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선일미 사상에 대하여-
*다선일미사상의 형성과 배경
차가 건강적인 효능 외에도 사람들의 정신에 보다 깊은 관계를 맺은 것은 불교의 선종(禪宗)과의 만남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선종의 승려들은 처음에는 차가 선 수행 때 정신이 맑게 해주고 수마(睡魔)를 퇴치하는데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차의 효능에 매료되었다.
인도에서 건너온 불교가 중국에 토착화 되는 과정에서 보시(普施)에 의존하던 승려들의 생활방식이 농선(農禪)으로 바뀌게 되었다. 농선은 선종사원을 자급자족하게 하여 경제적 기반을 이루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불교의 특징으로 정착 하게 되었다. 또한 선종사찰에서 생산된 차는 질이 매우 좋아서 송대 공차(貢茶)의 대종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차의 역할도 효능과 더불어 의례화 되어 선종의 필수품이 되었다.
일상적인 음다가 제도화되고 구체적인 의례가 만들어진 것은 백장회해(709~788)에 의해 『古淸規』가 만들어진 후이다. 「백장록」에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밥을 굶었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으로 청규가 철저히 이행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古淸規』가 나온 이래 선종의 청규는 각 시대마다 시의에 맞게 보완이 되었으며 음다법도 더욱 엄격해지고 의식화 되었다. 청규를 보면 당대의 선종사찰에서 차가 일상의 음료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종에서 차는 수행자의 건강과 수행을 도와주었고, 대중 사이의 화해(和諧)를 돕는 매개물이기도 했다. 또한 각종 법요의식의 장엄구이기도 하고, 불보살에 헌공할 때의 청정한 예물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차가 선미(禪味)의 본질에 다가서는 일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차를 선미의 본질과 확고히 연결시킨 사람은 조주종심(趙州從諶:778~897)이다. 조주종심의 ‘끽다거(喫茶去)’ 화두는 차와 선의 관련성을 가장 잘 나타낸 공안이다. 조주의 끽다거는 처음 이곳에 온 사람도 차 한 잔 하고, 다시 온 사람도 차 한 잔 하고, 오랫동안 이곳에 머무른 사람도 차 한 잔 하는 일승(一乘)의 차로, 이것은 내면에서 입증되는 것으로 말로 드러낼 수 없는 것으로 이 화두에서 차는 인식의 전환을 유도하는 매개물로 차를 마시는 것처럼 일상의 평상심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조주차는 선가 차의 대명사가 되었다.
차(茶)와 선(禪)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첫째, 선수행의 최대효과는 정신을 맑혀 불성을 체득하는 것이며 차의 효과도 역시 맑음의 효능을 지니고 있다. 「좌선의」에 의하면 선정이라는 “물이 맑고 깨끗해지면 마음이라는 구슬이 저절로 드러난다.” 라고 하였다. 또 유정량은 차의 10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차로써 방탕한 기운을 흩어내고 차로써 졸음을 쫒아내고 차로써 생기를 기르고 차로써 병의 기 운을 제거하고 차로써 예절과 어진마음을 더하고 차로써 공경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차로써 자양분 을 맛보고 차로써 몸을 기르고 차로써 도를 행하고 차로써 마음가짐을 아름답게 할 수 있다.
위의 내용을 보면 선과 차는 상보적이며 공통의 목표를 지향하는 수단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선과 차는 모두 깨달음의 방편이다. 차는 조주의 끽다거로 인해 기연(機緣)을 부여받아 선원의 대표적인 다선공안으로 깨달음의 방편이 되었고, 일상 속에서 도의 수용이라는 중국 선을 선양하는데 맑음과 일상이라는 이미지로 훌륭한 공부소재가 되었다.
셋째, 선은 차와 함께 진심(眞心)의 참된 도를 추구한다. 모든 망념을 끊어 한 점의 더러움도 없는 마음의 청정상태를 이루고자하는 이치에서 선리(禪理)에서 다리(茶理)를 발견하고 다리에서 선리를 발견함으로 궁극의 도에 닥아 설 수 있다.
넷째, 선과 차는 무(無)에 바탕하고 있다. 선심은 곧 무심이며 다심 또한 무심에 근본 한다. 무심무욕(無心無慾)의 경계를 스스로 깨닫게 된다면 바로 그 순간 선과 차는 다선일미의 진실로 화하게 된다.
다섯째, 선과 차는 모두가 엄정한 수행과 규구(規矩)를 통한 생활 속의 평범한 실천수행과정이다. 선은 생활 속에서 떠나자 않는 성품의 발현을 보는 것이고, 차는 찻잎의 채취, 제다, 끽다 등 평소의 차 생활 속에서 진리를 실현 하고자 한다.
여섯째, 선과 차에는 최상의 정신적인 즐거움의 맛이 있다. 선정에 들면 불성을 떠나지 않는 법회선열을 맛볼 수 있으며 불전에서는 이를 제호로 비유하였다. 차 또한 진수로 차를 달이는 것과 차, 차를 마시는 행위의 세 가지가 하나가 될 때 진미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선과 차의 맛을 『다경』에서 감로나 제호에 비유하고 있음을 보면 선과 차는 상통한다 하겠다. 이상으로 볼 때 선과 차는 영역이 다른듯하면서도 서로 상보적인 관계이다.
