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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솔빛
2011년 3월 29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다니3,25.34-43 마태18,21-35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21-35)
용서는 자신을 위하여 /김찬선신부님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오늘은 복음을 읽다가 “용서해주다”는 말에 새삼 눈길이 갔습니다.
“용서하다”가 아니고 “용서해주다”는 표현을 썼는데
용서는 남에게 해주는 것인가에 생각이 미친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 일을 해주고, 기도를 해주고 등 베푸는 의미가 있지요.
그러나 용서는 남을 위해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제겐 강합니다.
내가 용서를 청해야 하는 존재인데,
내가 감히 누구를 용서해준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과 더불어
혹 내가 누구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저의 용렬함 때문이기에
저의 용렬함 때문에 그에게 안 좋은 마음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이
오히려 죄송스럽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태도를 가지게 되고, 가지는 것은
제가 꽤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순전히 저의 실리를 위해서입니다.
어떤 실리입니까?
용서를 못하고 있으면 괴로운 것은 저입니다.
용서를 못하는 동안 상처를 입는 것은 그가 아니고 저입니다.
칼을 품고 있으면 제가 상처를 입지 그가 입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많은 경우, 저는 그를 용서 못해 괴로워하는데
그는 제가 그런지도 모르고 천하태평입니다.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혹 내가 용서하지 않고 있음을 상대가 알게 되고
그래서 그도 조금은 괴로워할지라도
용서받지 못한 사람보다 용서치 못한 사람이 더 괴롭습니다.
그는 언뜻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것을 늘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용서는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너’를 받아들이는 용서 /이병우 신부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내가 최고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많은 것을
간직하면서 사는 것인가! 또 아니면 우리가 아무 갈등 없이 문제없이 사는
것인가! 이런 일을 이룬다면 행복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그런 일을 이룰 수 있을까요! 우리 각자에게는 나약한 점이
너무나도 많고, 그러면서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데…. 우리는 한계를 지닌
존재들이기에 모두가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한계를
인정한다면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과 기쁨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저는 바로 용서라고 생각합니다. 닫혔던 마음을 풀고 ‘너’를 바라보고,
너를 받아들이는 것이 용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살기를 원합니다.
그것도 영원히 살기를 원합니다.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지옥에 빠져 영원한 벌을 받기 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도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이 말씀은 우리가 조건 없는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용서 /윤인규 신부님
용서는 모든 것을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맨 처음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한 처음’으로 돌아감으로써 너와 나의 의미와 관계를 하느님 손바닥 위에 놓는 것입니다.
용서는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행이 아닙니다.
용서를 미루거나 외면하면 분노를 증폭시키고 독심을 품게 해
결국 영혼을 파멸로 빠지게 합니다.
용서는 분노와 고통으로 가득 찬 마음을 쏟아버려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는 빈 배로 만드는 것입니다.
용서는 나의 눈을 하느님의 눈으로,
내 마음을 하느님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분노에 찬 마음을 쏟아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용서를 배우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는 법을 배웁니다.
하느님께서 낙원에서 죄지은 원조를 무시해 버리지 않고 그들을 불러 대화하심으로써,
그들한테 용서받는 법을 가르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분노를 떨쳐버리는 것이 아니라 분노하는 감정과 대화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용서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과 하느님과 이웃과 대화하는 법을 익히면
나의 더 깊은 곳까지 발견하게 되고 마침내 하느님의 자비를 보게 합니다.
그리하여 억누르기 힘들었던 원수에 대한 분노가
연기처럼 하느님 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용서 안에 하느님 나라가 /양승국 신부님
베드로 사도의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묵상하며, 나름대로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수도공동체 생활하는 저희에게도 수시로 대두되는
꽤나 큰 도전이자 십자가 역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가족처럼 어울려 살아가다보니
‘서로 다름’으로 인해 주고받는 상처와 에너지 소모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 말만 형제지 형제로 인정하지도 대우하지도 못한 때가 많아 많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제자 공동체 내 다른 멤버들과 주고받았던 상처도
만만치 않았던가, 봅니다. 뭔 일인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을 찾아오기 전 베드로 사도는
형제들과 크게 한번 부딪쳤을 것입니다. 크게 마음의 상처를 입고,
너무나 속상한 나머지 예수님께 다가와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천둥의 아들이라고 불리던 과격했던 요한,
어머니까지 등에 업고 인사 청탁을 서슴지 않았던 야고보,
열혈당원 출신 시몬, 늘 마음 안에 비수를 품고 다니던 유다...
수제자 베드로의 마음고생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불같은 성격의 베드로 사도, 날카롭게 모난 돌 같은 베드로 사도,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좌충우돌 럭비공 같던 베드로 사도였기에
다른 사도들 역시 그를 견뎌내느라 죽을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그에게 죄를 지은 형제는
멀리 떨어져 살던 이집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도상으로도 꽤나 떨어진 그리스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같은 동족이자 제자공동체를 이루며
같은 빵을 나누어먹던 동료였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죄를 짓게 만드는 사람은
저 지구 반대쪽 남미나 유럽, 동남아시아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우리 가정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우리 직장 안에, 바로 내 옆에 ‘그’가 있습니다.
