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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30;16-31. 문제는 늘 새로운 기회입니다 2. 2020. 8. 16.
여러분, 오늘 코로나19, 위기의 상황이 우리의 현장입니다. 이 어려움과 고통과 눈물의 현장이 나의 삶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여기서 다시 일어날 능력이 있어야 하고 위기의 상황에서 반드시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 아픔과 고통과 위기의 상황에서 다시 시작 합니다. 그래야 기회가 될 수 있고 회복과 비전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현실은 관념과 추상의 무대가 아닙니다. 실제의 상황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나에게 적용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상황은 십자가 위에 기회입니다. 그냥 손을 뻗기만 하면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닙니다. 생을 책임 질 삶의 수장으로서의 능력을 철저히 나타내야 하는 현장입니다. 그래서 6절에 다윗은 크게 군급하였으나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힘입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이 드는 급한 현장입니까? 몸서리치는 현장입니까? 아득합니까? 방법이 없습니까? 그래도 이 자리에서 여호와를 힘입어야 하고 이 현실에서 시작을 하고, 고통의 현장에서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꿈을 꾸고 비전이 있는 사람은 위기 때에 기도를 하고 여호와께 묻습니다. 나의 믿음의 생각 가운데 안 되는 일이라면 마음을 쓰지 말고 여호와께 올려드리고 여호와께 맡기고 신앙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상황에서 여호와를 힘입고 시작을 하고 여호와를 힘입고 기회를 잡고 복원을 이루며 더 나아가 비전을 만들어 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먼저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러면 다윗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을 합니까? 오늘 여기에 답이 있고, 진리가 있습니다.
1. 발을 밟은 사람은 발을 밟힌 사람의 마음을 잘 모릅니다. 아픔을 당한 사람은 아픔을 준 사람을 잘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준 가장 놀라운 복은 내일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베일로 가려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누구도 내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묻는 사람은 베일에 가려있는 놀라운 비밀을 아는 것과 함께 거기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해 왔기 때문에 그 것이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빌4;19.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영광 가운데 우리의 쓸 것과 필요와 나눔을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내용을 자세히 보아야 말씀이 꿀맛이고 오래 음미해야 더욱 자신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런데 순종을 하고 실천을 하면 기적을 체험하고 놀라운 역사를 경험합니다. 결국에는 삶에 다가온 슬픔대신 희락과 재대신 화관과 근심대신 찬송과 눈물대신 찬송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다윗은 밟혔고 아픔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시글락은 모르고 아말렉은 모릅니다. 어떻게 해요?
1-1. 잃은 뒤에는 돌아옴이 있습니다. 발로 밟힌 뒤에 돌아옴이 있습니다. 다윗은 아픔을 당한 뒤에 돌아옴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사실 이 말은 근사록(近思錄)의 극기(克己)편에 나오는 글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잃은 것이 있은 뒤에 돌아오는 것이 있는 것이니, 이미 잃음이 있으면 후회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멀리 가지 않고 돌아왔으므로 후회에 이르지 않은 것이니, 바로 크게 좋은 것이다. 여러분, 돌아왔다는 표현은 떠났다는 말을 담고 있고, 잃었다는 표현은 가졌다는 말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의 말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이전 상황을 짐작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후회합니다. 왜 그럴까요? 앞날을 미리 살아보고 다시 돌아와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미리 살아본 적이 없고 처음 살고 있는 오늘입니다. 그래서 머뭇거리다가 잃고 몰라서 잃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잃는 것이 있으면 돌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밟힌 것이 있으면 역전할 때가옵니다. 다윗이 시글락을 잃고, 가족을 잃고, 자기를 지켜 줄 아름다운 성을 잃었습니다. 어린 아이로부터 모든 여성을 잃었습니다. 가축을 잃었고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잃었습니다. 다 잃었습니다. 그런데 돌아 온 것이 있습니다. 8절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기도가 돌아 왔고, 여호와께 묻는 것이 돌아 왔습니다. 사실 다윗은 늘 여호와께 묻고 행동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가 묻지 않습니다. 자기의 생각대로 살고, 그 생각에서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불레셋의 이방나라 땅, 시글락 성까지 왔습니다. 삼상27;1-2에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여러분, 여기 표현을 보세요.