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꽃 명소를 가다
명옥헌, 일일레저타운, 송광사 및 명재고택
바아흐로 배롱나무 꽃의 계절이다. 붉은색 또는 힌색의 꽃이 7~9월에 원추꽃차례를 이루어 핀다. 배롱나무는 일명 목백일홍이라고도 한다. 꽃이 100일동안 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줄기를 만지면 모든 가지가 흔들린다고 하여 '간지럼나무'라고도 불린다. 남부지역에서는 귀신을 쫓는다고 하여 묘소 주변에 흔히 심는다. 중국에서 자라던 식물 중 키가 작은 품종이 뜰에 널리 심어지고 있다. 자미(紫薇)라고 부르기도 한다.
배롱나무는 꽃이 오래가고 줄기의 무늬가 아름다워 전통적으로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주택 공원, 자연학습장, 생태공원 등지에서 조경수로 쓰인다. 추위에 약해 충청 이북에서는 상업적인 대량재배는 어렵지만, 경기,서울에서도 겨울에 월동이 되는 곳에서는 관상수로 충분히 이용할 수 있다. 지구상에 아시아에서 호주에 이르기까지 열대 및 온대남부지역에 약 50종이 분포하는 낙엽성 관목이다.
예로부터 배롱나무는 사찰이나 선비들의 공간에 많이 심는다. 배롱나무가 껍질을 다 벗어 버리듯 스님들도 세속을 벗어버리길 바라는 마음에서이고, 선비들의 거처 앞에 심는 것은 청렴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배롱나무에는 재미있는 전설도 있다. 옛날 남해안의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는 해룡(海龍)이 파도를 일으켜 배를 뒤집어 버리는 심술을 막기 위해 매년 처녀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해마다 마을에서 가장 예쁘고 얌전한 처녀를 선발하여 곱게 화장을 시켜 바닷가 바위로 보내 해룡이 데려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마침 왕자님이 마을에 나타나 안타까운 사정을 듣고 처녀 대신 바위에 앉아 있다가 용을 퇴치한다. 마을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얼마 동안 머물던 왕자는 처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사랑에는 마가 끼는 법, 왕자는 마침 출몰한 왜구를 퇴치하기 위하여 100일 뒤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마을을 떠나버린다. 매일 먼 바다를 바라보며 왕자를 기다리던 처녀는 그만 깊은 병이 들어 100일을 다 기다리지 못하고 죽고 만다. 약속한 날짜에 돌아온 왕자는 그녀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서울로 되돌아갔다. 이듬해 무덤 위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더니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마치 왕자를 기다리듯 매일 조금씩 피는 꽃이 100일을 넘겨 이어지므로, 사람들은 이 나무를 백일홍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배롱나무 명소는 안동 병산서원, 담양 명옥헌 등이 대표적이다. 순천 송광사,서산 개심사, 양산 통도사, 화순 만연사 등 왠만한 사찰에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서해 류성룡의 위패를 모신 병산서원에는 지난 2008년 4월 7일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390년, 수고 8m, 둘레 0.85m인 배롱나무를 포함해 약 12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병산서원 배롱나무는 류성룡(柳成龍)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병산서원에 후손 류진(柳袗)의 사당인 존덕사를 건립하면서 1614년경 심은 나무들이라고 전한다.
또한, 담양 명옥헌은 조선중기 명곡 오희도 선생(1583-1623)이 자연을 벗삼아 살던 곳으로 그의 아들 오이정(1574-1615)이 선친의 뒤를 이어 이곳에 은둔하면서 자연경관이 좋은 도장곡에 정자를 짓고, 앞뒤로 연못을 파서 주변에 적송, 배롱나무 등을 심어 가꾼 정원이다. 명옥헌원림은 전남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명옥헌원림은 네모난 연못 가운데 둥그런 섬을 만들고 주변에 나무를 심었는데 그 당시 우주관인 '하늘은 둥글고 땅은 방정(네모)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이 담겨져 있다. 연못은 동서 20m, 남북 40m 로 별로 큰 편은 아니지만 산 아래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명옥헌 및 배롱나무숲과 함께 어우러져 경관이 수려하다.
명옥헌(鳴玉軒)이란 이름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어준 것으로 연못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옥이 부딪히는 소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계곡의 물을 받아 연못을 꾸미고 주변을 배롱나무로 조성한 솜씨가 자연을 거스르지않고 그대로 담아낸 조상들의 소담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배롱나무 꽃이 만발하는 8-9월에 이곳을 찾으면 붉게 타오르는 꽃숲이 연못에 비춰 마치 선경(仙景)에 온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절경이다.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 5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1년 '제 12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전남 화순군은 1994년부터 국도 29호선 60km(화순읍~이양면 보성경계)와 국도 15호선 48km(화순읍~남면 보성경계), 국도 22호선 30km(동면~동복면 순천경계) 등 총138km구간에 이르는. 배롱나무 특화거리를 조성하기도 했다. 단일수종으로 전국 최대의 거리로 2007년에는 전국 녹색 건전성 평가(산림청)에서 가로수 분야 최우수거리로 선정됐으며, 2014년도 산림행정종합평가에서도 우수시군에 이어 2015년에는 숲의 보존관리분야 특별상을 수상한 바 있다.
안동시 역시 지난 2004년까지 육사로 중앙화단에 배롱나무 280그루를 심는 등 옥동로와 용상로, 석주로 등 시내 곳곳에 배롱나무를 심어 시가지를 붉은 색으로 수놓고 있다.
배롱나무가 집단으로 심어져 있는 건 아니지만 필자가 최근에 방문한 순천의 일일레저타운과 송광사, 논산의 명재고택 역시 주변경관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여름을 수놓고 있었다.
주암호 끝자락에 위치한 일일레저타운은 사유지여서 입장료(5천원) 또는 식사 예약(백숙 등)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데,
아담한 호수와 정자, 그리고 구름다리가 어우러져 아침 일찍 이곳을 방문하면 마치 선경(仙景) 같은 분위기를 보여준다.
순천 송광사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승보종찰(僧寶宗刹)의 근본도량으로서, 한국불교와 맥을 이어온 유서깊은 고찰이다.
송광사 역시 경내 곳곳에 오래된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다.
또,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위치한 명재고택은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인 명재 윤증(1629-1714) 선생의 고택으로, 배롱나무는 물론 넓은 장독대와 고택이 아름다운 곳이다. 명재고택은 조선시대 우리 지방의 양반가옥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고택마루나 정자에 올라앉아 물소리를 들으며 배롱나무꽃숲과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시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시(詩) 한 구절을 읊고 싶어지고, 화가가 아니라도 멋진 풍경화 한 점 그리고싶어질 것이다. 오규원 시인은 그의 시 <해가 지고 있었다>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이름 모르는 새가 와서 울었다
배롱나무에서 울었다
배롱나무는 죽었지만 반짝였다
(후략)
배롱나무는 나무가 크지 않아 옆으로 퍼지면서 나무줄기의 곡선과 빛깔이 멋지고 맵시가 있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 사찰이나 한옥, 정자 등에 핀 백일홍은 한옥의 곡선미와 어우러지면서 환상적인 장관을 연출한다.(글,사진/임윤식)