이런 ‘그’이기에 힘들지만 끊임없이,
일상적으로, 맺힌 것을 풀어야 합니다.
쌓인 감정들을 수시로 내려놓아야 합니다.
밥 먹듯이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육체적 건강을 유지하며,
심리적,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배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때로 인간관계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하느님께 단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가까운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마치도
우리 발목을 꽉 잡아매고 있는 무겁고 단단한 족쇄와도 같습니다.
우리 영혼을 메마르게 하고 피폐하게 만듭니다.
충만한 영성생활은 물 건너가고 맙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지나치게 강한 어조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 안에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이 깃들어 있습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십니다.
형제끼리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용서 안에 하느님 나라가 건설됩니다.
용서받은 기억 되살리기 /상지종신부님
고해 성사 마지막에 고해 사제는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고해자를 파견합니다.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고해자의 입장에서 때로는 자신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죄의
언저리에서 헤매곤 합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하든지,
아니면 고해 성사 전에 제대로 통회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죄를 용서받는 것과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 두려워 용서받았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용서에 이런저런 조건을 따지는 우리이기에,
하느님의 조건 없은 용서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주님처럼 그렇게 용서하십시오.”
용서하기 힘든 상황에서, 어느덧 희미해진 하느님께로부터 조건 없이
용서받았던 소중한 순간을 다시금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의 사슬을 끊고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화해와 평화의 삶을 살도록 초대하는
파견의 말씀을 되새기길 바랍니다. 그리고 용서를 통해 죄로 물든 세상을
깨끗이 하라는 고귀한 사명을 받고, 기쁘게 세상 안으로 들어가길 기도합니다.
내가 누구를 판단하겠는가? /전삼용신부님
저의 동기신부는 자신이 자라면서 아버지에게 야단 한 번 안 맞아봤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있는 앞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말썽꾸러기였다고 합니다.
친구 4명이 초등학교 때부터 근방에서 하도 유명하여 경찰들까지 이름을 다 알 정도였다고 합니다.
싸움도 많이 하고 사고도 많이 쳐서 누구도 못 말리는 사고뭉치들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떨던 무섭던 십대였지만 결혼하여
가족들에게만은 큰 소리 한 번 안쳤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워낙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녔기 때문에 자녀에게 뭐라 할 처지가 아닌 것을 본인이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결혼을 해서도 자주 사고를 치셨는데, 한 번은 깡통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나무에 불을 붙여 넣고 철사 줄을 달아 빙빙 돌리는 대보름 밤에 하는 불놀이를 하다가 아버지가 그 것을
잘못 던져 다른 집 창고에 불을 내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이 거 네가 했다고 해라.
잘만 하면 끝나고 맛있는 거 사줄게.”하면서 아들을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들 앞에서 아들을 마구 혼내며, “아이고, 내가 이 놈 때문에 못 살아요. 매일 사고만 치고.
정말 죄송하고 손해 보상해 드릴게요.”라고 하며 엉덩이를 때렸습니다.
아들도 나름 연기를 잘 했습니다. 그래서 창고 주인이, “괜찮아요. 애들이 그럴 수 있죠.
앞으로는 조심해서 놀아라”하고 일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창고 주인이 보이지 않는 곳에 두 부자가 당도하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잘했어. 아들.
맛있는 거 사 먹으러 가자.”라고 말하고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모든 부모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이 아버님은 당신이 자녀들을 야단 칠 처지가 못 됨을 아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용서는 몇 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의무임을
일깨워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예화를 하나 말씀하십니다.
왕이 한 신하에게 일만 탈란트를 탕감하여 주었지만 그 종은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둡니다. 그래서 왕도 화가 나서 그 종에게 탕감해 주었던 빚을 다시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게 된다는 결말입니다.
일 탈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일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입니다.
만약 하루 품삯을 50,000원으로 친다면 친구가 빚진 100데나리온은 5백만 원이고,
왕이 탕감해 준 액수는 3조 원에 해당합니다.
3조 원이란 누가 빌려주고 탕감해 줄 액수가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지은 죗값이고
이는 인간의 힘으로는 갚을 수 없는 액수입니다. 그 죗값을 하느님 스스로 인간이 되어
피를 흘리셔서 대신 갚아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갈 운명의 인간들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5백만 원이란 인간들끼리 서로 잘못하여 짓는 죗값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 작은 잘못들까지 용서하지 못한다면 하느님도 ‘정의’상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 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 하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가만히 들어보면 자신도 많은 죄를 짓고 그것을 하느님께 용서를 받으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까지는 ‘내가 참 죄인임을 깨닫고 있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정의로워 진다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커다란 자비를 입었으니 나도 자비를 베푸는 것이 당연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해서 더 편안해지는 사람은 본인 자신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미움 때문에 몇 배의 고통을 더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많은 경우 다른 사람이 직접적으로 나에게 잘못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하는 행동이나 말이
마음에 안 들어 아무 이유 없이 미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사람을 판단하고
미워하는 것은 내 안에 죄가 있어서 그 죄책감을 상쇄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죄인으로 만드는,
어쩌면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입니다.
