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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감리교 공보부(UMCOM)에서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자료정리가 잘 되어 있는 듯하여, 왜 사람들이 미혹되는가를 알기 위하여 준비합니다. 연합감리교회 공보부(United Methodist Communications)가 포스팅 운영 관리하는 한인연합감리교회(The Korean United Methodist Church)입니다. http://www.KoreanUMC.org/
아래 내용에 관하여 성경을 믿는 바이블빌리버로써 개인적인 의견을 달아볼 예정입니다. 괄호 안의 청색과 붉은 글씨가 저의 견해입니다.
—전문—
최근에 한국에서 세월호 침몰 사건이 발생해서 수많은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를 계기로 그 선박의 실소유주인 유병언과 그가 교주처럼 지배하고 있는 "구원파"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필자에게도 구원파가 뭐냐고 묻는 분들이 있어서 이 지면을 통해 간단하게 정리해드리고자 한다.
구원파는 네델란드 선교사인 케이스 글래스와 미국 선교사인 딕 욕의 영향으로 1960년대 초에 한국에서 시작된 기독교 이단이다. <나무위키 자료 영국의 선교사 딕 욕(덕인영, Dick York)이 1960년대 자신의 구원관을 가지고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런데 딕 욕은 정식 교단에서 안수를 받은 기록은 없고, 말 그대로 개인 신앙을 설파하러 온 자로 알려져 있다. 딕 욕, 케이스 글라스(길기수, Kees Glas), 데릭 얼 등은 한국에 와서 선교학교를 만들었고 1기생이 바로 유병언, 박옥수였다. 당시 대구 칠성교회 시무였던 권신찬 목사는 청강생으로 함께 했다. 권신찬-유병언계 구원파(기독교복음침례회)를 만든 권신찬은 51년 11월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지만 62년 12월에 제명당한다. 한국기독교이단문제연구소 심영식 이사장에 따르면 "다른 외국인 선교사로부터 침례를 받고 장로교 교리와 다른 주장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권신찬 목사는 구원을 받은 후 성경에 나온 세례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다는 뜻인 침례라는 걸 알고 당시 물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를 받게 되는데 당시 장로교회의 헌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면직되었다고 한다. # 이때의 외국인 선교사가 바로 네덜란드 출신 독립 선교사 케이스 글라스와 영국 선교사 딕 욕이다. 박옥수는 딕 욕에게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고 주장하나 나중에 딕 욕 본인은 안수를 준 사실을 부인하였다. 현대종교 관련 기사. 또한 길기수 선교사 측의 단체 역시 그들과의 관계를 부정하고 이름을 도용당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권신찬 목사와 유병언 전 회장은 1960년대 초 외국인 독립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대구 성경학교에서 성경을 공부했고, 이후 1963년부터는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전도 활동을 펼쳤다.이들은 평신도운동으로 시작해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고 1981년 12월에 교단 설립이 필요하다는 의견 아래 기독교복음침례회로 교단의 형태가 갖춰지게 되었다 . 대한예수교장로회는 기독교복음침례회를 1992년 총회에서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현재 유병언파(기독교 복음 침례회), 이요한파(생명의 말씀 선교회), 박옥수파(기쁜 소식 선교회) 이렇게 세 계열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는데 그 시작은 권신찬 목사이다. 권신찬은 예장통합측 장로교 목사로 활동하다가 "죄사함을 깨달아" 침례를 받음으로써 (사람이 회개와 믿음이 아닌 "깨달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구원파의 주요 교리중 하나이다) 장로교 총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아 목사직을 박탈당한 인물이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유병언은 권신찬의 사위로서 권신찬의 뒤를 이어 기독교 복음 침례회를 이끌고 있다. 한편 이요한은 유병언이 자신의 사업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는 것을 비판하다가 권신찬이 유병언을 지지할 때 그들에게서 분리되어 나와서 방계그룹을 형성한 사람이다. 그리고 박옥수는 권신찬-유병언 계열과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지만 그들이 선생으로 모신 동일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교회를 형성했는데 같은 선생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교리적인 면에서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들 모두가 침례교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만 정통 침례교와는 상관이 없는 이단들이다.
자 그러면 왜 구원파가 이단으로 정죄되었는가? 우선 유병언파에게만 해당되고 나머지 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와 사업의 동일시의 문제이다. 현재 매스콤을 통해 잘 알려져 있는 사항이지만 유병언은 교회를 이끄는 수장인 동시에 기업의 총수이다. 사업가인지 전도인인지 헷갈린다. 유병언은 교회와 기업을 구분하지 않고 교회헌금으로 사업을 하고 또 신도들에게 구원파 기업체에 참여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기업활동과 신앙생활을 동일시하고 있다.
