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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기독교영성으로서 귀일생명신학을 찾아
- 이공 이세종과 다석 류영모, 그리고 동광원의 이현필을 중심으로 / 심중식 -
차례
1. 서론
2. 본론; 기존의 신학방법론에 의한 이공과 다석의 신앙과 영성
2.1 전기적 역사적 연구
2.2 성서신학과 해석학적 연구
2.3 영성신학적 연구
2.4 조직신학 또는 구성신학적 접근
2.5 이공과 이현필, 그리고 다석의 관계
3. 새로운 연구방법의 필요성
4. 한국적 영성, 귀일생명신학으로 보는 요한복음의 특징
5. 결론
1. 서론
지난 2022년 11월 대화형 인공지능인 쳇지피티(ChatGPT)가 출시되어 바야흐로 인공지능과 더불어 사는 시대가 되었다. 장난삼아 현대의 위기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1)기후 변동: 기후 변화는 현대문명의 가장 큰 위기 중 하나입니다. 온실가스, 대량 생산 및 소비, 자원 낭비 등이 지구 온난화를 일으켜, 기상이변, 해수면 상승 등의 문제. 2)자원 고갈: 인구 증가와 경제 발전으로 인해 에너지, 물, 식량 등 자원의 수요가 급증하고, 이로 인해 자원 고갈 문제. 3)환경 파괴: 산림 파괴, 생물 다양성 감소, 생태계 붕괴 등의 환경 파괴의 위협. 4)사회 불평등: 부의 불균형과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는 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교육, 건강, 기회 등의 영역에서도 나타나 사회적 불안정. 5)기술 남용과 윤리 문제: 인공지능, 생명공학, 사생활 침해 등의 기술적 위험과 윤리적인 문제 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현대의 문제점과 위기상황을 진단하는 일은 누구나 공감하는 바가 되었지만 우리는 어떤 탈출구 또는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을까 하는데 뚜렷한 지침을 갖지 못한다. 그동안 기술과 문명 기기의 발달로 지구촌에 80억 인구가 살면서 지구라는 행성에 기생할 수 있게 되었지만 바로 그 영향 때문에 지구라는 행성이 몸살을 앓고 있다. 따라서 지구와 생태계 회복을 위해서는 인구를 줄이고 활동을 제한해야 하지만 인간의 욕망과 욕구를 누가 제한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한때 산아제한을 주장하다가 이제는 저출산으로 인구가 줄어들자 국가경쟁력 저하를 염려하며 출산을 장려하고 있다.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일까. 이렇듯 현대위기의 원인은 현대문명의 동력이 된 인간의 욕망과 활동의 관성 때문이다. 즉 산업혁명이후 진행되어온 가치관과 세계관의 문제인데, 기술문명을 가지고 자연을 개발하고 정복하여 인간의 욕망을 무한히 추구하고 충족할 수 있다고 믿는 낙관론이다. 이런 낙관론은 오늘날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호모데우스를 넘어 트랜스휴머니즘이 출현했고 전기자동차 회사인 테슬라를 창업한 일론 머스크는 지구촌을 떠나서 화성촌을 개발하자는 인류의 화성 이주계획의 비전과 구체화의 꿈을 꾸고 있다.
현대사회의 병폐를 진단하면서 하이덱거는 존재망각의 시대라고 하고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물론 이때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 우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니체가 말한대로 우리 문화속에 이미 하나님은 사라졌고 죽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다. 신은 죽었다. 죽은 신은 하나님이 아니다. 과학기술문명의 도래와 더불어 추방된 하나님, 과학기술문명이 죽여버린 하나님, 그 하나님이 다시 살아 일어나실 부활의 날은 언제나 올 것인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부활을 기다리는 현대인들에게 아마도 3백년은 지나야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이덱거는 예언한다. 존재망각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구원의 손길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올 것인데 그 하나님을 모시는 그 성스러움의 공간을 찾으려면 전혀 새로운 사유방식이 필요할 것이고 지금의 철학과 과학과 종교적 사유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 길이 무엇인지는 하이데거 자신도 모른다고 하였다.
이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하이데거처럼 새로운 사유의 길, 영성의 길을 모색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서양에서 찾지 못한 그 길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왜냐면 우리는 전혀 다른 사유와 문화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산업화 이전에 살았던 이땅의 영성가들의 삶과 신앙을 살펴볼 것이다. 그들을 통해서 우리의 지나온 날들을 반성하면서 새로운 문화의 대안으로 새로운 사색과 영성의 길, 제3의 길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다. 그래서 19세기 말 20세기 초반에 태어나신 기독교 영성가 이공 이세종과 다석 유영모, 그리고 동광원을 창설한 이현필의 삶과 신앙을 일별해 보기로 한다. 이들에 관하여 기존의 연구방법과 연구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방법론으로서 문화신학과 해석학에 기반을 둔 구성신학의 창조적 변용으로서 경전비교해석학을 제시하며 한국적 영성을 새롭게 조명할 새로운 신학의 가능성을 모색할 것이다.
2. 본론; 기존의 신학방법론으로 보는 이공과 다석의 신앙과 영성
2.1 전기적 역사적 연구
가. 이공 이세종의 삶과 신앙
이공의 생애와 그 활동 그리고 그가 영향을 미친 사람들에 관한 조사로 이공에 관한 연구를 처음으로 진행했던 분이 엄두섭목사이다. 그는 <호세아를 닮은 성자 이세종 전>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이공을 알렸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이현필의 저작인 <우리의 거울>이 바탕이 되었고 또 이현필에게 들었던 제자들의 기억이 엄두섭목사의 면담을 통한 기록으로 보충되어 나온 작품이다. 앞으로 이세종의 생애에 대하여 잘못된 점이나 왜곡된 점 또는 새로 밝혀진 점들이 추후 연구로 보강될 수는 있을 것이나 자료의 한계로 쉽지는 않을 것이다.
엄목사님의 저서로 이현필과 이세종의 신앙이 신학계에 알려지자 윤남하는 1992년 <현대종교>라는 잡지에 ‘묻혀진 거룩한 혈맥을 찾아-이공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하였고 이어서 교회사를 전공하신 호신대 차종순교수는 2010년에 ‘성자 이현필의 삶을 찾아서’라는 책을 집필하여 이공과 이현필의 관계를 밝혀놓았다. 그리고 2018년에 신명렬 장로가 단행본으로 <이공 성자와 여인들>을 출간했다. 이처럼 앞으로도 계속하여 이공에 대한 연구와 저작들이 계속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전기적 연구에 더하여 교회사적 연구방법이나 성서해석학 또는 조직신학 방법 등이 추가될 수 있겠다.
▲ 엄두섭 목사와 그가 설립한 은성수도원 © 뉴스파워 |
사람은 누구나 시대적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신앙의 역사도 굽이굽이 굴곡이 있는바 성령의 역사로 기록되는 한국 교회사를 이해하지 않고 이공의 신앙을 따로 떼어서 이해하려 한다면 충분하지 못하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즉 일제 강점기의 상황과 신사참배 강요, 그에 대응했던 교계의 활동과 결정 등이 이공의 삶에 영향을 주었을 터인데 이를 제대로 고려해야만 이공의 삶과 신앙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 것이다. 이런 부분을 보충하여 이공의 삶과 신앙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작품들이 나오길 기대한다. 다행히 이공의 제자 이현필의 삶과 신앙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차종순박사에 의해 문헌과 증언의 검증을 거쳐 <한국적 영성의 뿌리를 찾아서,이편필의 삶과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나. 다석 류영모의 삶과 신앙
1) 다석의 생애
1970년대 씨알의 소리로 유명한 함석헌(1901~1989)의 스승으로 알려진 다석은 1890년에 태어났으니 이공 이세종(1877~1942)과는 십여년 차이가 난다. 2000년 서울서 열린 세계 철학자 대회를 계기로 다석 류영모와 함석헌은 한국의 현대 사상가로 자리매김 되었다.
다석은 16세에 기독청년회(YMCA) 초대 총무인 김정식의 인도로 연동교회에 출석하여 세례를 받고 20세에 남강 이승훈선생의 초청으로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봉직하면서 수학 물리 천문학 등을 가르치면서 또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여 남강 이승훈(1864~1930)선생도 기독교인이 되었다. 오산학교에 근무 시절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불경과 톨스토이 작품 등을 읽게 되었다. 이때부터 서구신학에 대한 비판이 싹트기 시작하고 자신의 신앙을 고민하였다. 22세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물리학교에서 수학하며 무교회자로 알려진 내촌을 알게 되었다.