혹은 내가 내 안에 누르고 있는 것들을 그 사람이 자유롭게 사는 것을 보고 화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결국 감추어진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됩니다.
심판은 하느님에게 맡겨드립시다. 유일한 심판관은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위치에 있는 교만입니다.
언젠가 눈이 가장 아름다운 배우로 프랑스의 이사벨 아자니가 뽑혔습니다.
그 이유는 눈빛이 매우 신비롭고 아름답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사벨의 눈이 신비로운 이유는 눈이 좋지 않아 초점이 맞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눈이 잘 안 보이지만 그냥 굳이 얼굴을 찌푸려가며 초점을 맞추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남들이 볼 때는 눈이 아름답고 신비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유명한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작품 중 ‘수련’이란 작품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명작으로 치고 있습니다. 모네는 나이가 들면서
시력을 점점 잃어갔습니다. 이 수련이란 작품도 정원을 눈이 안 좋은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보고 그린 것입니다. 굳이 보이는 것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면
그것 또한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고 판단하고 초점을 맞추려하기 때문에 눈이 찌푸려지고
보이는 사람도 또 보는 나도 추하게 되고 그렇게 주름이 늘어가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도 똑 같은 죄인이기에 우리 눈은 난시이고 색맹이라 사물을 올바로 볼 수 없습니다.
초점을 맞추고 판단하는 것은 주님께 맡겨드립시다.
그리고 우리는 편한 마음으로 세상을 봅시다. 그러면 나도 세상도 더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생각이 그 사람을 만든다 /천향길 수녀님
사람 사이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크고 작은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살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를 기억하려고 하지 용서하려고 생각하지 못한다.
내가 받은 상처를 철저하게
돌려주고 싶은게 인간의 마음이고 보면 용서란 무척 힘든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본인의 사인을 용서를 뜻하는 ‘恕’자로 사용하는 선배 수녀가 있다.
이름과 상관없는 사인이라 궁금해서 직접 물어본 적 있다.
그때 선배는 가장 좋아하는 단어라고만 했다.
‘생각이 그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생각은 행동으로 드러나야만 완성되고 그 행동은 다시 생각을 규정한다.
선배는 자신의 삶에서 ‘용서’가 필요해서 그렇게 의식하려고 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어쩌지 못하는 ‘상처’ 때문에 고통받고 살아간다.
송봉모 신부는 자신의 저서 『상처와 용서』를 통해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길이라고 제시한다.
저자의 말처럼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려 해도 ‘나’를 버리기 전에는 힘든데,
하물며 내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사람,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
나에게 원수가 된 사람을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때는 감당할 수없을 정도로 사람에게 시달린다는 느낌이 든다.
또 어느 때는 목이 타도록 사람이 그립다.
그래서일까? ‘상처는 친밀감을 먹고산다’고 한다.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한마디 했다고 해서 그렇게 상처받을까?
아니다. 지나가는 개가 짖었나보다 생각할 것이다.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는지 되씹는 것이다.
사소한 ‘말’ 때문에 상처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윈스턴 처칠은 “한번 내 뱉은 말은 도로 삼켜도 잘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송봉모 신부는 사소한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이렇게 제안한다.
첫째 기대하지 말라.
둘째 추측하지 말라.
셋째 상처에서 자유롭고 싶다면
앞으로 인정과 애정이 없이는 못 산다는 얘기를 하지 말고,
넷째 상처 때문에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자신 안에 있는 ‘상처의 텃밭’을 제거하라.
다섯 번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면서 살아가라고 권고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적인 예화를 들어가며 기도로 도움을 청하라는 것이다.
상처를 딛고 일어나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마태 18,22)해야 한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최우선이라
생각했던 나에게 오늘은 이렇게 일침을 놓으신다. 언제나 내 생각이나 방법과
다른 그분께 주님의 빛을 구하자. 당신의 빛으로 빛을 볼 수 있도록....
마음의 용서 /남궁영미 수녀님
마음〔心〕은 의지·생각·근본·본성·중심·도(道)의 본원·
알맹이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마음은 인간에게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용서(容恕)는 ‘얼굴·모양·모습·몸가짐·담다·그릇 안에 넣다.’라는 뜻을
가진 ‘용(容)’과 ‘헤아려 동정하다, 깨닫다, 밝게 알다.’라는 뜻의
‘서(恕)’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으로 용서하는 일이란 우리 근본`-`중심에서
깨닫는 일이며 밝게 아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용서란 본질에 해당하는 깨달음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마음에서 용서하라고.