두 번째로 구원파가 이단으로 정죄되는 이유는 구원받은 날짜를 알아야 구원받은 것이라는 주장 때문이다. 주로 이 이유 때문에 이들이 "구원파"로 불린다. 물론 문제있는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의 대다수가 그렇듯이 이 "구원파"라는 이름도 그들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붙인 이름이 아니다. 이 이름은 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 특히 지금은 작고한 종교문제연구소장이었던 탁명환씨가 붙여준 것으로 현재는 사람들이 그들을 부르는 공식 명칭이 되었다.
구원파 사람들이 정통 기독교인들을 만나면 사용하는 단골 질문이 있다. "선생님, 구원받으셨습니까?" "예,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 이어지는 질문이 "언제 어디서 구원받으셨습니까?"이다. 이에 대해 정확히 확신있게 대답하지 못하면 "죄송하지만 선생님은 구원받지 못하셨습니다." 라고 말해준다. 자신이 육신적으로 태어난 날은 정확히 기억하여 매년 지키면서 어떻게 우리의 영생을 좌우할 영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증거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일까? 구원받은 날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구원받은 날짜를 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성경에는 그런 걸 주장하는 내용이 하나도 없는 것일까? 우리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하는 것은 구원받은 날짜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 내가 구원받은 상태에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바울이나 빌립보 감옥의 간수같이 극적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 그래서 구원받은 날짜와 장소를 정확히 댈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면에 디모데나 루디아같이 그런 극적인 회심의 경험이 없이 (물론 본인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나름대로 회심의 순간이 있었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에 그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조용히 예수님 믿고 회심하고 구원받게 된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원받았느냐를 아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내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와 있느냐 아니냐인 것이다. ( 성경적으로 풀어봅시다.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자기 자신에게 물어서 스스로 입증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스스로 입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못하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들이라." 고린도후서 13:5 )
세 번째로 구원파가 이단으로 정죄된 이유는 한 번 회개하고 죄사함 받은 사람은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회개(metanoeo)와 자백(homologeo)을 구분한다. 회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을 때 단 한 번만 하는 것이고, 그 이후로는 일상적인 죄들에 대해 자백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는가? 요한일서 9절을 근거로 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homologeo)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9절 한글킹제임스성경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confess 그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이 구절은 구원이나 속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7절의 깨끗하게 됨이나 6절의 하나님과의 교제에 관한 말이다. 바른 성경이면 한번에 끝난다 confess. 에베소서 1:13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서 그분을 신뢰하였으니 또 너희가 그분을 믿고서 약속의 그 성령으로 인침을 sealed with 받은 것이니라. 캘빈이 이해하지 못했던 구원의 순서는 죄인이 말씀을 듣고, 복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신뢰한다. 그리고 구원을 받는 순간에 성령에 의해서 인침을 받는다. 은사주의자들은 무조건 기도하고 헌금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소용없다. 그리스도를 신뢰하기 전에 중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캘빈은 날때부터 구원받을 사람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그럼 당신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성경에 정말 회개는 한 번만 하면 되고 자백은 반복해서 하라고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선 위의 요한일서 9절을 검토해보면, 거기에서 말하는 "자백"은 사실 구원파가 주장하는 "회개"와 동일한 개념이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이 모든 불의(adikia, 여성형 단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신다고 했는데, 이 "불의"는 의롭지 못한 개별행위들(복수)이 아니라 그런 행위들의 뿌리인 "불의"(단수)인 것이다. 이렇게 "자백"이 그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준다면 이건 구원파에서 말하는 "회개"와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한글킹제임스 성경은 모든 불의에서 from all unrighteousness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어려운 다른 단어로 바꾸지 않는다. 신약은 시장언어로 누구나 읽을 수 있게 기록되었다. 럭크만 주석성경을 보십시요. )
또 성경 곳곳에 보면 일상적인 죄들을 씻는 것을 가리킬 때 "회개"라는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12:21절을 보라.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 또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들을 보라. 이미 예수를 영접한 교회/사람들에게 계속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 자신이 매일 회개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렇게 많은 곳에서 회개하라고 하고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매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구원파만은 이걸 부정하고 회개는 단 한 번만 하면 된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이다. (회개 repentance와 구원 Salvation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깨달음이고 이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구원주이시고 심판주이심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인정하고 그분을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21 유대인과 또한 헬라인에게도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하였노라. )
