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독일 연합군에 항복
← 독일군 장성이던 알프레드 요들이 무조건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1945년 5월 7일 독일이 연합국이 제시한 무조건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5년 8개월에 걸친 광기의 2차 세계대전이 그 종결을 알렸다. 항복 조인식은 프랑스 상파뉴 지방의 중심도시 랑스에서 이뤄졌다. 독일의 패배는 4월 30일 나치의 ‘신’이라 할 만한 히틀러의 자살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종전을 환영한 뉴욕과 런던 등의 시민들은 자동차 경적을 울려대며 환호했다. 연합국 총사령관 아이젠하워는 "적이 전장으로부터 영원히 쫓겨났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일본군이 항복할 때 우리들의 전투는 비로소 끝이 난다"고 방송했다. 스탈린은 `위대한 조국방위전쟁의 종결`이라는 특별포고를 발표했고, 처칠은 대일선전을 강화하면서도 `전체주의 국가와 경찰국가가 히틀러를 대신한다"며 소련군에 대한 경계를 나타냈다. 8월 6일에 이어 9일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동맹국 독일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티던 일본도 마침내 연합국에 백기를 들었고, 이로써 2차대전이 그 막을 내렸다. 이날 독일 항복문서에 독일 대표로 서명한 독일군 장성 알프레드 요들은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에서 전범판결을 받고 처형됐다.
[1861년] 인도 시인 타고르 출생
1861. 5. 7 인도 캘커타~1941. 8. 7 캘커타.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 되리라.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들린 곳, 지식은 자유롭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나지 않은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쉼 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죽은 습관의 메마른 사막으로 길 잃지 않는 곳, 끝없이 퍼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런 자유의 낙원으로 내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잠을 깨소서."-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191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인도 문학의 정수를 서양에 소개하고 서양 문학의 정수를 인도에 소개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위대한 성자 데벤드라나트 타고르의 아들로서 일찍이 시를 짓기 시작했다. 1880년대에 몇 권의 시집을 낸 뒤 시가집 〈아침의 노래〉(1883)로 그의 예술의 기초를 확립했다. 1890년에는 그의 성숙된 천재성을 보여주는 〈마나시 Mānasῑ〉라는 시모음집을 펴냈는데 〈마나시〉에는 형식에 있어서 오드를 비롯해서 벵골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시형을 지닌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그의 대표적인 시들도 상당수 실려 있다. 이 시집에는 또한 그가 지은 최초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시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1891년 실라이다와 사이야드푸르에 있는 아버지 소유의 부동산을 관리하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마을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냈고, 그들의 빈곤과 후진성에 대한 깊은 동정심은 나중에 그의 많은 저작들의 핵심적인 주제가 되었다. 1912년에 출간된 〈한 다발의 이야기들 Galpaguccha〉에는 그들의 '비참한 삶과 자그마한 불행들'에 대한 이야기가 모아졌다. 그는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으나, 결코 인도의 독립을 지상의 목적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그는 실라이다에서 벵골의 전원을 사랑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갠지스 강을 사랑하여 그의 문학의 중심 이미지로 삼게 되었다. 이곳에 머무는 여러 해 동안 그는 〈황금 조각배 Sonār Tari〉(1893)·〈경이 Citrā〉(1896)·〈늦은 추수 Caitāli〉(1896)·〈꿈 Kalpanā〉(1900)·〈찰나 Kṣaṇῑkā〉(1900)·〈희생 Naibedya〉(1901) 등의 작품집과 함께 〈Chitrāṇgadā〉(1892), 〈Chitra〉라는 제목으로 1913년에 재출간)와 〈정원사의 아내 Mālinῑ〉(1895)라는 서정적 희곡을 출간했다. 1902~07년 사이에 처자식과 사별한 그는 울적한 심경을 훌륭한 시로 형상화했다. 그는 1913년 널리 알려진 작품집 〈기탄잘리 Gῑtāñjali〉('찬송을 헌정함'이라는 뜻, 1910)의 영역본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1915년 영국으로부터 기사작위를 수여받았으나, 1919년 암리차르에서의 대학살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그 작위를 반납했다. 타고르는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수많은 작품을 썼다. 그는 생애의 후기 25년 동안 21권의 저작을 펴냈다. 그는 이 기간의 대부분을 유럽, 아메리카, 중국, 일본, 말레이 반도, 인도네시아 등지를 여행하며 강연하는 일로 보냈다. 그의 작품들 상당수가 그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영역되었지만, 영역본들은 벵골어 원작에 비해 문학적 가치가 상당히 떨어진다. 그는 시와 단편소설 외에 주목할 만한 소설도 여러 편 썼는데, 〈고라 Gorā〉(1907~10, 영역 1924)는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타고르는 1901년 볼푸르 근처 산티니케탄에 학교를 세우고 인도와 서양의 각 전통에서 최상의 것들을 선별해 조화시켜 가르치고자 했다. 그는 1921년 그곳에서 비스바바라티대학교를 세웠다. 한편 1920년 〈동아일보〉창간에 즈음하여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를 기고하여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한국민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1840년] 차이코프스키 출생