32세에는 조만식 선생의 뒤를 이어 오산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때 학생으로 만난 사람이 함석헌이다. 이후 함석헌은 일생 유영모를 당신의 스승으로 극진히 모시고 함석헌에 대한 다석의 제자 사랑도 극진하였다. 40대에는 창주 현동완(1989~1963)선생의 간청으로 YMCA의 선생이 되어 현동완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35년 동안 연경반 강의를 진행하였다. 현동완 선생은 세계의 성인들과 그 유적들을 찾아보기 좋아했는데 해방 후 다석을 모시고 광주 동광원을 찾았다. 다석은 이현필의 안내로 화순을 찾아가 이세종의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이를 계기로 다석은 해마다 이현필이 세운 광주 동광원을 강사로 방문하여 말씀을 전했다. 1971년 여름수양회 강사로 찾아간 것이 마지막인데 이때의 강의가 녹음으로 남아서 <다석 마지막 강의 므름브름프름>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2) 다석의 중생체험
다석은 45세 되던 1935년에 선친이 운영하던 솜틀집을 정리하고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로 귀촌하였다. 시골에서 농사짓고 은거하던 중에 1942년 1월 4일 중생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때의 체험을 정리하여 그는 김교신의 성서조선 157호인 1942년 2월호에 ‘부르신지 38년 만에 믿음에 들어감’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그 글 가운데 한 대목을 소개한다.
믿음에 들어간 이의 노래
나는 시름없구나. 이제부터 시름없다. 님이 나를 차지(점령)하사 님이 나를 맡으셨네(보관). 님이 나를 가지셨네(소유). 몸도 낯도 다 버리네. 내 것이라고는 다 버렸다. 위이무位而無 탈사아脫私我 되어 반짝 빛!
1942년 1월 4일 중생한 체험을 기억하여 요한복음 1장 4절을 자신의 말씀으로 삼고 그때부터 일좌식과 일언인의 하루살이를 시작하였다. 그해 3월에 <성서조선>에 김교신이 ‘조와’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일제가 그 글을 문제 삼아서 잡지를 폐간시키는 이른바 성서조선 사건 때문에 다석도 두어 달을 서대문 형무소에 고생했다.
1955년 다석은 자신의 사망 예정일을 발표하고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1974년까지 20여년을 계속했다. 이렇게 나온 것이 <다석일지>이다. 그가 묵상하고 얻은 생각을 기록했다가 금요일이면 YMCA 연경반에 가서 한글이나 한시로 적어놓고 자기의 체험을 전하며 강의를 하였다. 그가 하는 말은 세상의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세간을 벗어난 순수 체험이었다. 자기의 그런 체험을 우리말로 표현하려고 순우리말로 된 한글시를 많이 지었다. 적당한 우리말이 없어 표현이 어려울 때는 스스로 지어내기도 하였다.
3) 다석은 누구인가?
다석 선생이 무릎을 딱 굴하고 앉아서 말씀하시면 서너 시간은 보통이고 어느 때는 새벽부터 밤이 될 때까지 쉬지 않고 말씀을 전했다 한다. 다석이 앉아서 말씀을 전하는 모습을 마치 알을 품고 있는 어미닭의 형상으로 보고 현재 김흥호는 ‘나알알나’, 또는 ‘날알알나’라고 했다. 나를 알면 알을 낳게 되고 알을 낳으면 날 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다석은 자기 자신의 형상을 다음과 같은 한시로 표현했다.
수출고고영현외首出高高領玄外 요긴심심이황중腰緊深深理黃中
(머리는 옷깃 위로 높이 솟아 우주밖에 두고 허리를 졸라매어 깊고 깊은 땅 가온을 잡았네)
다석은 또 스스로 만든 5가지 질문을 통해 자기가 누구인지 말했다.
(1) 어디서 살았나? 빈탕한데서 살았다. 우주의 허공을 생각하고 그 허공을 감싸고 있는 빈 마음을 빈탕이라 했다. 그리고 한데는 이 우주 밖의 세계요 또한 선생님의 사상이 근거하고 있는 터를 말한다. 그래서 빈탕 한데, 거기서 사는 사람이 다석이다.
(2) 언제 살았나? 하루를 산다. 어제를 사는 것도 아니고 내일을 사는 것도 아니고 오늘이라는 하루, 영원이라는 하루를 산다.
(3) 어떻게 살았나? 목숨을 키우며, 생명을 살리며 살았다. 다석의 사상과 철학은 한 마디로 숨철학이다. 목숨, 말숨 우숨의 생명이다. 무상생無常生이요 비상명非常命인데 지상처중知常處中이 되면 무비생명無非生命, 어느 것이나 생명 아님이 없다.
(4) 왜 사는가? 한숨이룸이다. 이룸이란 사람의 이름이라 생각하지만 이름이란 속에 도달의 뜻을 생각했다. 인격의 성장과 인격의 완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이 우주가 하나로 통하는 한 생명을 이루어 만물과 한몸이 되는 절대의 사랑으로 사는 것이 한숨이룸이다. 이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5) 무엇을 하며 살았나? 다석은 생각하는 것을 말숨 쉰다고 하는데 언제나 말숨을 쉬며 살았다. 새벽이면 일어나 성령의 숨님을 받기까지 생각을 했다. 생각은 그냥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몸과 맘과 뜻을 바쳐 그리워하는 것이다. 체조 정조 지조를 통해 생각하고 물음 부름 푸름을 통해 생각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말씀이다.
2.2 성서신학과 해석학적 연구
가 이공의 성서관
<우리의 거울>, 또는 <호세아를 닮은 성자 이세종전>에 따르면 이공이 성경에 대하여 가르친 내용이 전해진다. 이공은 성경해석에 대한 의견이 달라질 수 있기에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함부로 성경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전하려 하지 않았다. 성경과 말씀에 대해 의문이 있으면 각자 기도에 힘써서 성령께 직접 구하라고 하였다. 혹 자기의 깊은 속마음을 나눌 제자들에게만 은밀히 전하면서도 그것을 자기에게 들었다고 하지 말라고 하였다. 자기는 성령의 감동으로 받은 생각이지만 자칫 교회의 가르침과 어긋난다고 하여 분란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조심스런 이공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제자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가장 바른길로 인도하기 위한 말씀을 골라서 자기가 풀이한 내용을 가지고 한 것인바 혹 그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나 전통적 주석과 다른 것이라 하여 잘못되었다고 정죄하거나 폄훼할 수 있을까. 물론 이공은 학문적 수련이나 제도적 학교의 현대적 배움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다.
이공은 무학이라고 할 만큼 배움이 없지만 공자는 말하길 지식을 가진 사람이 배운 사람이 아니라 인격이 된 사람을 배운 사람이라고 했다. 이공은 성경을 읽으면서 한글을 깨쳤고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면서 지혜를 얻고 인격자가 되었다. 그가 때로는 교회에 가서 설교 말씀도 듣고 사경회에 가서 성경공부도 했지만 체계적인 신학지식이나 성경지식을 갖춘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차정식 교수나 정경옥 교수가 지적한 대로 그의 성경해석에는 지나친 알레고리도 있을 수 있고 맥락을 잘 못 이해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실로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삶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함을 추구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공은 학자가 아니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요 진실한 구도자요 진정으로 예수님을 존경한 인격적 제자요 진실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추구한 영성가라 할 것이다.
▲ 이공 이세종 기도처
한일장신대학교의 성서신학자인 차정식 교수는 “이세종 선생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한 성서신학적 분석 및 평가”라는 논문을 통해이공의 특징으로 성서중심주의에 입각한 회심과 비움의 영성 그리고 자연만물과 화해하는 생태적 영성, 금욕적 고행의 영성, 초월적 영성이라 평가하였다. 또 이런 이공의 영성과 신앙은 일상적 삶과 분리되지 않는 회통과 일치의 모범이지만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공동체 운동으로서는 미약했다고 지적했다.
2) 다석의 성서관
이기상 교수는 다석 사상의 특징을 “태양을 꺼라”는 한 마디로 압축한다. 태양빛이 밝은 것 같아도 사실은 영원한 별빛을 볼 수 없게 가리고 있지 않느냐는 다석의 말씀을 되새겨 ‘존재중심의 사유로부터 해방’을 주장한 사람이 다석이라 하고 이것이 또한 다석사상의 철학사적 의미라고 해석한다.서양의 존재중심의 사유구조로 말미암아 놓쳐버린 없음, 무, 공, 빈탕의 의미를 되살려 성스러움의 공간으로 회복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석의 신관은 <다석일지> 곳곳에 나타나는 ‘없이 계신 하나님’이라고 표현된다.