그러나 우리는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그 사람과 마주치면 마음이 완고해지고 화가 치미는 자신을
대면하게 되고, 그때마다 자기 부정의 유혹과 절망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 갈등과 죄책감은 귀를 막고 눈을 멀게 해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거나 듣지 못하게 합니다.
용서는 어둠으로 왜곡되고 단절된 세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것은 용서하는 사람에게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주며
동시에 용서받는 사람도 해방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용서하기 위해 갈등하는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수없이 갈등하고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기를 반복하는
그 모든 과정이 이미 용서의 과정임을 믿을 수 있을 때
용서하는 일이 조금씩 더 쉬워질 것입니다. 삶이란 그런 것입니다.
이 순간과 저 순간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용서한다는 것도 용서한 순간과 용서하기까지
갈등의 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갈등의 순간이 용서를 잉태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 힘을 냅시다!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의 용서가….
용서, 상처의 고통에서 상처의 사랑으로 /김찬선신부님
어제는 죄지은 형제를
어떻게 교정해주어야 하는지 보았습니다.
오늘은 나에게 죄지은 형제를
어떻게 용서해주어야 하는지 보게 됩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이 질문에서 두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몇 번이면 되는지”
용서해 주어야 하는가?
용서한다면 누구를 위해 왜?
나에게 죄를 지은 그 형제를 위해?
나에게 죄를 지은 그 사람 죽어 마땅한데
오히려 그 형제를 위해 용서를 해?
우리는 그를 용서해 주는 것이니까
그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를 위해 그를 용서하라면 죽어도 용서 못합니다.
죽이고 싶은데 어찌 용서를 합니까?
용서하려 해도 억지로 되지 않을뿐더러
용서하려 할수록 더 생각나서 더 죽이고 싶습니다.
그러니 그를 위해 용서하려는 생각은 아예 거두는 것이 좋습니다.
용서는 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내 안에 있는 그의 가시를 빼내는 것입니다.
빼내지 않고 그냥 놔두면
그가 던진 말이
그가 한 행위가
그가 끼친 손해가
계속 나를 후벼 파 상처를 덧내고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에
나를 위해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의 심장에 가시를 박아놓았다면
원한을 품고 그를 미워한다고 그 가시가 뽑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이렇게 상처 주고 괴롭게 하였으니
너도 상처 받고 괴로우라고 미워해도
무디고 뻔뻔한 사람은 아무리 미워해도
상처받거나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미움과 원한을 품고 사는 자기만 손해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함은 하느님 사랑 때문에
하느님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용서하는 것이고
그러니 몇 번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계속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 사랑 때문에 용서한다 함은 어떤 뜻입니까?
하느님 사랑 때문에 용서한다 함은
나를 용서하시는 하느님 사랑을 체험함으로
우리 마음이 하느님 마음처럼
넓어지고 너그러워졌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용서한다 함은 또한
먼저 나를 용서하신 하느님 사랑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못 했어도 어머니는 자식들이 서로 용서 하기를 원하시니
어머니 사랑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용서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지요.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사실은
내가 미움과 원한에서 해방되고
상처의 고통에서 상처의 사랑으로 성장케 되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보여줘 /김효준신부님
내 지갑에서 돈을 훔친 사람을 잡았습니다. 실수라 여기고 용서해줬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또 지갑에 손을 댔습니다. 한 번 더 용서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또 다시 지갑에서 돈을 빼 갔습니다. 이젠 더 이상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생각과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상식과 이성을 벗어난
행동이기에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일흔일곱 번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유일하게, 일흔일곱 번, 아니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우리의 부모님입니다. 부모님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식의 잘못을 일흔일곱 번, 일흔 번씩 일곱 번, 일흔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부모님은 자식의 잘못을
‘이성’으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용서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이해하고 용서하는 데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내 이성이 아니라 내 마음입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음이 빠진 용서에는 이성만이 남고 이성을 통한 용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십시오.
빚진 자의 용서 /남상근 신부님
베드로 사도 딴에는 관대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형제들의 죄를
일곱 번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질문합니다. 일곱 번이 그에게
있어서 최대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할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는 까닭으로 만 탈렌트를
빚진 이가 엎드려 청하자, 그를 가엾이 여겨 탕감해준 임금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주님의 무한한 용서를 입은 이라면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용서를 빚진 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일흔일곱 번의 용서’로
표현하셨습니다. 자, 정답이 있습니다. 죽도록 미운 그 사람,
보기만 해도 성질을 돋우는 그 사람, 도무지 반성할 기미가 없는
그 사람을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일흔일곱 번까지 하나 하나 수를 헤아리십시오. 그리고 일흔여덟
번째부터는 실컷 미워해도 됩니다. 마음 놓고 퍼부어도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지키고자 한다면 일흔일곱 번까지는 참아주도록
합시다. 용서의 한계를 일흔일곱 번으로 설정하도록 합시다.