←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 러시아의 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음악적으로는 조숙했지만 음악에 대한 그의 관심은 적극적인 후원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에 대한 그의 관심은 끊이지 않았다. 185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률학교의 예비학교 시절, 그는 그의 부족한 음악 교육을 보완하려는 듯 자주 오페라 극장을 찾았다. 1859년 19살 때, 학교를 졸업하고 법무부의 관사로서 근무했으나, 음악에 대한 애착과 정열에 못이겨 22살 때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들어갔다. 1865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다음해 1월 니콜랑니 루빈스타인이 창설한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어 이때부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른바, `러시아 5인조` 등의 광신적인 민족주의가 음악계를 휩쓸고 있을 때, 이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서구적인 전통과 순수한 감정의 표출에 중점을 두어 보편적인 어법으로 음악을 만들었다. 그는 특히 피아노와 바이올린에서 대단한 진보를 보였다. 이것이 고전적인 작풍과 서로 작용하여 그의 음악에 신선하고 쉬운 영상(影像)을 심어주었고, 이것이 곧 차이코프스키 음악만의 독특한 매력을 지탱하게 하는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특히 선율적 영감과 관현악법에 뛰어나,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 유수한 발레 음악 작품을 남겼다. 그 후 돈 많은 철도 운영자의 미망인 맥크 부인으로부터 후원을 받으며 작곡에 전력을 기울였지만, 결혼 실패 후 그 충격으로 한 때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에서 요양을 하기도 했다. 1893년 11월 6일, 그의 `비창 교향곡`이 초연된 5일 후, 당시 러시아 전역에 유행했던 콜레라에 걸려 안타깝게도 이날 세상을 떠났다.
[1937년] 조선총독관저 건립
← 청와대
1937년 5월 7일 조선총독관저가 건축되었다. 일제는 조선민족의 혼이 담겨 있는 경복궁 앞에 조선총독부를 세운 다음, 경복궁 뒤에 총독관저를 지었다. 이 집의 최초 주인은 일제의 제7대 조선총독인 미나미 지로[南次郞]였다. 이후 일제의 8, 9대 총독이 이 집에 머물렀다. 8·15해방과 더불어 남한 주둔군 사령관이 된 미국의 J. R. 하지 중장이 이 집에 들어와 1948년 8월 24일 한국을 떠날 때까지 3년여 동안 거주했다. 이어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대통령으로 피선된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 집의 주인이 되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 집을 떠날 때까지 12년 동안 경무대라 불렸다. 제2공화국의 내각책임제 아래 윤보선 대통령은 관저 이름을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바꾸었다.
[1937년] 진단학회 설립
← 단군상, 충청남도 온양시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1934년 5월 7일 한국과 그 인근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할 목적으로 진단학회가 설립되었다. 학회의 이름인 '진단'(震檀)은 동방 단군의 나라, 즉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1910년대말부터 전문적 역사교육을 받고 1920년대 후반부터 연구와 저술활동을 시작한 국학 연구자들은 일제의 식민사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한국학자들에 의해 한국어로 이루어지는 한국 역사·문화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학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진단학회 설립 당시의 발기인은 고유섭·김두헌·김상기·김윤경·김태준·문일평·박문규·백낙준·손진태·신석호·이병기·이병도·이상백·이선근·이윤재·이은상·이희승·조윤제·최현배 등 24명으로서 당시 국학의 명사들이 많이 참가했다. 진단학회는 회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주요 사업으로 회원들의 연구업적을 수록한 <진단학보>를 간행하고 강연회와 간담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1940년 일제의 탄압에 의해 자진해산이라는 형식으로 해체되었다. 진단학회는 1945년 사단법인으로 재건되었다.
[1812년] 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 출생
