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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기독교 삼원론의 나라
(요한복음 1:1-3)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 삼원론에 대한 이해
1) 논리학의 삼원론
논리학에 삼단논법(三段論法)이라는 것이 있는데, 일종의 연역법(演繹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시조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 죽는다.” “그런데 김일성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김일성도 죽는다.”와 같은 것입니다. 또 “모든 곤충은 다리가 여섯이다.” “모든 개미는 곤충이다.” 그러면 “모든 개미는 다리가 여섯이다.”라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조금 성격이 다른 또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가 짚신장사 큰아들과 우산장사 작은아들을 둔 어떤 어머니 이야기를 봅시다. “비가 오면 큰 아들의 미투리가 안 팔릴 것이므로 걱정이다.”이라 하면 이것이 첫째 대전제이고, “비가 안 오면 작은 아들 우산이 안 팔릴 것이므로 걱정이다.”가 둘째 대전제입니다. 그런데 날씨란 “비가 오거나 안 오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것을 소전제라고 합니다. 그러면 결론은 무엇입니까? “어머니는 날마다 걱정 속에서 산다.”라고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삼원론이란 이런 것이 아니지요?
2) 변증학의 삼원론(三元論)
변증법에는 정반합(正反合)의 원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변증법을 체계화했답니다. 그의 유명한 正反合이라는 변증법 논리의 삼 단계 개념이 나옵니다. 역사나 정신 같은 모든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가는 변증법적 전개원리로 설명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즉 하나의 주장인 정(正)에 다른 주장인 반(反)이 나오고, 여기에 더 높은 종합적인 주장인 합(合)이 나와 통합되고 발전되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문제에 찬성과 반대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주장을 어떻게 통합하여 모두가 만족하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정반합의 목표입니다. 여당과 야당의 주장이 상반됩니다. 그러나 이 둘의 의견을 종합하여 조화를 이루면서 더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정치가의 기술입니다.
3)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분들은 말하기를 “기독교는 이원론(二元論)을 가르치는데, 우리 조상들은 삼원론을 말하였다.”라고 합니다. 좀 쉽게 이야기하면 기독교는 ‘천국과 지옥’ ‘복과 저주’ ‘선과 악’ ‘유일신 하나님과 우상들’ 등으로 모든 것을 둘로 갈라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편이 아니면 나의 원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조상들은 삼원론이라고 말합니다. 곧 선과 악만 말하지 않고, 그 중간도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극단을 피하고 항상 세 가지를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① 삼태극(三太極) - 지금의 우리 태극기는 가운데 원의 절반 위쪽은 빨간색, 아래는 파란색으로 나누어져 불과 물을 상징하고 있지만, 고조선의 태극모양은 붉은색, 파란색뿐 아니라 노란색도 들어 있는 삼태극(三太極)입니다. 이것은 천지인(天地人), 곧 하늘, 땅, 사람을 뜻합니다. 적·청·황의 삼색이 상징하는 하늘·땅·사람은 각각이면서 하나이고, 그 가치 또한 동등하다고 합니다. 태극의 음(陰)과 양(陽)이 화합하여 완전한 원형을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땅·사람이 모여 우주가 됩니다. 그러므로 태극과 삼태극은 모두 우주를 상징합니다. 태극기의 네 모퉁이에 그려진 괘를 건곤감리라고 합니다. 건은 하늘, 곤은 땅, 감은 달, 리는 해를 뜻합니다.
② 삼족오(三足烏) - 태양 속에 산다는 신화 속의 까마귀는 발이 세 개로 되어 있습니다. 전에 TV 드라마 ‘주몽’과 ‘연개소문’에 이 삼족오 깃발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③ 삼신(三神)할머니 - 일반적으로 삼신할머니라고 부르는 이 신은 아기를 점지하고 낳고 잘 자라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삼신할머니가 있어 아기가 태어날 때 첫째 신은 뼈를, 둘째 신은 살을, 셋째 신은 영혼을 갖게 해준다고 믿었답니다.
“삼신할머니”가 누구냐 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우리나라의 건국 시조인 “환인(桓因)-환웅(桓雄)-환검(桓儉/단군)” 세 분을 신격화하여 부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둘째 이론은 ‘삼신’이라는 말은 원래 산신(産神), 곧 ‘아이를 낳게 하는 신’에서 온 것이고, 옛날에는 아기를 낳아도 100일도 되기 전에, 또는 돌도 되기 전에 죽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산신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삼신할머니를 생각해 냈고, 그 이름의 ‘삼’이라는 말은 태(胎)를 ‘삼’이라고 했던 데서 온 것이라고도 합니다.