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스스로 말합니다. 사울이 절망하리니,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다 자기 생각이고 다 스스로 한 행동입니다. 여호와께 묻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글락의 모든 것을 잃어 버렸더니 돌아 온 것이 기도이고 돌아 온 것이 여호와께 묻는 것이고, 돌아 온 것이 주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을 찾고, 에봇을 찾습니다. 여러분, 잃어버린 것 때문에 돌아 온 것이 있습니다. 기도가 돌아 왔고 묻는 것이 돌아왔고 여호와를 주목하는 것이 돌아 왔습니다. 그 결과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섬세하시고 자상하시고 계획적인 하나님의 로드맵이 시작이 됩니다. 다윗을 위해서 하나하나 만들어가고 길을 엽니다. 회복과 되돌림을 만들고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낙심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잃어버린 뒤에 돌아옴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살아온 불레셋에서의 지난 1년4개월은 하나님으로서는 탐탁지 않은 세월이고, 필요치 않은 세월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기간 동안 다윗의 삶 속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행동과 자기주장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모습을 잃었습니다, 그러니까, 27장 말씀처럼 그 마음에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누구의 손에 망하리니.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나 때문에 망하리니. 나 때문에 절망하리니. 누구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상책이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일반 사람들과 보통사람의 모습이 현재 다윗입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이런 表現 자주 사용하잖아요. 그런데 보통사람으로 전략한 다윗을 하나님은 그냥 내 버려두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다윗을 향하여 극약처방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늦었지만 다윗도 이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 왔습니다. 그러면 이 내용이 무엇일까요?
1-2. 언제 어느 때든지 절망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다윗의 위대함이 이 것입니다. 보통사람인 다윗의 모습은 오늘 우리와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다른 점이 무언인가? 다윗은 절망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삶의 현실가운데 실패와 낙심될 만한 일이 있을 때라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현실 앞에서도,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앞에서도, 당장 죽는 사람처럼 맥이 풀리고 힘이 없고 눈이 감기 우는 그 현실 앞에서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낙심하면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시고 선택하고 지명하여 불러 세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순간순간 지키시고 이끄시고 책임지시고 길을 여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잃은 것이 있으면 돌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이 것이 진리이고 이것이 자녀의 특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상황과 여건 때문에 늘 넘어지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다윗처럼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늘 새로운 삶의 길과 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3.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책임지실 일이 됩니다. 내가 주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이고 놀라운 일입니다. 약속과 작정 가운데 아들과 나를 맞바꾸신 사건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양자 삼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양자를 삼았습니다. 부모에게도 잊혀 진 존재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양자 삼아서 책임을 져주는 다윗이 됩니다. 그 책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꿈꾸신 다윗에 대한 기대와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끝을 맺으면 하나님이 품고 있던 꿈들이 휴지조각이 됩니다. 여러분, 나의 눈에 보이지 않는 주의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압니다. 그래서 나의 인생에 대한 로드맵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시고, 반드시 만들어 가십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십니다. 내 인생의 책임자는 하나님입니다. 내 인생의 결정자는 하나님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람은 그래서 위대합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뒤에 그 자리에 하나님이 돌아옵니다. 자신의 생을 잃어버린 뒤에 하나님이 다윗의 생을 살아줍니다. 그래서 다윗은 잃은 뒤에 돌아옴을 경험합니다. 다윗은 어떤 일이 있어도 미래가 확실하고 확신에 차 있습니다. 