탁월한 극적 독백과 심리묘사로 유명하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로마의 살인재판에 대해 쓴 시집 〈반지와 책 The Ring and the Book〉(12권, 1868~69)이다. 생애 아버지는 런던에 있는 영국은행의 사무원이었다. 브라우닝은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아버지로부터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기초를 배웠다. 1828년 런던대학에 다녔으나 첫 학기 도중 그만두었다. 1834년 러시아 총영사 조지 데 벤크하우젠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행했다. 1838, 1844년의 이탈리아 여행을 빼고는 1840년까지 런던의 캠버웰, 그뒤부터 1846년까지는 런던의 해첨에서 부모와 함께 살았다. 이때(1832~46) 초기의 장시(長詩)와 대부분의 극이 씌어졌다. 처음 출판된 〈폴린 Pauline : A Fragment of a Confession〉(1833, 익명으로 출판)은 형식 면에서 극적 독백이지만 청년기 시인의 열정과 불안이 담겨 있다. 이 작품은 호평을 받기도 했지만, 존 스튜어트 밀은 브라우닝이 자신의 감정과 '강렬하고 병적인 자의식'을 드러내어 이기적으로 이용했다고 공격했다. 이러한 밀의 비판은 브라우닝이 시에서 다시는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쓰겠다는 결심에 영향을 주었다. 〈파라켈수스 Paracelsus〉(1835)·〈소르델로 Sordello〉(1840)는 위대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내면의 요구와 세계의 요구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는 내용이다. 〈파라켈수스〉는 많이 읽혔지만 〈소르델로〉는 독자에게 무리한 지식을 요구하는 이해하기 힘든 시이다. 브라우닝은 배우 찰스 머크리디의 격려로 몇 년 동안 이미 〈스트래퍼드 Strafford〉(1837)에서 시도한 바 있는 시극 형식에 몰두했다. 1841~46년에는 〈방울과 석류나무 Bells and Pomegranates〉라는 소책자 시리즈에 〈피파가 지나가다 Pippa Passes〉(1841)·〈오명 A Blot in the 'Scutcheon〉(1843 공연)·〈루리아 Luria〉(1846)를 비롯해 7편이 넘는 극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과 〈스트래퍼드〉를 제외한 모든 초기작들은 브라우닝 가족의 돈으로 인쇄되었다. 그는 극을 쓰기를 즐겼지만 공연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 재능은 〈스트래퍼드〉에서 고백하다시피 '사건 속의 인물보다 인물 내부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1845년경 브라우닝 생애의 1단계는 거의 끝났다. 그해에 엘리자베스 배렛을 만났기 때문이다. 배렛은 〈시 Poems〉(1844)에서 브라우닝을 칭송하는 시를 썼고, 브라우닝은 1845년 1월 고마움을 글로 표현했다. 5월에 만나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배렛은 여러 해 동안 병자로서 방에 갇혀 지냈으며 불치로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녀의 아버지는 위압적이고 이기적이며 딸의 사랑을 독차지하려 했고 그녀 역시 아버지에게 의존했다. 의사가 이탈리아 요양을 권했으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자, 그들은 규칙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만나다가 드디어 결심을 하게 되었고, 1846년 9월 비밀리에 결혼하여 1주일 뒤에 피사로 떠났다. 결혼 뒤에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휴가를 보낸 것을 빼고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카사구이디에서 주로 살았다. 아들 로버트가 태어난 뒤 1849년 브라우닝 부인의 사촌 존 케니언으로부터 1년에 100파운드씩 받았고, 그가 1856년에 죽자 1만 1,000파운드를 물려받긴 했지만 수입은 적었다. 그는 결혼 뒤부터는 거의 시를 쓰지 않았다. 1849년 전집 출판을 빼고는 〈크리스마스 이브와 부활절 Christmas-Eve and Easter-Day〉(1850)만을 발표했을 뿐이다. 1849년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이 작품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여러 가지 태도를 검토한 것이다. 또 셸리의 편지로 위조한 글에 부치는 서문(1852)은 유일한 주요산문작품이며 비평서이다. 시 51편을 모은 시집 〈남과 여 Men and Women〉(1855)에는 〈주요사건 Memorabilia〉·〈폐허 속의 사랑 Love Among the Ruins〉·〈갈루피가(家)의 토카타 A Toccata of Galuppi's〉 등의 극적 서정시와 〈리포 리피 신부 Fra Lippo Lippi〉·〈동시대를 겨냥하는 법 How It Strikes a Contemporary〉·〈블로그램 주교의 변명 Bishop Blougram's Apology〉 등 훌륭한 독백시가 실려 있다. 그밖에도 〈화롯가에서 By the Fireside〉에서는 암시적으로, 〈한마디만 더 One Word More〉에서는 명백하게 자신이 세운 원칙을 어기고 시인 자신과 사랑하는 아내에 대해 노래했다. 그러나 〈남과 여〉는 많이 팔리지 않았고, 호평도 받지 못했다. 브라우닝은 이러한 반응 때문에 처음에는 실망을 느껴 다음 몇 해 동안 거의 시를 쓰지 않고 낮에는 스케치를 하거나 점토모형을 만들고 밤에는 사교 클럽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탈리아에서 현저히 회복되었던 브라우닝 부인의 건강도 마침내 나빠지기 시작했다. 1861년 6월 29일에 그녀는 남편 품에 안겨 죽었다. 그해 가을에 브라우닝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런던에서는 먼저 아내가 쓴 〈최후의 시들 Last Poems〉의 출판 준비를 했다. 처음에 사람들을 꺼렸으나 서서히 거리낌없이 초대에 응했고 사교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1863년 새로운 시집을 내놓았으나 여기에 〈폴린〉은 실리지 않았다. 뒤이은 시집 〈등장인물 Dramatis Personae〉(1864)에는 〈앱트 보글러 Abt Vogler〉·〈랍비 벤 에즈라 Rabbi Ben Ezra〉·〈Caliban upon Setebos〉·〈슬러지 씨 Mr.Sludge〉·〈중용 The Medium〉이 실렸으며, 제2판이 나오고서야 폭넓은 인정을 받게 되었다. 1868~69년에 나온 가장 훌륭한 시집 〈반지와 책 The Ring and the Book〉은 1698년 로마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재판과정을 소재로 했다. 이 시집은 그 계획과 완성작의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나오자마자 갈채를 받아 브라우닝은 당시 가장 주목받는 문인으로서 자리를 굳혔다. 