‘서양 사람은 없음(無)을 몰라요. 있(有)만 가지고 제법 효과를 보지만 원대한 것을 모르고 그래 갑갑하기만 하지요. 무극이 태극, 태극이 무극, 오묘한 것은 여기 있습니다. 시작과 끝점이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다석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계시된 말씀으로 보지만 문자주의적 성서관은 아니다.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과 성령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당시의 언어문화적 환경에서 적어놓은 글이기에 문자에 매달리면 안 되고 그 뜻을 알아야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한없이 좋아하고 늘 묵상하며 그것을 우리말로 고쳐서 따로 외우며 기도했다.다석이 로마서도 많이 읽고 강의도 했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은 요한복음이었다. 다석이 왜 그렇게 요한복음을 좋아했는지 요한복음의 신학적 특징을 이글의 마지막에 제시해 보았다.
없이 계신 하나님으로 표현되는 다석의 신관은 삼위일체 신관이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서구신학과 같은 용어지만 그 해석 내용은 차이가 많다. 즉 서구신학에서 삼위일체는 존제론적 형이상학의 이론이지만 다석의 삼위일체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실천적 체험적인 삶의 증거요 증언이다. 하나님과 하나됨의 합일의 체험이요 그 하나됨과 하나의 의미를 깊이 파고들며 하나가 무엇인지 그 뜻을 알리고자 애를 썼다.
‘사상에는 동양이니 서양이니 하는 수식어를 달 필요가 없다. 사상은 다 하나를 담아 영원한 것이다. 사상이라는 것이 나온 것도 다 영원한 하나를 찾자고 나온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다석은 동양의 경전들도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의 감화로 된 책이라 본다. 즉 <논어>의 주인공인 공자나 <맹자>를 쓴 맹자도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그런 진리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은 인류 전체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지 이스라엘의 역사만 주관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민족의 역사를 태초부터 지금까지 이끌어오신 분도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끄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유교 경전이나 노장의 글도 우리는 구약성경이나 마찬가지로 선지서로 받아들여다 된다고 하였다. 혹자는 이를 잘못 해석하여 다석을 종교다원주의 선구자로 보기도 하지만 다석의 제자 김흥호는 결코 다석을 다원주의자로 볼 수 없다고 한다. 다원주의는 서구신학자의 입장에서 타종교와의 관계를 놓고 주장한 존 힉의 이론인데 다석사상을 서구신학의 틀에 맞출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될 일이다.
다석이 성서에서 발견하고 만나게 된 그리스도 예수는 또한 ‘없이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이다. 아빠의 아들로 성령을 믿은 이요, 선악과 생사의 한 가운데로 솟아오를 길이 있음을 믿은 이요, 참 말씀을 믿은 이요, 한 뜻 계신 아버지, 없이 계심을 믿은 이다. 예수는 또한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한 ‘한나신 아들’이다. 독생자 예수를 다석은 한나신 아들이라고 표현한다. 독생자 예수, 즉 하나신 아버지의 아들을 소개하기 위해서 다석은 1971년 동광원 여름 수양회 동안 일주일에 걸쳐서 강의한 것이 다석의 마지막 강의였다.
2.3 영성신학적 연구방법
개신교 신학에서 가톨릭의 수도원적 영성에 관해 부정적으로 보아온 것도 사실이다. 신학교에서도 개혁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수도 영성을 도외시 해왔다고 한다. 왜냐면 루터 등 종교개혁자들은 수도원의 영성을 중세의 펠라기우스적 입장과 같은 것으로 보고 배척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석대학교 최형걸 교수는 “기독교 영성에 대한 이해”라는 글에서 개신교가 가졌던 영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고자 했다.
그럼 영성이란 무엇인가? 이강학 교수는 ‘기독교영성학과 이세종의 영성’이라는 글을 통해 샌드라 슈나이더스(Sandra Schneiders)의 글을 인용하여 기독교 영성을 설명하였다.
슈나이더스는 먼저 일반적인 영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 한다: “자신이 인식하게 된 궁극적 가치를 삶의 목표로 삼고 자기 초월을 통한 삶의 통합 프로젝트에 의식적으로 참여할 때 일어나는 경험”(the experienceof conscious involvement in the project of life-integration through self-transcendence toward the ultimate value one perceives).
이강학 박사는 이런 일반 영성을 기독교 영성에 적용할 때 나타나는 다섯 가지를 나열한다.
- 기독교 영성이란 곧 궁극적 가치로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 기독교 영성은 자기를 초월하는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 기독교 영성은 삶을 통합하는 프로젝트 안에서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 기독교 영성은 의식적 참여와 관련되어 있다. 의식적 참여란 자발적이고 의지적이고 인격적인 참여를 가리킨다.
- 기독교 영성의 주요소는 경험이다. 이 경험은 기독교 영성에서 구체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다.
이런 다섯 가지 원리를 적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독교 영성을 정의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영적 성장을 위한 영성훈련에 의식적으로 참여할 때, 은혜로 얻게 되는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한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반응들”이다.
가) 이공의 기독교 영성
이상과 같은 영성신학과 영성신학 방법론인 해석학을 가지고 이강학 교수는 이세종의 영성 지도에 관하여 연구한 사례를 발표하였다.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세종의 영성은 기독교 영성의 핵심과 닿아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이세종을 부르셨고 이세종과 함께 하셨으며 이세종을 통해 한국 교회에 말씀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된다. 이세종의 삶이 한국 교회에 던진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언자의 음성을 배척했던 유대인과 같은 모양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유은호교수는 2013년 발표한 “이세종의 생애와 영성사상 연구,”라는 글에서 서방 영성가의 영성에 비추어 이공의 영성이 기독교 영성임을 밝혀주었다. 유은호 목사의 연구에 따르면 이세종에게는 초기 사막의 수도자와 같은 금욕적 영성이 보인다는 것이다. 즉 금식기도와 순결생활을 실천하면서 가난을 실천했다.
가난한 청빈은 또 마음의 비움으로 연결되어 예수의 케노시스 영성을 보여준다. 성령체험을 강조하는 이공의 영성은 빈방이라야 빛이 환하게 들어오듯이 마음이 깨끗해야 성령충만이 될 수 있다는 허실생백의 원리로서 비움과 성령충만의 영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성령충만과 예수그리스도의 케노시스적 삶을 충실히 따랐다는 점에서 이공의 영성을 기독교 영성이라 한다. 또한 최광선 교수는 2014년에 발표한 “이세종 생태영성 탐구”라는 논문에서 이세종의 삶이 생태학적 영성임을 밝혀주었다.
나) 다석의 기독교 영성
이강학교수가 제시한 기독교 영성의 내용을 가지고 다석의 경험과 내용을 서술해 볼 수 있겠다.
- 궁극적 가치로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과 관련된 다석의 기독교 영성
이것은 다석이 52세되던 1942년 1월 4일의 경험을 연구하면 될 것이다. 더구나 그 내용을 그해 성서조선 잡지에 ‘부르신지 38년만에 믿음에 들어감’이라는 기나긴 글로 연재하여 쓴 것이므로 다석의 영성을 깊이 연구하는데 일차 자료로서 무궁한 가치가 있다.
아직 이 부분을 깊이 연구한 학자가 없는 것 같다. 앞으로 영성학자 및 신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한 분야라고 본다.
- 자기를 초월하는 경험과 관련된 다석의 기독교 영성
다석이 52세에 하나님을 만나서 중생을 체험한 다음부터 일좌식을 실천하면서 살게 되었다. 자기를 초월하는 경험을 하루살이로 표현하면서 그 내용을 일식 일좌 일언 일인이라 하였다.
일식주야통, 일좌 천지통, 일언 생사통, 일인 유무통이라 하였다.
즉 일식은 밤과 낮을 초월하는 일이고, 일좌는 하늘과 땅을 초월하는 일이요, 일언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고 일인은 있음과 없음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일식은 하루 한끼 먹는 일이요 일좌는 매일 새벽마다 기도 묵상하는 일이며 일언은 남녀를 초월하는 일이요 일인은 날마다 걸어다니는 일이다.