아마 그렇게 되기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참아주고
참아주고 참아주는 동안, 미워할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이 변화될
것입니다. 아니라면 미움 속에서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있는
내가 오히려 변화될 것입니다. 용서의 한계로 설정하신 일흔일곱
번을 통해 용서하는 이나 용서받는 이나 모두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 이제 행복하리라! /김찬선신부님
누구를 위해 용서를 하나?
용서를 받는 그를 위해서?
용서를 하는 나를 위해서?
용서를 받는 그를 위해서라면 용서는 아예 생각지도 말아야지.
죽여도 시원치 않을 사람을 어떻게 용서한다고.
그러니 용서하기 위해서라면
누구를 위해서 용서하는지,
왜 용서하는지를 분명히 해야지.
인간은 참으로 이기적인 동물.
용서도 사랑도 다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
죄로부터 그를 용서하여 그를 해방시켜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가 그로부터 또는 그의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
그를 사랑하여 그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가 사랑으로 충만하여 내가 행복하게 되는 것.
용서의 반대말은 단죄.
죄를 물어 예수님을 못 박듯 그를 죄와 함께 못 박는 것.
그런데 그를 죄와 함께 못 박을 때
나의 옷자락을 그와 함께 못 박는 것이 단죄다.
하여 이제 어디를 가려해도 갈 수가 없고
어디를 간다 해도 그의 죄와 함께 간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몹쓸 단죄에 내가 걸려들었나?!
어찌하여 이 저주스런 죄에 고정되었나?!
얼마든지 다른 방송을 들을 수 있는데
어찌 이 단죄의 채널에 고정되었나?!
아름다운 사람 많고도 많은데
왜 이 죄인에 고정되었나?!
이 사람의 좋은 점 많고도 많은데
왜 그의 죄에 고정되었나?!
그가 아니로다!
그의 죄가 아니로다!
나의 불행이로다!
그의 죄에 고정되어 내가 불행함은
그가 아니요
그의 죄도 아닌
나의 불행 때문이로다!
나의 불행을 그의 죄 탓으로 돌리는 나의 불행 때문이로다!
나 이제 행복하리라!
나 이제 해방되리라!
그와 맺은 못된 인연 끊어버리고
죄와 얽힌 질긴 얽힘 풀어버리고
나 이제 용서하리라!
나 이제 해방되리라!
나 이제 행복하리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만이 우리가 살길 /양승국 신부님
용서에 대해 강론 중이시던 신부님께서 신자들을 대상으로
질문을 한 가지 던졌습니다. “지금 이 순간 미워하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으신 분
한번 손 들어보세요!” 적어도 두세 명은 손들겠지, 했었는데,
단 한명도 손드는 신자가 없었습니다.
“옆 사람 눈치 보지 마시고 소신껏 손들어보세요.”
그래도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적막감이 흐르던 순간 아주 연로하신 할아버님 한분이 손을 드셨습니다.
너무나 기뻤던 신부님께서 할아버님을 앞으로 모셨습니다.
“어르신, 정말 훌륭하십니다.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으면, 또
얼마나 열심히 용서의 삶을 실천하셨으면 단 한명도 미워하는 사람이 없으십니까?
우리 신자들을 위해서 비결을 좀 말씀해주십시오.”
그 순간 할아버님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 한 마디를 던지셨습니다.
“신부님, 훌륭할 것도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세상을 오래 살았습니다.
올해 제 나이가 90입니다. 원래 저도 미운 사람들 엄청 많았는데, 오래 살다보니
그 사람들 다 죽었습니다. 용서를 하려해도 용서할 사람이 있어야지요.”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정말 중요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말 어려운 일이 바로 용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용서가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한번 두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용서만이 살길이니 밥 먹듯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하고말고 따질 것이 아니라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할까 말까 고민할 것이 아니라 늘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우리의
신심은 즉시 피폐해지고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용서하지 못할 때 즉시 다가오는 것이 스트레스입니다.
몸에 해로운 독소가 분출되면서 소화기능에 문제가 생깁니다.
숙면도 취하기 어렵습니다. 상습피로에 시달립니다. 하루가 피곤합니다.
결국 갖은 질병에 시달리고 그 끝은 결국 죽음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그 순간부터
특별한 한 가지 현상이 우리의 신심을 뒤흔듭니다.
누군가가 내 안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 삶안에 끼어들어와
내 삶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늘 삶이 부자연스럽습니다.
삶이 부담스럽고 피곤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신앙생활도 기대하기 힘듭니다.
하느님 체험도 불가능합니다.
결국 용서만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용서만이 참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 /허찬란 신부님
누구나 자신의 이웃에게 사랑을 받으며 산다면 행복을 느낄 것입니다.
누가 나를 위해 희생하고 아낌없이 사랑을 준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바로 그분이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해야 맞을까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해야 맞을까요? 둘 다 맞을 것입니다.
우리쪽에서만 하느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이
우리를 믿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늘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분이십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신앙이자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응답하며 사는 것이 기도요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요? 찬양성가에 나오듯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하신 하느님 창조사업의 최고 작품입니다.