그뒤부터 런던 사교계의 초대가 쇄도했고 여름에는 친구들과 프랑스·스코틀랜드·스위스에서 지냈으며 1878년부터는 이탈리아에서 여름을 보냈다. 능숙한 창작력에 의해 씌어진 대부분의 대표적 후기시는 장편의 이야기시나 극시들로서 〈호엔슈틸 슈방가우 왕자 Prince Hohenstiel-Schwangau〉(1871)·〈박람회장의 피핀 Fifine at the Fair〉(1872)·〈Red Cotton Night-Cap Country〉(1873)·〈여인숙 명부 The Inn Album〉(1875)·〈극적 목가시 Dramatic Idyls〉 시리즈 2편(1879, 1880) 등과 같이 시사적인 주제를 다루었다. 또한 〈바로스티온의 모험 Balaustion's Adventure〉(1871)·〈아리스토파네스의 변명 Aristophanes'o Apology〉(1875) 등 고전적 주제를 다룬 시도 다수 발표했다. 이밖에도 짧은 시들로 이루어진 〈파치아로토와 그가 언짢아할 때 Pacchiarotto and How He Worked in Distemper〉(1876)·〈조코세리아 Jocoseria〉(1883)·〈페리시타의 공상 Ferishtah's Fancies〉(1884)·〈아솔란도 Asolando : Fancies and Facts〉(1889)를 내놓았으며 죽기 직전에 이례적으로 자전적 내용의 시집 2권을 출판했다. 〈La Saisiaz〉(1878)는 친구 앤 에거턴 스미스의 죽음을 슬퍼한 비가로서 죽음에 대한 명상시이다. 〈당대의 중요인물들과의 담화 Parleyings with Certain People of Importance in Their Day〉(1887)에서는 젊은시절부터 그에게 영향을 준 책들과 사상을 논했다. 1889년 베네치아에 있는 동안 감기에 걸려 몹시 앓다가 12월 12일에 죽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평가 브라우닝은 다른 시인들보다 악의적인 오해와 그릇된 찬사를 많이 받았는데, 이는 그의 시가 가지는 극적인 특성이 이해되지 못한 데서 비롯되기도 했다. 1846년 이전의 많은 작품들이 무대를 겨냥해 쓰여졌고, 그 이후의 주요시들은 극적 독백기법을 점점 완숙하게 구사했다. 극적 독백기법에서는 1명의 화자가 말하고 이 이야기에 대한 화자의 해설이나 말하고 있는 주위의 분위기 등이 첨가된다. 그러나 브라우닝이 이 형식을 즐겨 쓰자, 의도적인 모호함과 기본적인 의도에 있어서 경박한 낙관주의라는 2가지 오해가 생겨났다. 이러한 비판은 타당한 점도 있으나 충분하지는 않다. 그의 시가 항상 어려운 것은 아니다. 짧은 서정시를 비롯한 많은 시에서 명백한 표현이 훌륭하게 구사되어 있다. 그렇지만 시구의 전달을 어렵게 하는 표면상의 장애물도 많다. 거칠고 불규칙적인 리듬으로 대사를 전달하기 때문에 시를 빨리 읽기가 거의 불가능하며, 생략된 구문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조금만 주의해서 읽는다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소르델로 Sordello〉·〈피렌체에 있는 옛 그림 Old Pictures in Florence〉과 같은 시는 주제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어야 이해된다. 또한 슬러지 씨나 나폴레옹 3세 같은 허풍선이, 궤변론자의 독백을 즐겨 썼기 때문에 독자는 교묘하고 역설적인 일련의 이야기를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특징은 손쉬운 독서를 방해한다. 문체나 기법상의 독특한 점들이 해명된다고 해도 브라우닝의 시에는 여전히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다. 첫째, 독백 등에서 뜻밖의 시점을 택하여 독자에게 낯선 관점을 던질 때가 종종 있다. 둘째, 1편의 시 안에서 갑자기 강조점을 바꾸기도 한다. 예를 들어 〈리포 리피 신부〉·〈Master Hugues of Saxe-Gotha〉에서처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주제를 통해 불변의 주제를 다룬다. 개별적인 관찰을 통해 초월적인 진리로 옮아가는 부분은 17세기 형이상학파 시인들이 그랬듯이 독자에게 어려움과 흥미를 부여한다. 셋째, 브라우닝의 시에서는 화자가 항상 아이러니 속에서 등장하기 때문에 풍자의 대상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갈루피가의 토카파〉 같은 음악적인 시의 경우는 논쟁의 고비마다 거짓된 상황과 참된 상황을 구분해야 하며, 〈블로그램 주교의 변명〉 같은 매우 궤변적인 독백에서는 공감할 부분이 더욱 교묘하게 변화한다. 브라우닝이 철학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시를 썼다는 것은 맞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은 그다지 심오하거나 흥미롭지 않으며 안이한 낙관주의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변을 통한 신념보다는 상상에서 나온 신념을 추구했기 때문에 그의 시를 단순히 형이상학적 표현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한편 브라우닝의 극적 독백은 그도 주장했다시피 가공의 인물을 화자로 형상화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브라우닝의 정서와는 다르다. 따라서 시 속에 나오는 가상의 인물들은 시인의 자화상 시리즈가 아니라 인간의 동기를 포괄적으로 나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그리스도교 신앙과 같은 개인적 믿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근본적인 가정이 끊임없이 제기되기도 한다. 인간의 행위에 관한한 그는 애정이나 정직한 본성, 따뜻한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했으며, 이러한 면들은 결코 풍자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그는 비록 실패하더라도 이상을 향해 전력을 다하는 사람들 편에 섰다. 그러나 다소 불합리해 보이지만 같은 시에서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낮은 수준에서 행동하거나 타협하는 사람들을 포용하는 태도를 동시에 보여준다. 브라우닝은 인간의 본질이나 운명에 대해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관점에 서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대해 깊이 생각지도 않은 채 순진하게 희망을 품지는 않았다. 