 메시아의 강림으로 성취될 기쁨을 들려준다. 한 마디로 ‘네가 신부다’라고 말씀하신다. 이사야는 장차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혼인잔치에 비유한다. 이제 망가진 역사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되살아날 것이다.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61:10).
사실 혼인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다. 내 힘으로만 가능하지 않다. 유대인 사회에는 직업적인 중매인이 있는데, 이를 ‘샤도쿤’이라고 부른다.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중매쟁이는 누구인가? 그들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남녀 간의 사랑을 맺어주는 중매꾼 ‘샤도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란 자부심이 아주 강하다.
혼인이란 히브리어는 ‘키두싱’이다. 하나님이 행하신 성별이란 뜻인데, 모든 결혼에는 하나님이 참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르크 샤갈의 ‘혼인’이란 작품을 보면 신랑과 신부 사이에 천사가 함께 하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일찍이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아의 강림을 예언하였다. 그는 제3이사야라고 불린다. 과연 메시아가 오시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 메시아의 강림은 온전한 구원의 때이다. 구약의 표현대로 하면 새로운 시온이 시작된다고 하였다. 신약의 표현대로 하면 혼인잔치가 시작된다.
이제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버림받은 소박데기 같은 존재에게도 희망이 있다. 이제 메시아의 강림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놀라운 약속의 성취이다. 무엇보다 ‘네가 신부다’라는 부르심처럼 가장 존귀한 존재로 회복되는 일이다. 예전에 버림받은 시온 또는 예루살렘이란 이름에도 새로운 의미가 회복될 것이다.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62:3).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으로 예루살렘이 아름다운 면류관과 왕관처럼 변한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신부와 같이 변한다. 하나님의 손에 달린 일이다.
2)
혼인에 대한 비유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적절한 표현은 없다. 성경의 시인과 예언자들은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서 혼인 관계 비유를 거듭거듭 사용한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아 2:10).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 한 때,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있어서 열심이었다. 그 시절은 성실한 신부로 묘사되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렘 2:2).
그 후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신의에서 늘 벗어났다.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온 후 신뢰관계가 깨진지 오래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버리고 화려한 이방신을 따름으로써 혼인의 순정을 저버렸다. 신부 예루살렘은 부정하게 되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무섭게 책망한다.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라”(겔 16:3).
더 이상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마침내 자기 백성을 정죄한 끝에, 하나님이 배역한 이스라엘을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렘 3:8)다고 말한다. 무서운 징벌이 주어진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책망인가? 예레미야는 이렇게 예언한다.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를 내가 네 목전, 네 시대에 이 곳에서 끊어지게 하리라”(렘 16:9).
탈무드에 따르면 혼인은 여섯 가지 요소로 성립된다고 한다. 그 중 하나만 ‘애정’이고, 나머지 다섯은 ‘신뢰’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먼저 하나님에 대한 신의를 깨버렸다. 정절을 잃은 신부처럼 음란한 우상숭배를 일삼았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혼인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상징하는 세속적 이미지였다. 교부 암브로시우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 영혼의 태도를 ‘강가에 앉아 신랑을 기다리는 젊은 여인’으로 비유하였다. ‘톨레레게’ 성경운동을 대하는 마음이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신실함은 신랑과 신부가 서로에게 신의를 지켜야 하는 것과 같다.
3)
그런데 본문을 보라. 장차 달라질 모습이 삼삼하게 그려진다.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아의 강림으로 그런 이스라엘조차 새로운 존재가 된다고 말한다.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62:2).
하나님께서 새로 지어주실 시온의 이름은 헵시바와 뿔라이다(62:4). 헵시바는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는 뜻이고, 쁄라는 ‘결혼한 여인’이란 뜻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결혼한 연인들처럼 기뻐하신다고 한다.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62:5).
초대 교회에서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창조주를 향한 인간의 사랑을 혼인관계로 이해하였다. 더 나아가 그 사랑의 고백과 찬미를 그리스도와 교회로 관계 지어 해석하였다.
전도자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역할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매꾼으로 이해하였다. 복음 전하는 자기의 사명을 혼인 비유로 설명하면서 자신을 ‘샤도쿤’으로 자처한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고후 11:2).
세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된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불렸다. 믿음을 지킨 자들은 그리스도와 혼인으로 결합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환상과 묵시를 본 예언자는 어린 양과 신부의 혼인이 마침내 성취되리라고 선포한다.
‘톨레레게’를 경험한 교부 어거스틴도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의 아드님이 혼인하려고 한다. 그 혼인식에 자주 참여하는 손님들이 신부다.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떨리는 심정으로 신부의 자리에 선다. 신랑을 향해 노래를 불러줄 신부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금은 성탄절기다. 하나님이 내게 찾아오시어 이름을 불러주시는 때이다. 우리는 아기 예수를 그리스도로 맞아드림으로서, 그리스도인이란 새 이름을 얻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인정과 환대를 뜻한다. 성탄을 맞은 사람들은 서로를 축하한다. 그리스도가 너를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축하한다. 성탄일 하루 만이 아니다. 새로운 신부를 맞듯, 평생을 기뻐한다.
메시아가 다시 오시면 만물이 회복될 것이다. 죄인이 용서를 받고, 소박데기가 ‘나의 신부’라고 불릴 것이다. 참 구원의 사건이다. 우리의 삶도 누군가를 위로하고, 새 힘을 줄 수 있다. 하나님의 신부로, 반려자로 살아간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당당하고, 행복할까?
해가 바뀌어 2015년을 맞는다. 여러분 모두 고생과 수고가 많았다. 남은 사흘 동안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자. 돌아보니 우리 주위에는 길동무도 많고, 꿈 동무도 많더라. 내가 세상에 나눈 일보다, 세상의 사랑을 더 많이 받으며 살았더라.
무엇보다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결코 웃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웃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 그리고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하자. 하나님은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우리를 향해 약속하신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새해에 여러분이 걷는 길 위에서 늘 예수님을 만나고 동행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선물로 주신 시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은혜와 축복을, 위로와 사랑을, 용기와 도전을 경험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