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살아갑니다. 월남하신 장인, 장모님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 그리움이라는 것이 쉽게 지워질 수 없는 것임을 보았습니다. 사실 저처럼 서울에서 어려서부터 자란 사람은 고향이란 애틋한 그리움을 전부 공감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명절이면 고향에 가기 위해서 10시간 이상씩 거북이 걸음을 하면서도 고향을 찾는 분들을 보면 그 그리움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짐작해 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추석명절이 찾아왔고 많은 분들이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도 고향을 떠나 바벨론에서 기약없는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를 통해서 선포하신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까요? 지금은 남의 나라에 끌려와서 사람취급도 못살고 있지만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향으로 인도하신다는 약속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요?
“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노래하며 시온으로 들어오니 영원한 기쁨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고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본문 말씀을 통해서 이번 추석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된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추석은 관계를 회복하는 축제의 날이 되어야 합니다.
삶은 곧 관계입니다. 가정생활은 부부관계 그리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직장생활은 직장의 고용인과 피 고용인 그리고 나와 내게 맡겨진 과제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교회생활 혹은 신앙생활의 본질도 결국 관계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과 교회의 지체된 성도의 관계야말로 교회생활의 질을 결정하는 열쇠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의 신실성을 테스트하는 시금석은 약속의 문제에 대한 관점과 약속을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약속(promise)이란 말을 성경적으로 말하면 언약(covenant)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어떤 언약은 무조건적이며 어떤 언약은 조건적이기도 합니다. 무조건적인 언약은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의 표현이며 조건적인 언약들은 그의 기대를 반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무조건적인 언약들을 하나님이 신실하게 기억하셨음을 회고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생각해 보면 출애급의 은혜도, 가나안의 기업을 허락하심도 일방적인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오늘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구원의 은혜도 조건없는 선물이며, 천국의 소망도 조건을 초월한 그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로서 우리가 할 일은 조건적인 언약들에 대해서 우리가 해야할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약속한 일들에 대해서 신실한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유대인들의 절기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한 장치로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신앙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명절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명절에 만나는 많은 가족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그 분들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비판적이기도 하고, 어떤 관심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절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내가 하나님과 아무 관계 없이 살아가는 분들에게 이 관계의 중요성을 드러내고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절을 지내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속에 있는 사람으로서 신앙적인 명절을 지내야만 합니다. 어린 시절에 아버님은 늘 저를 대전 큰 아버지 댁에 데리고 가셨습니다. 가보면 제사를 드리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저희 집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축문부터 시작해서 제사의 모든 절차를 진행하시지만 절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에게는 “형들이 절할 때 너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거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에 감사했던 것은 큰 아버님이 아버지의 절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인정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절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버지가 조상들을 공경하지 않거나 문중의 일에 무관심하고 나몰라라하지 않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절을 하지 않았지만 조상을 귀히 여기고 존경했으며, 문중의 일에 늘 책임 이상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모습들이 둘째 큰 아버지댁에 복음이 전해지는 기회가 되었고, 절의 보살이셨던 우리 할머니가 구원받고 돌아가실 수 있었던 시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명절에도 우리는 모든 사람의 본이 되도록 솔선수범해야 하고, 조금 더 손을 펴서 더 많은 것을 나누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가족들에게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누가 시온으로 돌아옵니까? “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들,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을 수 없었던 사람들, 그래서 포로로 잡혀가고 수치와 모욕을 당했던 자들이 그들의 죄악을 용서 받아 자유와 기쁨과 희망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기에 기쁨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믿지 않는 가족들의 영혼이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동시에 명절은 일그러진 가족관계를 회복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목요일 밤 늦게 ‘동행’이란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한번은 게임에 빠진 아내가 집을 나가서 8살,5살난 두 아들을 키우며 좌충우돌하는 한 아빠의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8살난 형이 5살난 동생을 챙기며 밥을 먹입니다. PD가 물어봅니다. 아빠랑 같이 밥먹고 싶지? 그랬더니 8살난 아이가 네 손가락을 펴는 거에요. ‘엄마, 아빠하고 함께 밥을 먹고 싶다는 거죠.’
한국사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잔혹한 범죄와 병리적인 현상들을 겪에 될 것입니다. 왜냐구요? 가족관계를 지난 20년간 신나게 깨뜨렸거든요. 그 깨어진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지금 20-30대가 되었거든요, 그들이 받은 상처와 고통이 어떤 형태로 우리 사회안에서 드러날지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이 시대 교인들이 가장 먼저 깨어진 가정을 회복하는 일을 위해서, 깨어진 관계를 치유하는 일을 위해서 헌신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자동차 왕’으로 불리는 헨리 포드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경영자 중 한 명입니다. 보편적인 생산방식인 분업을 처음 고안해서 자동차를 대량생산했습니다. 당시 엄청나게 비싼 값의 자동차를 헨리 때문에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는 또한 매우 인격적인 경영자로서 사업성공으로 얻은 많은 수익을 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으로 연결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하층민으로 여겨졌던 공장 노동자들이 여유 있는 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차를 구입할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중산층이라는 말은 헨리포드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는 자동차뿐만 아니라 직물, 유리, 페인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그가 은퇴 후 한 파티에 참석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삶의 엄청난 성공이야기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일생 동안 많은 성공을 이루셨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성공은 어떤 것입니까?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가정입니다.” 헨리 포드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가정이었습니다.