그러면 왜 구원파는 이런 성경의 명백한 예들을 부정하면서 한 번의 회개만을 고집하는 것일까?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칭의의 교리를 왜곡함으로써 정통 교회에 대항하여 자기들만이 올바른 구원의 교리를 가르치고 자기들만이 구원받는다는 이단의 체계를 세우기 위함이다. (구원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도 없고 모두 머리속의 상상 뿐입니다. 구원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진리를 모르는 사람에 대해 신경 안씁니다. 대꾸할 필요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루터가 로마서 2:17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를 발견하고는 로마 카톨릭의 위협에 눈 하나 깜짝 안 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시각으로 본다면 구원파의 구원에 대한 교리는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들은 바로는 구원에 이르기까지는 성경적으로 옳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물론 그 다음의 문제는 열매를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구원은 죽어봐야 안다고 하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시더라. 마태 15:14b )
구원파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justification)를 철저히 오해한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의"가 필요하고 이 "의"는 우리의 선한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통해 주어진다는 것이 칭의의 교리의 핵심이다. 그런데 구원파는 이 칭의의 교리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완전히 다른 의미로 이해한다. 즉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의가 주어질 때 우리 속에 있는 "죄덩어리"가 단번에 완전히 없어져서 이제부터는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동물의 피로는 제거되지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제거합니다. 구원파의 구원에 관한 논리를 제대로 알고 있습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히 보장됩니다. 히브리서 10:14에서 이는 그가 한 번의 제사로써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기 때문이라. 로마서 6:23에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2; 8,9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칭의가 그런 의미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십자가의 은총으로 죄가 용서받고 의롭게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서 죄가 완전히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 죄가 남아있지만 더 이상 하나님이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마치 법정에서 범죄를 저지른 피고가 그 범죄에 대한 형벌을 면제받는 것과 같다. 그런데 형벌을 면제받았다고 그 범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이 우리의 형벌을 면제해주시고 의인으로 선언해주셨다고 해서 우리의 죄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만일 그런 식으로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한번 회개한 다음에는 우리가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 ( 이 글을 쓰신 분은 조심스럽게 생각하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인 듯합니다. 또한 잘못된 교단 교리에 쇠뇌된 사람입니다. 잘못된 성경을 사용하기에 일어난 일 입니다. 한글킹제임스성경에서는 요한복음 1:29에서 그 다음 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taketh away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이분이 개역개정을 쓴다면 세상죄를 지고가는 이라고 되어 있는 성경을 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칭의를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구원파에서는 한 가지 종류의 회개, 즉 칭의의 회개만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맞지도 않고 우리의 경험에 맞지도 않는다. 바울이 구원받은 후에도 자신의 죄성과 싸우는 모습을 보였고 다윗도 여러 번 회개한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듯이, 회개는 한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해서 해야 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이 구원받는 것은 모든 것의 완성이 아니고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베드로전서 2:2 갓난 아기들로서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이는 너희가 그것으로 인하여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
네 번째로 구원파가 이단으로 정죄되는 이유는 전인적인 회개(즉 지정의를 모두 아우르는 회개) 대신에 지적인 차원에서만 하는 "쉬운" 회개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즉 죄에서 돌아서려는 의지가 필요 없는 "깨달음"만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 깨달음이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의 전부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권신찬은 일찍이 빌리 그래함 목사가 여의도전도대회에 와서 죄사함을 깨달으라고 설교하지 않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라는 의지적인 결단을 촉구하자, 그가 성경을 잘못 이해했다고 하면서 그도 구원받지 못했다고 한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구원은 쉬운 것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회개는 이 악한 현 세상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이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
구원파가 주장하는 구원의 과정은 이렇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실 때 인류의 모든 죄가 일시에 용서되었다. 이 용서는 우리가 회개를 하든 하지 않든 상관이 없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다 용서해주신 것이다. 그러면 구원파에서는 결과적으로 누가 구원을 받는가? 우리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 순간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거듭나고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파에서는 회개의 고된 투쟁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깨달음만이 있는 것이다. (회개에 왜 고된 투쟁이 필요합니까? 종교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행위를 요구합니다. 주일성수, 새벽기도, 십일조, 헌금, 봉사 등등 행위구원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들의 밥벌이를 위해 써먹는 상투적인 오랜 전통입니다. 이것에 속지 마십시요. 교회는 구원받은 후에 자신의 신앙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는 어떤 모습인가? 구원파에서 말하는대로 회개는 지적인 차원의 "깨달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와 가슴과 의지를 동원하는 전인격적인 회개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주님께로 방향전환을 할 때 이 회심/회개는 세 가지 측면이 있는 것이다. 머리로 복음을 이해하는 것(mental assent), 가슴으로 복음을 체험하는 것(inner experience), 그리고 주님께로 의지적인 위탁(trust)을 하는 것을 동시에 포함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정적이고 의지적인 회개의 모습이 구원파의 구원론에는 빠져 있는 것이다. 바울이 사도행전 20:21절에서 자신의 복음전도의 핵심으로 설명한대로 우리는 깨달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부단한 회개와 십자가의 은혜에 나 자신을 의탁하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이건 거짓말입니다. 로마서 10:9,10에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라.)