오늘 시글락을 회복하는 것도 잃어버린 뒤에 다시 찾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잘못과 실수로 잃어버린 뒤에도 책임져 주시고 다시 세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오는 역사가 여러분에게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항상 결정은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고 후회는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견디어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오늘 상황이 그렇습니다. 독일의 소설가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uskind)의 단편소설 깊이에의 강요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주인공으로 한 여류 화가가 나오는데 열심히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어느 평론가가 작품을 구경한 후에 그림에 대하여 평가를 합니다. 당신 작품은 재능도 보이고 마음에도 와 닿으나 아직 깊이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류 화가는 재능도 보이고 마음에 와 닿는다는 말은 다 잃어버리고, 깊이가 부족하다는 말에 마음이 걸렸습니다. 그녀는 깊이라는 두 글자에 집착을 합니다.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집념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깊이를 진전시키지 못하는 자신의 작품 때문에 아름다웠던 모습은 고뇌와 집착으로 무너져갑니다. 살아갈 의욕을 잃어버린 그녀는 결국 깊이 없는 자신의 그림을 전부 찢어버리고, 139m의 높이에서 몸을 던져버렸습니다. 여러분, 말 한 마디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말이라는 것은 한 번 말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씨가 됩니다. 그래서 말의 씨가 자라 말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그 씨가 어느 사람에게는 활기와 용기와 힘과 기쁨과 소망과 행복을 주는 생명의 씨가 됩니다. 어느 때는 절망과 우울과 슬픔과 고독과 포기의 씨로 심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결정은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지금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고, 후회는 더욱 두렵습니다. 이는 견디어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깊이 있는 결정을 합니다. 어떻게 결정을 합니까?
2-1. 동조현상입니다. 요사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의 징표로 커플링(Couple-Ring)을 낍니다. 기념으로 커플링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같이, 함께 라는 뜻입니다. 이 것을 동조현상이라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디 커플링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함께 움직인다는 뜻의 커플링(coupling)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탈동조화, 비 동조화입니다. 커플링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행보를 보일 때 디 커플링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커플링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고 디 커플링은 그 반대의 개념입니다. 주님과 함께 같은 방향 같은 목적으로 죽고, 살고, 오르고 내리면 커플링이고, 주님의 발걸음과 목적에 대하여 나와 다르고 반대방향이면 디 커플링 입니다. 여러분, 지금 다윗이 잠시 시슬락 성을 비운 사이 아말렉이 쳐 들어와서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아이와 모든 여인들을 죽이지 않고 다 사로잡아 아말렉의 군사들이 끌고 갔습니다. 다윗의 아내와 자녀들도 끌려갔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함께 한 백성들이 울 기력이 없을 때까지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시글락 성에 남은 백성들이 돌로 다윗을 치려고 벌 떼같이 몰려듭니다. 같이 슬픔을 나누고 대안을 세워도 부족한데 모두 디 커플링입니다. 비동조이고 비협조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때에 다윗은 사람에게 신경 쓰지 않고 죽이려고 하는 그 위협에도 오직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하나? 여기에 꽂혀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붙었습니다. 왜 하나님께 동조하고 하나님께 물을까요? 여러분,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회복은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그 소망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루셨습니까? 죽음과 음부의 권세에서 빠져 나오게 하시는 일을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길을 여셨습니다. 음부의 권세에서 놓임을 받게 하셨습니다. 마귀 권세와 사탄의 통치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그래서 회복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언제나 회복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허락된 은혜와 능력이며 특권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특권을 부여받은 자녀의 특권, 또한 회복에 있습니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죽음의 자리에 이르는 모든 일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귀신을 쫒아내고 새로운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낫게 되는 모든 능력과 특권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회복이 있고, 삶의 해결 방법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 하시면서 저나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회복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표적이 따르는데 이것이 커플링이고 동조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로 용기를 얻고, 하나님과 함께 승리를 합니다. 