인생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안식과 활력을 얻을 수 있는 가정이야말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제는 가정의 회복은 가장 중요한 시대적 기도제목입니다. 명절을 통해서 깨어지고 일그러진 가족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추석은 은혜를 고백하는 감사의 날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 가정에서 강아지를 키우게 된 사연을 공개했습니다.
교회 건축을 하던 중 떠돌이 개 한 마리가 공사현장에 밤이면 기어들어와서 잠을 자고 사라졌다를 반복했습니다. 사람이 다가가면 기겁을 하고 도망치던 강아지는 일군들이 만들어준 강아지 집에서 잠을 자게 되었고, 목사님이 가져다 주는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차츰 목사님이 다가가도 도망치지 않게 된 강아지는 목사님을 따라다니게 됐고 목사님이 부르면 금방 달려오는 순종형 강아지가 되었습니다. 결국 강아지는 부흥이라는 이름과 함께 목사님의 가정에서 기르는 개가 되었습니다.
사모님이 그 강아지에 대해서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보다 생생한 실물로써 그 강아지를 우리 집으로 보내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또한 주님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부흥이처럼 떠돌이 신세에 불과한 인생이 아니었던가요? 떠돌이와 같은 우리를 부르셔서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주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세워 주셨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나 주인을 위해 절대적인 충성으로 복종하는 강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에 커다란 부끄러움과 찔림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엄청난 은혜들은 어느 순간엔가 잊어버리고 불평하며 불충했던 모습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주인이 돌아올 때마다 가장 먼저 달려나와 한 번도 빠짐없이 꼬리를 치며 반기는 그 모습을 나는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고 있는 가를 자문해 보게 됩니다. " 사모님은 그 떠돌이 강아지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자신을 회개했습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배은망덕이란 은혜를 모르는 사람, 은혜를 받고도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해꼬지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모님은 떠돌이 강아지를 통해서 불순종하고, 충성하지 못하는 배은망덕한 자신을 뒤돌아보며 회개하였습니다. 명절은 두가지 은혜를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는 날입니다. 하나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이 고전15:10절에서 고백하는 것과 같이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자기 아들을 죽이고 대신 남의 아들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 누가 자기 아들에게 모든 죄 값을 치루게 하고 남의 죄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은혜를 받은 것보다 먼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자녀 삼아주신 그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부모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가 되어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말합니다.
한 엄마가 아들이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후 집에 돌아 왔을 때, 간식을 해주면서 아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아들에게 간식을 주며 엄마는 말했습니다. “어떤 엄마가 있었는데 그 엄마는 음식을 너무 잘해준데. 그 모습을 사자성어로 하면 무엇일까?” “자화자찬” 실망한 엄마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예쁜 엄마가 음식을 잘해서 간식을 잘 챙겨주는 것은?” “과대망상” 엄마는 좀 짜증이 났죠. “나 같이 예쁜 엄마가 음식도 잘하고 간식도 잘 챙겨주는 것, ‘금’으로 시작하고 ‘ㅅ’이 들어가는 사자성어는?” “금시초문” 엄마는 한숨을 내쉬었죠. 엄마가 바라던 정답은 “금상첨화”였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마음을 몰라주는 존재입니다.
자녀로 살 때 그렇게 섭섭하고 원망스러웠던 일도 부모가 되어보니 왜 그랬는지 알듯 합니다. 제 아버님이 참 엄격하고 무서우신 분이었습니다. 군인으로서의 강직함을 자녀들에게 그대로 적용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외삼촌들 집에 가보면 이게 집안 꼴이 무슨 콩가루 집안도 아니고, 아버지 옆에 누워서 같이 텔레비전보고, 아버지에게 반말 비슷하게 하고,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습니다. 어른들 앞에서는 늘 단정하고 예의바르게 앉아야 하고, 손님이 가시면 대문까지 나와 인사를 드려야 하고, 식탁에서도 절대로 먼저 수저를 들어선 안되고, 좋아하는 것이라고 그것만 먹으면 안되고, 되는 것보다 안되는 것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엄격함 때문에 자라면서 ‘써가지 없는 놈’이란 말 안들었으니 참 감사합니다. 정직하고 강직한 삶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고, 책임감 있는사람이 된다는 과 성실한 삶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부모란 늘 말하지만 뭘 해줘서 부모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하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위해 기도하는 분이요, 모든 사람들이 다 등을 돌려도 끝까지 나를 지지하는 분들이니 감사해야 합니다.
명절은 감사가 넘쳐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부모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복된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안에서 온 가족이 건강하고 화목하며 감사하는 복되고 넉넉한 명절 지내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