다섯 번째로 구원파가 이단으로 정죄된 이유는 오랫동안 기독교 전통으로 내려오는 경건의 모습들을 "종교행위"로 규정하면서 배척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십일조제도, 직분제도(장로, 권사, 집사), 새벽기도, 철야기도, 축도, 심지어는 주기도문까지 "종교"와 "율법"으로 규정하면서 복음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그런 규정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기성교회는 그런 복음에 반대되는 율법행위를 가르치기 때문에 구원이 없다고 주장한다. ( 구원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믿고 있다면 성경을 올바로 나누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은 살아있을 때만 받을 수 있습니다. 죽어봐야 안다고 하는 자들은 성경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11:25, 26에서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하시니 )
물론 그런 종교의식들이 알맹이가 빠진 형식에 그치는 경우 구원파의 지적이 맞을 수 있다. 나의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이해가 없이 그저 무슨 짓을 하든 소득의 1/10만 바치면 된다고 한다면, 아니면 직분제도를 마치 계급이 올라가는 것으로 이해한다거나 새벽기도나 철야기도를 하면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건 분명히 예수님이 경계하신 율법적 차원의 신앙생활인 것이다. 바리새적인 가식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그런 경건의 수단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을 악용하는 것이 문제이지 그것을 잘 사용하면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천 년을 거쳐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지키도록 도움을 준 그런 수단들을 그것을 악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구원파는 (특히 유병언계열은) 기도 자체를 율법적 종교행위로서 부정한다. 기도는 마음에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지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니고, 또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이에 더 나아가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문도 거부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것도 율법적 형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실제 이유는 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회개하지 않는다는 구원파 교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매일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내용 중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구절을 구원파의 교리에 맞지 않는다고 주기도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면 뭔가 이상한 곳이지요. 주님께서 “유대인” 제자들에게 이 기도를 가르치신 때는 아직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주기도문”이 교리적으로 교회 시대 성도들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신약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그것이 우리가 매 기도 때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을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그냥 아멘으로 끝나지 않는가? 사실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의미 없는 일이기에, 끝에 예수님의 이름을 붙이거나 말거나 역시 의미 없는 것이다. )
이단은 항상 성경의 전체적인 시각 대신에 편향된 시각을 제공한다. 어느 사안을 볼 때 성경 전체의 입장에서 보지 못하고 성경의 한쪽만을 붙잡고 억지로 해석을 한다. 예를 들어, 구원파는 칭의를 위한 회개는 아는데 성화를 위한 회개에 대해 무지하니, 회개는 한번만 하면 되는 것이고 계속 회개기도 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엉뚱한 주장을 편다. 또 "구원받은 날짜"를 아는 것도 극적인 회심의 과정을 거친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을 일괄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을 하니 이것도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무식하게 말하는 것이고, 자신들의 교리에 맞지 않는 경건의 모습들을 모두 "율법"이라든지 "종교"라는 이름을 붙여서 치워버리는 것도 기독교 전통을 무시하는 편협하고 교만한 태도인 것이다. 그래서 이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에 대한 교육과 성경 전체를 보는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한 것이다. (구원 하나만 놓고 본다면 구원파의 교리가 연합감리교회의 교리보다는 진보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교리가 진보되었다는 하나 만으로 그들이 옳다고 판단하면 안된다. 열매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누가복음 6:44 나무마다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얻지 못하며 찔레나무에서 포도를 얻지 못하느니라.)
이 모든 문제는 바른 성경을 잣대로 사용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들입니다. 성경을 최종권위로 두지 못하면 이런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요구되는 것은 바이블빌리버입니다. 바른 성경인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이 나라의 표준 성경으로 정해야 합니다. 영국이 1611 킹제임스성경을 제정하면서 해가 지지않는 나라가 되었고, 미국이 바른 성경으로 나라를 건국하여 불과 200년 만에 세계 최강국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한국은 유사이래 중국을 능가해 본 적이 거의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이 우리에게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월간지 성경대로믿는사람들 글입니다.