혼자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커플링이고, 동조현상입니다. 18-20.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취하였던 모든 것을 도로 찾아 왔고,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아말렉이 탈취하였던 모든 것을, 무리의 자녀들이나 크고 작은 것을 무론하고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이 다 찾아 왔더라. 양 떼와 소 떼도 다 찾아 왔더라. 커플링 현상으로, 동조현상으로 하나님과 함께 다윗이 모든 것을 찾았습니다. 이전으로 돌렸습니다. 회복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권세와 코로나19와 어려움에 눌려 있습니까? 힘이 없고, 두려움이 있는 삶입니까? 해 받을 것 때문에 두렵고 망설여집니까? 내 삶과 공동체에 스며드는 병 때문에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까? 이모든 것에서 회복시킬 능력과 특권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함께하시는 커플링의 효과와 동조현상으로 소원하고 믿고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상황의 반전입니다. 동조현상이 되면 반전이 됩니다. 삼하22:29. 여호와는 나의 등불이시오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두움을 밝히시리로다. 하나님께서 어두움의 현실을 밝히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고 합니다만 사실 본인이 바꾸지 않으면 변화되지 않습니다. 반전이 안 일어납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3가지를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무엇입니까? 제목만 말씀을 드리면 위대한 신앙인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더 중요시 합니다. 물질과 능력이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삶의 여정에 주어진 시간이 더욱 중요합니다. 불필요한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진입 장벽을 높이고 더 높인다는 사실입니다. 손쉬운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고, 특권과 능력을 유지하는 자물쇠 효과, Lock-in Effect를 허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물쇠 효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끝까지 지속하는 현상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묻는 것으로 동조 현상을 이루고 그리고 하나님은 회복을 약속하면서 거기에 회복할 수 있는 사건들을 나듭니다. 그래서 결국 상황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다윗의 어두움을 밝혀줍니다.
3. 문제는 늘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줍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이 것이 진리입니다. 그래서 문제 앞에 당당해야 하고 힘들지만 결정을 해야 하고 지금의 상황 때문에 이전의 일로 후회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8절에 쫒아가라, 반드시 미치리라, 정녕 도로 찾으리라. 여러분, 기쁨의 삶을 쫒아 가시면 반드시 이르게 되고 정녕 잃어 버렸던 것을 도로 찾습니다. 다윗이 이 하나님의 세 마디 말씀에 의지해서 용기와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용기와 힘을 얻도록 가장 적절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알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윗을 통하여 궤도를 이탈할 때와 다시 돌아올 때의 자국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분명히 압니다. 다윗과 동지들의 가족이 아말렉 족속에게 사로 잡혀간 것을 알았을 때 모두는 절망에 빠졌고 그로 인하여 내분의 상황까지 치달았지만 다윗이 다시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다윗에게 소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쫒아가라, 반드시 미치리라, 정녕 도로 찾으리라. 이제라도 낙심하지 말고 추격하면 그들에게 이르고, 잃었던 모든 것을 다시 찾게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다윗과 그들 600명의 동지들은 하나가 되어 깊이 있게 전진을 합니다. 하지만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200여명과 아말렉을 쫒는 400명으로 나누게 됩니다. 다윗은 피곤하고 지친 200명은 브솔 시내에 쉬게 하고 400명은 다윗과 함께 아말렉 족속을 뒤쫓아 갑니다. 그런데 용기만 있고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가족들을 찾아야 하는 책임만 있지 어떤 방법이 없습니다. 쫒아 가는데 해결방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미치게 되는데 언제인지 모릅니다. 정녕도로 찾게 되는데 어떻게 찾게 될지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다윗에게 방법과 대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기만 있고 의욕만 있습니다. 돈도 없고 재능도 없고, 나를 뒷 받침해줄 그 어느 것이 없습니다. 