브라우닝은 죽기 전 1864년부터 비평계의 반응을 얻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 하지만 그의 책은 아내나 테니슨의 것만큼 잘 팔리지는 않았다. 20세기에는 빅토리아 시대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명성도 쇠퇴했으며, 독자들이 시에 담긴 가치에 점점 회의를 느끼면서 독자 폭이 줄어들었다. 브라우닝은 개인의 심리와 자신의 의식 흐름에 중점을 두면서 극적 독백을 구사한 점에서 로버트 프로스트나 에즈라 파운드 같은 많은 현대시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다양한 현대인의 삶을 인습의 냄새가 전혀 없는 언어로 표현했다는 점에서도 이들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P. Drew 글)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연방 제3대 대통령 취임
러시아 대통령 푸틴(Putin, Vladimir V., 1952~ )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19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 법학부 국제법과를 졸업한 뒤 연방보안국(FSB)의 전신인 구 소련 국가안보위원회(KGB)에 들어가 주로 동독에서 오랜 기간 첩보활동에 종사하였다. 이어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표자회의 의장의 보좌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시(市) 해외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재선된 뒤인 1996년 대통령 총무실 부실장, 1997년 대통령 행정실(크렘린궁) 제1부실장으로 옐친을 보좌했으며 1998년 7월 FSB 국장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999년 3월부터는 국가안보위원회 서기까지 겸임하고 있던 중 8월 9일 옐친 대통령에 의해 총리로 지명되었다. 총리 취임 후 유가상승에 따라 재정적 압박이 완화되자 서방에 대해 강경노선을 유지하고 체첸사태를 유리하게 수행하면서 국민의 지지를 얻기 시작하였다. 1999년 12월 31일 옐친 대통령이 임기를 남겨둔 채 전격 사임함에 따라, 47세의 젊은 나이에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2000년 3월 26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자의 과반수 이상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4년 3월 14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71.3%의 지지율을 얻어 재선되었다.
[1992년] 우주왕복선 엔데버호 첫 비행 엔데버호(Endeavour)는 미국이 개발한 유인우주왕복선(스페이스셔틀) 제5호(OV-105). 무게 약 92t. 챌린저 우주왕복선과 대체하기 위해 1987∼1992년 4월까지 제작한 최신형 우주왕복선이다. 1회에 최고 16일까지 비행할 수 있으며, 30회까지 발사할 수 있도록 설계 제작되었다. 1992년 5월 7일 첫 발사되어, 지난 1990년 3월 발사되었으나 2단 로켓의 고장으로 370km의 지구궤도에 표류하고 있던 통신위성 인텔샛위성 6호를 수리하여 지구 정지궤도로 재발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1993년 말까지 총 5회 비행하였다.
[1987년] 포항제철 광양제철소 1기 설비 준공(조강연산 270만톤) 1968년 창립된 포철은 우리나라 최초로 포항에 제철소를 건립, 철강을 소재로한 산업을 바탕으로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으며 80년대 들어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철강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자 정부는 제2제철 실수요자로 포철을 선정, 1985년 3월 광양제철소 1기설비를 착공 87년 5월7일 준공하였다. 포철은 계속 늘어나는 국내 철강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88년 7월에 광양 2기설비를, 90년 12월에 광양 3기설비를, 92년 10월 광양 4기 설비를 준공함으로써 조강년산 1,140만톤 체제를 갖추었다. 1992년 종합준공된 광양제철소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첨단 설비를 갖춘 단위제철소로는 세계1위인 최대규모의 제철소가 되었으며, 이후 조강증산 활동을 통해 년간 1,400만톤 이상의 강철을 생산,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1977년] 제3회 주요선진국 정상회담 개막 서방7개국정상회담(World Economic Conference of the 7 Western Industrial Countries)은 세계의 부(富)와 무역을 지배하고 있는 서방 7개 선진공업국의 연례 경제정상회담. 선진국수뇌회의라고도 하며, 통칭 서밋(Summit)이라고 한다. 세계정세에 대한 기본인식을 같이하고, 선진공업국간의 경제정책조정을 논의하며, 자유세계 선진공업국들의 협력과 단결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다. 참가국은 프랑스·미국·영국·독일·일본·이탈리아·캐나다이며, 그 외에 EC(유럽공동체)의 의장국이 참가한다. 1975년 프랑스의 랑부예에서 처음으로 열린 후 미국(1976)·영국(1977)·서독(1978)·일본(1979, 도쿄)·이탈리아(1980, 베네치아)·캐나다(1981, 오타와)·프랑스(1982, 베르사유)·미국(1983, 윌리엄즈버그)·영국(1984, 런던)·서독(1985, 본)·일본(1986, 도쿄)·이탈리아(1987, 베네치아)·캐나다(1988, 토론토)·프랑스(1989, 아르아르세)·미국(1990, 휴스턴)·영국(1991, 런던)·독일(1992, 뮌헨)·일본(1993, 도쿄)·이탈리아(1994, 나폴리) 순으로 회의장소를 옮겨가며 진행한다. ⑶ 경제력:서방 7개국의 인구는 세계인구의 14%를 차지할 뿐이나, 부(富)에 있어서는 3/5을 점유하고 있다. 또한 세계은행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GNP(국민총생산)는 세계 전체의 56%를 차지하며, 1인당 GNP(국민총생산)는 세계 평균 GNP의 4배에 달한다.