오늘날 한국 땅에서 각종 이단들이 일으키는 사회문제 때문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까지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요즘처럼 반기독교 세력들이 각종 언론매체들을 통해 기독교를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로 위장한 이단들이 비성경적인 교리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어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성경대로 믿고 행하는 정통 교회까지 싸잡아서 비난을 받고 있다. 누군가가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지난달 4월 16일 아침에 일어난 “세월”호 선박침몰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사람들의 안타까움이 변하여 선박회사에 대한 분노로 바뀌어가고, 세간의 눈과 귀가 그 선박의 소유주에게로 쏠리면서 다시 한 번 몸서리를 쳐야 했다. 그것은 “기독교복음침례회”라는 단체, 즉 “구원파”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하는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어떠한 죄를 지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비성경적 교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거부감부터 들게 하는 이때에, 자칭 이단 전문가라고 하는 자들까지 나서서 방송에 출연해 구원에 관해 아는 체를 하며 틀린 구원론을 말함으로써 참된 복음 전파를 가로막고 있다. 그들은 구원받은 성도가 옛 생활을 청산하고 반드시 거치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성화 과정을 성경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구원파의 잘못된 교리에만 초점을 맞추어 억지로 설명하는 모습을 보인다.
구원파에서 생활하다가 빠져나왔다고 하는 사람들은 천편일률적으로 그들의 잘못된 교리를 말한다. 구원파가 말하는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구원받은 후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은 그들만의 이단적 가르침이다. 이러한 혼란은 그들의 구원에 관한 교리가 잘못된 것과 그리스도인이 된 후 죄와 맞서 싸워야 하는 성화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성경에 의하면 한 번 받은 구원은 구원받은 후의 행위와 상관없이 영원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의 역사는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세주로 믿고 영접할 때 일어나는 영적인 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구원은 죽어서 지옥에 가야할 죄인의 혼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고 동시에 아담 이래로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이제 일하는 사람에게는 그 보수가 은혜로 여겨지지 않고 빚으로 여겨지지만, 행함이 없어도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롬 4:3~5).
하지만 한 사람의 혼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겉 사람까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 아니고, 그 이후에는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야 하는 기나긴 여정이 남아 있다. 『우리 모두가 믿음의 하나 됨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의 하나됨에 도달하게 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엡 4:13). 모든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경건하여 선한 간증을 남겨야만 하기에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숙해야만 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데 현재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혼을 말하는 것이지 몸은 아직 구속을 받지 못하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창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받는 것을 우리가 아노니 그들뿐만 아니라 성령의 첫열매들을 가진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되는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느니라』(롬 8:22,23). 그래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어떤 그리스도인도 완벽한 사람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죄의 몸이 구속을 받을 때까지 늘 죄와 싸워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다. 때로는 자신을 비참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만큼 힘든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이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낼 것인가?』(롬 7:24) 이것을 성경에서는 선한 싸움이라고 말씀하시며, 거기에는 죄와 불의와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영적 전쟁 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이런 건전한 교리에 무지한 사람들은 늘 이와 같은 성경적 교리를 비판하고 오류를 퍼뜨린다. 어떤 신학박사는 단회적인 “회개”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부정하며 말하기를 “기독교인들은 사기를 치거나 탈세해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기독교인들은 개독이니 먹사라는 소리를 들어도 싸다.”고 했는데 그의 이 말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라는 성경적인 구원관을 부정하고 행위 구원을 주장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가 예로 든 것은 구원받지도 않은 교인들이 더러운 양심으로 행한 악인데, 그는 이를 역이용하여 참된 구원론을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거듭나지 않은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성에서 나온 악행들이 성경의 진리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귀가 성경의 진리를 가리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성경은 비록 살인자나 강도라도 진실로 회개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8,9).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라』(롬 10:9,10).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 무지한 사람들이 구원이 이처럼 교리적으로 무척 쉽다보니 거기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가 하면, 반대로 “옳지, 잘됐다. 믿고 영접하여 구원을 받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다 용서받아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받았으니 이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복음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은 구원파가 주장하는 많은 부분이 성경과 거리가 먼 것으로 보아 그들이 정상적인 복음을 전하거나 들어보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이들은 구원론이나 교회론, 종말론 등 그리스도인으로서 알아야 할 건전한 조직신학을 배제하고 사이비적인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세뇌시킨 것이 분명하다. 이들은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회와 아무런 관계도 없으면서 기독교복음침례회라는 이름을 81년부터 사용하고 있는데 이들은 성경에도 없는 죄 사함의 비밀(?)을 깨달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거짓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죄 사함은 비밀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통해 이미 다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들의 복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복음이 아니라 깨달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가짜 복음이다. 그래서 그 안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실 리가 없기에 그렇게 육신적으로 살다가 죽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죄 사함을 받으면 죄가 완전히 없어져서 의인이 됐다고 착각하며,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고, 죄를 지어도 그 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마음껏 죄를 지을 수 있는 길을 스스로 활짝 열어놓았다. 그 끝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다.