- 삶을 통합하는 프로젝트 안에서의 경험과 관련된 다석의 기독교 영성
삶을 통합하는 프로젝트는 곧 일생의 할 일, 사명을 자각하고 그 일에 매진하는 것이다. 다석은 중생을 체험한 뒤에 이제 이땅에서 무엇을 할까, 무슨 말을 할까, 아무 걱정근심이 사라졌다고 한다. 자기의 할 일이 뚜렷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날마다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서 실천하고 그것을 증거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날마다 하루 속에서 일생을 실천하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 의식적 참여와 관련된 다석의 기독교 영성
다석이 의식적으로 참여하고 자발적으로 의지적으로 인격적으로 참여한 일은 YMCA연경반이다. 날마다 성경과 경전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위로부터 얻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아서 매주 금요일이면 종로 청년회관에 나가서 두 시간 동안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 연경반을 통해서 김흥호도 나오고 함석헌도 나오고 박영호 유달영 등 수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그 가운데 김흥호는 다석의 강의를 들은지 3년 만에 귀가 뚫리고 6년 만에 눈이 뚫려서 1954년 3월 17일 계시체험을 받아 믿음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김흥호선생 또한 다석처럼 거듭난 중생체험 이후 일좌식을 실천하면서 12년 동안 사색 잡지를 펴내고 또 이화여대 연경반을 통하여 수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과 관련된 다석의 기독교 영성
다석이나 현재 김흥호나 모두 계시체험을 겪고 그것을 증언하고 증거하는데 일생을 보낸 분들이다. 계시체험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 체험이요 그것은 극적인 특수체험과 아울러 이후에는 계속되는 동행체험이었다. 즉 김흥호의 경우 1954년에 세 차례 하나님을 만나는 계시체험이 있었고 그 하나님 체험 이후에는 12년 동안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그리스도 체험, 또 그 다음에는 성령과 함께 하는 성령체험을 가지고 일생을 사신다고 하였다. 이것이 다석과 현재의 삼위일체 신앙의 특징이라 하겠다. 즉 다석과 현재의 기독교 영성은 삼위일체 영성이요 그것은 일생을 삼위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의 체득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으로 증거하며 사는 영성이다.
2.4 조직신학 또는 구성신학적 접근
조직신학 또는 교의신학이란 사실 개인의 신앙에 대한 연구 분석이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교의학 또는 조직신학에서 다루는 기본 질문은 신론, 기독론,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을 성경을 기반으로 학문적 체계적 이론으로 다루게 된다.
그런데 이런 조직신학은 여러 면에서 비판적 요소가 있다. 종교와 신앙의 세계를 합리적 이성의 논리적 구조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가. 합리적 논리 구조 안에 집어넣을 수 없는 부분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서구신학은 그리스철학 전통에 따른 명제적 진술의 체계화이기에 인간의 생동하는 삶을 담아낼 수 없는 근본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조직신학은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라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인간이 처해 있는 구체적 역사적 상황 안에서 성경이라는 계시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응답하는 삶의 방식을 신앙이라 하여 그 신앙적 삶과 관련된 주제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노력이 조직신학이다. 계시된 말씀은 절대적이요 불변의 상수가 되지만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말씀에 비추어 하나님의 뜻을 찾아 기도하는 신앙인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 즉 그리스도인이 처한 시대와 상황에 맞는 하나님의 뜻을 성령께서 그에게 새롭게 알려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역사적 시대적 응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볼 때 모든 신학은 절대의 상수가 아닌 상대적인 것으로 시대마다 상황마다 변화되는 변수라는 것이다.
그럼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독일신학이나 미국신학을 공부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의 신학 내용을 취하자는 것보다는 그들의 신학방법을 배우자는 것이다. 달리 말하여 그들은 그들이 처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어떤 질문을 던졌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어떻게 하나님께 응답했는가 하는 그들의 경험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구신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그 배움을 통해서 마침내 우리의 신학을 할 수 있어야 될 것이다.
이상에서 생각해본 것처럼 조직신학이 갖는 한계는 두세 가지로 요약된다. 진리는 인간의 합리와 이성 안에서 체계적으로 파악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 그리고 신학이 이론으로 조직화 되면 교조화 되기 쉽고 교조화가 되면 무서운 독단과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점, 성경은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계신 성령의 말씀으로 시대마다 상황마다 새롭게 조명되기에 신학도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데 자칫 교단 안에서 상수로 취급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닫힌 체계로서의 조직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진리를 규정하는 이론체계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보자는 구성주의 신학이 시도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세종 등 한국 크리스천의 삶과 신앙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학방법을 가진 한국신학이 나와야 될 것이다. 또한 동시에 이공이나 이현필 등 우리나라 교회사에 등장하는 기독인들의 삶과 신앙을 조명하는 작업을 통해서 한국신학이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이공은 타고난 조선인 즉 한국인이었다. 조선의 시골 농부로 살던 그가 성경을 읽고 전혀 새로운 영의 사람이 되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성경말씀으로 인해 어떻게 그렇게 변화될 수 있을까. 성경의 말씀이 이세종을 새로운 인격, 거룩한 영으로 변화시켰다는 그 놀라운 사실을 하나님의 역사요 표적이라 믿고 그에 대한 증언자가 이현필이요 동광원 사람들이다. 이세종을 본받아 이현필도 성경말씀으로 변화되고 성화되었고 그 밖에 오북환 정인세 김준호 손임순 김춘일 김금남 등 수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되어 새로운 인생, 거룩의 길을 걸었다. 말씀으로 변화된 이분들의 거룩한 삶을 보면서 어찌 하나님의 섭리요 성령의 역사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학은 하나의 길잡이요 안내자일 뿐이지 진리 자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진리는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신앙과 영성의 세계는 말과 생각을 떠나 영으로 올라가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각자 말할 수 없는 진리와 만나는 실존의 체험일 뿐이다.
가) 이공을 처음 만난 조직신학자
조직신학자로서 처음으로 이세종을 만난 사람이 앞서 언급한 정경옥교수였는데 그가 바라본 것도 이공의 생각이 아니라 이공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과 성령의 역사였다. 당시 신학자로서 조직신학의 석학이었지만 그 신학이 그의 신앙에 힘을 주지는 못했다. 신학적 지식으로는 영혼의 어둔 밤에 겪는 실존적 고뇌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공을 만나서 이공에게 타오르는 성령의 불꽃을 만나서 그 어둠이 일시에 해소되고 말았다. 그래서 정경옥은 이공을 만난 후 그를 성자라 부르고 존경했던 것이다.
1937년 봄에 이세종을 만난 정경옥은 같은 해 여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정경옥교수 이 글로 말미암아 이세종은 교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아마도 광주의 많은 목사 장로들이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을 기회로 이현필도 이세종을 만나게 되었다고 보여지기에 사실은 정경옥교수와 이공의 만남은 향후 동광원이 발생하게 된 중요한 역사적 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도암면 등광리라는 이곳에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성자 한분이 계시니 그의 이름은 이 세종이다. 우리는 흔히 이 세대에 참된 구도자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탄한다. 이 땅에 종교를 논하는 자는 많거니와 참으로 도를 구하고, 참으로 도를 즐기는 자 그 몇 사람이나 되는가?
현대인의 생활 기구와 이상은 진정한 신앙생활을 곤란케 한다. 이제 우리들의 신앙은 생명 전체에 대한 최종의 결단인 것보다 감각적 욕구를 채우려는 일시적 수단에까지 타락하고 말았다. (중략) 이제 기독교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이러한 위기를 당하여 우리는 이공(李空)과 같은 인물을 가졌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쁘다고 할 것이다. 그는 과연 자기를 이긴 사람이요. 참된 사랑의 사도이다.
이처럼 정경옥교수가 지식도 이론도 정책도 모르는 이공을 성자라 하고 그 인물을 존경하는 것은 그를 거룩하게 하신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었다. 정경옥이 이공을 만났을 때 넘치는 감격을 금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미루어 이공이 얼마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가 있다. 정경옥은 이공의 존경스런 모습과 그 이유를 다시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는 학자가 아니다. 성경의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는 신학자가 아니다. 신학상 이론으로 공의 박식을 비웃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는 설교가도 아니요 정책가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요 정책을 쓰는 이가 아니기 때문에 그를 경모(敬慕)하는 것이다. 성경을 학문으로 배우려고 하지 아니하고, 신학을 이론으로 꾸미려고 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를 존경하는 것이다. 그가 받은 영감을 누가 부인하랴, 그의 엄숙한 신앙을 누가 거역하랴, 공의 얼굴은 창백하나 눈에는 밝은 빛이 비추이고 그의 외양은 초췌하나 영은 산 기운이 있다.
나) 다석에 관한 조직신학적 연구
다석이 믿는 하나님은 유일하신 한 분 하나이신 참 하나님이다. 다석은 하나의 의미를 깊이 생각했다. 하나는 상대의 세계가 아니라 있고 없음을 초월한 절대의 하나다. 즉 둘이 아닌 불이의 하나다. 초월과 내재가 둘이 아니고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고 있음과 없음이 둘이 아니다. 이런 대극 합일의 체험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그래서 없이 계신 하나님이라 한다. 우주보다 크신 한 분이시라고 하나님이요 위에 계신 분이라 하여 한웋님이라 하고 본래의 하나인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라 하여 한아님이라 한다. 하나님은 또 삼위일체 한분이시다. 이런 하나님 체험을 가온찍기라 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서 하나가 되는 것을 귀일이라 한다.