[1964년] 울산정유공장 준공 1964년 오늘, 울산정유공장이 준공됐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외국과 합작투자로 세운 정유공장이다. 미국의 거대 석유회사인 걸프가 5백만 달러의 투자금과 2천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했다. 걸프사는 정유공장을 가동하는 데 필요한 제반 기술을 제공하고 파이프 등 수백만 달러 어치의 부품을 공급했다. 걸프사는 이와 함께 울산정유공장 주식의 49%를 확보하고 원유를 독점공급하는 방법으로 공장 경영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울산정유공장은 하루 3만5000배럴의 원유를 정제했다. 우리 정부는 원유정제과정에서 LPG가 생산되자 1966년 LPG버스를 시험운행한 데 이어 1969년에는 LPG버스를 700대로 늘려 본격 운행했다.
[1954년] 프랑스군 거점 디엔비엔푸 베트민군에 함락 1954년 5월 7일 인도지나전쟁의 종결을 토의하는 제네바회담 도중 인도지나에 있는 프랑스군 거점 디엔비엔푸(Dien Bien Phu)가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56일간에 걸친 전투후 함락됐다.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라고 쓰여진 베트민군의 군기가 포연가득한 디엔비엔푸 계곡에 펄럭였다. 프랑스군 총사령관은 외인부대를 포함한 프랑스연합군 1만6천명을 투입, 이 계곡을 요새화하기 시작한 것은 1953년 11월이었다. 베트민군은 3월 13일 디엔비엔푸 포격을 개시해 프랑스군 지역을 차츰 점령해나갔다. 베트민군은 그후 전술을 바꿔 참호를 파나가면서 서서히 프랑스군 거점에 접근하는 전술을 택했다. 1954년 5월 6일 베트민군은 네번째 공격을 개시해 백병전에서 최후의 거점 이자벨을 점거해 다음날인 5월 7일 전투를 종결지었다.
[1919]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의 부인 에바 페론(Perón, Eva, 1919~1952) 출생
← 남편 후안과(1945) 결혼 전 성은 Maria Eva Duarte. 별칭은 Evita.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의 2번째 부인. 후안 두아르테와 후아나 이바르구렌 사이에서 태어난 5명의 사생아 중 1명이었던 에바(또는 에비타)는 연극 배우와 라디오 성우로서 평범한 연기생활을 한 뒤 1945년 상처하고 독신으로 있던 후안 페론 대령과 결혼했다. 그녀는 1945~46년에 걸친 남편의 대통령 선거유세에 가담하여 대중의 추종을 받게 되었는데, 그녀는 대중을 ‘데스카미사도스’(셔츠를 입지 않은 사람들)라고 불렀다. 에바는 정부 내에서 어떠한 공직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노동조합에 대해 후한 임금인상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노동조합측은 그 대가로 페론 대통령에게 정치적 지지를 보냄으로써 사실상의 보건장관 및 노동장관으로 행동했다. 에바는 자선협회에 대한 전통적인 정부보조금을 폐지함으로써 전통적인 상류층 인사들 사이에 많은 적을 만들었고, 그 단체 대신 국민복권과 그밖의 기금에 대한 실질적인 세금 삭감과 자발적인 노동조합 및 기업 헌금에 의해 후원을 받는 자신 소유의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했다. 에바 페론 재단기금은 수천 개의 병원·학교·고아원·양로원, 기타 자선단체를 세우는 데 쓰였다. 에바는 여성의 참정권법 통과에 큰 기여를 했고, 1949년에는 여성 페론당을 결성하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전 학교에 의무적인 종교교육을 실시하도록 했다. 1951년 에바는 자신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알았지만 부통령지명을 얻어냈다. 그러나 군부는 그녀로 하여금 출마를 철회하도록 강요했다. 그녀가 죽은 뒤에도 에바는 여전히 아르헨티나 정계에서 외경스러운 존재로 남아 있었다. 그녀를 추종하는 노동자계급에서는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녀를 성녀로 추대하려고 시도하는가 하면 에바의 정적들은 페론주의의 국민적 상징인 그녀를 아르헨티나 정치에서 몰아내기 위해 페론 정권이 전복된 뒤 1955년에 에바의 시체를 훔쳐내어 16년간이나 이탈리아에 은닉하기도 했다. 1971년 군사정부는 페론주의자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에바의 유해를 마드리드에서 망명 생활 중이던 남편에게 인도했다. 