역사적으로 초대 교회 성도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했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그런데 그들이 구원파가 행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했다면 그 누가 그들을 칭찬할 수 있었겠는가?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 『너희 중에 누구도 살인자나 도둑이나 행악자나 다른 사람들의 일에 간섭하는 자처럼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하라. 그러나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5,16). 이 세상에 죄를 가져온 존재는 마귀이며, 그 마귀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미혹해 죄를 짓게 하는데 심지어 기독교라는 탈을 씌워 구원을 받은 사람은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까지 속이고 있는 것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님께서는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이는 마귀가 처음부터 죄를 짓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마귀의 일들을 멸하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모독하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말인가?(요일 3:8) 그런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는 구절은 성경에 단 한 구절도 없으며, 그런 거짓말쟁이들을 가리켜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말씀하실 뿐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와서 너희 아비의 정욕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으며 진리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자기 안에 진리가 없음이라. 그가 거짓말을 할 때는 자신에게서 우러나와 한 것이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또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라』(요 8:44).
월간지 성경대로믿는사람들 글입니다.
오늘날 한국 땅에서 각종 이단들이 일으키는 사회문제 때문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까지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요즘처럼 반기독교 세력들이 각종 언론매체들을 통해 기독교를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로 위장한 이단들이 비성경적인 교리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어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성경대로 믿고 행하는 정통 교회까지 싸잡아서 비난을 받고 있다. 누군가가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지난달 4월 16일 아침에 일어난 “세월”호 선박침몰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사람들의 안타까움이 변하여 선박회사에 대한 분노로 바뀌어가고, 세간의 눈과 귀가 그 선박의 소유주에게로 쏠리면서 다시 한 번 몸서리를 쳐야 했다. 그것은 “기독교복음침례회”라는 단체, 즉 “구원파”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하는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어떠한 죄를 지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비성경적 교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거부감부터 들게 하는 이때에, 자칭 이단 전문가라고 하는 자들까지 나서서 방송에 출연해 구원에 관해 아는 체를 하며 틀린월간지 성경대로믿는사람들 글입니다. 구원론을 말함으로써 참된 복음 전파를 가로막고 있다. 그들은 구원받은 성도가 옛 생활을 청산하고 반드시 거치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성화 과정을 성경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구원파의 잘못된 교리에만 초점을 맞추어 억지로 설명하는 모습을 보인다.
구원파에서 생활하다가 빠져나왔다고 하는 사람들은 천편일률적으로 그들의 잘못된 교리를 말한다. 구원파가 말하는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구원받은 후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은 그들만의 이단적 가르침이다. 이러한 혼란은 그들의 구원에 관한 교리가 잘못된 것과 그리스도인이 된 후 죄와 맞서 싸워야 하는 성화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성경에 의하면 한 번 받은 구원은 구원받은 후의 행위와 상관없이 영원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의 역사는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세주로 믿고 영접할 때 일어나는 영적인 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구원은 죽어서 지옥에 가야할 죄인의 혼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고 동시에 아담 이래로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이제 일하는 사람에게는 그 보수가 은혜로 여겨지지 않고 빚으로 여겨지지만, 행함이 없어도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롬 4:3~5).
하지만 한 사람의 혼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겉 사람까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 아니고, 그 이후에는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야 하는 기나긴 여정이 남아 있다. 『우리 모두가 믿음의 하나 됨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의 하나됨에 도달하게 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엡 4:13). 모든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경건하여 선한 간증을 남겨야만 하기에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숙해야만 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데 현재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혼을 말하는 것이지 몸은 아직 구속을 받지 못하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창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받는 것을 우리가 아노니 그들뿐만 아니라 성령의 첫열매들을 가진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되는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느니라』(롬 8:22,23). 그래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어떤 그리스도인도 완벽한 사람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죄의 몸이 구속을 받을 때까지 늘 죄와 싸워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다. 때로는 자신을 비참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만큼 힘든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이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낼 것인가?』(롬 7:24) 이것을 성경에서는 선한 싸움이라고 말씀하시며, 거기에는 죄와 불의와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영적 전쟁 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이런 건전한 교리에 무지한 사람들은 늘 이와 같은 성경적 교리를 비판하고 오류를 퍼뜨린다. 어떤 신학박사는 단회적인 “회개”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부정하며 말하기를 “기독교인들은 사기를 치거나 탈세해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기독교인들은 개독이니 먹사라는 소리를 들어도 싸다.”고 했는데 그의 이 말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라는 성경적인 구원관을 부정하고 행위 구원을 주장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가 예로 든 것은 구원받지도 않은 교인들이 더러운 양심으로 행한 악인데, 그는 이를 역이용하여 참된 구원론을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거듭나지 않은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성에서 나온 악행들이 성경의 진리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귀가 성경의 진리를 가리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성경은 비록 살인자나 강도라도 진실로 회개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8,9).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라』(롬 10:9,10).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 무지한 사람들이 구원이 이처럼 교리적으로 무척 쉽다보니 거기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가 하면, 반대로 “옳지, 잘됐다. 믿고 영접하여 구원을 받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다 용서받아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받았으니 이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복음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은 구원파가 주장하는 많은 부분이 성경과 거리가 먼 것으로 보아 그들이 정상적인 복음을 전하거나 들어보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이들은 구원론이나 교회론, 종말론 등 그리스도인으로서 알아야 할 건전한 조직신학을 배제하고 사이비적인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세뇌시킨 것이 분명하다. 이들은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회와 아무런 관계도 없으면서 기독교복음침례회라는 이름을 81년부터 사용하고 있는데 이들은 성경에도 없는 죄 사함의 비밀(?)을 깨달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거짓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죄 사함은 비밀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통해 이미 다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들의 복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복음이 아니라 깨달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가짜 복음이다. 그래서 그 안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실 리가 없기에 그렇게 육신적으로 살다가 죽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죄 사함을 받으면 죄가 완전히 없어져서 의인이 됐다고 착각하며,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고, 죄를 지어도 그 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마음껏 죄를 지을 수 있는 길을 스스로 활짝 열어놓았다. 그 끝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다.