다윗과 400명에 있어서 빨리 해결해야 하는 현실 앞에 방법이 없었는데 출발하고 나니까? 방법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마침 아말렉 족속들이 버린 애굽의 종을 만납니다. 그의 안내로 아말렉 족속을 손쉽게 따라잡습니다. 용기만이 있었고 당위성만 가지고 나아가는데 아말렉이 버린 사람을 만납니다. 단지 병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버렸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그렇습니다. 필요하면 옆에 두지만 짐이 되면 거추장스럽고 힘들고, 지겨우면 귀찮으면 버립니다. 매정하고, 냉정하고 지극히 계산적 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세상을 의지하지 마시고, 사람을 찾지 마시고, 되도록이면 주께 묻고, 주를 찾고 신앙인을 만나십시오. 그러면 내가 어려울 때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아말렉은 애굽의 종을 단지 병든 것 때문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이 애굽의 종이 다윗의 문제를 해결하고 잃어버리고 빼앗겼던 것을 도로 찾아오는 데에 없어서는 아니 될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함께 커플링하고 동참한 사람을 버리면 안 됩니다. 같은 목적과 같은 인식과 같은 행동을 한 사람을 버리면 안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만 하시는 분이 아니고 말로만 하시는 분이 아니고 그 약속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만드시되 사건과 사람을 동원해서 만드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회복시키고 되찾는 데에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용기와 당위성만 가지고는 시간이 걸리고 지체가 되고 에너지가 빠집니다. 성질 급한 사람은 숨넘어가고, 목 마르고 죽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사람도 붙여주고 일도 만드십니다. 아말렉은 그냥 우연히 버렸습니다. 단지 귀찮아서 짐 덩어리이가 되어서 쉽게 손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에게 우연은 다윗에게는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이끄시는 방법입니다. 상황을 보십시오, 3일 밤과 낮을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 그래서 애굽의 종에게 가장 필요하게 공급 되어져야 할 것이 먹고 마시고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다윗이 해결하여 주고 애굽의 종으로부터 신임을 얻고 다윗이 이루어야 할 일에 애굽의 종이 친히 나서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될 런지 모릅니다. 그 어떤 사람이 나에게 붙여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겉으로 보고 판단하여 쓸모가 있다 없다 말하잖아요? 여기서부터 실수 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상황의 해석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어진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고, 주어진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3일 밤낮 굶는 사람이 옆에 있습니까? 나그네가 갑자기 밥 한 그릇 달라고 하십니까? 이 사람들을 통해서 회복의 시간을 줄이고 회복의 능력을 배가시키고 약속한 말씀의 성취가 빠르게 됩니다. 쫒아 가면 됩니다. 반드시 미치게 됩니다. 정녕 도로 찾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윗이 시작을 했더니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처럼 도로 찾고 쫒아가고 미치게 되는 결과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런데 여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3-1. 아말렉을 통하여 던지는 교훈입니다. 아말렉은 기회 뒤에 문제를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군맹평상이란 앞을 못 보시는 사람들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너무 일찍 승리와 행복에 도취하면 아니 됩니다. 지금 아말렉은 죄송합니다만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 트렸습니다. 너무 일찍 축하를 하고 너무 일찍 영광에 취해서 대열이 흐트러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 다윗의 적수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일찍 터트린 즐거움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교훈이 여기 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진멸하고 사로 잡혔던 가족들과 잃어버린 모든 물품들을 되찾은 것은 물론, 그 동안 그들이 강도질하며 탈취했던 가축들까지 전리품으로 얻었습니다. 다윗과 일행 400여명이 수고하고 마음고생하고 괴로웠지만 이전 보다 더욱 많은 것을 가져옵니다. 일찍 터트린 영광은 상대에게 틈이 되고 쓸데없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가만있으면 나중에 축하하고 건배하면 그 결과가 없어집니까? 아말렉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안될 때는 여러 가지를 실수합니다. 애굽의 종을 버렸습니다. 일찍 샴페인을 터트렸습니다. 그래서 헛점을 노출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안다는 것에 자만하지 말고 모르는 것에 좌절하지 않아야 합니다. 항상 문제 뒤에 기회와 기회 뒤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3-2. 기회 앞에서 문제가 되는 것을 줄여야 합니다. 다윗을 보면서 얻는 결론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줄여야 합니다. 이야기가 될 말도 줄이고 문제가 될 행동을 줄이고, 부정적인 모든 것을 줄여야 합니다. 