후안 페론 대통령이 1974년 재임 중 죽자, 페론 대통령의 뒤를 이은 이사벨 페론은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을 목적으로 에바의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여 대통령궁 납골당에 안치된 페론 전 대통령 옆에 안치시켰다. 그러나 2년 후 페론주의에 적대적이었던 신(新)군사혁명위원회가 유해들을 대통령궁 납골당에서 제거해버렸다. 결국 그녀의 유해는 레콜레타 공동묘지의 두아르테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1915년] 독일 잠수함 U보트 영국선 루시타니아호 격침. 1198명 사망 영국의 정가여객선 루시타니아호(Lusitania)가 1915년 5월 7일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당한 사건은 미국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시키는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3만 2,000t의 루시타니아호는 1,959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우고 뉴욕을 떠나 리버풀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아일랜드 남부 연안에서 상선들이 종종 침몰하고 독일 잠수함이 이 지역에서 활동한다는 보고를 받은 영국 해군본부는 루시타니아호에게 이 지역을 피하라고 경고했으며, 유보트(U-boat:독일의 대형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교란시키기 위해 몇 분마다 일정하지 않은 시간차를 두고 진로를 바꾸면서 지그재그식으로 운항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승무원들은 이 권고를 무시했고 루시타니아호는 1915년 5월 7일 오후에 공격을 받았다. 어뢰가 우현(右舷) 가운데 부분을 명중시키고 폭발했으며, 잠시 뒤 배의 보일러 폭발로 여겨지는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배는 20분도 안 되어 침몰했고 1,198명이 익사했다. 128명의 미국인을 포함한 인명과 배의 손실은 미국에서 커다란 분노를 불러일으켜, 사람들은 미국이 곧 선전포고하리라 생각했으나 미국 정부는 중립정책에 집착했다. 루시타니아호는 라이플 총탄과 폭탄(합쳐서 173t 정도)도 싣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배를 침몰시키겠다고 경고했던 독일은 적국의 전쟁 목적을 수행하는 배를 공격했다고 자신의 행위를 충분히 정당화시킬 수 있었다. 또한 독일 정부의 입장에서 유보트는 수면에 떠 있을 때에는 공격당하기 쉽고 영국이 일반상선도 무장시키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에, 공격 목표물에 대해 사전경고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15년 5월 13일 미국 정부는 이 잠수함전에 대해 원칙적 측면에서 비난하는 통고문을 베를린에 보냈으나, 이 문서는 뒤이어 보낸 2차례의 통고문과 함께 루시타니아 사고에 대응하는 미국의 한계를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1917년 미국은 참전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독일의 잠수함전을 지적했다.
[1901년] 미국의 영화배우 게리 쿠퍼(Cooper, Gary, 1901~1961) 출생
몬태나주(州) 헬레나에서 출생하였다. 영국에서 보통교육을 마치고 미국의 아이오와주 그루넬대학교를 졸업한 후 만화가로 출발, 1925년 엑스트라로 영화계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단순한 장신(長身) 미남배우였으나 수줍어하는 동작이 지니는 인간적인 매력 때문에 점차 연기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7일간의 휴가》(1927), 《모로코 Morocco》(1930), 《시가(市街) City Streets》(1921), 《무기여 잘 있거라 A Farewell to Arms》(1933), 《어느 일요일의 오후》(1932), 《생활의 설계》(1934) 등에 출연하였고 《오페라 하트》(1936) 등 코미디 영역에서도 뛰어난 연기를 보였다. 《평원아(平原兒)》(1937), 《서부의 사나이 The Westerner》(1958)에서는 서부극의 인물에 인간미를 느끼게 하였고 《요크 중사 Sergeant York》(1941)와 《하이눈 High Noon》(1952)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두 번 수상하였다. 《마천루(摩天樓) The Fount Cinhead》(1949), 《우정 있는 설득》(1956), 《숨겨진 정사(情事)》(1958)에서는 만년의 원숙한 연기를 보여 주었다.