셋째 이론은 음과 양에 또 하나가 합해져서 3이 될 때에 새로운 자손의 생산을 이루게 된다는 뜻에서 삼신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조상들의 삼신신앙이라고 합니다.
④ 우리나라 사람들은 삼세번이라는 말을 좋아한답니다. 그래서 큰 시합에서는 이승삼판제(二勝三判制)를 택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단판 승부를 한다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번 패한 사람에게도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입니다.
⑤ 우리에게 세 가지의 옛 경전이 있는데, 그 첫째는 천부경(天符經)입니다. 가로 세로 아홉 글자씩 모두 81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의 ‘부’자는 ‘부합(符合)한다, 적합(適合)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부합한 경전, 하나님이 내려주신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해설한 책이 두 권인데 그 첫째가 ‘삼일신고’(三一神誥)라는 책이고 둘째가 참전계경(參佺戒經)인데, 참전(參佺)이라 함은「사람으로서 온전하게 됨을 꾀한다.」는 뜻이랍니다.
참전의 ‘참’자는 ‘삼’으로도 읽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고대의 세 경전에 삼(參, 三)자가 다 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3은 완벽하고, 복을 가져다주는 수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실은 기독교가 철저히 삼원론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말부터 삼원론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가르침은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말로는 삼원론이다, 삼위일체다 하면서도 그 말의 뜻을 잘 알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2. 고조선에 나타난 삼원론
1) 이원론과 삼원론에 대해 “우리 모두가 잘 사는 세상” blog에 나타난 설명을 봅니다.
① 이원론은 흑백논리나 음양론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 맞지 않으면 틀린 것, 밝지 않으면 어두운 것, 좋지 않으면 나쁜 것, 선이 아니면 악한 것 등등으로 말하자면 평면적이고 단순논리에 입각하여 모든 사물을 양자택일(兩者擇一)하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사물을 판단할 때 모든 것을 대립되는 논리로 판단합니다. 이것은 중도를 지킬 수 없는 논리이기도 합니다. 찬성 아니면 반대가 있을 뿐 기권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싫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것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크거나 작거나 둘 중에 하나이지 중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선하지 않은 것은 모두 악하며 중도는 없다는 것입니다.
음악에 비유하면 2박자입니다. 강약을 되풀이하는 …… 규칙적이고 여유가 없는 리듬입니다. 이원론의 약점은 공격적이란 것입니다. 상대를 용납하지 않는 속성이 있습니다.
② 이렇게 설명하고서는 개신교의 교리가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합니다. 곧 유일신을 주장하고, 다른 신을 부정하고, 믿으면 천국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의 불바다에 떨어지고... 입으로는 사랑을 부르짖으면서도 기독교가 아닌 모든 다른 종교를 이단시하는 흑백논리가 지금 우리 사회를 긴장 속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삼원론은 인간 중심의 중도를 취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상기의 이원론에서 더 좋은 한 가지를 선택함에 있어서 양자택일이 아닌 순환의 이치를 놓고 판단하여 그 중도를 취하는데 그 높은 뜻이 있다고 말합니다. 삼원론은 중도를 취하여 본래 있는 만물을 순환의 이치에 따라 키우고 가르치고 다스려서 인간 중심의 홍익인간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주장은 2박자가 아닌 3박자의 노래, 곧 단순한 강약(强弱)이 아닌 당기고 잡고 미는 … 약동적(躍動的)이고 자유스럽고 그러면서도 부드러운 리듬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이론의 틀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③ 또 이 사람들은 우리 땅에 자리 잡은 외래종교를 비판합니다.
첫째로 불교(佛敎), 불교의 교리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욕심을 버리는 것, 곧 속세를 떠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우리 인생 모든 일이 부질없는 일이며 결국엔 인연 따라 환생하여 내세에 부처가 되는 것인데, 그 덕분에 우리의 높은 기상은 사라지고 허약함만 남았답니다.