조직신학자로 심일섭, 이정배, 김흡영, 최인식, 강돈구 등 신학자들이 다석에 관한 연구 및 책을 집필하였다. 성서신학자로서 정양모신부가 다석 연구와 다석일지 풀이에 정성을 쏟고 있으며 철학자로서는 이기상, 박재순 두 분이 지대한 관심과 연구를 하였다. 조직신학자 가운데 특히 김흡영교수와 이정배교수께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셨는데 김흡영교수는 ‘도의 신학’이라는 자신의 입장을 세우는데 다석 연구를 활용하고 있으며 이정배교수는 ‘생태신학’ ‘생명신학’ ‘귀일신학’ 등 다양한 방면으로 다석을 해석하여 전하고 있다.
가장 최근으로는 2021년에 안규식박사가 연세대에서 ‘후기 그리스도교 신학으로서 다석 유영모 신학연구’라는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 매우 방대하고 종합적인 연구로서 깊고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유영모 신학을 잘 정리해 놓았다. 그는 특히 다석의 수행론을 신학적 미학의 관점에서 ‘수행-미학적 인간론’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영성적 삶이란 하나의 생명사건이요 역동하는 움직임인데 어떻게 언어의 논리와 이론의 체계화로 담아낼 수 있을까. 과학적 이론이나 실험방법 또는 결과를 분석하고 체계화하는 것은 필요하고 가능한 일이지만 살아있는 인격과 생명의 내용을 담지한 진리 사건에 관하여 체계적인 논리나 언어로 과연 표현될 수 있을까. 그래서 철학자 하이데거도 철학은 이미 끝났다고, 과학에 의해 철학은 이미 해체되어 사라졌다고 한 것은 아닐까? 성스러움의 공간은 오히려 언어보다 예술로 시로 춤과 노래로 표현해야 되지 않느냐고. 그래서 다석은 한시로 한글시로 모두 4천여 수를 남겨놓은 것이 아닐까. 그런 시적 세계를 다시 논리로 풀어서 체계화 하다 보면 살아있는 생명을 해부하여 죽게 하는 것은 아닐지. 오히려 예술은 상징과 은유, 침묵과 역설의 여운이 감도는 가운데 새로운 거룩함과 성스런 공간이 열리고 열린 틈새로 새로운 빛이 솟아나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다석도 또한 시인이요 영성가요 예술가가 아닐까. 법열에 취해서 춤추고 노래하며 시를 읊어대는 다석의 영적 생명이 약동하는 모습을 어떻게 말과 글의 논리로 전할 수 있을까.
2.5 다석과 이공 그리고 이현필의 관계
다석이 중생체험을 하고 믿음에 들어가게 된 때가 1942년 1월인데 그 무렵 이공 이세종은 나 같은 사람이 또 나타날 것이라 하며 세상을 떠났다. 물론 이세종의 후계자로 나타난 사람은 제2의 이공 이현필이었다. 이공은 거의 무학으로서 근대학문을 접한 기록이 없고 그저 한글을 겨우 깨친 상태에서 성경을 읽으며 묵상하고 추리하는 가운데 성령의 충만함을 얻고 성화된 삶을 살았다.
이에 비하여 이현필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어와 신문물을 배웠으며 특히 20세에 광주에서 에비슨 선교사가 세운 농업실습학교에 들어가 당시로서는 가장 앞선 네덜란드의 농업기술을 배운 선구자였다.서울 기독청년회 야간성경반에서 영어도 배웠으며 광주에서 활동한 서서평선교사의 주일확장학교 교사로서 또 전도사로서 활동하면서 목회자의 꿈을 꾸었다.
그러나 결혼 후 고향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이공을 만나면서부터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결정적으로 아내의 사산을 계기로 스승 이공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화학산에 올라가 비움의 기도를 시작하였다. 3년여의 기도와 회개와 비움의 수행을 통해 마침내 빈 마음에 거룩한 성령의 충만을 느끼고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복음을 가르치며 전도를 시작하였다.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조국이 해방 되자 산중 활동을 멈추고 도회지 광주로 진출하였다. 이공과 이현필의 소식이 교계에 알려지자 성인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서울 기독청년회 총무인 현동완이었다. 현동완선생이 다석을 모시고 광주의 동광원을 처음으로 찾아온 시기는 1946년 8월말이었다.
이때 광주역으로 마중을 나간 이현필은 다석과 처음으로 조우하게 된다. 두 분은 초면이지만 별다른 말이 없이 함께 정인세 광주YMCA 총무의 안내로 걸어가면서 노래를 했다고 한다. 다석이 먼저 ‘이이이이이’ 하고 노래를 하자 이현필은 ‘아아아아아’ 하고 응대를 했다는 것이다. 그 후 두 사람은 평생지기로 살면서 서로 존경을 다하였다.
다석은 해마다 동광원을 찾아 수양회 강사로서 강의를 하고 이현필과 동광원 회원들이 함께 경청했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이현필은 세상을 떠나면서 귀일원을 세우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현필의 스승 이공은 오직 성경만을 연구했다. 그리고 예수교 장로회 노회에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였다. 그만큼 장로교인으로서 정체성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노회에서 하는 사경회에 참석한 이력도 있는 것을 보면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예수라는 칼뱅주의 개혁신앙의 세례를 받은 것 같다.
그런데 이현필은 성경만이 아니라 농업기술서적 그리고 동양의 경전들인 논어나 맹자 등도 읽고 가톨릭의 기도서나 출판물도 다양하게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공은 성경을 공부하는 학습공동체 위주로 살았지만 이현필은 제자들을 모아서 함께 생활하는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공동체 운동인 귀일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고아원을 운영하고 오갈 곳 없는 이를 하룻밤이라도 재워 보내자는 복지공동체를 시도하면서 십시일반 일작운동 등 구제활동과 기도활동 그리고 공동체운동 등을 통한 귀일운동을 벌였다.
다석은 이현필이 농사를 기반으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아름답게 바라보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십일조를 모은 돈으로 전주에 땅을 사서 동광원에 기증하였고 한때는 무등산에 올라와서 살기도 하였지만 주로 묵상과 기도의 구도적 생활이었다. 이런 다석의 영향을 받은 이현필은 삼온회를 조직하고 삼온정신을 내 걸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자는 것이다.
삼온정신 ; 나와 너는 선 자리와 맛본 일이 다를지라도 뜨겁게 사랑하기를 굳게 마음 먹고 그이의 마음 안에서 녹아져 하나가 되자.(벧전 1:22-25)
따뜻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다음 말을 지키자.
- 금과 울타리를 넘어뜨리고 금에 걸리고 울타리에 넘어진 벗을 찾자.
- 껍질과 뚜껑을 벗기고 순수한 마음과 마음으로 부딪혀 속마음을 나누자.- 글 모양과 말소리 밖에 있는 뜻을 찾고 모양과 소리에 걸림이 없이 마음속의 속 마음을 알아주자.
3. 새로운 연구방법의 필요성
우리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면 그것을 평가하고 승인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서 먼저 미국 등 선진국의 허가를 받고 난 다음이라야 우리나라에서 승인을 해 준다는 것이다.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과학기술의 세계도 우리 스스로 평가 방법이나 기술 표준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과학기술의 세계에서도 선진으로 앞서기 위해서는 주체적인 역량이 필요한 것이다. 하물며 문화와 정신의 세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영의 세계야말로 주체성이 없으면 그것은 잠꼬대요 신기루를 좇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령이 있는 곳에는 주님이 계시고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자유를 잃어버린 주체는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우리 역사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진리의 영을 받아 자유인으로 살았던 신앙의 선조들을 보내주신 것을 감사한다. 철저하게 그리스도에 순종하는 모습이 곧 자유인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특별히 이세종 이현필을 통하여 동광원을 세워주신 것을 감사한다. 동광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고 성령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인격이 어떻게 드러났는지 우리가 새롭게 발견하고 찾아서 이어가야 할 것이다. 그 방법으로 먼저 여러 가지 신학하는 방법을 검토했으나 그 모두가 우리에게 참고가 될 뿐이고 필요한 것은 우리의 신학과 우리의 방법론을 찾는 일이다.