여러분, 공동체의 행복은 공동체의 일치됨은 낙오된 사람들까지 챙겨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회법이고, 거룩의 한 방법입니다. 승리의 결과로 전리품이 있습니다.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은 400명입니다. 나머지 200명은 브솔 시내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손실도 수고도 없고, 얻는 것도 없습니다. 이들은 너무나 피곤하고 지쳐서 용기주시는 하나님의 세 마디 약속 앞에서도 일어 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200명은 브솔 시내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400명이 승리와 함께 전리품을 어마어마하게 가져 오는데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승리와 기쁨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왜요? 그들의 몫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하고 합당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 모든 전리품을 도중에 힘에 겨워 대열에서 낙오한 200명의 약한 동지들과도 똑같이 분배를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실적 위주로, 결과 위주로, 공적에 따라서, 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참 신앙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약한 자를 배려하고 힘없는 자를 돕는 일은 거룩한 백성들을 지켜야 하는 사회법입니다. 거룩하게 되는 일입니다. 고아와 홀로 사는 여인과 지나가는 객을 위하여 한 모퉁이 결실을 남겨 놓아야 합니다. 오늘 400명의 용사들 속에 일부 반발이 있고, 안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들의 당연한 권리이고, 당연한 요구이고 마땅한 이유 아닙니까? 그런데 다윗은 문제를 줄이고 불평을 줄이고 말을 줄이고 행동을 줄입니다. 여러분, 신앙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문제를 줄이는 사람입니다. 문제 될 일을 크게 만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지도자와 앞 선 사람은 문제를 줄여야 합니다. 왜냐고 묻지 마세요. 불평하지 마세요. 일을 만들지 마세요.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렇게 하신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알고 싶으면, 목사에게 물으면 거기에 상당한 이유를 가르쳐 드립니다. 그러면 당시에는 왜 그렇게 하셨는지? 모르지만 나중에 알게 됩니다. 오늘 다윗은 이 사람들을 설득했고, 문제를 줄입니다. 그런데 이 후로 공동분배의 원칙은 이스라엘 대대로 이어가는 법이 됩니다. 마음을 잘 써야 하고 될 수만 있으면 같이 가야하고 내 것까지 내어주어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일어나겠다고 하면 도와주고 協力해야 됩니다. 이것이 다윗을 위대하게 하고 복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사회법을 지키는 것이 되고, 이것이 거룩하게 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고의로 동참 하지 않고 고의로 반대하지 않으면 동일한 배려와 최소한의 배려를 하시는 그래서 더욱 풍성한 삶과 더욱 부요하게 되는 은혜를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3. 우공이산입니다. 우공이산이 무엇입니까? 묵묵히 결정한대로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대하고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앞에서 얻는 결론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당연해도, 말이 맞아도, 경우에 합당하더라도, 지도자가 가르치고 이끌면 그대로 순종을 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400명 중에 상당한 사람들이 다윗의 결정에 순종을 합니다. 그런데 이 순종을 하고 따라간 사람들이 나중에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는 용사가 되고 지도자가 됩니다. 여러분. 악한사람이나 비류가 아닙니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당연한 권리를 말하는 사람에게 성경은 악인이나 비류라고 오늘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순종하고 따라 갔더니 이들이 악인이나 비류가 아니라, 위대한 이스라엘의 용사가 됩니다. 방금 전까지 불평을 하고 이유를 묻고, 왜냐고 했던 사람들이 순종하고 따라 갑니다. 이것이 중요하고 이것이 교회의 질서이고, 이 것이 복입니다. 가르쳐 주면 따라가고, 모르면 알도록 하되 다윗에게, 주님에게 물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묻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다윗의 궤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길입니다. 공적인 사람입니다. 400명과 200명도 공적인 사람이 되는 울타리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과 이 무리들의 가는 길은 그 흔적이 선명하게 남습니다. 우리가 지도자들을 바라보면서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기준을 제시하며 이야기를 합니다. 왜 이들에게 이런 것들을 요구 할 까요? 공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는 흔적이 남습니다. 우리 역시 다윗과 다르지 않습니다. 언제나 최선은 이탈하지 않고 궤도 따라 가는 것이 은혜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정해 주신 `나의 길`을 가시되 원치 않게 벗어나고 어긋날 때에도 두려움 없이 돌아오시면 하나님은 언제나 답을 주시고 길을 여시고 회복을 시키십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주님 앞에서 우공이산입니다. 그렇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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