역사적으로 초대 교회 성도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했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그런데 그들이 구원파가 행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했다면 그 누가 그들을 칭찬할 수 있었겠는가?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 『너희 중에 누구도 살인자나 도둑이나 행악자나 다른 사람들의 일에 간섭하는 자처럼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하라. 그러나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5,16). 이 세상에 죄를 가져온 존재는 마귀이며, 그 마귀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미혹해 죄를 짓게 하는데 심지어 기독교라는 탈을 씌워 구원을 받은 사람은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까지 속이고 있는 것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님께서는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이는 마귀가 처음부터 죄를 짓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마귀의 일들을 멸하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모독하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말인가?(요일 3:8) 그런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는 구절은 성경에 단 한 구절도 없으며, 그런 거짓말쟁이들을 가리켜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말씀하실 뿐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와서 너희 아비의 정욕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으며 진리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자기 안에 진리가 없음이라. 그가 거짓말을 할 때는 자신에게서 우러나와 한 것이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또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라』(요 8:44).
마지막으로 점검하세요.
문제의 세월호를 물에 띄운 청해진해운이라는 곳이 유병언이라는 인물에게 속한 구원파 회사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구원파의 교리에 관해 새삼 많은 관심이 쏠렸다. 그들이 무슨 교리로 교육을 받았기에 승무원들이 직무유기로 인한 살인 행위를 했냐는 것이다. 구원파가 인간의 구원을 말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깨달음”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깨달았기에 어린 생명들을 인생의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수장되게 하고도 저리도 태평한 것일까? 대부분 구원파 신도들로 이뤄졌다는 승무원들은 배의 침몰이 마치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유치장에서 낮잠도 자고 영화도 보며 밥도 잘 먹고 잘 지냈다고 한다. 대체 무엇을 “깨달았기에” 그런 살인죄를 저지르고도 그토록 “태평”할 수 있었을까? 구원파의 “깨달음”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면 그 어떤 죄를 지어도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배웠기에 그토록 태평한 것 아니겠는가?
구원파가 구원을 위한 “깨달음”의 교리를 강조하는 데 즐겨 사용하는 구절은 ‘골로새서 1:6’이다. 변개된 한글개역성경의 그 구절은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바른 성경인 <한글킹제임스성경>은 『그 복음이 온 세상에서와 같이 너희에게 이르니 너희가 듣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열매를 맺는도다.』(골 1:6)라고 되어 있다. 틀린 성경은 바른 성경과 비교했을 때 『진리 안에서』가 “참으로”라고 변개되어 있고, 전체 내용 또한 마차로 말을 끌고 가듯 뒤죽박죽으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존하여 우리 손에 주신 바른 말씀을 근거로 구원파의 “깨달음”의 교리를 판단해 보도록 하자.
우선 골로새서 1:6은 골로새 성도들이 복음을 듣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복음이 그들 안에서 열매를 맺었다고 말씀한다. 그 열매란 골로새 성도들이 먼저 구원을 받은 일로부터 시작하여 구령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와 여러 가지 선한 일들을 통한 섬김의 열매를 포괄한다. 골로새서의 이 구절은 결코 깨달음이 구원의 방법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즉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요 14:6)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그들이 이 현 세상을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딛 2:11)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구원파는 골로새서 1:6만을 들고 나와 깨달음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지만 성경에는 그들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참조 구절이 단 한 구절도 없으며, 오히려 죄인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구절이 신약 성경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행 16:31, 롬 10:9,10, 고전 15:2-4, 갈 2:16, 골 2:12, 살후 2:13 등). 특히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는 말씀은 골로새서 1:6의 의미를 밝히 밝혀 주고 있다. 이 구절에 따르면 깨달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다. “깨달으면”이 아니라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된다는 뜻이다. 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며 인간의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다(엡 2:9). 깨달음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들을 위하여 창조된 하나님의 작품들이다(엡 2:10). 이 작품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들에 열매를 맺는 것인데, 이것이 골로새 성도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줄곧 해온 일이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케 되어 주께 합당히 행하므로 모든 일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들에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골 1:10).