[1833년] 독일 작곡가 브람스 탄생
함부르크 출생. 5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과 첼로를 배우고, 7세 때 O.코셀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10세 때 음악회에 나가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자, 부모는 미국으로 건너가 그의 재능을 이용하여 치부(致富)할 생각이었으나 코셀은 이를 반대하고 그의 스승인 E.마르크센에게 브람스를 사사받도록 하였다. 여기서 그는 작곡법, 고전음악의 가치, 음악의 견실한 구성법과 이론을 배웠는데, 이는 그의 음악적 생애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1850년까지는 브람스의 고난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가정 사정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가계를 돕기 위해 술집 ·식당 ·사교장 등을 돌면서 피아노 연주를 하였으며 여가가 나면 피아노 개인지도, 합창단의 지휘, 합창곡의 편곡 등으로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1850년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 J.요아힘을 알게 되어 1853년 그와 함께 연주여행을 떠나 이 여행에서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슈만부처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브람스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각 방면에 소개하여 음악계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854년 신경쇠약으로 인한 슈만의 자살미수와 입원, 그리고 1856년의 사망에 이르는 약 2년 동안에 브람스는 작곡에 몰두하는 한편, 어려움에 처해 있는 슈만가(家)를 도왔다. 한편 슈만의 부인이며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클라라와의 우정도 깊어져 갔다. 1857∼1859년 그는 처음으로 공적인 직위를 얻어 데트몰트궁정에서 피아니스트로 근무하면서 작곡에도 몰두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의 근무를 마친 후 1862년 가을까지는 고향인 함부르크로 옮겨 합창단의 지휘, 합창곡의 작곡 등을 하다가 1862년 9월 빈으로 이주, 1863년 징아카데미합창단의 지휘자로 초빙되었다. 그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많은 뛰어난 작품들을 작곡하였다. 1865년 2월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추도하는 작품에 착수, 1868년에 대작 《독일레퀴엠》을 완성하고 1869년에는 슈만의 셋째 딸 유리에에 대한 그의 실연을 노래한 《알토랩소디》를, 1871년에는 프로이센의 대 프랑스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승리의 노래》를 작곡하는 등, 관현악부 성악곡을 많이 만들었다. 1872년 가을부터 1875년까지는 빈 음악인협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그 합창단과 관현악단의 정기연주회를 지휘하였는데, 이때의 관현악단을 통한 실지 체험은 1876년에 완성된 《제1교향곡》에 잘 나타나 있다. 브람스의 작곡가로서의 진면목은 이때를 전후하여 발휘되기 시작했고 대가로서의 품격도 갖추게 되었다. 1878년 이후 매년 걸작을 발표하였는데, 《바이올린협주곡(D장조)》(작품 77) 《바이올린소나타》(작품 78) 등은 모두 이 무렵에 발표된 것들이다. 1879년 브로츨라프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되자, 이에 대한 사의로 그 이듬해 《대학축전서곡》(작품 80)을 작곡하였다. 이어 1890년까지 《비극적 서곡》(작품 81), 《피아노협주곡 제2번》(작품 83), 《현악 5중주곡》(작품 88) 등 수많은 작품을 완성하였으나, 1890년부터는 체력과 창의력의 쇠퇴를 자각하고 대곡의 창작을 단념, 신변 정리를 결심하였다. 그러나 1891년 3월 뛰어난 클라리넷 주자 R.뮐펠트의 연주를 접하자, 다시 영감과 창의력을 얻어 1891년 《클라리넷 3중주곡》(작품 114) 《클라리넷 5중주곡》(작품 115)과 1894년 두 곡의 클라리넷소나타 등 일련의 클라리넷을 포함한 실내악곡을 쓰게 되었다. 1896년 3월 그의 평생의 친구인 클라라가 졸도한 후 병세가 악화되자,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성서를 토대로 한 《4개의 엄숙한 노래》(작품 121)를 작곡하였다. 5월 20일 클라라가 세상을 떠난 뒤 브람스의 건강도 눈에 띄게 쇠약해졌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오르간용의 종교적인 오르간곡 《11의 코랄전주곡》(작품 l12)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1897년 4월 3일 마침내 간암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밖에 2007년 중도개혁통합신당 창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김한길 의원 선출 2005년 내신등급제에 반대하는 고교생 촛불시위 2004년 미국 워싱턴 한인회장 최제창 박사 별세 2002년 중국 여객기 랴오닝성 다렌시 인근 바다에 추락, 112명 사망 1999년 나토군, 유고연방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 폭격 1998년 독일 다임러-벤츠와 미국 크라이슬러 합병을 선언 1996년 이홍구 전국무총리, 신한국당 대표로 임명 1995년 프랑스 대통령에 시라크 당선 1992년 한경직 영락교회 원로목사, 템플턴상 수상 1991년 한국 오로라탐험대, 세계11번째 국가로 북극점탐험 성공 1983년 중국 공식대표단 민항기 불시착 문제로 첫 내한 1983년 북한군 대위 신중철 귀순 1982년 한국여자등반대 여성 처음으로 히말라야 람중히말봉 정복 1981년 평화통일정책위원회 발족 1963년 텔스타2호 발사 1956년 해공 신인희 유해호송, 군중과 경찰 간에 충돌사건 발생 1955년 신서유럽연합(WER) 정식 발족 1955년 민병대 해체 1955년 소련, 영국-프랑스 동맹 조약 폐기 1955년 서구동맹(WEU) 정식 발족 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장 도드 피랍 1946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 미군정 수사대에 의해 발각 1942년 일본군 고레히돌 섬 점령 1921년 황신덕등 동경에서 조선여자기독청년회(YWCA) 조직 1921년 상해에서 중국공산당 창당대회 1914년 윌슨대통령, 5월 두번째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제정한다는 연방의회 결의를 승인 1909년 사진의 현상과 인화 과정을 단일화한 미국의 발명가, 물리학자 랜드 출생 1902년 황성신문 사장 남궁억 피검 1875년 일본-러시아 사할린 간도 교환 조약 조인 1873년 베네수엘라의 초대 대통령 파에스 사망 1840년 19세기 초 독일의 낭만주의를 개척한 화가 프리드리히 사망 1592년 임진왜란 최초의 대승 거둔 옥포해전(음력일) 1396년 목은 이색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