둘째는 유교(儒敎). 이상향(理想鄕)을 기리는 유교정신 그 자체는 훌륭한 사상이라고 하겠으나, 지나친 점은 너무나 문(文)에 치우쳐 무(武)를 무시하는 것이랍니다. 우리의 육예(六藝)는 문무를 겸비하는 것이었으나, 이 유교의 정신은 무보다는 문을 지나치게 앞세워 결국 나약한 인간을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국가 위기에 처하면 제일 먼저 줄행랑을 치는 겁쟁이를 양산하게 되어 우리의 본래의 힘찬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비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신적으로 결정적 위기에 놓이게 되어 마침내 일본의 식민시대를 맞았으니, 정신적인 암흑시대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말을 빼앗기고, 성과 이름을 빼앗기고, 우리의 역사를 빼앗기고, 우리의 조상의 정신마저 빼앗기게 된 절체절명의 시대가 왔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기독교(基督敎)인데, 기독교의 위험성은 우리의 뿌리를 부정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조상이 믿어왔던 하느님이 아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모두가 이단자가 되는 것이고, 우리의 조상이 아닌 이스라엘의 조상을 믿기를 강요당한다고 비판합니다. 또 다른 새로운 정신적인 암흑기가 도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절체절명의 정신적인 위기에 놓여 있는데, 수없이 많은 기독교의 목사들이 주동이 된 반(反)단군 운동의 거센 물결에 우리 모두는 침몰위기에 있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3. 우리 고대사 학자들의 오해
우리 고대사학자들의 오류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고대사 학자들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오해입니다. 성경이 항상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1절을 보세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시고 그와 함께 계신 말씀도 하나님이시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14절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하였으니,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분명히 세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셋이 각각 다른 하나님들입니까? 아닙니다. 이 셋이 결국은 하나이십니다.
또 기독교는 뿌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말하는 뿌리란 단군까지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단군이 섬기신 하나님을 찾아 그 하나님을 섬기자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독교야말로 참된 뿌리를 찾자는 운동이고, 실제로 그 뿌리를 찾은 종교입니다.
2) 이 세상에는 이원론도 있고, 삼원론도 있습니다. 그런데 삼원론을 강조하려다가 이원론을 정죄하고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원론도 맞고, 삼원론도 맞습니다. 사람에 대하여도 이분법이다, 삼분법이다 하지 않습니까? 영과 육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이분법이라고 하고, 영육혼, 또는 영과 육과 마음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삼분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느 하나가 옳다고 하여 다른 것은 틀렸다고 정죄할 것이 못 됩니다.
또한 삼원론에 대한 이해도 잘못되어 있습니다. 삼원의 셋째는 중도가 아닙니다. 곧 흑백논리에서 셋째는 회색이 아니란 말입니다. 파란색과 붉은색 다음에 셋째는 보라색이 아닙니다. 엉뚱하게도 노랑색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보라색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3) 셋째의 오류는 천지인에서 그들은 인, 곧 사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사람이 곧 하늘이다, 사람이 곧 신이다.”라는 경지에까지 나갑니다. 천도교에서 말하는 소위 인내천(人乃天) 사상이라는 것도 역시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은 성경에서도 밝히 강조하고 있는 바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으셨습니다. 지금은 잠깐 천사보다 못하지만, 장차는 천사보다 훨씬 존귀하게 될 것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이 부리시는 종이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자력종교(自力宗敎)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사람은 더욱 깊은 나락(奈落)으로 떨어질 뿐입니다.
“사람이 곧 하나님이다.”라고 하면, 결국은 “하나님이 곧 사람이다.”라는 말이 됩니다. 이것이 무신론입니다. 사람을 강조할수록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사람에 대해서도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4. 바르게 이해된 삼원론은 무엇일까요?
1) 성경에 나타난 예들을 봅시다.
① 솔로몬의 유명한 재판 이야기는 열왕기상 3장 전반부에서는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리고 지혜를 받게 되는 이야기에 바로 이어서 나옵니다. 창기 두 여자가 한 아기를 놓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떻게 판결해야 합니까? 요즘 같으면 DNA 검사를 한다든지 하여 산 아기가 누구의 아기인지 쉽게 판결할 수 있겠지만, 솔로몬 시대에는 바르게 판결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우리들은 보통 “A의 아기다, 또는 B의 아기다.”라고 판결합니다. 보류한다거나 그 중간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모성애’라는 새로운 방향을 알려주셨습니다.