선원에서는 이처럼 선과 차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활용하여 선차문화를 흥성시켜왔다. 또 선과 차의 공통점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상호조화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선종의 '청규(淸規)'가 제정됨으로써 차는 선종 사찰의 일상에 보다 깊숙이 스며들게 되었고 선승들은 차를 정신 경계의 최상승인 선의 경지에 깊숙이 들여놓았는데 이것이 바로 다선일미사상의 배경이라 할 수 있다.
다선일미(茶禪一味)는 차와 선의 경계는 하나라는 화두로 원오극근(1063~1125)에 의해 처음 발설되었다고 한다.
다선일미란 선미(禪味)와 다미(茶味)가 동일한 종류의 흥취임을 가르치는 말로서 본래 송대의 원오극근이 호남성 협산 영천선원에서 선 수행을 하던 일본인 제자에게 써준 것이다
다선일미는 ‘차와 선은 한맛’이란 다도와 선도를 한가지로 본다.는 시각으로 다도와 선도가 지향하는 궁극의 사상과 목표가 일치한다는 점에 있다. 차와 선의 관계는『선다록』에서 말하듯이 ‘다의는 곧 선의요, 선미를 알지 못하면 다미도 없게 되었다’ 즉 다의나 다미를 깨닫는 과정은, 선의나 선미를 깨닫는 과정과 동일시 될 수 있다. 따라서 차를 마실 때 오로지 일심으로 깊은 차 맛에 몰입하는 과정은, 마치 선에 있어서 선정을 통해 그 묘미를 체오(體悟)하는 과정과 일치하기 때문에 결국에 차와 선은 삼매의 경지에 이르러 다선일미의 사상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다선일미 사상은 그 전통이 천년을 이어 현재까지도 적극적으로 계승 발전되고 있다.
송 대의 선원다례는 불교 차 문화가 의례화 된 일면을 반영하는 것인 동시에 궁극적으로 선의 정신과 차의 의례가 고차원적 조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다선일미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선일미사상은 송대 이후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선차문화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무라다쥬코(村田珠光:1423~1502)에 의해 다선일미 정신으로 초암차의 시작이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조선후기 초의와 추사 김정희에 의해 명선정신(茗禪精神)으로 거듭 난다
우리나라의 다선일미사상
우리나라의 차 문화의 전래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성립과 매우 관련이 깊다. 구산선문이란 나말여초에 이루어진 아홉 개의 선문(禪門)을 말하는데 이들 구산선문의 개산조들은 거의 모두가 중국 강서(江西) 홍주(洪州)의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강서(江西) 홍주(洪州)의 선종은 청규서 등을 통해 보면 선차(禪茶) 문화의 본산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구산선문이 합쳐져 조계종이라는 거대 종단으로 출범하여 우리나라 불교교단의 중추가 되었으므로 청규의 다법이 우리나라의 차 문화와 더불어 선차 문화의 효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 말기 구산선문의 도입은 차 문화도 함께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차 문화는 선종의 유입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선일미사상이 부각된 조선시대는 억불승유정책으로 불교의 선차문화가 침체 되는듯하였으나 후기에 초의(草衣:1786~1866)의『동다송:東茶頌』과『다신전:茶神傳』이 세상에 나옴으로 인해 다시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초의를 통하여 다선일미 사상이 불가뿐만 아니라 사대부와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초의의『다신전』의 발문에 "총림에 조주의 풍이 있으나 다들 다도를 잘 알지 못하기에…"라고 발행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 말에 의거하면 조주풍, 즉 선차의 진면목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드물어 초의는 이것(선차)을 알리고자 『동다송』을 쓰게 되었다는 뜻이다. 초의는 『동다송』의 내용으로 미루어 홍현주에게 『동다송』지어 바친 52세 여름에는 이미 확고한 다도관이 성립되었다고 하였다. 초의는 선승으로 그의 다도관은 불가의 선 수행을 통하여 체득한 선차의 다선일미사상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다선일미 사상의 중심은 말할 것도 없이 초의이다.
초의의 다선일미사상은 그의 글 奉和山泉道人謝茶之作에 잘 표현되어있다.초의는 선사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삿됨이 없는 것인데 그것이 차의 됨됨이라고 하였다. 초의에게 있어서 차는 욕심과 번뇌이전의 본래면목으로 집착하지 않는 바라밀을 의미한다. 차의 성품은 삿되지 않은 것, 그래서 차란 어떠한 욕심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고 때 묻지 않는 본래의 원천이라는 것이 초의의 견해이다. 이것이 초의의 다선일미 사상이며 우리나라의 다도정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초의의 다선일미사상은 조선후기 차 문화를 중흥시키는 바탕이 되었고 문인들의 예술세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추사(秋史)는 초의의 선사상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는데, 추사의 명선(茗禪)과 선탑다연(禪榻茶烟), 그리고 정좌처다반향초(靜坐處茶半香初), 묘용시수류화개(妙用時水流花開)와 같은 글은 모두 다선일미사상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