이 안에 우리 고유의 인격과 본성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매정한 종은 이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머리로도 알았고 많은 빚을 탕감 받는 체험도 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왜 하느님의 사랑을 망각한 채로 경거망동 했을까요?
용서하라 /김상용 수사님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는 자신의 저서에서 “창조의 하느님
이전에 용서의 하느님이 계셨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하느님
본성에 대한 의미 있는 성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관한 진실입니다. 베드로의 ‘용서의 횟수’에 관한 질문의 근저에는 ‘내가 이만큼
용서 한 후에 행하려는 도저한 판단과 집행’의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습니다.
거듭되는 용서의 횟수에 기인해 마침내 가해지는 법 집행은 논리적이고 용납이
가능하며 심지어는 매우 합리적이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불이익을
끼친 이 인물에게 몇 차례의 용서는 내가 이윽고 감행하려는 판단과 공격에 대한
탄탄한 심리적 도덕적 뒷받침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인간들의 공격적인 행동 뒤에서 차분히 타이르시며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신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외아들마저 희생제물로 봉헌하신 그 참뜻을
우리 인간들도 닮아갈 수 있다고 역설하십니다. 과연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당신의 십자가 위에서 그 절정을 이루며 몸소 인간들에게 용서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우리는 스승이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용서 /이제민 신부님
"여러분은 서로 너그럽게 따뜻하게 대해 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하지만
하고 싶지만 잘 안 되고,
해야한다는 것은 알지만
쉽게 일어나지 않는 것이 용서가 아닌가?
용서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님은 마태오 복음에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종은 자기가 일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탕감받은 존재라는 사실은 잊고,
자기에게 겨우 백 데나리온 빚을 진 동료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빚을 갚으라고 닦달을 한다.
종은 방금 자기가 용서받고 풀려난 존재임을 잊고 있다.
용서는 자기가 늘 용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비롯한다.
인간은 용서받지 못할 일을 수없이 저질러 왔음에도 지금 버젓이 살아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끊임없이 용서를 받고 있다는 증거이다.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늘 눈감아주고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 때문에 우리는 지금 살아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용서를 느낀 자만이 진정 남을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처럼.
이런 용서는 내게 주어진 생명을 선물로 보고
내게 접근하여 오는 이웃을 선물로 보며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주변 환경을
선물로 볼 때 가능해진다.
주어진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데서
땅이 땅의 대접을, 돈이 돈의 대접을,
인간이 인간의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되고,
진정한 너와 나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자비한 행동이 '용서받지 못할 일'이 생기게 된다.
왕은 그 종을 다시 붙잡아들여 감옥에 가두고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것은 협박이 아니다
너는 용서받은 존재, 은총 받은 존재임을 깨우쳐 주는 말씀이다.
너는 용서할 수 있는 존재다.
화해할 수 있는 존재다.
너는 하느님의 성전이다.
소멸의 아름다움 /양승국 신부님
요즘 뜨고 있는 책 가운데 "소멸의 아름다움"(필립 시먼스 저,
도서출판 나무심는 사람들 출간)이란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한때 장래가 촉망되는 문인으로서 이제 막 생의 활기찬 걸음을
내딛으려던 순간, 갑자기 "죽어가는 기술(Art of dying)"을
배워야 하는 암담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한 순간에 장미 빛 꿈을 모두 접게 된 저자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를 겪게 되었는데, 그로 인한 고통이나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이 원망스러웠고, 루게릭병이란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병에 걸려
추한 모습으로 변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이토록 극심한 고통 속에서 번민하고 있는데도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즐기고 떠들어대는 것, 역시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극심한 고통가운데를 헤매던 어느 순간 저자는 자신의 삶 한 귀퉁이로부터
참으로 놀라운 은총이 스며들어옴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고통은 결국 성장을 위한 신비"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진실로 용서하고 진실로 마음을 열면 이 세상은
문제덩어리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저자는 행복한 삶을 엮어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삶의 원리는
"낙법(落法) 배우기(learning to fall)"임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서 머지 않아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은 사라지므로 미리
낙법을 배워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꿈의 좌절, 체력의 저하,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병이나 죽음...언제 닥칠지 모르는 모든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인생의 낙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가 제시하는 낙법이란 다름 아닌
"놓아버림", "자신과 이웃에 대한 놓아버림",
다시 말해서 자신과의 화해이며, 이웃에 대한 용서입니다.
평소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
성취,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놓아버리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억울함, 상처, 분함, 복수심, 시기심, 경쟁심 등을 모두 놓아버리는 순간,
다시 말해서 용서하는 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말씀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니 490번을 용서해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우리보고 인간이 아니기를 바라시는 말씀,
바보가 되기를 원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우리의 용서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토록 강한 어조로
"용서의 일상화"를 강조하신 이유는 무엇보다도
용서는 지극히 어려운 덕행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 용서하지 못할 때 우리가 겪게 되는
영육간의 고통을 잘 내다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있는 곳에 참된 마음의 평화가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서 진정한 새출발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성장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상처와 고통을 안겨준 이웃들을
용서하려는 노력도 무척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노력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입니다. 자신과의 화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우리 자신을 놓아주지 못함으로 인해,
우리 자신과 화해하지 못해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우리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이웃에 대한 용서도 중요하지만, 먼저
"나 자신"을 용서하고자 노력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니, 용서하라구요? /오상선신부님
베드로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이 이야기의 속사정을 한번 추론해 보자.