우리 신학을 위한 새로운 방법론으로서 고려할 사항들을 나열해 보면 첫째로 우리는 서양과 다른 우리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와 사유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 둘째는 우리는 다양한 종교적 전통을 가지고 함께 어울려 소통과 화평을 이루며 살아왔다는 점, 셋째는 우리는 우리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서양과 다른 삶의 문법으로 형성된 공공성과 공동체 경험이 많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양과 다른 우주관과 자연관 그리고 인간관과 세계관을 지니고 살아왔다. 이런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기독교 성경을 대할 때 저절로 해석학적 방법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 한국인이 성경을 해석할 때 우리는 우리의 문화, 역사, 언어의 차이를 가지고 바라본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될 일이다. 즉 다양한 종교적 전통을 가지고 살아온 우리로서는 유교나 불교나 노장사상들이 우리 삶과 언어 그리고 역사 속에 스며들어 우리 삶의 문법 속에 살아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저절로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전이해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우리가 우리의 의식과 문화 속에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는 새로운 문화의 창조자로서 우리 역사를 이끌어 가실 것이다. 서구 기독교와 동양의 사상이 만나서 새로운 지평융합을 이루는 새로운 공간에서 거룩함을 예비하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새로운 문화의 창조가 일어날 것이며 그 중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런 기독교 영성 체험을 통하여 기독교는 한국땅에 뿌리를 내리고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며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그 사명을 이루게 될 것을 소망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새로운 신학 방법론으로서 기존의 방법론과 아울러 언어철학과 해석학 그리고 현상학 등 현대철학적 지혜를 원용하여 한국인이 가진 종교 문화와 역사적 경험으로 형성된 내면 심층의 무의식적 내용들이 전이해로서 충분히 살아날 수 있도록 각성시키는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성서신학을 할 경우라도, 물론 성서신학만 아니라 역사신학 또는 조직신학 또는 영성신학 무엇이나 다 적용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인데, 우리는 성경을 기독교 성경에 국한하여 연구하는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 역사에 국한되어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철학의 고전들인 유교경전이나 노장의 문헌, 나아가 불경들도 비교 텍스트로 함께 읽고 서로 대조하면서 그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과 문화에 영향을 준 컨텍스트 안에서 서로 교감이 가능한 세계를 탐구할 때 우리는 또한 진리의 빛을 새롭게 드러내는 창조 역할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인정하여 서양에서도 최근 비교신학이 대두되어 활발한 연구활동이 이어지고 있다.문화신학 또는 비교신학은 동서 문명이 교류하는 현대에서 기독교를 새롭게 재조명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렇게 서구인들은 그들의 관점과 입장에서 새로운 기독교 신학을 재수립하고, 우리는 우리의 관점과 입장에서 기독교 신학을 수립하여 서로 소통하고 교감하고 융합하여 한국신학은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주지하듯 21세기의 흐름은 생명과 영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 한다. 서양의 근대문명이 가져온 인류재앙을 맞아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거룩함의 공간인 영성을 회복하여 새로운 생명관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인간과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요구하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근대 기술문명이 가져온 가장 큰 문제로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그리고 지구 온난화이다. 지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동아시아적 지혜의 전통에서 힌트를 얻고 개별 국가로 해결 불가능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 세계정부의 출현이 있어야 한다. 지금 개별국가를 넘어서 하나가 되자는 유럽연합의 모델이 지구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길이 열려야 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인간과 우주자연, 그리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가치 패러다임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의 핵심으로 장회익교수가 제안했던 온생명이라는 패러다임 같은 새로운 생명관과 아울러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영성과 생명의 패러다임이 이미 이공 이세종과 이현필의 신앙과 삶 속에, 다석 유영모의 믿음과 삶 속에 녹아 있었다고 본다. 이현필이 말하는 “인류는 나와 한 몸이요 만물은 내 지체”라는 언급 속에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고 본다. 다석도 우리 전통의 한 사상에 기초하여 없이계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모두가 하나라는 귀일신앙을 주창했고 하늘과 땅이 하나요 낮과 밤이 하나요 있고 없음이 하나요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영적 생명의 관계론적 영적 의미를 밝히 드러냈다.
거칠게 성급한 결론을 말하자면 이공과 다석을 통해서 우리는 21세기에 필요한 영성과 생명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발견하고 귀일생명신학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현대를 진단하고 내련 결론이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고 말한 내용의 핵심도 과학과 합리라는 기존의 사유틀로 말미암아 거룩함의 공간을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그 성스러움의 공간을 되살릴 수 있는 새로운 사유의 길이 무엇이 있을까 하는 물음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공에게 그 성스러움의 공간이 있었고 이현필도 그것을 발견하였고 다석도 그 성스러움의 공간에 올라가서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뵙는 체험을 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이어받아 전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신성의 공간, 하나님을 뵙는 거룩한 시간,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지금 여기서 순간마다 깨어있는 산 영, 그런 생생한 믿음과 신앙이 아니고 무엇이 있겠는가. 귀일영성은 바로 다석과 제 2의 이공 이현필이 만나서 서로 공명하고 공감했던 그 고요와 신성과 거룩함의 세계, 십자가의 죽음이 곧 부활의 생명이라는 그 대극합일의 영성이요 하늘(하나님) 땅(우주만물) 사람(그리스도) 만물(인류)과 하나가 되는 귀일의 영성이라 하겠다.
특별히 다석은 4천여수의 영성적 한글시와 한문시를 일지로 남겨놓았는데 이를 연구한 안규식박사는 포스트모던 시대 세속화와 탈서구화로 특징되는 후기 그리스도교 신학의 대안으로서 다석신학의 가능성을 밝혀놓았다. 그에 따르면 다석신학은 한국신학으로서의 가능성, 변증신학으로서 가능성, 그리고 통전신학으로서의 가능성이란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다석신학은 한국인의 주체성에 근거한 한국신학으로서 다양성의 일치를 추구하는 창조적 융합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을 만나고 비움의 수행을 통한 신인합일의 길로서 그리스도를 만나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며 궁극적 실재인 하나님체험을 바탕으로 우리말과 우리글로 복음을 재해석하고 재진술하여 새롭게 표현하였다.
둘째, 변증신학으로서 다석신학은 서구의 실체론적 이원론적 사유에서 기인한 초월과 내재의 분리, 윤리와 실천력의 상실, 인간의 존재론적 붕괴라는 모순을 극복하는 불이(不二)적 무분별의 세계로서 초월과 내재의 일치, 자속과 대속의 불이적 일치로 인류의 고난에 동참하는 새로운 상호 주체성, 그리고 욕망으로 왜곡된 미학을 전복하여 탐진치 삼독을 비우고 벗어나는 수행적 아름다움의 미학으로 새롭게 바라보는 인간론이다.
셋째, 통전적 신학으로서 다석신학은 그동안 서구신학에서 배제 내지 망각되었던 무, 공, 없음의 존재에 대한 사유를 가지고 고요와 거룩함의 신성공간을 열어가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였다. 그래서 ‘없이계신 하나님’이라는 호칭에서 보여주듯이 다석신학은 존재와 비존재의 분별을 넘어서는 절대무의 빈탕한데에서 하나님을 뵙는 거룩한 신성의 길을 새롭게 열어보였다. 그동안 절대무의 개념이 비인격성이라 하여 서구신학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부분을 다석은 절대무가 그리스도의 케노시스와 같은 신성의 공간임을 밝히고 그 거룩함의 공간에서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인격을 만나는 체험을 진술함으로써 부정신학과 긍정신학의 통합 내지는 서구신학과 동아시아 지혜전통과의 통전성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 진리체험과 십자가 체험을 ‘가온찍기’라는 말로 표현하여 관계성의 존재인 상호(서로)주체성으로서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와 만물이 하나되는 귀일생명의 통전성을 보여주었다. 탐진치가 벗겨지는 무아의 체험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하나가 되는 대아의 상호 주체성을 가온찍기라 한 것이다.
이공 이세종도 자기를 다 비워버렸다고 공이라 하였던바 다석이나 마찬가지로 비움, 없음, 무의 수행을 통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맛보고 거룩함의 숨결을 느끼며 창조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사랑을 찬미하였다. 즉 세상에서는 탐진치의 추구를 성취와 성공으로 포장하여 아름다움이라 하지만 다석이나 이공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거룩한 비움과 극진한 사랑을 느끼고 감격하여 ‘순결의 길 초월의 길’이라는 고행의 십자가를 지며 영광의 아름다움으로 생각했다. 즉 세상사람들이 볼 때는 고신극기의 길이지만 이공이나 다석에게 그것은 정행의 올바른 삶이요 행복한 기쁨의 삶이요 영광스런 ‘미학적 수행’이었다.
이렇듯 이공과 다석의 한국적 영성을 아우를 수 있는 영성을 귀일영성이라 하고 또 그런 대 우주적 생명을 귀일생명이라 하여 귀일영성으로 모두가 서로주체로서 하나가 되는 귀일생명공동체를 이루자는 새 신학을 귀일생명신학이라 해 본다.