② 헤롯당원이라는 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yes냐, no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립니다. 그 중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내도 좋고, 안 내도 좋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마귀는 간교하여서 꼭 이렇게 난처한 문제들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옵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에게는 다른 적당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라고 하셨지요? 이것은 아주 기이한 기상천외의 대답이 아닙니까? 전혀 새로운 곳에 답이 있었습니다.
③ 부활 이론에 대한 사두개인들과의 논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장차 천국에서는 어떻게 되는지를 몰랐습니다. 이 인간 세계와 똑같을 줄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29-30)라고 하셨습니다. 저들에게는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실은 우리 모두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욥 38:2; 42:3) 하고 있지 않습니까? 깨달아야 합니다.
④ 예수님이 시험 받으실 때의 일도 똑같습니다. 마귀는 “돌로 떡이 되게 하라.”라고 제안하였습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답은 yes냐, no냐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라는 전혀 새로운 방향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⑤ 우리 인간들은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영의 세계에 대하여 깜깜합니다. 그러니까 삼원론이라거나, 삼위일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의 세계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이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주시지 않았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신 29:4)를 우리 한민족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2) 성도들의 체험에도 이것은 많이 나타납니다.
① 나운몽 청년의 경우를 봅시다. 일제 때, 일본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교회에서도 하나님보다 자기네 천조대신(天照大御神,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이 더 우월하다고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절한 많은 목사님들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때에 청년 한 사람도 같이 갇혀 있었습니다. 취조관이 한 사람씩 불러내어 취조를 합니다. 감옥에 갇힌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밤잠을 못 자가면서 기도하고 상의합니다. 만일 “너희가 믿는 하나님과 천조대신 중 누가 더 높으냐?”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인가? 대부분은 “다 같은 신인데, 이름만 다를 뿐이다.”라고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더랍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한 이 청년은 하나도 걱정하지 않고 주님께서 대답을 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이튿날 한 사람씩 불러서 물어봅니다. 이 청년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그것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갑자기 성령께서 그의 입술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고, 천조대신은 일본의 신이라고 배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말에 취조관이 “배웠다? 배웠다?”라고 중얼거리더니, “누구에게서 그렇게 배웠느냐?”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라는 것은 성경에서 배웠고,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가 일본의 신이라는 것은 교과서에서 배웠습니다.” 그러자 취조관은 연필로 책상을 똑똑 치면서 “배웠다? 배웠다?”라고만 하더니 “알았다. 도로 들어가 있어라.” 하면서 감방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입니다.
② 서재철이란 목사님(1903-81)이 계셨습니다. 1934년에 성결교회에서 목사님이 되셨는데,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 정부는 기독교를 박해하여 교회 지도자들을 친미파라는 명목으로 체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서 목사님도 1943년 5월에 다른 교역자들과 함께 동대문경찰서에 수감되었습니다. 모진 고문과 회유를 받는데, 서 목사를 조사하던 일본인 형사가 일본과 미국의 전쟁에서 누가 승리한다고 보는가라는 유도심문을 했습니다. 이때 서 목사님은 “정의가 이깁니다.”라고 대답하니, 일본 형사는 자기네가 정의라고 생각했으므로 서 목사님을 석방했습니다.
3) 성경에는 삼원론의 신비가 가득합니다.
① 조용기 목사님이 강조하는 삼박자 축복이라는 것이 있지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2). 사람들은 자기 육신과 돈밖에 모릅니다. 영혼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혹시 있다고 인정해도 그 영혼이 잘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이 영혼에 눈이 떠져야 합니다.
②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이 눈을 열어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까? 땅만 내려다보면서 살지 말고 눈을 높이 들어 하늘을 쳐다보라고 하십니다. 육신의 안락과 부귀영화만 찾지 말고, 눈을 높이 들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보라고 하십니다. 참된 복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둘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한 마리의 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거룩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자기들을 구원하시려고 찾아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 백성들이 기쁨으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이 놀라운 복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귀가 열려야 합니다. 천국의 영광스러운 새로운 세계가 열려야 합니다.
③ 또한 성령이 오셔야 삼원론의 세계가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에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로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려니와,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8-20)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때마다 일마다 은혜를 주시면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고로 땅만 내려다보면서 탄식합니다. 결국에는 깊은 허무감에 사로잡혀서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기독교 삼원론의 비밀이 있지 않습니까?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깨닫고 그 세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깨닫지 못하면 땅에 속하여 하늘의 보화를 알지도 못한 채 스스로 멸망에 나아가게 됩니다.
(2009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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