구원파는 죄인이 구원파의 교리를 깨달으면 그 깨달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죄값을 대신 치러주신 구주로서 인격적으로 믿고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요 1:12, 계 3:20) 십자가에서 죄인의 죄가 씻겨졌다는 그 사실을 단 한 번 “지적으로 깨달음으로써”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증거를 듣고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한” 아그립파왕을 떠오르게 한다(행 26:28). 그는 바울이 복음에 관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지적으로 깨달았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죄값을 대신 치러주신 하나님의 아들로는 인격적으로 믿지 않았던 것이다. 구원파에게는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는 일이 없고 “지적인 깨달음”만 있다. 지적인 깨달음을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교만하기 때문인데, 그들은 자신들이 순수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보다 더 알고 있다고 자만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구원(?)을 받으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사해졌기에 회개는 구원받을 때의 회개 외에는 더 이상 필요가 없고, 이후로 반복적으로 죄를 지어도 그 죄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죄를 지었다고 자백만 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오히려 구원받은 후 죄를 짓고 회개하는 것이 구원받지 않은 증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간에 교제가 있게 되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아무 죄도 없다고 말하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나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그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요,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7-10). 구원파는 죄인이 구원받을 때 회개하는 것과, 구원받은 성도가 죄를 지은 후 그 죄에서 돌이키는 참회의 차이점을 모르고 있다. 그들은 죄를 지으면 자백하면 된다고 하지만 성경에서 자백은 그 지은 죄를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자기 죄들을 숨기는 자는 번성하지 못할 것이나, 죄들을 자백하고 버리는 자는 누구나 자비를 얻으리라』(잠 28:13). 죄를 짓고 또 짓고 하는 것은 성경적인 자백이 아니다. 그들은 구원받을 때 한 번 회개하면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고 하지만,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죄의 종이 되며(벧후 2:19), 죄의 결과로 죽게 된다고 말씀한다(롬 8:13).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이라』(갈 6:7). 거듭난 성도는 죄의 종 된 상태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기에 이제는 골로새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롬 6:22).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값으로 구원하신 모든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깨달음’은 이교도들의 용어라는 것이다. 그것은 특히 ‘불교’의 용어이다. 불교는 ‘깨달음’을 통해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에 이름을 강조한다. 해탈은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얻는 것이고, 열반은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지고 진리를 ‘깨달아’ ‘불생불멸’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구원파의 ‘깨달음을 통해 죄로부터 자유를 얻는다’는 교리와, ‘깨달음으로 인한 영생’의 교리에 부합한다. 믿음이 아닌 깨달음을 가르치는 것은 구원파와 참된 그리스도인의 영이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의 영을 소유한 그들은 성경을 이교도들처럼 가르치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성경대로 가르친다(고전 2:12). 구원파는 가장 기본적인 구원의 진리도 모르고 있다. 남들에게는 자유를 약속하나 자신들은 타락의 종들인 그들이 맺은 열매가 그들의 실체를 보여 준다. 세월호 참사 한 가지만 보더라도 그들이 사람의 혼을 가지고 장사를 해 먹는 십자가의 원수들임이 드러난 것이다(빌 3:18).
구원파의 깨달음 교리는 멀쩡한 배를 증축하여 아까운 생명들을 수장시킨 세월호에 비견되는 교리이다. 죄인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죄값을 대신 치러주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면 은혜로 구원받는 순수하고 정확한 복음에 비성경적인 “깨달음”을 “증축”하여 뭣 모르고 승선한 죄인들을 “구원파호”와 함께 수장시켜 버리는 사악한 교리이다. 성경은 죄인들을 향해 “깨달으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죄인이 성경을 어떻게 깨닫는가? 다만 믿으라고 말씀할 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니라』(롬 10:17).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사도 베드로가 “깨달은” 진짜 복음이다. 『형제 여러분, 당신들이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우리 가운데 택하시어 나의 입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셨느니라.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증거하시어 성령을 주셨으며 우리와 그들 사이에 어떤 차이도 두지 아니하셨으니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결케 하셨느니라. 그런데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의 조상이나 우리도 감당할 수 없었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걸려고 하느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믿으며 그들도 마찬가지니라』(행 15: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