4. 한국적 영성, 귀일생명신학으로 보는 요한복음의 특징
역사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발전은 예수 사상에서 바울 사상으로, 바울에서 요한 사상으로 삼단계의 변화와 발전을 통해 성립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은 산상수훈에 집약되어 있다. 가난한 자, 온유한 자, 긍휼히 여기는 자,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 화평케 하는 자, 이런 사람이 되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인데 이것은 기존의 율법적 가르침과 달리 인간의 내적 변혁과 사회적 변혁을 요구한다.
예수의 이런 가르침은 인간의 양심을 때리는 울림이 크겠지만 예수를 따르자고 결심하는 제자로서는 그만큼 무력감이나 죄책감에 시달릴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순수한 사랑과 정의의 실현자인 의인으로 보는 그런 신앙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세상 권력의 희생양으로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로마권력 및 그들과 결탁한 제사장 등 착취계급으로부터 민중인 우리 약자를 보호하고 우리의 권익을 위해서 억울하게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는데 나는 그간 무엇을 했으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이런 죄책감과 무력감에 빠질 수 있다.
이런 좌절과 실의에 빠져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소식은 무엇보다 기쁜 소식이요 그로 인하여 새로운 자각과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 즉 그리스도라는 확신을 얻게 되었고 그때부터 비로소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 그룹이 탄생하게 된 것 아닐까.
예수의 부활 소식을 거짓 뉴스라고 여기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유대인 중 한 사람이 닷소 출신의 사울이었다. 그는 유대교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지식인이었는데 유대교에 충실한 유대인으로서 거짓 선동자인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다가 도중에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 됨으로써 극적인 회심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사울인 바울의 삶이 180도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울사상이다.
바울사상의 핵심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된다는 이신칭의라 한다. 우리의 도덕적 행위나 인격적 성취 또는 공덕을 쌓아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내용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는 말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이며 그것은 동시에 나 자신이 죄에 죽고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즉 십자가의 의미는 이제 온 인류와 죄인인 나를 용서하고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크신 사랑이요 나는 예수 안에서 용서받은 죄인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로 내가 용서받은 죄인임을 자각하게 되면 나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바울이 말하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삶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로 요약된다. 이런 하나님의 계시체험에서 비롯된 바울의 사상과 믿음이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어 지난 2천년 동안 서양에서 발달해 온 것이 서구신학이요 서양사상이라 할 것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로 알려진 사도 요한은 갈릴리 어부출신이요 야고보의 동생으로 12제자 가운데 가장 어린 사람이었다 한다. 불같은 성격으로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이 있지만 예수님을 만나서 주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장에 함께 있었고 예수님은 제자 요한에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라고 부탁하셨다고 전한다. 그는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서 주후 100년 경 94세를 일기로 에베소 근처 밧모섬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요한복음의 특징
공관복음서와 구별하여 요한복음을 제4복음서, 또는 영적 복음서라고 한다. 그동안 학계는 요한복음을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문서로 취급하여 로마서나 공관복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비중이 크지 않았지만 21세기 영성의 시대를 맞아 그 중요성이 갈수록 커질 것이다.
요한복음은 제1장에서 우주적 서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묘사하면서 구원의 길을 제시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성육신)이요, 세상의 참 빛이요, 그분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다. 그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였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런 내용이 요한복음 서문, 1장 1절에서 18절까지 내용이다.
바울의 대표작인 로마서가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 십자가와 부활이 핵심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성육신의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한다. 십자가를 사랑으로 부활을 진리로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체험의 믿음을 이방세계에 전하면서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로 표현했다면 사도 요한은 은혜의 사랑과 빛의 진리로 표현한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얻는 것이다. 요한은 전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한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오신 그분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한다. 그 하나님의 독생자를 영접하고 믿는 것은 곧 주님의 은혜로운 사랑을 깨닫는 것이며 진리의 눈을 뜨는 것이다. 그래야 주님에게 참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증언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사도 요한은 바울처럼 믿음이라는 타력신앙을 말하면서도 또한 진리와 사랑이라는 지적인 체험을 함께 말하는 것이다.
우선 바울이나 요한이나 믿음이라는 타력신앙을 말한다. 특히 바울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행위에 의한 자력신앙이 아니고 믿음의 타력신앙이다. 율법주의는 자기의 힘으로 구원을 성취하겠다는 자기 의가 드러날 수 있지만 복음은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순전한 타력적 구원을 말한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의 내용도 또한 사랑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보고 깨닫는 것인데 이런 인간의 체험을 본질직관(contemplation)이라 한다. 본질직관은 인간이 계시를 받게 될 때 눈이 열려서 계시의 내용을 체득하는 것이다. 그것을 사도 요한은 은혜와 진리라 한다. 그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가운데 사는 것을 요한은 믿음이라 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와 함께 부활하여 새사람이 되는 것이라 한다.
이처럼 우리가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으로 본질직관을 하게 되고 이를 통해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거듭난 삶,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살아가는 영적 생명의 발전을 이루며 살아가는 진리와의 일치 또는 합일적 삶을 근본경험이라 한다. 내가 있어서 경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있어서 내가 되는 그런 경험이다. 쉽게 말하여 나의 근원이 되시는 은혜와 진리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경험이다. 그 경험은 과정이요 되어감이요 일체와 유기적인 하나됨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의 십자가 부활의 메시지나 사도 요한의 은혜와 진리의 메시지는 같은 체험과 믿음의 다른 표현이라 보고 그것을 통합하여 영성학적으로 본질직관과 근본경험으로 재구성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만나서 내가 없어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새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믿음이나 요한의 믿음이나 모두 근본경험으로 이뤄지는 역동적 삶의 과정이지 논리적 이론이나 대상적 지식이 아니다. 동양에서는 진리를 깨닫는 근본경험을 ‘형이상의 도’라 하는데 바울이나 요한이나 모두 형이상의 믿음이지 지식과 논리의 형이하가 아니다. 그런데 동양은 믿음을 말하지 않고 깨달음을 강조한다. 깨달음은 고행으로 자기가 없어지는 무아를 통해 본질직관을 경험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계시를 통해 본질직관의 체험을 한 것이라면 사도 요한은 예수의 제자로서 수 많은 전도의 고난을 겪고 진리의 눈을 떴는지 모른다. 그래서 사랑과 진리라는 지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믿음을 말할 때는 타력을 강조하는 일이요 깨달음의 앎을 말하는 것은 자기의 눈을 뜨는 자각이요 자력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궁극에서는 이런 자력과 타력이 하나라는 것이다. 계시를 통하여 형이상의 도에 들어가거나 고행을 통한 자력으로 형이상에 들어가거나 형이상의 도에 이르면 저절로 믿어지고 저절로 행하게 되어 일체 은혜요 일체 사랑이다. 이처럼 정情적인 믿음과 지知적인 경험(깨달음,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통합적으로 말하는 복음이 요한복음이라 하겠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고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요한복음에서는 믿음과 깨달음(앎, 근본경험)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요한복음은 우리 동아시아 사람을 위한 복음서라 한다. 믿음의 형이상과 깨달음의 형이상은 둘이 아닌 것이다. 그 둘을 통합적으로 표현하여 철학적 용어로 본질직관과 근본경험이라 한 것이다. 형이상의 도에 들어가는 경험을 본질직관이요 형이상의 도에 들어간 탁월하고 자유로운 삶의 경험을 근본경험이라 한다.
동아시아의 석가 공자 노자 등은 고행을 통해 이런 형이상의 도에 들어가는 길을 제시하여 왔다. 그런데 바울이 전한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한 믿음으로 형이상의 도에 들어갔던 신앙체험의 고백이라 하겠다. 문제는 사도 바울의 계시체험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믿음의 길은 매우 좁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믿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계시로 나타나 현시하셔야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그러나 그 믿음에 들어가면 바로 자기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본질직관이라 한다. 그에 비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고행의 길은 누구나 시작할 수 있지만 깨닫기까지 오르는 그 길이 너무나 멀고 길이 협착하여 찾기도 어렵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유산이 공존한다. 그래서 믿음으로 들어가려고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 또 고행으로 깨닫고자 독서와 사색과 계행의 실천으로 노력한다. 그렇게 하여 믿음을 위한 기도와 깨달음을 위한 고행이 병행 될 때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형이상의 도에 들어가서 본질직관의 체험으로 새사람이 되는 근본경험을 살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의 특징이 바로 이렇게 믿음의 길과 깨달음의 길을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요한복음은 믿음을 말하면서 동시에 깨달음의 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또다른 특징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즉 ‘한나신 아들’로서의 독특한 기독론과 삼위일체 신앙을 말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서의 고기독론과 사람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의 저기독론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신성과 인성의 불이적 일치의 관계로서 그리스도 예수를 밝혀준다는 점이다. 또 삼위일체는 지적인 이해를 위한 신론이 아니라 믿음에 들어간 이의 본질직관과 근본경험의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다. 또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을 아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믿는 것이다. 이런 구원의 길을 요한복음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한다. 길은 초월의 힘이요 진리는 하나님의 빛이요 생명은 부활의 숨이다. 달처럼 달려서 하늘에 올라가는 힘을 얻는 것이 길이요 태양의 빛을 받아 빛나는 것이 진리요 어둔 밤을 비춰 지구를 살리는 일이 생명이다.