베드로는 제자 공동체의 맏형이었다.
능력이 많아서라기보다는 나이가 많다보니
자연스레 형 노릇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도
신앙고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맏이가 형노릇 하는게 순리이기 때문에
제자 공동체의 책임자 역할을 하게 한 것은 아닐까?
어쨌든
베드로는 공동체를 이끌어 나가야만 했다.
그런데 그게 맘대로 잘 될 리가 없다.
자기보다 더 똑똑한 동생들도 많았고
기질상으로도 강한 성격의 소유자들도 많았다.
능력으로도,
리더쉽으로도,
베드로는 인정받을 만한 형이 못되었다.
그래서 동생들도부터
빈정대는 소리도 많이 들어야 했을 것이다.
베드로는 그때마다 화가 치밀었지만
그래도 참아주었다.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베드로는 그때마다 그래도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라 위안하면서도
뿔다구가 날 수 밖에 없었지만 참고 또 참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느 녀석인지 밝힐 수는 없지만
동생 중 한녀석이
또 형을 싹 무시하지 않는가?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할 수록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대 갈겨주고 싶었다.
실컷 두들겨 패 주고 싶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견디다 못해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가를 얻어
한대 쥐어박을 참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예수님, 이 정도 참았으면 되었지요?
이제 한 대 쥐어박아도 되겠지요?>
하고 물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도 인정해 주시리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이건 누가 봐도 해도해도 너무한 일이라
<그래 한 대 때려 주려무나> 하실 거라 믿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허허> 하고 혀를 차면서
지금까지 용서했다면 끝까지 용서하라고 하신다.
<그렇지 않냐 베드로야!
쥐어 박을 것이었다면
첨부터 강하게 쥐어박을 것이지
이제와서 더 참지 못하고 쥐어박으면
지금까지 참은 것이 허사가 아니냐?>
<앞으로
이런 일이 있을 때는
무조건 참지 말아라.
쥐어 박아야 겠다면 그 자리에서 쥐어 박아라.
하지만
용서하고 참았다면
끝까지 용서해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아예 용서하지 말아란 말이다...>
우리 삶에서도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가?
특히 맏이 역할을 해야만 하는 이들은
베드로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으리라.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말씀하시리라.
<한번 참기 시작했다면 끝까지 참아라.
끝까지 용서해라.
그것이 안될 것 같으면
아예 처음부터 쥐어 박아라. 속 시원하게...>
그래 이렇게 살자!
단순하게 살자!
이것저것 너무 따지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다가
나중에 가서야 울고불고 원통해 하지 말자.
용서할려면 끝까지 용서하고
그게 안될 것 같으면 처음부터 강하게 따지고 욕을 하고
한 대 멋지게 갈겨 주라.
그러면
용서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그 고통은 겪지 않으리라!
베드로야, 베드로야!
그대는 혹 용서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대상이 있는가?
지금까지 참아왔다면 용서하라.
그리고 앞으로는 그런 사람을 만들지 말라.
처음부터 안될 성 싶으면 아예 대판 싸워라.
머리카락을 쥐어뜯어 버려라.
입으로 깨물어 버리든지
몽둥이로 속시원하게 두들겨 패버려라.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평생 원한과 미움 때문에 가슴 아파하지 않게 되지 않겠는가!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용서가 죽기보다 힘겨울 때 /양승국 신부님
죽었으면 죽었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다른 것은 다 하겠다. 그러나 그 인간만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하자고 용서하자고 수백 번 수천 번도 더 다짐해도 그때뿐이다.
그 인간 얼굴만 떠오르면 자신도 모르게 혈압이 오르면서
살인하는 사람들 마음 이해가 간다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 마음 정녕 이해가 갑니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망쳐놓은 사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해친 사람,
단란한 가정을 망쳐놓은 사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사람,
견딜 수 없는 모욕을 준 사람을
용서하기란 진정 어려운 일입니다.
입으로야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용서는
우리 인간적인 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결국 진정한 용서는 신앙 안에서만이 가능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해결이 가능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과 진지한 숙고 그 위에 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바처럼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 존재는
용서여부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셀 수도 없이 많은 용서를 받아온 우리들입니다.
그 많은 죄악, 진홍빛같이 붉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한량없는 자비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당신께서 우리를 향해 그러하셨듯이 우리 역시
끊임없이, 무조건적으로, 무한히 용서하는 일입니다.
용서가 정말 힘겨운 날,
지금까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셨던
자비를 생각해보십시오.