요한복음은 이처럼 우리에게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그 은혜와 진리의 체득을 알려주는 복음이다. 그래서 진리의 체득을 강조하는 우리 동아시아 문화권을 위한 영적 복음서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은 특별히 우리를 위한 복음서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보다 친숙하게 요한복음을 접할 수 있고 그 깊고 거룩한 신성의 진리와 은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며 그런 복을 누리는 자로서 또한 그리스도를 온 땅에 새롭게 증언하는 사명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5. 맺음말
서구문명이 가져온 포스트모던 시대의 병폐를 해결할 포스트 크리스탠덤(후기 기독교)의 바람직한 교회와 기독교영성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한국적 기독교영성이 나아갈 방향이 드러난다. 즉 포스트 모던의 시대적 병폐의 근원은 다름 아닌 세속화로 인한 신의 죽음, 거룩한 성스러움의 세계를 상실한 것이기에 어떻게 메마른 현대인의 심성에 신성의 공간을 열어주느냐 하는 과제가 곧 한국적 영성의 길이다. 이런 한국적 영성을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모든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즉 하나님의 계시체험만이 신성의 근원이요 이런 본질직관의 근본체험을 한국인의 심성으로 경험할 때 그것이 한국적 영성이다. 이런 영성을 서구인들이 상실하게 된 연유가 그들이 가진 사유구조, 실체와 본질을 추구하는 사유속에 존재가 은폐되고 존재망각의 심성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서구 기독교에서 잃어버린 영성, 교회에서 사라진 신성의 공간, 인간의 마음에서 사라진 거룩한 심성, 세상에서 죽임당하고 추방된 하나님, 그로 인해 세상은 타인과 우주만물을 그저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주체들의 전쟁터가 되었다. 이런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새로운 사유로 신을 찾는 새로운 신학, 새로운 신학방법이 요청된다.
그런데 침묵과 고요의 비움을 통한 거룩한 신성의 공간을 찾는 지혜의 전통이 동양에서는 수천년 동안 이어져 왔다. 그래서 한국인의 심성에는 고요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보배로운 사유방식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 결과 서구 기독교가 우리 땅에 들어왔을 때 많은 사람이 그 침묵과 거룩함의 공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거듭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이공 이세종이요 그 제자 이현필이며 또한 다석 유영모와 현재 김흥호선생이다.
동광원을 창설한 이현필의 스승으로서 구도자요 영성가로서 본을 보여준 이공은 신학자도 아니고 사회적 운동을 일으킨 사람도 아니고 시골의 평범한 농부로 살다가 성경말씀을 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기 위해 말씀묵상과 고요의 기도생활로 생을 마쳤다. 그의 활동은 사회적 영향이 아니라 이현필이라는 한 제자의 삶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기도였다.
다석 류영모도 마찬가지로 부르신지 38년만에 52세 되던 1942년 중생체험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일생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와 일식의 하루살이를 살았던 구도자였다, 날마다 기도와 침묵의 묵상 가운데 얻은 계시의 말씀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그리며 4천여 수의 영성 시로 지어서 찬양하였다. 다석의 신앙은 제자 김흥호에게 전해져 35세 중생체험 이후 구도자요 목회자로서 동양적 기독교의 토착화를 위하여 동서양 사상을 회통하고 융합하여 재해석하는 일, 즉 동양경전들을 성경에 비추어 새로운 생명의 말씀으로 피워냄으로써 한국적 영성의 길을 닦아 놓았다.
우리는 이처럼 이공과 다석의 삶과 신앙 속에 이미 한국적 기독교 영성이 풍부하게 열려있음을 바라보며 우리도 그것을 본받아 우리 심성에 비움과 고요의 거룩함의 공간을 열어서 성령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을 뵙는 참 신앙으로 영생을 얻자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고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아는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영의 눈을 뜨고 거룩의 영을 알게 되는 것이지 우리의 지성적 논리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한국적 영성은 부정의 길, 또는 무와 비움과 침묵과 고요의 길을 통한 ‘빈탕한데’의 거룩한 공간으로 올라가는 길을 보여준다. 빈탕한데 올라서 참 하나님 아버지를 뵙고 아이처럼 뛰노는 ‘빈탕한데 맞혀 놀이’하는 그런 유희삼매의 거룩한 생명의 약동, 그것이 바로 한국적 영성이 추구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다석과 이공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이다.
이런 다석과 이공의 한국적 영성을 어떻게 소개하고 알릴 수 있을까? 기존의 방법론들, 즉 전기적 역사적 방법으로 소개하고 성서신학적 방법으로 소개하고 조직신학적 방법 영성신학적 방법 등을 사용하여 기존 연구들을 소개하였다. 그러면서 기존의 방법론의 한계로 서구적 사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여겨졌다. 새로운 신학방법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뚜렷이 제시할 수는 없었다. 다만 경전을 서로 비교 해석하는 해석학적 비교신학의 방법과 영성신학과 구성신학을 창조적으로 변용하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비교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영생에 대한 새로운 사유, 즉 거듭난 영적 생명으로서 하나님 우주 자연 인간이 하나가 되는 유기적 생명, 그 생사 초월의 자유로운 대 우주적 생명의 회복을 귀일영성이라 해본다.
그래서 귀일영성은 상호주체가 되는 공동체의 원리가 된다. 상호주체는 고요하고 성스러운 내밀의 공간에 그리스도를 모시며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만물에 대한 우주적 책무와 책임을 지고 사랑으로 섬기는 가온찍기의 주체를 말한다. 무한 우주공간에서 중심은 어디나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중심이듯 무한한 영의 자유로운 세계에서 주님을 모시고 이웃을 섬기는 가온찍기의 자리가 곧 천국의 중심이다. 누구나 그 가온찍기라는 중심에 서서 서로를 존경과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상호주체의 공동체가 곧 귀일원의 이상이다. 이런 대우주적 생명의 귀일영성과 서로주체의 귀일공동체를 추구함이 또한 귀일생명신학의 과제요 내용이다.
이런 귀일생명신학의 입장에서 요한복음을 바라볼 때 요한복음의 특징이 무엇인가. 요한복음의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영성회복의 길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시도해 보았다. 그 결과 다석과 이공의 영성을 아우를 수 있는 내용, 즉 계시를 통한 믿음과 비움의 수행을 통한 거룩함의 자각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동양의 지혜전통과 유대의 계시신앙이 융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요한복음이 보여준다고 볼 때, 믿음과 성화가 둘이 아닌 불이적 관계요 또한 거듭남과 자녀됨이 둘이 아닌 불이적 관계라는 점을 밝혀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또한 불이적 관계임을 밝혀주고 있다고 볼 때,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신앙의 본래면목을 이론이나 지식체계가 아닌 본질직관과 근본체험으로 영위되는 삶의 여정임을 보여준다고 볼 때, 우리는 요한복음이야말로 우리를 향한 우리시대의 가장 주요한 복음이라고 느껴진다.
우리는 한국적 영성을 보여준 위대한 영적 스승을 가지고 있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그분들의 삶과 신앙을 뚜렷이 조명할 수 있는 요한복음을 통해 우리 시대 필요한 성스러움과 거룩함의 영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 생명으로서 여전히 우리 삶과 역사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시대의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우리의 소망은 이것이다. 우리의 고요하고 깨끗한 심성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는 거룩함의 영성을 회복함이 우리를 살리고 인류를 살리고 지구를 살리는 길이다. 그 길은 이미 된 길이요 난 길이요 아직 가야 할 길이다.
이상으로 한국적 영성으로서 새로운 신학의 가능성 즉 귀일생명신학의 길을 제시한다고 했지만 정작 귀일생명신학의 디테일은 다루지 못한 것 같다. 귀일영성과 귀일공동체의 방법과 그 구체적이고 실질적 내용을 담아내는 귀일생명신학으로써 한국적 영성을 밝히는 과제를 안고 글을 마친다. 2023. 6. 26. 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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