용서가 죽기보다 힘겨울 때,
지금까지 이어져온
하느님 자비의 날들을 기억하십시오.
결국 우리 인생은
하느님 자비로 인한 은총의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분의 용서로 인한 축복의 나날들이었습니다.
용서가 있는 곳에 내적평화도 있습니다.
영적인 삶도 있습니다.
기도다운 기도도 있습니다.
의미 있는 신앙생활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무슨 수를 써서든
다시 한번 진정으로 용서하고자 노력하는 하루,
훌훌 털고 홀가분하게
하느님 앞에 다시 서는 하루가 되길 기원합니다.
“불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이수철 신부님
하느님은 자비와 지혜의 샘입니다.
하느님을 알수록 나를 알 수 있고, 이어 너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나와 너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자비와 지혜, 겸손이지만,
하느님께 멀어질수록 무자비와 무지, 교만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알아 자기를 아는 게 겸손이자 지혜요,
하느님을 떠나 선,
내가 될 수 있는 길도, 나를 알 수 있는 길도 없습니다.
“불 한가운데 우뚝 서서”
제1독서 첫 구절에 나오는 이 말 마디가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시련과 고통을 상징하는
불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기도할 때
자비와 겸손, 지혜의 은총입니다.
몸과 마음 무너지지도,
망가지지도 않습니다.
아자르야의 기도 중
‘당신의 벗 아브라함,
당신의 종 이사악,
당신의 거룩한 사람 이스라엘’에서
호칭에서 보다시피
아브라함, 이사악, 이스라엘,
얼마나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겸손과 지혜의 사람들인가를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만 탈렌트 빚진 자는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 속에 살면서도
그 은총을 까맣게 잊고 사는
무자비하고 인색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진정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은 자는 모두가 은총이지만
깨닫지 못한 자는 온통 죄 중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을 때
‘죄의 바다’는 ‘은총의 바다’로 바뀝니다.
이런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깨닫는 게 바로 회개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 모두 하느님께 만 탈렌트 빚진 자들임을 압니다.
우리 삶은 우연도, 당연한 권리도 아닌
다만 하느님의 은총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한량 없는 자비와 은총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이를 깨달을 때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요,
넓어지고 깊어지는
우리 마음에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탓할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비롭지 못한 나입니다.
끊임없이 마음을 넓혀가고 깊게 하여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한다.”
무한한 용서를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역시 무한한 자비를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주님의 무한한 자비와 용서를 체험할 때,
이런 지칠 줄 모르는 자비와 용서의 실천입니다.
이웃에 자비와 용서를 베풀 때
저절로 뒤따르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입니다.
1독서의 아즈르야처럼 간절히 바치는 기도가
자비와 용서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참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가난한 자의 기도입니다.
시련의 불길 속에 있을 때
내 기도로 바쳐도 참 좋은 기도입니다.
“저희의 죄 때문에
저희는 오늘 온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받아 주소서.
이것이 오늘 저희가 당신께 바치는 희생제물이 되어,
당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정녕 당신을 신뢰하는 이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당신의 호의에 따라,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희를 대해 주소서.
당신의 놀라운 업적에 따라 저희를 구하시어,
주님, 당신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사순시기 우리 모두 가난한 자 되어 바쳐도 참 좋은 기도입니다.
이런 겸손하고 가난한
통회하는 우리들 안에 가득 차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입니다.
매일의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으로
마음을 다해 당신을 섬기는 우리들을
당신 자비와 은총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아멘.
容恕와 하늘나라 /강영구신부님
+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그대에게
진정한 용서(容恕)란 무엇입니까?
당신은 누구를 용서(容恕)했다고 말을 하지만,
가슴 한 구석에 섭섭하고 억울한 감정, 울분과 울화를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용서하긴 했지만 내 방식대로 용서했기 때문에 가슴 속에 앙금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용서(容恕)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임금은 일만 달란트나 빚을 졌지만, 갚을 능력이 없는 종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줍니다.
“너는 갚을 능력이 없구나. 갚을 능력이 없는 너를 인정하고 받아주마.
갚을 능력이 없는 너를 윽박지른다고
일만 달란트가 어디서 나오겠느냐? 앞으로 열심히 살아라.”
임금으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받은 그는
더 이상 빚에 짓눌리지 않고 새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어
새 삶을 시작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옹졸함은 친구를 감금하고 끝내 자신도 감금당합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은 소나무를 느티나무가 되라 하지 않습니다.
잔디를 클로버가 되라하지 않습니다.
수국에서 장미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시기에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느티나무는 느티나무대로 아름답고 늠름합니다.
하느님은 때 묻고 상처투성이인 나를 깨끗하게 되라 하시거나
깨끗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자비의 손길로 감싸 어루만져줍니다.
그 순간 나의 더러움은 씻겨나가고 상처는 깨끗이 치유됩니다.
여기에 하늘나라(天國)가 있습니다.
오늘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을 용서(容恕)하십시오.
용서(容恕)하는 당신은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는 사람이 됩니다.(一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